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쓰키 나오토를 다시 만났을
때, 그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가을은 이미
지났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코트를 껴입고 있었다.
"세상에는 비현실적인 일도 일어날 수 있어. 마쓰다하고 함께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왠지 구원받는
기분이야. 네게 바람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괴로운 일을 잊을 수 있어.
소설이나 만화를 읽었을 때처럼. 그래서 혼조는 너하고 표류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던
거야."
- '염소자리 친구' 중에서, p.115
마쓰다의 집은 언덕 위에
있어 2층 창문으로 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있어, 마을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때도 마쓰다의 집 2층에는 어째선지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마쓰다의 방 베란다에는 매일 낙엽이 수북이 쌓이는데, 가끔은 바람을 타고 다른 물건들도 떨어지곤
했다. 사진이나
잡지, 헌 옷이나
수건, 외국에서 바람에 날려온
듯한 물건까지 섞여 있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물건들이 베란다 격자에 걸려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찢어진 신문 조각이 날아왔고, 날짜는 무려 두 달 후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미래의 어느 날에 발행된 신문이 온
것이다. 신문에 실린 기사
중에 고1 사망 사건의
참고인으로 신문을 받던 고등학생이 경찰서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얼마 뒤 실제 마쓰다의 반에서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동급생 친구가 가해자를 죽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 평소에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를 모른 척 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죄책감이 든 마쓰다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된 친구를 도와주기로
한다. 그리고 엿새 후에
벌어지게 될 신문 기사에 실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마쓰다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염소자리 친구'는 학교 폭력이라는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오쓰이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판타지를
사용해서 풀어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를 다루고 있는 작품 중에 단연코 돋보이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외에도 은둔형 외톨이로 살던 인물이 아버지의
유품인 잉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생활 방식이 달라지고,
성격이 바뀌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친구들에게 도둑으로 오인 받아 학교생활이 어려워진 인물이 친구가 없어 반에서
고립되어 있는 소년의 도움을 받게 되는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쓰나미로 인해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 인물이 술에 절어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죽은 아들의
장난감을 통해서 아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트랜스시버'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어디서
만났던가요?”
나는 물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소녀의 눈은 양쪽의 색이
달랐다. 오른쪽 눈동자는
검은색이지만 왼쪽 눈동자는 붉은색. 오드아이.
“벌써 잊었어? 네가 나를 죽였잖아.”
소녀가 미소를 머금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사람들이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 놀라운 고백을 듣고 동요하지 않았다. -
메리 수 죽이기'
중에서,
p.202
이 책은 청춘소설에서
호러, SF, 판타지, 미스터리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작가가 펼치는 다채롭고 환상적인 단편 모음집이다. 전혀 다른 매력의 일곱 편의 단편으로 만들어진 한 권의 환몽 컬렉션인
셈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 현대 문단의 천재 오쓰이치, 청춘·연애소설로
잘 알려진 나카타 에이이치, 괴담 작가로 유명한 야마시로 아사코,
복면작가 에치젠 마타로,
해설을 맡은 아다치 히로타카까지. 사실 이들 다섯 명의 작가 모두 한 사람, 오쓰이치이다.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방식과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인다는 설정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엄연히 다섯 작가들의 이력도 책 표지에 실려 있어 당황스러운 책이었다. 이들 다섯 작가들은 오쓰이치의 다섯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창적인 구성과 방식으로 쓰여진 이 작품들은, 사실 전혀 정보 없이 읽는다면 모두 다른 작가가
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개성과 색채가 뚜렷하다.
한 작가에게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오츠이치의 작품은 국내에도 꽤 많이 출간된
편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섬세함과 안타까움을 기조로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퓨어 계열'의 화이트 오쓰이치와 잔혹함과 처참함을 기조로 하는 '다크 계열'의 어두운 블랙 오쓰이치로 나누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는 작가이고,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거기에 더해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인 이 작품집은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도
든다. '오쓰이치의 오쓰이치에
의한 오쓰이치 팬을 위한 압도적인 소설집'이라는 평가가 제격이라는 느낌이 드는 정말 색다르고 매혹적인 작품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