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벚꽃
왕딩궈 지음, 허유영 옮김 / 박하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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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의 일생에 몇 번의 연애가 허락된다 해도 나는 단 한 번으로 끝날 수 있기를 바란다. 방금 전 그 길이 첫 번째 길이었다고 해도 그 다음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런 확고한 생각이 조금 황당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길 위에서 어떤 구간이 가장 옳은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사랑도 원래 영감처럼 아슴아슴 떠다녀 붙잡기 힘든 것이다. 영감이 찾아오지 않으면 머릿속은 죽은 바다나 다름없다. 그 바다에 거센 파도가 몰아쳐야만 외로운 세상도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p.99

 

남자가 혼자 운영하는 카페에 첫 손님으로 뤄이밍이 온다. 어떤 응대도 주문의 절차도 생략된 작은 카페의 침묵 속에서 뤄이밍은 커피를 마시고, 30분도 안 되어 자리에서 일어선다. 뤄이밍은 그 길로 집에 돌아가 앓아 누웠고, 곧 옥상으로 올라가 자살을 시도한다. 경찰과 구급대원이 등장했고 그 상황은 조용히 마무리되지만, 이후 동네 전체가 남자에게 한 목소리로 조용한 분노를 게워 낸다. 평소 살갑게 맞이했던 가게 주인의 태도가 냉랭해지고, 노점상들은 지나가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그가 지나가면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남자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현장을 빠져 나와야 했다. 뤄이밍은 대형 은행의 고위 임원으로 남몰래 선행을 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 남자와 그의 아내 추쯔는 5년 전 뤄이밍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뤄이밍이 취미로 사진을 가르쳤는데, 추쯔가 그에게 사진을 배웠던 것이다.

남자의 아내 추쯔는 그의 곁을 떠났고, 남자는 바닷가 마을의 황량한 변두리에 와서 홀로 카페를 열었다. 뤄이밍의 갑작스러운 사고 이후 경찰이 남자를 찾아와 묻는다. 뤄 선생에게 무슨 원한이 있느냐, 복수를 하러 온 거냐, 뤄 선생은 털끝 하나 건들지 마라 등등... 이 장면으로 미루어 추쯔가 사라진 것이 뤄이밍과 무슨 연관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남자의 태도는 어딘지 석연치가 않았다. 떠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녀를 원망하는 것 같지는 않고, 뤄이밍을 찾아가 따지고 분노를 퍼부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오히려 찾아온 그에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의 카페에 낯선 여자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병세가 걱정스러워 직장에 휴가를 내고 고향에 내려온 뤄바이슈, 그녀는 뤄이밍의 딸이었다.

 

매일 벚나무에 소금물을 부을 때 뤄이밍의 머릿속은 또렷했을 것이다. 벚꽃이 그를 병들게 한 것은 아니지만 위험한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시드는 벚꽃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뤄이밍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욕망의 부추김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심연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것을.   p.291

 

아내를 잃은 한 남자, 남편을 떠난 뒤 실종된 여자, 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른 남자, 그리고 그의 딸, 이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매우 독특하게 전개된다. 뤄이밍의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남자에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등장한다. 아빠가 왜 자학증에 걸려 자신을 못살게 구는 것인지, 아빠가 무슨 죄라도 지었다면 속 시원히 말해달라고, 침묵은 아빠에 대한 복수처럼 보이니 침묵하지 말라고. 정말 이상한 것은 남자의 태도이다. 다니던 건축 회사를 그만두고 인적도 드문 해변에 작은 카페를 열고 아내가 돌아오기만 기다리지만, 그 이상의 적극적인 행동은 없다. 아내를 빼앗아간 이에 대한 복수의 마음이나 자신을 버린 아내에 대한 분노의 마음도 없어 보인다. 그렇게 이야기는 남자와 뤄바이슈의 대화를 통해 전개되고, 아내인 추쯔와 뤄이밍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만 등장한다. 인물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인물의 주변을 묘사해 그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왕딩궈의 방식은 매우 낯설지만 이상하게 슬프다. 게다가 나는 이토록 지독한 사랑의 방식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렇게 치열하지 않은 형태로, 담백하게 쓰여진 사랑 이야기로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가 바로 왕딩궈'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추천 때문에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판밍이라는 문학평론가는 이 작품에 대해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고 평가했다. 아마도 서정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처연한 슬픔과 행간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특별한 생의 의미들 때문일 것이다. 왕딩궈는 이 작품의 프롤로그에서 '내가 쓰려고 한 것은 슬픔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극중 아내를 잃은 남자는 '비극이 희열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뤄바이슈에게 말한다. 추쯔와 뤄이밍에 대한 이야기가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한 남자의 모든 걸 바꿔놓은 엄청난 변화가 시작된 사건의 발단이 그렇게나 작은 일이었다는 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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