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나의 병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27
하비에르 세르카스 지음, 김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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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사건을 덮자는 권유를 듣게 된다. 이쯤 되면 시비를 가리는 것은 ‘따지는’ 것이 되고 성가신 일이 되는 것이다. 스페인도 그러했다. 내전과 독재, 왕정 복고라는 현대사를 거친 그들은 과거사를 정리하고 청산하기 보다는 학살 등의 문제를 덮기로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지쳤기 때문이리라. 공화정을 핍박하고 학살했던 이들은 기억 속에서 잊혀졌으며 공화정을 수호했던 이들의 영광 역시 그러했다. 이를 ‘민주화 이행기’라 한다.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살라미나의 병사들』은 내전과 독재, 이행기를 거친 90년대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상흔이 남은 역사를 더듬어 진정한 영웅을 찾아내는 기록이다.

 

소설은 세르카스 본인의 목소리로 진행되는데 역사와 실존인물들을 바탕으로 하며 작가의 삶 또한 함께 진행되는 메타픽션이다. 20대 후반 첫 소설을 출판한 후로 이렇다 할 작품이 없는 작가는 곧 마흔이 된다. 하는 수 없이 신문사로 복직하고 라파엘 산체스 페를로시오를 인터뷰하는데, 그의 아버지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가 내전 중 총살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공화파 병사가 마사스를 살려줬다는 것이다. 이 기이한 이야기를 제외한 적당한 기사를 써 낸 세르카스는 얼마 후 독자들의 생각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 그 중 눈길을 끈 것은,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편지였다. 기자는 이 독자에게 연락하고, 마사스의 일화에 등장한 ‘숲속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인 피게라스의 아들을 만나게 된다.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는 나쁘지 않은 문인이라는게 당대의 평가였지만 내전을 일으킨 열렬 팔랑헤 당원이기도 했다. 흥미를 느낀 작가는 1939년 1월 30일, 마사스가 총살현장에서 달아난 전후 며칠을 더듬어 간다. 세르카스는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해 프랑코 체제와 마사스의 작품을 다룬 학자와 교수, 그의 지인들을 만난다. 결정적인 증언을 한 이들은 마사스를 숨겨주었던 마리아 퍼레, 안젤라츠, 피게라스였다. 특히 피게라스는 마사스가 남긴 수첩(일기와 같은 기록)을 제공함으로써 시간적 순서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작가는 기억과 증거(수첩)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면밀히 살핀다. 1부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며 2부는 마사스의 삶의 궤적이라 할 수 있다. 3부는 글을 완성했지만 부족한 부분, 그 한 조각을 찾지 못해 작품을 포기하려 하는 세르카스의 이야기이다.

 

원래의 목표는 총살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산체스 마사스의 전기를 쓰되, 그의 인물됨을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그가 대표했던 팔랑헤주의, 당을 이끌었던 소수의 미친 동기(자기집단의 특권과 안위를 위한 이기심으로 파시즘을 추앙)에 대한 평가를 제기하고자 한 것이다. 글쓰기를 중단하고 다시 신문기자로 돌아간 세르카스는 로베르토 볼라뇨를 인터뷰한다. 칠레의 그 작가가 맞다. 볼라뇨가 생각하는 영웅관, 그리고 그가 젊은 시절 캠핑장에서 만난 미라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세르카스는 미라예스라는 인물이 자신이 잃어버린 조각이라 직감하고 그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세르카스가 미라예스를 등장시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산체스 마사스를 살려준 그 무명용사가 미라예스라 생각했기 때문에?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볼라뇨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 ‘영웅관’을 보자면 이 소설은 ‘망각 협정’과 그 수혜자들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스페인 사회에는 내전에서 승리한 자들의 목소리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산체스 마사스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공화파 병사의 아량으로 살아남은 그는, 붓으로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내전에 참전하게 했고 프랑코가 파시즘을 이용, 스페인을 독재하게 도와준 인물이나 마찬가지다. 내전 종료 후, 프랑코에 맞서지도 않고 동조하지도 않은 채 칩거하며 문예활동에만 몰두했다. 마사스는 팔랑헤의 상징으로 평안한 삶을 살다 죽었다. 그와 대척점에 위치한 미라예스의 삶은 어떠했던가. 그가 지금 스페인이 아닌, 타국에 홀로 남은 모습마저 묘하게 우리 현대사와 오버랩된다...

 

현 스페인 사회는 미라예스로 상징되는, ‘망각 협정’의 결과 의도적으로 잊혀진 무명용사들에 빚을 지고 있다. 미라예스의 ‘기억’에 대한 술회는 민주화에 대한 용사들의 공적을 떠올리지 않는 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현재 우리 삶과 사회를 돌아볼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영웅의 행동에는 거의 언제나 뭔가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있습니다. 뭔가 자기 본성 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지요. 게다가 사람은 평생토록 기품있는 사람이 될 수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숭고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웅은 단지 예의적으로 어느 한 순간만 영웅인 것입니다. (193쪽)

 

그들을 아직 기억하는 이유는 비록 그들이 죽은지 60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미라예스가 그들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에게 매달려 있는 건지도 모른다. 완전히 죽지 않기 위해서. (266쪽)


