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파리
데이비드 다우니 지음, 김수진 옮김 / 올댓북스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이곳이 바로 살롱입니다." 관장이 설명했다. "그리고 노디에가 기대어 서 있었던 벽난로가 바로 저기지요."

그 순간, 밖에서 들리던 자동차 소리가 귀에서 멀어져 갔다. 잠시 시간의 흐름이 멈추었다. 나는 노디에가 살았던 시절 그와 함께 했던 그림과 책, 물건들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기억과 먼지가 켜켜이 쌓인 비옥한 흙냄새가 나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랬더니 어느 날 저녁 살롱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한 뒤마의 글이 떠올랐다.    p.59

파리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영화와 이야기들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는 바로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이다. 약혼녀과 함께 파리로 여행을 온 할리우드의 작가인 주인공이 어느 밤 자정에 파리의 골목길을 헤매다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그 영화는 그야말로 파리라는 도시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설레이는 작품이었다. 불꺼진 상점들 너머 길을 잃은 자정이 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통로를 발견한다는 낭만적인 설정도, 위대한 작가들이 쉼쉬는 공간에서 그들과 함께 한다는 호사스러운 공상도 너무 매혹적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가 여는 파티에 참석하고,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헤밍웨이가 불쑥당신은 어떤 소설을 쓰지? 문장은 간결해야 해하고 조언해주며, 거트루드 스타인이 내가 쓴 글을 평가해준준다니,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이 꿈꿀 달콤한 상상이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리라는 도시는 이 영화에서처럼 '매일 밤 12시가 되면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1920년대행 자동차'가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설레이는 판타지가 진짜 벌어질 수도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런 곳이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다우니는 파리라는 도시가 지닌 매력의 원천에는 물리적 아름다움이나 고급스러운 삶뿐만 아니라 또 다른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말한다. 역사와 여행과 회고록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저자가 파리로 건너와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파리와 파리의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탐색에 나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라는 말은 잊기 바란다. 그리고 한밤중 대신 새벽에 몽마르트르를 가로질러 산책해보기 바란다. 마녀가 출몰할 것 같은 이 시간이면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장소들은 텅텅 비어 있다. 이제 저속하고 시대착오적인 것들 대신 마법처럼 역사 속 인물들이 동시에 나타나는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장밋빛 불빛 속에서 마르스 신은 모딜리아니가 긴 목을 지닌 한 연인과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거투르드스타인은 전신으로 받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바토 라부아르에 있는 파블로 피카소의 정신 없는 작업실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p.421

푸치니의 오페라, 플로베르와 빅토르 위고의 소설, 할리우드 영화 그리고 나다르와 브라사이, 드와즈노,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속에는 낭만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를 본 사람들이 파리를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파리를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 낭만의 토대이자 뿌리가 되는 것들, 정말로 중요하지만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거대하고도 어둡고 비밀스런 것들, 파리와 파리지앵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선과 다름없는 것들에 대해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센 강변과 생 마르탱 운하, 중세풍의 거리, 멋지고 오래된 건물들 모두 하룻밤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뚝딱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노래와 와인, 장미로 생기가 도는 완벽한 도시의 밤 풍경은 섬세하고도 세심하게 계획해서 만들어낸 환영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미국에서 태어나 파리의 매력에 빠져 이주해온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가 읽어내는 빅토리 위고, 조르주 상드, 샤를 보들레르, 오노레 드 발자크, 펠릭스 나다르 등 위대한 낭만주의자들의 삶과 사랑은 대단히 흥미롭게 들려진다. 파리라는 도시의 세속적이고 낭만적인 곳을 찾아 순례를 하며 세계적인 문학가, 예술가들이 깃들어 있던 곳들을 직접 찾아가보고 감상하고 탐구하고 그들의 사랑과 인생, 해프닝,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여정은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100여 컷의 역사적이거나 현대적인 사진이나 스케치, 그림들은 우리가 파리의 과거와 현재를 읽어 내는데 더 생동감을 부여한다. 파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파리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면 이 책으로 인해 굉장히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 보이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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