플로는 로즈의 시건방진
행동, 무례함, 지저분함, 자만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을 괜히 고생시키려 들고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그녀는 브라이언의 순진무구함과 로즈의 되바라짐을 입에 올린다. 오, 넌 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지, 플로가
말한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이렇게 말한다.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p.31
앨리스 먼로의 고국인
캐나다에서는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Who Do You Think You
Ar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그 외 지역에서는 '거지 소녀'로 발표된 작품이다. 주인공 로즈를 중심으로 연결된 단편 열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종의 연작소설처럼
단편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시골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즈의 어린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새어머니 플로와의 유대를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타운의 가난한 지역에서 살았던 로즈의 가족은 네
명이었다. 가구 수선 일을
하는 아버지,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새어머니 플로, 이복동생 브라이언. 로즈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기일 때 병으로 죽었다.
과묵한 아버지는 딸에게 혹독한 매질도 서슴지 않았고, 새어머니는 로즈의 시건방진 행동이나 무례함을
지적하며 억누르려 한다. 아버지는 로즈가 학생일 때 병으로 세상을 먼저 뜨지만,
새어머니 플로는 로즈가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과 이혼을 하고 중년에 이르는 세월 내내 고향 집에
머무른다. 누추한 환경과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똑똑한 소녀 로즈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다.
왜냐하면 여학생들에게 가난은 상냥하고 헤픈 태도나 멍청함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었고, 좋은 머리는 우아함의
징후, 즉 품격과 결합되지
않는 한 매력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로즈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패트릭을 만나 결혼하지만,
결국 십 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로즈는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질 거라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고,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어서인데,
자기 안에 그것이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내, 애인, 하고
생각했다. 그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말들. 그 말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은 기적이었다. 실수였다. 그것은
그녀가 꿈꿔온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p.147~148
표제작이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거지
소녀’는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라는 동명의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 왕이 아름다운 거지
소녀에게 청혼을 하며 왕관을 벗어 들고 있는 그림이다.
비천한 거지 소녀를 왕비로 맞을 수 없다며 모두 말렸지만, 왕은 왕좌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다. 패트릭은 로즈와
사귀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 너무 다른 세계에서 자랐다고,
우리 가족은 가난하다고 말하는 로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부유함에서 오는 오만이었고, 패트릭이 사랑한 것이 로즈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였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즈 역시 막막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심정으로 결혼을 결심했기에, 이들의 파국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이후 로즈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곳 저곳을 떠돌며 배우이자 교사로 살아간다.
생활은 안정적이지 않고,
수입은 터무니없이 적고,
끊임없이 외로워하며,
누군가에게 희망을 품었다 좌절한다. 매번 실패하고, 실망하면서도 행복에 대한 환상 때문에 계속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희망을 꿈꾸는
것이다. 앨리스 먼로는 로즈의
삶을 미화하지도, 긍정적으로
그려내지도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허영과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꾼다. 먼로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과 주변을 소재로 다양한 변주를 하며 인간사와
관계를 그려내는 걸로 유명한데, 비교적 초기 작품인 <거지 소녀>의 주인공 로즈의 성격이나 그녀가 겪는 인생은 이후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다양하게 보여진다. 실패와 실망, 어리석음과 허영, 나약함과 수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택한 그 삶을
살아보겠다고 말하는 로즈의 목소리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먼로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체감하는 것이지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상처, 관계와 회한에 대한
것들은 무엇 하나 내 일 같지 않은 장면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그러했다.
비록 외롭고 초라하더라도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가치가 있으며, 내가 비록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찮은
존재도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