비록 이 엿 같은 나라는 아주 하찮은 마을의 아주 하찮은 거리 그 어디에도 미라예스의 이름을 붙이지 않을지라도, 내가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한 미라예스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살아 있게 될 것이고,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한 가르시아 세게스 형제―주안과 렐라―, 미겔 카르도스, 가비 발드리치, 피포 카날, 고르도 오데나, 산티 브루가다, 조르디 구다욜 역시, 비록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죽고, 죽고, 죽고, 죽어 있었지만, 계속 살아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나는 미라예스와 그들 모두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피게라스 형제와 안젤라츠에 대해서도, 마리아 퍼레와 나의 아버지, 그리고 볼라뇨의 젊은 라틴 아메리카 친구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리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체스 마사스와, 마지막 순간 문명을 구원한 그 소수의 병사들에 대해서도 말하리라. 그 소수의 병사들에 산체스 마사스는 끼일 자격이 없지만 미라예스는 자격이 있다. 또한 생각하기도 힘든 그 순간들에 대해, 전 문명이 한 사람에게 달려 있던 그 순간들에 대해,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문명이 그 사람에게 지고 있는 부채에 대해 이야기하리라.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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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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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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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킹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1 아서 왕 연대기 1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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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콘웰의 군벌 연대기(The Warlord Chronicles)은 『윈터 킹』, 『에너미 오브 갓』, 『엑스칼리버』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기 400년경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그 유명한 '아서 왕'이 군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때는 아직 브리튼족이 색슨족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현대 영국인의 뿌리라 여겨지는 앵글로-색슨족(앵글족, 색슨족)은 아직 이 땅에 대한 지배력을 점하지 못했다. 아서 왕 전설에 등장하는 대마법사 멀린은 브리튼 최고(最高, 最古)의 드루이드로 등장한다. 드루이드는 전역에 퍼져있던 토착신앙을 대표하는 샤먼으로 우리네 무당이라 할 수 있다. 신들과 소통하며 병도 고치고 저주도 하는데- 전투시에는 상대를 도발하고 욕설과 춤을 통해 사기를 꺾는 등, 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였다. 드루이즘을 믿는 브리튼 섬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려지는 모습들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군벌, 아서가 그 주인공이 되는 소설이지만 실질적인 화자이자 주인공은 데르벨 카다른이다. 금발에 푸른 눈, 색슨 족 출신의 이 소년은 한 드루이드에 의해 죽음의 구덩이에 빠졌다 살아나온 인물로 출생 또한 범상치 않다. 데르벨이 아직 소년이고, 유서 펜드래곤(우서 펜드래곤, 아서의 아버지)의 적손인 모드레드가 탄생하는 장면에서 소설이 시작한다. 특이한 점은 아서가 서자로 등장하고, 모드레드는 아서의 아들이 아닌 이복동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복동생 모드레드는 사망한 상태로, 이후 언급되는 모드레드는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유서의 손자이다. 아서는 동생 모드레드를 죽게 했다며 부왕에게서 부당한 미움을 받고 있다. 한편 아기 모드레드는 절름발이로 태어나 비뚤어진 성정을 가진 청년으로 자라나는데, 유서의 죽음을 앞두고 아서는 모드레드를 왕으로 모실 것을 맹세하게 된다. 이 서약을 지키고자 한 아서의 의지가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연대기의 1부인 『윈터 킹』에서 데르벨은 멀린이 주워온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로 등장한다. 함께 자란 니무에(아서 왕 전설: 호수의 요정 비비안)는 멀린의 연인이자, 수제자인데 데르벨의 첫사랑이기도 하며 둘은 영혼을 잇는 맹세를 한다. 이때 데르벨은 이 맹세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생각도 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서의 밑으로 들어간 데르벨은 점차 공을 세우고 장군으로 인정받는다. 아서의 꿈은 통일된 브리튼을 만들어 색슨족으로부터 브리튼 섬을 지켜내는 것이다. 그는 포위스의 공주 에인윈과 정략결혼을 해 이상을 이루려 하지만 약혼식에서 귀네비어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귀네비어와 숲 속에서 도둑 결혼을 하고 영지로 돌아 온 아서, 에인윈의 불명예스러운 파혼으로 고르디버드 왕은 노발대발하고 결국 브리튼 족 사이 전쟁이 발발한다.

 

아서 왕 전설의 최고 미남이자 사기 캐릭터, 호수의 기사 란슬롯도 출연하는데 영국인이 쓴 이 군벌연대기에서 줄곧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이 왕자를 보면 상당히 재미있다. 란슬롯은 어니스 트레베스(프랑스의 몽생미쉘)의 왕자로, 프랑스인들이 쓴 아서 왕 이야기에서 묘사된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그가 전설 속에서 미화되는 이유도 등장한다. 한편 귀네비어는 사냥을 즐기며 활동적인, 야망있는 미녀로 등장한다. 남편을 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의 과정을 보면 악녀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가 전개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녀의 총명함과 정치력에 감탄하게 된다. 아서가 브리튼 왕국에 평화를 가져오고, 멀린은 브리튼의 고대 유물들을 찾아 오래된 신, 옛 신들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 두가지 이야기는 서로 다른 듯 교차된다. 멀린이라는 인물의 영향력은 소설의 초반부터 암시되지만 그는 계속 부재중이다. 의외인 곳에서 등장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며 읽는 것은 재미를 더할 것이다.

 

『윈터 킹』은 모드레드의 출생과 비극, 색슨족의 침공, 아서의 결혼과 약혼, 브리튼의 분열, 어니스 트리베스로 가는 데르벨, 러그 계곡에서의 전투로 전개된다. 이 작품은 신화를 현실로 가져오면서 상당한 고증을 거쳤다. 또한 브리튼 족의 입장에서, 아서 왕 전설에 대한 시각에 균형을 맞춘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현재' 데르벨은 수도원에서 자신의 왕비 이그레인을 위해, 아서의 이야기를 색슨어로 쓰고 있다. 결국 그의 회상인 것이다. 두껍지만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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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우 시선 : 꿈속의 꿈 (레귤러판)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
에드거 앨런 포우 지음, 공진호 옮김, 황인찬 서문 / 아티초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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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르면 에드거 앨런 포가 맞지만, 역자는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에드거 앨런 포우라 표기하였다. 리뷰에서도 그에 따르고저 한다.


