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관계의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바람직한 메세지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여자아이들은 이를 "나약한 여성에게는 지지자 혹은 보호자로서의 남성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잘못 받아들이도록 학습되고 있다. 그 결과 여성의 성은 남성의 보호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교환수단으로 이해되고, 이는 또한 많은 여성들을 '안전한'피해자로 만드는 원인이 된다.

(p. 67)


어떤 면에서 성폭력 가해자와 비가해 남성의 차이는, 소년들이 흔히 남자다움이라고 배우는(그러나 최악의 의미를 지닌) '마초성'을 얼마나 신봉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연구자들은 이 요소를 '극단적 남성성'으로 여기고, 또 어떤 연구자들은 이러한 행동양식을 취하는 남성을 가리켜 '남성성 광신도'라 명명한다.

(p. 98)


남성들의 이와 같은 언어 속에서 성은 단지 개인적 만족감을 얻는 도구가 되며, 성적 파트너와의 상호작용은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는 지양해야 하는 것으로(남성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니크는 "남성들이 성관계를 가치 있는 재화의 획득으로 이해한 상태에서 여성과 데이트를 하면, 여성의 동의는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p. 101)


도나의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엘리가 자고 가라고 했을 때 그녀가 한 대답 -"할 일이 많아서 집에 가야 한다"- 이다. 도나는 이미 엘리의 성관계 요구를 여러 번 거부한 상태였고, 따라서 좀 더 명확하게 "나를 건드리지 말라"거나 "집에 가겠다"고 주장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또한 도나는 소리를 질러 다른 이들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상대 남자를 물거나 잠긴 문을 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방법을 시도한다고 해서 도나와 같은 상황에 빠진 여성이 쉽게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도나가 그런 방법들을 아예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가르쳐온 남녀 간 소통과 상호작용의 방식은 도나를 그처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p. 157)


남성이 상대 여성의 언행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해도, 만약 그가 성적인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이 공격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데 반해 여성은 그걸 진심으로 원하지 않거나, 혹은 좋은 평판을 위해 거절하려고 들 경우에는 일종의 남녀 간의 경쟁과 대립이 시작된다. 이 때부터 데이트는 한 쪽이 이기려 드는 게임이 되고, 그 결과는 강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p. 158)


이는 우리 사회의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도록 배우고 있는가, 라는 주제와 긴밀히 연관된다. 그들은 여성들이 단지 문란해 보이지 않기 위해 성관계를 거부한다고(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 배운다. 또한 속으로 원하면서도 겉으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바로 여성들이라고 배운다. 이뿐만이 아니다. 많은 남성들은 여성이 진짜 원하는 것은 남자가 자신을 휘어잡고 통제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상대 여성이 남자의 성적인 제안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든, 아니면 밀치고 발로 차고 울며 저항하든 상관없이 밀어붙이면 된다고 배운다. 성적인 관계에서 "안 돼"라는 여성의 말이 남성에게 종종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이다.

(p. 162)


또한 어떤 사람들은 아는 이에 의한 성폭력을 남자들의 치기로 여기며 문제를 축소하려 한다. 그들에 따르면 성폭력이란 "흥분한 남성에게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강간 본능이 적극적으로 표출"된 것에 불과하다.

(p. 169)


어떤 친구들, 특히 여자 친구들은 스스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피해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기도 한다. 이는 많은 여성들이 피해 경험자의 메시지 -'멀쩡한' 남자, 즉 자신들이 알고 좋아할 가능성이 높은 그런 남자가 성적으로 폭력적이라고 알려주는- 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들 또한 자신이 잠재적인 위험에 처해 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p. 190)


아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강간 사건에서 대부분의 가해자는 흉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피해자를 때리지 않을 수도 있다. 피해 여성 또한 대개 자신을 공격하는 남자에게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며,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이는 공포심 때문이다.) 그리고 심각한 상흔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피해 여성의 질 안이나 몸 어딘가에서 가해자의 정액이 채취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둘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음을 나타낼 뿐 그 관계가 강제성을 지녔는가 여부는 설명 해주지 않는다. 더욱이 강간 사건에는 증인이 있는 경우가 흔치 않다. 또 피해자들은 사건을 신고하지 않거나 신고하더라도 한참 후에 하는 예가 많은데(그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강간 당했음을 인지하기까지 오래 걸린다), 바로 이 때문에 '강간당했다는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p. 219)


"모든 여성이 강간에 취약할 뿐 아니라 아는 사람에 의해 빈번히 강간 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만약 나쁜 여자들만 강간을 당하고 제정신이 아닌 낯선 남자들만 강간을 저지른다고 믿는다면, 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겠죠."

(p. 224)


스스로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저 자신이 아는 사람에 대한 강간범이라는 거였습니다. 물론 저는 누군가를 넘어뜨리지도 않았고, '네가 이걸 하지 않으면 팔을 비틀어버릴 거야'. 라는 식의 말을 하지도 않았죠. 하지만 저는 기억합니다. 저 역시 우리(남자들)가 흔히 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완전히 꼼짝 못하게 했다는 것을요. 우리가 하는 방식이란 당신(상대 여성) 위에 누워서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것은 한 번도 상대 여성과 합의를 보려 한 적이 없다는 거에요. 그 대신 거짓말을 하거나 온갖 시나리오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고는 정작 성관계 후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거나 오히려 그 날의 일에 대해 상대방이 불편하고 불안하게 느끼게 만들었죠.

(p.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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