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알았어. 내가 말했다. 서로 생각이 정말 다를 때는 내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그녀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이었다. 무려
18년 동안 밀려 있었던 연체료 32달러를 내고 연체 기록을 지운다. 그리고 방금 전 반납한 이디스 워튼의 책 두 권을
다시 대출한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데다 지금이야말로 그 책들이 딱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27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지금은 남이 된 남편은 옆에서 속 좁은 불평들과 상처를 주는 악담을
늘어 놓는다. 남편에게 들은
터무니없는 비난으로 인해, 그녀는 이제 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두 주 만에 책 두 권을 반납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죽을 때까지 한 남자와 부부로 살고
싶다고. 학교 제도를 바꾸고
도심의 여러 문제와 관련한 연설을 하는 유력한 시민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그녀는 방금 대출한 두 권의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녀는 책을 반납하러 오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평생 아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왔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다 일찍 죽었고 아들은 참한 아가씨와 결혼했지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대체 그녀가 그토록 전전긍긍했던 모든 것들이 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삶이란 그렇게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걸, 우리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깨닫게 된다.
모든 걸 바쳐서 키운 아들은 비행 청소년이 되어 동네에서 가장 품행이 나쁜 여자와 결혼하겠다
하고, 딸아이는 갑자기
이혼하겠다며 찾아온다.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를 맞이하는 엄마, 남편이 바람을 피운 아내,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불행한 여자들의 모습이 이 소설집에 실린 17편의 중·단편소설 속에 등장한다.
중요한 대화가 아주 간절했던 순간,
남자의 모든 세계를 코로 들이마시며 냄새로 느끼고 싶었던 순간, 나의 다정한 언어를 그의 시들지 않는 육체적
사랑으로 바꾸어 표현할 줄 아는, 적어도 한 명의 똑똑한 동반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 순간,
나는 별 도리 없이 아이들 가득한 동네 공원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그레이스 페일리는 단 세 권의 단편집으로 미국문학의 전설이 된 작가이다. 수전 손택은
"우습고 슬프고 담백하고 겸손하며 유쾌하고 예리하다. 나를 울리고 웃기고 감탄하게 만든
책." 이라고
했으며, 그녀의 작품들을 직접
번역해 일본에 소개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칠면서도 유려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인정이 넘치고, 즉물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서민적이면서도 고답적이며, 영문을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고,
남자 따윈 알 바 아니라면서도 매우 밝히는, 그래서 어디를 들춰봐도 이율배반적이고 까다로운 그 문체가 오히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라고 말했다. 국내 번역본에는 하루키가 일본에서 이 소설집을 번역했을 때 썼던 에세이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하루키는 페일리의 어조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
유머 감각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어둡고 심각한 내용에서도 왠지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오는 부분이 있다고, 역시 뉴요커인 우디 앨런의 어조와도 다소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페일리는 첫 단편집을 낸 후
사십 년 동안 단 세 권의 단편집밖에 발표하지 않은 작가이다.
그러니 그녀의 작품들을 읽을 때 '질 좋은 오징어를 씹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곰곰이 맛을 음미하면서 즐겨야
한다. 하루키의
조언처럼 ‘곱씹어보게 되는
중독성 강한 문장'이 굉장히
인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짧게
갑작스럽게 끝나 버리는 이야기라서 더 임팩트있게 다가오는,
서사보다는 장면에 집중하는 단편이라서 여운과 잔상이 더 길게 남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극중 페이스와 같은 순간을 맞이 하게 된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던 평범한 하루였지만, 어느 한 순간의 아주 사소한 일들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을 만나는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 오길.
헤어 스타일을 바꾸고,
일자리를 옮기고,
삶의 방식과 말투까지 바꾸게 되진 않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책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그레이스 페일리를 만나기
전과 후, 달라질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