포우는 주로 단편들로 유명하지만, 사실 청소년기에 시를 먼저 썼다. 그가 남긴 시와 비평들은 19세기 미국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까마귀The Raven」는 미국의 국민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생애를 설명하는 단어인 알코올중독과 마약중독, 소아성애는 유작 관리를 맡은 그리스월드의 악의적인 첨삭과 유포로 얻은 것이다. 오히려 가난이 그의 생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리라... 에드거는 3살이 되기 전 양친이 사망하여 위탁가정인 존 앨런 부부에 맡겨진다. 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하나 이때쯤 존 앨런과의 사이가 나빠져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 우수한 학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술과 도박으로 인한 빚(상류층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다)이 많아지자 에드거는 대학을 중퇴하고 군에 입대한다. 복무기간 동안 인정 받아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지만 사관생도로서 품위유지비조차 없어 자퇴를 결심한다. 그러나 존 앨런이 동의서를 써주지 않자 규율을 어겨 퇴학당한다.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볼티모어에서 고모 마리아 클렘을 만나 함께 산다. 가족들은 할머니 앞으로 나오는 연금에 의존했지만 가난한 와중에도 사이는 좋았다 한다. 에드거는 외사촌 버지니아의 공부를 봐주며 창작활동에 전념한다. 1836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연금이 끊기자 가족을 책임질 필요성을 느낀 에드거는 버지니아와 결혼한다.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네살이었지만 당시 사촌 간 결혼, 어린 신부는 드물지 않았다. 에드거는 버지니아가 열여섯이 되어서야 부부로서 생활한다. 마약중독설은 사실무근이며, 버지니아를 잃고 우울증에 빠져 일시적으로 알코올중독에 이른 적은 있었지만 문예활동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 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독립신생국으로서 미국문학은 싹트던 시기였다. 에드거는 독자적인 문학 노선을 개척함으로써 미국 문학의 수준을 높인다. 그는 영국과 유럽을 휩쓴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화와 전설, 초자연적이고 비이성적이며 극단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작품에 투영된다.


포우의 시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는 그의 시론과도 관련이 있다. 그가 생각하는 시의 정수는 아름다움이고, 이를 잘 설명하는 것은 우울한 톤과 운율(음악성)이며, 그 소재는 미인의 죽음이다. 「애너벨 리」, 「울랄룸」 등을 생각해보면 된다. 사실 그의 시를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포우가 중시하는 시의 운율, 음악성은 '시를 위한 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그의 의도와도 관련있다. 시가 담아야 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운율이므로 번역본을 읽고, 원문과 대조하며 꼭 소리내어 읽어야 그의 의도를 알 것이다. 아티초크 출판에서 번역한 「꿈 속의 꿈」은 가장 최근에 나온 포우 시선으로, 간단한 작품 해설과 삽화가 실려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시선을 뒤잇는 안나 드 노아이유와 샤를 보들레르의 시선과 함께 〈다크로맨스 3부작〉을 이룬다. 미국의 대중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포우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는 것도 큰 기쁨이다...

 


지난 6월 작고한 크리스토퍼 리가 낭송한 「까마귀」이다. 원문은 영상 안에 있으며 번역된 시는 3연까지 올린다.


 

까마귀


어느 울적하고 깊은 밤 기운 없고 지친 나는 잊혀진 기이하고 진기한 이야기책들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꾸벅꾸벅 조는데 갑자기 똑똑 소리가 났다. 누군가 방을 살며시 두드리는 듯했다. 톡톡, 톡톡. "그냥 누가 찾아와 방문을 두드리는 거야, 그뿐이야." 나는 혼잣말했다.


아아, 쓸쓸한 십이월, 벽난로의 잿불이 방바닥에 허깨비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던 일이 생생하다. 나는 날이 밝기를 고대했다, 슬픔을 잊으려, 죽은 르노어, 그녀를 잃은 슬픔을 잊으려, 보기 드문 빛나는 소녀 르노어, 천사들이 이름 지은 르노어, 그녀를 잊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여기서는 영영(永永) 무명(無名)인 그녀, 영영.


나는 가만히 바스락거리는 부드럽고 슬픈 보라색 커튼 소리에 오싹해졌다. 처음 느끼는 근거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같은 말을 반복했다, "누가 늦게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거야, 누가 늦게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거야. 그뿐이야."


(중략)



-2015년 9월 15일 추가: 포의 알코올 중독에 대하여


본문에서 '마약중독설은 사실무근이며, 버지니아를 잃고 우울증에 빠져 일시적으로 알코올중독에 이른 적은 있었지만 문예활동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 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라고 썼는데 리뷰 쓸 때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볼티모어의 에드거 앨런 포 학회' 홈페이지에서 본 '포와 약물, 알코올'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포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자료들을 볼 수 있고, 자세한 것은 홈페이지에서 확인바랍니다.


1. 볼티모어의 에드거 앨런 포 학회: http://www.eapoe.org/

   (이 단체의 역사: http://www.eapoe.org/society/psbhist.htm)


2. 포와 약물, 알코올: http://www.eapoe.org/geninfo/poealchl.htm


다음은 2013년, 민음사에서 나온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에 실린 역자 해설 중 일부입니다. 전문은 책에서 확인 바랍니다.


