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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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래야만 한다. 스탤론 덕분에 그녀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리즈는 일어났다.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스튜디오의 현관문 열쇠를 쥔 손에 힘을 모아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p.26

리즈는 친구들과 함께 실베스터 스탤론의 영화 <록키3>를 관람한다. 영화에서 세계 챔피언으로 승승장구하던 록키는 자만심과 매너지즘에 빠져 무너지게 되는데, 모든 것을 잃고 쓰러질 뻔한 순간에 다시 혹독한 훈련을 재개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결국 타이틀을 되찾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남자 친구인 미셸과 친구 부부는 이 작품 보다 <록키1> <록키2>가 더 좋다고 말한다. 리즈는 두 작품 모두 보지 못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록키3>를 보고 나서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밖으로 나와 걷는 동안에도 영화에 삽입되었던 음악의 전주곡이 울리고, 스탤론이 샌드백을 치고, 뛰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고열에 시달리느라 병원에 출근하지 못했고, 기력이 회복되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록키 발보아처럼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였다. 그녀는 중단했던 의과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해,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는다. 사실 그녀는 가장 힘든 예과 2년 과정을 마친 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집을 떠났었다. 집으로 돌아가 5년 전 공부하던 책들을 가져오고, 이번에도 인내심이 없어 중도에 포기할 거라고 말하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 친구와 헤어진다. 그리고 결국 몇 년 후 의사가 되고, 새로운 사랑인 장과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서 스탤론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자신의 히어로를 향한 리즈의 애정은 순수하면서도 엉뚱하고, 진지하면서도 유치하다. 스탤론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한 그녀는 스탤론이 가난해지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그녀가 버는 돈의 10퍼센트를 저금하는 예금 계좌를 개설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가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웃음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차츰 호흡을 가다듬었다. 리즈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스탤론. 어떻게 그런 생각을! 시치미를 뚝 떼고서. 그는 한순간도 아내가 성실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스탤론을 도와주기 위한 저금이라니!     p.54

엠마뉘엘 베르네임은 20년 동안 100쪽 남짓한 소설 다섯 편만 발표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작품은 '100페이지의 미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출간할 당시부터 너무 짧고, 너무 간결하고, 너무나 건조한 문체의 독특한 작품으로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가 발표했던 100쪽 남짓한 다섯 편의 소설 중 가장 마지막으로 발표된 것으로, 실제로 작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은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짧은 분량으로 60여 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책의 후반부에 <씨네21>의 이다혜 기자와 <코끼리는 안녕,>의 이종산 소설가가 작품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나눈 대담이 수록되어 있다. 대담의 내용만 40여 페이지이니, 이건 뭐 거의 작품의 분량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얘기이다.

여러 책에서 이다혜 기자의 추천사를 읽고, 팟캐스트를 통해서 그녀가 소개해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그녀가 써낸 여러 에세이들을 읽어 왔기에, 특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것 같다. 아마도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대담이 소설보다 더 재미있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이종산 소설가는 이 작품에 대해 '장식을 제거하고 골격만 남겨놓아도 소설이 되는구나, 충분히 많은 걸 느낄 수 있구나' 싶었다며 간결하다고 해서 어떤 요소가 빠진 게 아니라 모두 풍부하게 응축되어 살아있다고 말한다. 이다혜 기자는 베르네임의 장점이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에 어디서 얘기가 끝날지 짐작할 수 없다는 건데, 이 작품은 전작들에 비해 미묘하게 비관주의적인 태도가 사라지고 더 낙관적으로 변한 것 같아서, 전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설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작품 외에도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며 폭넓고 다양한 시각에서 흥미진진한 논의를 들려준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연애나 결혼과 같은 것일 테고, 또 누군가에는 작품 속 리즈처럼 나만의 히어로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히어로가 스크린 속 배우가 아니라 부모나 스승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만약 그날, 리즈가 <록키3>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한 여자의 강한 의지와 인생을 바꾸는 최고의 덕질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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