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좋아서 이겠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반드시 문학 때문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자 핵심은 문장으로 의미에 나타난 시인의 깊은 사유의 시선과 생각의 통찰력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살아 있음일 것이고 존재의 근거이자 바탕이라고 철학자들이 2천년 전부터 주장했으며 여전히 오늘날에도 가장 유효한 까닭이거든요.
사진도 마찬가지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피사체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피상의 모습에서 의미의 이미지 문장으로 전염시키는 확장성에 대해 철학자들의 주장과 엇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진은 시와 상당한 궁합이 딱딱 맞아떨어집니다. 응용하다 보면 사진을 찍을 때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면 사진은 기술이지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사진의 기능이 예능화가 되면 사진따위 안해도 되거든요. "보이는 것과 보려 드는 것의 차이". 이 차이에서 시의 역할은 사진의 매개체가 되어 주더군요.
사진 좋아하는 놈이 뭐 하러 시를 읽는 이유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진을 보시면, 아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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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1002/pimg_7680301471497837.jpg)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앞도 못보는 넝쿨이 중력을
거슬러서 옮아간다.
거스른다는 것은 힘을 들여야 하는,
순응에 대척된 저항이다.
우리들의 삶도 시키는 대로만
할 수도 없도, 그렇다고 늘상 저항으로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가 존재의 시간에 생존으로
순치될 때 저항은 사라지고
고분한 복종이 남는 똥개가 되지.
똥개는 "식욕의 넘침과 무감각한 굴욕"뿐이라고 하던,
시인의 시선으로
넝쿨이 올라가는 것을 보게 한다.
보지도 않고 촉수의 감각만으로 휘감아
클라이밍 하는 본능적인 기술 앞에서
너희들이 천국에 도달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매번 추락만 거듭하고 있는데,,,
참고 : 이현승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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