3.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은 있었지만 술에 절어 살았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무엇보다도 포가 이십 년가량의 길지 않은 기간에 발표한 수많은 시와 단편과 평론, 그 외에도 무기명으로 잡지에 실렸던 그 많은 글을 술에 취해 써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심하게 일에 몰두하는 일중독이 문제였다. 다만 아내 버지니아가 오랜 투병 끝에 1847년 결핵으로 사망한 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알코올중독 증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때도 버지니아 사후 이 년 뒤인 1849년에는 알코올중독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재기를 꿈꾸며 리치먼드로 돌아가 정착을 시도했다.


다음은 D.H.로렌스의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6장, 에드거 앨런 포입니다.


4. 『미국 고전문학 연구』 6장: http://xroads.virginia.edu/~HYPER/LAWRENCE/dhlch06.htm


위키피디아도 훑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5. 위키피디아, 에드거 앨런 포: https://en.wikipedia.org/wiki/Edgar_Allan_P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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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9-08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궁금해서요^^ 포우가 왜 문학계의 고흐인가해서요. ^^

에이바 2015-09-08 14:44   좋아요 1 | URL
가난 그리고 재능을 인정받은 건 사후 보들레르가 포우의 작품을 발견하고 번역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런 점이 반 고흐와 닮았다 할 수 있어요. 생전엔 그리 인정받지 못했죠. 포우의 비평 때문에 문인들과도 그리 친하지 않았다 하고요.

cyrus 2015-09-08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가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라는 제목의 그림도 그렸었죠. ‘처음 느끼는 근거 없는 공포’라는 구절이 제 눈에 박힙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좋아할만한 구절이에요. 그가 생전에 포의 시를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소설은 읽었어요. 러브크래프트는 포의 소설에 관해서 다섯 쪽 넘을 정도의 분량이 나올 정도로 호의적으로 평가해요. 오늘 따라 포의 시에서 러브크래프트의 공포가 떠올리네요.

에이바 2015-09-08 21:18   좋아요 0 | URL
그럼요. 아시다시피 러브크래프트는 포를 글쓰기 모델로 여기고 아주 좋아했어요.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는 포가 자아내는 공포와도 맞닿아 있죠.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러브크래프트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이미 장르적 기초를 다 닦아놓은 포의 영향력이 지대하죠. 저번에 쓰다만 포스트가 있는데 러브크래프트의 시 네메시스에는 포의 울랄룸의 시구가 비슷하게 반복돼요. 포 덕후가 시를 안 읽었을리 없잖아요ㅎㅎ

AgalmA 2015-09-09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코올중독에 대해선 건국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에드거 앨런 포우> 작가론에 따르면 알코올 의존증이 좀 심각했어요, 술을 마시면 행방불명되는 일쑤였고, 그 때문에 편집일을 쉬는 일도 잦았고, 친구도 많이 잃었죠. 아내 병세와 죽음이 결정적이었는데, 술 의존도가 너무 심해져 정신착란까지...
아내 병상 중 쓴 <갈가마귀>, 아내 죽음 후 쓴 <애너벨 리>가 과연 맨정신에서 썼을까...저는 글쎄요...
쉘던 부인과 재혼을 앞두고 또 행방불명되었다가 술집에서 과음으로 인한 사망 사고에 이르게 됩니다.
알코올 뿐 아니라 약물중독, 정신병자 온갖 낙인이 있죠ㅜㅜ...
포우와 버지니아와의 짧고 강렬한 5년간의 결혼 생활은 고흐와 창녀와의 애틋한 동거생활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진 것 없는 자였던 포우와 고흐의 심적 동질성에 대해서...

에이바 2015-09-09 10:58   좋아요 0 | URL
남아있는 포의 편지들을 보면, 그가 평생을 알코올에 저항하려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중독은 글쎄요, 저도 알코올 중독이라 알고 있었는데 시를 읽고 의문이 생기더군요. 명징한 정신이 아니라면 이런 음악성을 드러내는 시 창작이 가능한가? 에드거가 가족력과 더불어 `알코올`과 싸운 건 맞지만 전반적인 문예활동, 술에 취해 시와 소설을 썼다고 보기는 힘들다 생각합니다. 게다가 술이 굉장히 약해 두 잔, 석 잔이면 취했다고 하죠. 실제로 포의 알코올 중독에 알려진 글들은 적대자들에 의해 쓰였으며 개중엔 사건 발생과 글이 쓰인 시기에 차이가 있는, 기억에 의존한 글도 있고요.

에드거는 과학적, 체계적인 원리에 따라 시어를 배치했다고 봐야 한다- `까마귀` 같은 경우는 창작 과정을 담은 에세이 `창작 이론The Philosophy of Composition`이 있습니다. 그의 시학(시를 위한 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드러내는 에세이 `시의 원리(The Poetic Principle)`도 있고요. 버지니아 사후 알코올 중독에 이르러 심각한 방황, 자기파괴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입니다. `울랄룸`, `애너벨 리` 등의 작품의 소재와 쓰인 시기가 버지니아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고, 그렇게 여겨지지요. 그래도 저는 알코올 중독, 그가 취한 상태에서 시를 썼다고 보진 않습니다. 시 구조도 그렇고, 에드거는 시를 고쳐쓰는 걸로도 유명한데 `애너벨 리`였던가(확실하지 않습니다) 죽기 전까지도 개작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시, 소설, 비평에 이르는 그의 활동을 보면 알코올이 문예활동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는 말이 아주 틀렸다고 보진 않고요. 에디터로 일하다 해고된 사례를 말씀하셨지만 음... 시각의 차이니까요. 시인의 사망도 과음 뿐만 아니라 콜레라, 열병, 광견병 등 많은 이론들이 있습니다. 저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믿고 싶은 정보만 취합했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글을 쓰기 전 찾아본 자료 중 기억나는 건 두가지 밖에 없네요. (추가: 이 글은 지난 달에 포의 `율랄리`, `울랄룸` 비교글을 작성할 때 함께 쓴 글이에요. 그 글은 지운 상태고요. 아무튼 저는 `중독`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 소사이어티 오브 볼티모어, `포와 마약, 알코올 `
http://www.eapoe.org/geninfo/poealchl.htm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민음사,2013) 해설 중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은 있었지만 술에 절어 살았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무엇보다도 포가 이십 년가량의 길지 않은 기간에 발표한 수많은 시와 단편과 평론, 그 외에도 무기명으로 잡지에 실렸던 그 많은 글을 술에 취해 써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심하게 일에 몰두하는 일중독이 문제였다. 다만 아내 버지니아가 오랜 투병 끝에 1847년 결핵으로 사망한 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알코올중독 증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때도 버지니아 사후 이 년 뒤인 1849년에는 알코올중독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재기를 꿈꾸며 리치먼드로 돌아가 정착을 시도했다.

