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pharnaum
가버나움은 이스라엘 갈릴리 바닷가의 한마을 이름이다. 성경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가 활동한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하고, 이곳에서 예수는 많은 환자들을 고치는 의사같은 기적을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아 결국은 예수의 예언대로 가버나움은 버려지고 마을이 폐허로 변한다. 배은망덕한 곳이기도 하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호혜를 베풀고 병자를 치유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이 땅에 태어난 임무이자 사명이었다고 성경에서 내내 나온다. 즉 하나님의 뜻은 방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부모에게 방임이 되는 순간이면 생명에 큰 위협을 받는다. 인간의 아이는 케어 받지 못하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는, 죽기 십상으로 허약하다. 일반적으로 여타 포유동물에서 보듯, 태어나면 오래지 않아 바로 달릴 수가 있는 생존 본능이 인간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이에 반해 인간과 같은 영장류는 근 1년이란 기간 동안 자궁에서 머물러야 되고 태어나자 일어서지도 못하고 달리지도 못한다. 그대로 방치되면 안 되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 그런데 왜 인간의 본능으로 자손을 일정 기간 동안 오래 돌보아야 하는 진화론적인 방향으로 설정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부모로부터 지능적인 삶의 방법으로 보육을 받음으로써 언어적 능력, 신체적 능력, 또는 지능적인 능력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장기적으로 여타 동물들과 달리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점하는 고도화를 이루고, 이것이 생존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작용이 된다고 판단되었기에 동물들과 다른 훈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일정 기간 동안 케어해야 하고 방임되지 않는 것이 거의 본능처럼 굳어진 결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이 태어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원죄에 대해, 그리고 삶의 병환적 상태에 대해 예수라는 목자가 양을 보호하고 돌보듯이 인간도 부모로부터 보살핌이 필요함을 싱징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보지 않았다. 아니 시청하지 않을 작정이다. 상당히 불편할 것이 너무나도 뻔하다. 간략한 스토리만 읽어도 혹은 영화 포스터의 문구에서 나오는 방임한 부모의 과오를 탓하는 결과로써 고소하겠다는 것이 은유하는 바가 너무나도 자명하다는 결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무지한 부모의 본능적인 행위로 만들어진 생존의 고달픔. 그리고 이어지는 불행들. 흡사 부모라는 존재는 불행의 제조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행복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 않는 상황을 전개시켜야 하는 것 또한 그 책임일 것이다. 인간의 생명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유전자의 정보가 수천 수만 년에 걸쳐 기록된 명령서와도 같다. 그러나 이런 명령서에 나온 불복종은 방임이란 죄악을 만들고 불행이란 결과의 눈물을 만든다. 인간이 존재 자체를 혐오하게 만들고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게 만든다. 차라리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아예 없었더라면 과연 그런 불행이 존재할 수는 없었던 당위론이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로 방임으로 치를 떨어도 다른 곳에서는 반대로, 자식을 통해 자신의 이루지 못한 욕망을 자식을 통해서 이루고자 욕망의 감옥에 가두려고도 한다. 과잉의 보살핌은 간섭으로 나타나고 과도한 사교육으로 하루하루가 싫은 고통의 불행을 만드는 것 또한 현실이기도 하다. 부모로서 현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하다못해 무슨 대회라도 나가려고 하면 훈련하고 연습이라도 하고 준비라도 되어야 할 텐데, 이 세상의 부모는 연습과 훈련을 해본 적이 없는, 무경험의 첫 경험으로 자식을 가지고 키운다. 훈련도 없는 미숙함으로 때로는, 결핍을 만들고 때로는 과잉을 양산하는 꼴이다. 고통스러움을 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가버나움이란 영화에서 던저 주는 메시지는 인간의 존재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다. 왜 태어나게 하며 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끝없이 임신하여 만들고 죽어가야 하는 것인지. 그 과정에서 만나는 수 없는 눈물과 고통과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인간은 어떻게 해석하며 받아들이고 배척하며, 왜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흡사 "붓다"가 인간의 고통, 윤회에 고민을 하고 깨달은 것처럼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에는 종족 번식의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 이 욕구가 커지면 욕망으로 확대되고 이것은 지구 스스로가 가진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하다못해 화성이나 금성 같은 별에는 풀 한 포기 조차 자라지 못하고 황량한 황무지로 빛과 그림자와 무기물의 덩어리만 존재한다. 과연 그 무기질 덩어리에 행복과 불행을 가늠할 이유는 없다. 감각이 없고 감각을 느낄 주체가 없는 그 황무지에서 그야말로 있으되 없고 없으되 있는 불교적인 교리를 특별히 떠올릴 것도 없이 마냥 평화로워 보일 뿐이다. 전쟁 같은 다툼으로 죽고 죽이는 고통도 없고 불행한 고통도, 고통을 느낄 감각도 감지할 주체도 없으니 그야말로 무성이다. 공기도 희박하니 흙바람에 먼지나 일었다 잠들기 마련이다. 생물이 살지 않는 곳의 역설적인 아름다움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해필, 해필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저런 별들에 비해서, 왜 전혀 다른 종류의 현상의 작용이란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책임과 방임과 과잉의 불행에 대해 차고도 넘치는, 전 머리 굴리는 변명 거리만 늘어 내기 바쁘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역설법이다. 인생은 다 추악과 같다. 이거 잘못 알아 들으니 정말 아름다운 줄 착각으로 안다. 화성에서 활동하던 로봇, 오퍼튜니티가 보여준 황무지의 현실이 차라리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 그곳엔 고통도 슬픔도, 그 어떤 욕망의 추악함도, 어떤 욕구조차도 없는 보기엔 무기물의 덩어리에서 완전에 가까운 무욕의 세계가 차라리 더 아름다워 보기는 것은 나만의 오류이었던가 싶은 정도이다. 맹목의 완전한 평화로움. 내가 본 화성의 오퍼튜니티가 보인 사진의 감상평이었다. 이에 반해 지구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결국은 욕망이었던 세포들의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어쩌랴. 지금의 현실이 화성 같지 않은 이상, 앞으로의 지구에서 인류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한 전진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할 것인지는 결국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의 당면한 과제이다. 욕망의 거부이든 욕구의 복종이든 앞으로 인간은 여기서 살아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가지 않을듯 하다는 점이다.
오늘도 지구촌의 뉴스에서 해양 동물의 뱃속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나왔다는 연구 보고가 있었다. 미세먼지로 숨 막혀 하는 대기와, 미세 플라스틱으로 굳어가는 바다를 보고도 인간은 무심한 존재론의 무심한 욕망으로 계속 나갈 것이다. 언젠가 부처가 깨달을 아무 욕망이 없는 완전의 해탈 세상은 미륵이 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떠도는 지구의 종국적인 운명일 것이다. 45억의 지구의 존재 가치가 앞으로 45억 이후의 잔존 가치의 제로가 되기까지. 물론 세월은 지금의 백 년도 못하는 인간이 보기에 언젠가는 도래할 운명일 것이고, 그간 얼마나 많이 난리 법석을 일었다 잠들 것인지 상상하기가 너무 싫으다. 아마 우리 태양계에 속한 은하가 안드로메다의 은하와 뒤섞인다고 하니까.... 혹시 또 모르지. 우주 은하 철도를 만들어 타고 가는 철이와 메탈이 될지도, 그래서 또 영원한 생명이란 욕망을 가지게 될는지도. 그러나 궁극의 욕망은 아무 것도 없는 완전한 무(無)가 아닐까.
컨트롤 되지 않는 욕망은 모든 불행의 근원인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