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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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우드를 증오해왔지만, 그리 강렬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추수 전에 들이닥치는 우박을 동반한 폭풍, 들판을 뒤덮는 메뚜기 떼 같은 것이었다. 그보다 더 끔찍하고 악몽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연의 일부다. 하지만 이제는 우드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를 모두 해치기 위해 악의로 똘똘 뭉친 채 서서히 접근하는 생물체로, 우리 마을 전체를 굽어보며 집어삼킬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생물체로 느껴졌다.   p.287

전부터 <테메레르> 시리즈가 너무 궁금했었는데, 전체 9권으로 완결이 되었기에 그 분량 때문에 선뜻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해당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으로 쓰인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에 <업루티드> 부터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야 겨우 만나보게 되었다. 나오미 노빅이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폴란드의 민담과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했다는 이 작품은 2016년 네뷸러상 장편부분 수상작이기도 하다.

마법사이자 불사의 존재이기도 한 드래곤은 십 년에 한 번씩 열 일곱 소녀 한 명을 자신의 탑으로 데려간다. 그는 소녀를 십 년 후에 다시 마을로 돌려보내는데, 그때가 되면 소녀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소녀들을 드래곤에게 제물로 바치게 된 지 백 년이 넘었고, 그 동안 드래곤은 '우드'라는 무시무시한 숲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었다. 올해는 주인공 소녀 아그니에슈카가 열일곱이 되는 해였다. 드래곤의 소녀가 될 후보는 총 열한 명이었지만, 다들 아름답고 영리하고 똑똑한 카시아가 선택될 거라고 생각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소녀였던 카시아는 자신이 떠나게 되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와 항상 함께 지냈던 아그니에슈카는 자신의 친구를 데려갈 드래곤이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의 날이 왔고, 드래곤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카시아가 아닌 아그니에슈카의 손을 낚아채 허공으로 사라진다. 당사자인 아그니에슈카를 비롯해서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난 분별력 따위는 원하지 않아요!"

내가 정적을 깨며 크게 외쳤다.

"분별력이 생기는 게 아무도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라면요. 사람들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가 뭐가 있나요?"    p.435

이야기의 배경에는 인간의 탐욕을 빨아들이며 폴니아 왕국을 잠식해온 '우드'라는 숲이 있다. 그 숲에 발을 들인 사람 누구도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상태로 나오지 못했다. 눈이 먼 채로 비명을 지르며 나오거나, 온몸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리고 일그러지거나, 미치광이가 되곤 했다. 그 중 가장 끔찍한 것은 멀쩡한 얼굴로 걸어 나와 살인을 저지르는, 내면이 뭔가 크게 잘못된 사람들이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우드의 저주를 두려워하며 살아 왔다. 아그니에슈카가 드래곤의 탑으로 간지 얼마 뒤, 카시아가 '우드'에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거대한 대벌레처럼 생긴 워커가 종종 숲에서 사람들을 채가곤 했는데, 카시아가 물을 길으러 갔을 때 워커 세 놈이 그녀를 데려가고 만 것이다. 카시아의 엄마 웬사가 아그니에슈카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우드로 끌려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설사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오염되지 않은 채 나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을테고 말이다. 하지만 아그니에슈카는 카시아를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드래곤 몰래 길을 나서고, 무시무시한 저주의 숲 '우드'로 향한다.

67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는 작품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페이지가 쓱쓱 넘어가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극 초반, 드래곤이 아그니에슈카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그녀가 점차 마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가는 과정이었다. 정말 아무 것도 몰랐던 천방지축, 왈가닥 소녀가 청소와 요리를 할 수 있는 마법부터, 마을에 퍼진 우드의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는 마법과 그 과정에서 늑대에게 물려 온몸으로 오염이 퍼진 드래곤의 상처를 치유하고 정화하는 마법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마법에 재능을 타고난 천재 소녀가 아무렇게나 툭툭 위기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간단한 마법만 간신히 턱걸이로 배우고 있는 평범한 소녀가 급박한 상황에서 재기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라 누구라도 손에 땀을 쥐고 소녀의 편에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융통성 없고 고집 센 마법사 드래곤을 비롯해서 형이 물려받은 왕권을 호시탐탐 노리는 폴니아의 둘째 왕자 마렉, 왕실의 제1마법사가 되기 위해 간신 노릇을 일삼는 마법사 팔콘 등 분명하게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지루할 틈 없이 끌고 나가는 것 또한 이 작품의 매력이다.

 

판타지는 가장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불가능의 문학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현실도피 수단이 바로 판타지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판타지 소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이 작품은 판타지 소설이 줄 수 있는 가장 최상급의 재미를 선사한다. 진부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탈출하고 싶다면, 소설이란 자고로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나오미 노빅은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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