AgalmA 2015-09-12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찮을 수도 있었을 부연설명의 노고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포의 전기를 찾아볼 때는 10년 전이었는데, 자료가 많이 없었을 때여서 제가 읽은 책 위주로 언급을 해서 단편적이었던 거 같고, 폭도 너무 좁게 말한 것 같아요.
저도 그의 시학, 소설론 책을 찾아 읽어보기도 했고, 그의 창작의 철저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작을 썼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라는 단정으로 결론을 짓기에 제가 주저하는 것은, 많은 예술가와 창작자들이 술, 약물 등등으로 창작의 효과를 꾀하는 것도 분명 상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는 여전히 유효하죠. 빠져나오지 못한 몰락이 부지기수기도 하고요. 헤밍웨이를 비롯 많은 창작자들이 상당한 애주가지만 알콜중독자라고 불리진 않으니 포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죠. 그것도 고의적으로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엄청난 방탕주의, 성도착증을 대놓고 드러낸 사드 책을 유심히 읽어보면 대단한 철학적 식견으로 중무장하고 있다는 것도 놀랍죠.
약물, 일 각종 중독과 컴플렉스 등의 병적 증상 vs 통제력과 창의력의 관계는 참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예술에 대한 세간의 호기심도 상당수 이 부분이고요.
무엇 때문에 무엇은 맞다/아니다로 단정하는 합리적 추론이 되는 문제는 이 세상에서 극히 일부분이라고 봅니다. 해석의 차이가 과연 줄어들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아요. 그게 많은 게 나쁜 것도 아닌 것이고...참 어려운 문제.
정확히 모든 걸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저는 점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덧붙이게 되네요. 물론 제 생각의 오류와 편견을 제일 견제해야겠죠. 제 첫댓글은 그런 의미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죠. 이 댓글은 좀 나으려나...

무엇보다! 좋은 정보 공유 감사합니다

에이바 2015-09-15 11:52   좋아요 1 | URL
아갈마님 댓글을 읽고 나름대로 생각을 해 봤는데 의견을 좁히긴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지속적인 알코올, 향정신성 약물 등에 의존한 창작의 결과물에 대해 회의적이에요. 무엇에 취한 상태, 비일상적 상태에서 떠오르는 영감도 결국 자신에게 내재한 것이라 보고요. 글의 경우, 취한 상태에서 써내려갔을지라도 개고할 땐 명징한 정신이라 봐서요. 물론 취한 상태에서 멋진 결과물을 끌어내는 예술가들도 있지요. 부정하고 싶진 않고요. 하지만 지속적인 약물 투여-중독-의 결과를 보면 그 재능이 오래가지 않잖아요. 그래서 포의 창작 행위와 그 결과물에 있어 인간 이성의 역할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D.H.로렌스의 말을 빌리자면, 포는 예술가라기 보다는 과학자에 가깝다고 했죠. 세심하게 배열되고 해체된 단어들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고요. 볼티모어 포 소사이어티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포의 알코올중독-추가 수정합니다: 알코올중독 자료를 제시한 후- 무엇을 믿을지는 각자의 생각에 달렸다 했습니다. 저는 그리스월드의 악명 유포가 악질이고(아시다시피 포의 작품도 첨삭했죠) 포와 문단의 사이를 고려할 때, 중독설은 과장되었다 생각합니다. 술이 약하다보니 더 그랬겠지만, (자료의 진실성 여부에도 불구하고) 중독이 아니라 폭음에 가깝다고 느꼈고요. 그렇다고 해도 포의 짧은 생애동안, 취해서 그런 정교한 작업(창작)을 하진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취했다 하더라도 개고할 땐 멀쩡했을거고요.

더불어 역자와 출판사(민음사)의 권위도 제 생각에 한몫 했습니다. 역자 전승희 씨는 비교문학을 전공했고 하버드 한국학연구소 소속으로, 리뷰 쓸 때 확인한 바로는 여름까지 연구기간(term)이었고요. 이 해설이 실린 단편선 출간일은 2013년이니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죠. 아갈마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갈마님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포에 대한 자료가 날조되었다 여겨지니, 그것을 감안하고(부정하지 않고) 그의 객관적인 결과물을 통해 추론한 거였죠. 단정이라 느끼셨다 해서 다시 읽어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만 저도 나름대로 찾아보고 내린 결론이라... 리뷰에서 삭제하기도 그렇고, 본문에 첨가하도록 하겠습니다.

D.H.로렌스의 미국 고전 문학연구 6장, 에드거 앨런 포
http://xroads.virginia.edu/~HYPER/LAWRENCE/dhlch06.htm

AgalmA 2015-09-1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포를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작품에 대한 그 의지와 명철함을 특히) 포를 알코올중독자로 여기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런 호감에서 혹시 사실을 놓치거나 판단착오를 하지 않을까 자기 검열이 좀 더 심하게 끼여들게 되요. 좋아하는 작가일수록 더욱. 타인이 이의를 제기할 시 (내 의견보다) 작가를 변호할 수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지금 에이버님처럼!
에이바님의 결론 삭제하지 마세요. 이런 결론을 내릴 정도로 충분히 객관적이셨다 생각합니다.
괜히 시간과 마음 고생 시킨 거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고맙기도 해요. 그런 지지를 :)
 
콜리마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76
바를람 샬라모프 지음, 이종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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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면서 별점을 매길 때 마다 후하게 주지 말자, 별 다섯은 없는 셈 치자 다짐하나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런 책을 읽을 땐, 첫 장을 넘기면서 한 방 먹은 기분을 느낄 땐 더욱 그렇다. 『콜리마 이야기』의 첫 번째 단편인 「설원을 걸으며」는 아주 오랜만에, ‘압도당하는’ 체험을 선사했다. 단 두 페이지, 24줄의 위력이었다.

 

수용소 문학이라 하면 떠오를 작품이 많겠지만, 내게는 도서관 한 켠에서 만난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3부작」이 처음이었고 이후로도 계속 관심을 둔 편이었다. 다양한 증언과 고발을 통해 알려진 대표적인 강제 노동 수용소(절멸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이다. 그 곳에 가스실이 있었음은 모두가 알지만,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목격자’들은 그 곳에서 사라졌기에, 우리는 수용소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일들을 짐작만 할 뿐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이’들은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야 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이성적 한계를 넘어서는 그 상황을 전해야 한다. (영화는 오히려 생각을 제한한다. 『쇼아』가 그 긴 러닝타임을 오로지 ‘증언’으로만 채웠음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아우슈비츠, 독일이 운영한 강제 수용소와 비교했을 때 소련의 굴라그(강제 노동 수용소)의 비극은 주목도가 덜하다.

 

굴라그를 증언한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 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이다. 김학수 교수님이 번역한 『수용소 군도』의 경우, 범우사에서 열린책들로 판권이 넘어갔지만 전집은 절판이며 오로지 1권만 구입이 가능하다. 예전에 문의한 바로는 재출간 계획이 없다고 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의 작품도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솔제니친과도 교류했던 작가, 바를람 샬라모프의 작품을 읽고는 말 그대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정말 좋다. 생전 두 작가는 서로 교류한 바 있다. 솔제니친의 작품이 사미즈다트(지하출판)으로, 그리고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그 비극을 알릴 수 있었다면 샬라모프의 작품은 자국에서조차 오랜 시간 출간되지 못했다. 『콜리마 이야기』는 작가가 사망한지 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출간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이 작품은 유기적인 짧은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샬라모프 전집 7권 중 1권이다. 작품들의 분량만큼 내용이 간결하며 명확하게 서술되는데, 러시아 문학을 읽을 때 까다로울 수 있는 이름들도 전혀, 독서에 방해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이 곳의 반역, 반체제 인물들은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콜리마는 극동이자 극북에 위치한, 스탈린 체제 하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강제 노동 수용소이다. 수인들은 광산에서 노동한다. 아무리 건강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 곳에서 수개월이면 도호댜가(기진맥진하여 죽어 가는 사람)가 된다. '부실한 옷과 빈약한 배급 식량, 동상' 거기에 '엄청난 정신적 압박이나 절망'이 가세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양하며, 그들의 일상생활은 굉장히 상세하게 그려진다. 담담한 필치로 있는 그대로 묘사되기 때문에 콜리마의 삶(그것을 삶이라 할 수 있다면-시인 네크라소프 인용)은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수용소 생활은 폭력에 취약하다. 권력은 깡패들이 쥐고 있으며, 지도부와 의사도 자유롭지 않다. 카드놀이에 걸 물건을 뺏기 위해 일어나는 살인, 도둑질은 일상으로 보인다. 무덤을 파 고인의 옷을 벗겨 속옷을 취하는 모습, 극도의 굶주림에 인육을 먹거나 얼어붙은 돼지를 훔쳐 그대로 입에 우겨넣는 모습, 광산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환자와 그를 적발하려는 의사(심지어 수인 출신)의 잔인성...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과 도둑질은 북극의 미덕이라 칭할 정도이다.

 

수인들은 생존을 갈망한다. 절망 속에서도 단 몇 시간의 노동하지 않을 자유, 잠깐 동안 몸을 녹일 수 있는 난로 앞에서의 특권, 빵을 하나 더 얻는 것과 같은 일을... 사랑과 우정, 연민으로 울어본 적은 있어도 배고파 울지는 않았다는... 아, 어떻게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쓸 수 있을까. 내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수용소가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언어를 넘어서는 그 비참함은 오로지 수인생활을 했고, 그를 증언하기 위해 살아남은 작가의 글로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샬라모프의 다른 작품들도 이어 출간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큰 아이처럼 행동하고 연극에 열중하는, 화내지 않고 어린애처럼 서로 말다툼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행동을 눈치채고 감동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진짜 깡패 세계의 인간을 만나 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다. 그런 세계에 대해선 그 자신이 어떤 동정의 말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수용소 내에서 강도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수없이 많다. 불행한 사람은 강도에게 마지막 넝마를 빼앗기고 마지막 돈을 빼앗기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고발을 두려워한다. 강도가 수용소 당국보다 막강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강도는 노동자를 구타하고 노동을 강제한다. 수만 명이 강도에게 맞아 죽었다. 수용소에 수감된 수십만 명이 강도의 이데올로기에 정신적으로 타락하여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깡패의 무엇이 수인의 영혼 속에 영원히 자리를 잡았고, 강도와 강도의 모럴은 모든 사람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영원히 남겼다.

  수용소 관리는 난폭하고 잔인하며, 교육 담당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의사는 양심이 없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깡패 세계의 폭력에 비하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수용소 당국은 그래도 인간이다. 그렇다, 그렇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인간적인 면이 보인다. 그러나 깡패는 인간이 아니다.

  깡패의 도덕이 수용소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한하고 전면적이다. 수용소는 완전히 나쁜 인생 학교이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은 누구나 아무것도 거기서 얻지 못한다. 수인 자신도, 그 관리도, 경비도, 우연한 목격자도, 이를테면 기사, 지질학자, 의사도, 수용소의 상관도, 그 부하도.

  수용소 생활의 1분 1초가 독이 되지 않는 시간이 없다.

  거기엔 인간이 알아서는 안 보아서는 안 될 일이 너무 많다. 만약 보았다면 죽는 편이 낫다.

  수인은 거기서 노동에 대한 혐오를 배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채울 수 없다.

  수인은 거기서 아첨과 거짓말, 크고 작은 비열한 행위를 배우면서 이기주의자가 된다.

  자유의 몸으로 돌아갈 때 수인은 수용소 시절 동안 자신이 성숙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관심이 편협하고 부족하고 난폭해진 것을 안다.

  도덕의 벽이 어디론가 옆으로 밀려났다.

  비열한 짓을 하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거짓말하고도 살 수 있다.

  약속은 할 수 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친구의 돈을 술값으로 써 버릴 수 있다.

  구걸하며 살 수 있다! 걸식하며 살 수 있다!

  사람은 비열한 짓을 하고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수인은 태만, 거짓,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증오하는 데 익숙해진다. 자기 운명을 슬퍼하며 온 세상을 비난한다.

  사람에게 저마다의 슬픔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고통을 과대평가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동정을 잊어버린다. 그냥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회의. 그것은 아직 괜찮다. 그것은 수용소의 유산 중 아직 나은 편에 속한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배운다.

  그는 두려워한다. 겁쟁이가 된다. 자신의 운명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밀고를 두려워하고,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도덕적으로 분쇄되었다. 도덕관이 변했는데, 그 자신은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

 

『콜리마 이야기』, 「적십자」, 252-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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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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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의 진 루이즈는 뉴욕에서 메이콤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되어 잠시 다니러 온 것이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독립심이 강하며, 전형적인 남부 여성으로 그려지는 알렉산드라 고모와 대척점에 서 있다. 바지와 코르셋은 두 사람의 거리감을 보여주는 단어다. 진 루이즈는 고모가 질색하는 백인 하층민 출신(화이트 트래쉬)의 변호사 행크와 데이트하면서 그와 결혼한 모습을 그려보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고향에 돌아와 추억을 더듬던 것도 잠시, 그녀는 아버지와 행크가 참여하는 메이콤 주민 협의회가 실은 인종차별 집회임을 목격한다. 동류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배신에 진 루이즈는 고통스러워하고, 아버지를 우상화하던 자신-어린 스카웃-을 졸업함으로써 성장하는 모습이 주된 줄거리이다.


진 루이즈는 메이콤을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그리워한다. 뉴욕에서도 ‘메이콤 트리뷴’을 읽으며 고향에 대한 소식을 찾는다.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한 애정은 핀치스 랜딩을 팔았다는 말에 반응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그녀에게 메이콤은 동화 같은,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소중한 세계이다. 그래서 진 루이즈는 ‘귀향’한 날, 아빠의 질문-연방대법원의 판결과 NAACP(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상상조차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잭 핀치의 말대로 진 루이즈는 ‘인종적으로 사고’한 적이 없으며, 그녀에게는 ‘사람’만 있을 뿐이니... 1950년대 미국은 인권운동이 일던 시대였다. 애티커스의 질문 속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여 교육시키는 것이 불법이라 선고한 것이다. 진 루이즈가 얘기하는 ‘버스 스트라이크’는 버스에서도 행해진 인종분리,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강요받은 로자 팍스의 거절에서 비롯한 운동들을 가리킨다.

 

『파수꾼』의 절정은 애티커스와 진 루이즈의 설전이다. 이 대화를 통해 진 루이즈는 어린 시절, ‘스카웃’을 졸업하게 되는데 이보다 핵심을 찌르는 것은 잭 삼촌과의 대화이다. 아빠와 행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조카의 말에, 잭은 ‘남부 전역에서 거의 사라진 철학’ 얘기를 꺼낸다. 인척으로 구성된 보수적인 지역 사회, 농경을 중심으로 한 중세 장원과 같은 사회. 이들을 내전에 참여하도록, ‘동족 의식’을 부여한 것은 ‘남부의 정치적 독자성’을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실제 노예를 본 사람은 5퍼센트에 불과했으므로 결코 ‘노예’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목적은 남부 연합의 국가 승인, 연방 탈퇴였고 노예제는 구실이었을 뿐이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시간이 흘러 재건되었어도 남부의 ‘자치’에 대한 유산은 여전했다. 진 루이즈의 헌법 제 10조에 대한 생각, ‘연방이 주의 자치권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역시 남부 사람다운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재건된 남부는 연방(북부)의 간섭이 탐탁지 않다. ‘남부의 전통과 가치를 수호’하고, ‘남부의 일은 남부가 알아서 한다’는 생각은 당시 인권 운동의 선봉에 섰던 NAACP와 맞물린다. 새로운 문명에 준비되지 않은 남부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연방정부가 거대정부가 되어 자치권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공포가 불러온 결과는 애티커스가 ‘방어’라고 표현한 지역 공동체(클랜)들의 성립이었다. 남부와 북부의 발전 정도와 가치관의 괴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이다. 영화화된 소설 『헬프』와 진 루이즈가 커피 모임 전 고모와 나눈 대화를 교차해보자. 알렉산드라는 메이콤 가정부들이 몇 해 동안 NAACP 회원이었다며, 고용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1960년대 미시시피 주를 배경으로 하는 『헬프』에서 흑인 가정부들은 고용주의 가정을 돌보지만 사소한 일로도 해고당하며, 주인과 같은 화장실을 쓰지도 못한다. 이런 배경, 그보다 앞선 시기의 메이콤에서 백인과 흑인이 같은 교실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연방’의 법령이 어떻게 받아들여졌겠는가?

 

진 루이즈는 이러한 논리를 가진 애티커스를 거세게 비난하며, 이 모습은 자신의 가치를 고집하는 알렉산드라 고모와 겹쳐진다. 잭의 말대로 고집불통다운 모습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들의 본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색맹’이라 자책하지만, 그 범주에 스스로를 넣지 않았다. 진 루이즈는 메이콤 유지인 핀치 집안에서 태어났고, 변호사이자 주 의회 의원을 역임한 애티커스의 딸이다. 그녀의 행동들은 행크의 말대로 ‘스카웃’이기 때문에, 핀치 집안의 아이이기 때문에 용인된다. 캘퍼니아 집에 들어서는 진 루이즈에게 경의를 표하는 흑인들을 떠올려보자. 그들 중 한 명은 직업학교 교장이자 교수요, 다른 한 명은 목사였다. 아버지 뻘인 지보는 그녀를 ‘미스 스카웃’이라 부르며 쩔쩔맨다. 엉망인 문법을 구사하며, 자신을 ‘백인’으로 대하는 캘퍼니아 앞에서 절망하는 진 루이즈. 그 집 지붕 아래 있는 흑인들과 캘퍼니아는 무엇이 다른가. 진 루이즈는 자신이 사회에서 ‘핀치’ 집안의 ‘백인 여성’으로서 누리는 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류라 생각했기에, 하층민 출신의 백인과는 결혼을 생각해보지만 흑인과의 결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 루이즈 역시 보수적임을 보여준다. 흑인들이 능력을 발휘할 교육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간과하고, 그들을 이류 시민으로 분류하는 아버지에 반대하는 그녀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생각의 물꼬를 틔워주며 대화를 주도하는 잭도 마찬가지다. 또 진 루이즈가 스스로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기보다 잭의 조언을 받아들여 고향에 남을 것을 시사하는 대목도 좀 안타까웠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진 루이즈가 그 시대 여성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롭게 사고하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독립한 주체적인 존재로서 성장하는 주인공이,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주장만큼이나 진보적이라 느껴졌다. ‘파수꾼은 개인의 양심이지 집단의 양심이 아니다’라는 잭의 말은, 자신의 양심과 아버지의 양심을 동일시했던 ‘스카웃’과의 대화 속에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집단의 양심’이 필요하다. 소설 속에서도 NAACP의 존재가 두려움을 불러오지 않는가. 진 루이즈는 남부 사회에서 자라났지만 그 가치관을 이어받지 않은 별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별종, 기득권층에 있으면서 소외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는 별종들이 함께, ‘집단적 양심’을 형성하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백인들이 참여하면서 인권 운동이 더 활발해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에서 그려진 애티커스의 변화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오히려 『앵무새 죽이기』에서 느꼈던 그의 수동성(톰의 변호는 판사의 지명, 흑인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대한 의문이 『파수꾼』을 통해 풀렸다. 또 애티커스가 NAACP의 활동을 포퓰리즘이라 하고, 잭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프레임 논리를 지적하는 두 형제의 시각 차이도 흥미로웠다. 『파수꾼』이 『앵무새 죽이기』의 초고였다는 사실은 다듬어지지 않은 적나라함에서 알 수 있었고 (주석의 도움 없이) 책장을 넘기기 쉽지 않았다는 점은 개고를 권한 편집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품보다 쉽고 명확한 교훈을 드러내는 『앵무새 죽이기』와 언제나 비교되겠지만, 거기서 얻는 즐거움도 지극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청사에는 남부연합 국기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인종차별문제와 폭력사건들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다른 대륙에서는 정체성 문제로 심화되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도 여전한 갈등... 다시 한 번, 문학의 울림이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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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9-02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 리뷰는 진짜 짱이에요!

그렇지만 전 파수꾼을 읽기 위해서는 앵무새 죽이기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오래되어서..

에이바 2015-09-03 10:2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고맙습니다. >_<

오류를 고쳤어요. 『헬프』와 교차한 부분은 헤스터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고모와의 대화였어요! 『파수꾼』을 먼저 읽으셔도 상관없는데 앞부분은 많이 지루했어요. 스카웃(진 루이즈) 폭발하는 장면쯤 되면 흥미로워져요. 역시 싸움구경이 최고(?) 이례적으로『파수꾼』은 두번 읽고 리뷰를 썼어요.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cyrus 2015-09-02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수꾼>과 <헬프>의 한 장면을 비교하는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조만간 <앵무새 죽이기>를 읽어보려고 하는데, 이것과 같이 읽을 수 있고, 비교할만한 흑인 문학 작품을 알아보고 있어요.

에이바 2015-09-03 10:25   좋아요 0 | URL
cyrus님 댓글 달아주신 후 오류를 고쳤어요. 『헬프』와 교차한 부분은 헤스터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고모와의 대화였어요. 『헬프』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작품이고, 알렉산드라 발언 부분에서 떠올라서 언급하게 되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