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09호 2014. 5. 5.






아침도 점심도 없이 두시 넘어서 도착했다여느 때보다 붐비는 터미널그 넓은 공간의 가장 구석에 있는 '편의'점에 가 삼각 김밥을 골랐다전자레인지에 이십 삼초를 돌린 후 통로에 서서 먹는 몇 명을 피해 나오다가 나는 무엇에 가로막혀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뒤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사람이 없는 영정사진검은색 테두리만 있는 빈 곳이 매대에 서너 권 꽂혀 있었다편의점에는 서 있을 공간이 없어 휘청거리며 곧 밖으로 밀려나오게 되었다나는 사람이 많은 대합실의 한쪽 아무 곳 구두를 벗고 걸터앉아 삼각 김밥을 먹었다세입인가 네입인가맛은 생각나지 않고 어느새 삼각형 모양의 비닐봉지만 남아있었다비닐 안쪽에 빨간 양념이 김가루가 표정 없이 묻어있다오늘 첫 끼였고 마지막 끼였다물을 사오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 먹고 나서야 했다비닐은 투명하고 가벼웠다바람이 없는 곳에서 파르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앞뒤로 물집 잡힌 발을 다시 구두에 집어넣었다트렁크를 끌고 고향으로 혹은 여행지로 떠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불이 환한 편의점누가 죽었는지 모르는 얼굴 없는 영정사진이 매대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세어지지 않는 사람들셀 수 없는 사람들셀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것은 세월호의 안과 밖에 있는 이 모두에게 해당된다박근혜와 정부는 똑똑히 확인시켜주었다이제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입을 열거나 닫을 것이다. ''를 보여준다압도하는 숫자를저 빈 영정에는 누구의 얼굴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 그 얼굴들이 영정 밖으로 나와 노란 깃발로 거리를 걷는다. 지옥은 눈을 감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얼굴과 산 얼굴이 뒤섞여 거리를 뒤덮을 것이다.




20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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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움직임, 어떤 움직임-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이곳의 불은 어둡다. 천장 중심에 있는 등 아래서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빛을 다 가려버린다. 나만한 그림자가 타자를 가리고 모니터에 올라와 눈에 닿는 빛이 부족하다. 나를 치우지 않으면 여기는 계속 어두울 것이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있는 곳을 바꿔야 하겠지. 천장을 바라보며 책상에 앉아야 앉아야 할 것 같다. 위치를 바꾸는 것이 어려운 이유 하나. 중력을 거스르는 일은 떠올리기도 전에 거부된다는 점. 움직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책 하나를 들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이제서야 조금씩 움직여본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베른하르트가 병실에서 만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과의 이야기를 독백으로 거칠게 그린 책이다. 장이라고 나눌 것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질게 이어진다. 내용이 크게 바뀌지 않으면서, 그러나 꽤 다양한 곳을 도달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우정이라는 말이 어렵다. 증오, 혹은 증오 같은 감정이 담겨 있는 말이어야 한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잘 살피면 나에게서 기인하는 경우가 왕왕하다는 점을 알아두자.


나는 그가 느닷없이 병실로 뛰어들어 와 나를 무작정 힘껏 껴안고 내 가슴에서 울음을 터트릴까 봐 정말로 두려웠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쉽아홉 혹은 예순 살이나 나이를 먹은 그가 나에게 매달려 엉엉 우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49


이런 구절들이 곳곳에 쓰러져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과의 소통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의 병세, 그의 연약함을 모두 받아줄 생각은 없다. 자신이 침식되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라면 모든 것을 받아주어야 하는 것이 미덕 같겠지만 생존 본능을 뛰어넘는 미덕 따위는 없다. 파울을 가여워하며, 파울을 만난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위험을 견디는 것은 이와 별개의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목숨이 하나이고, 또 그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은 무척이나 병들기 쉬운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둘이 같은 병을 앓았다면 서로는 알은 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라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같은 흔적을 몸에 새기고 있는 사람에게 '타인'이라는 인식을 받기 어렵고 그러면서 나와 같음을 연민하는 것은 싫기 때문이다. '다행히' 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다른 병을 앓기에 병자이면서 건강한 자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파울은 정신이 아프고, 나는 폐가 아프고. 다시 말하자면 나는 정신이 건강하고 파울은 폐가 건강한 셈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몇 시간이고 말 한마디 나누는 법 없이, 모차르트를 들었고, 베토벤을 들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사랑했다. 51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우정이 아니라면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공백의 시간, 침묵의 시간을 기쁜 마음으로 채우는 일은 쉽지 않고, 혼자서 혼자인 상태를 만족하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그들은 침묵으로 시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힘도 나올 수 없는 육체를 벗어나 음악으로 간신히 지탱 된 정신의 아치에서 기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는 모르는 표정 하나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네다섯 발자국을 걷는다. 그다음에는 열이나 열한 발자국, 그러고 나서 열세 발자국이나 열네 발자국을 떼어야 한다. 환자란 그렇게 움직여야 하지' 16 이 말은 환자의 움직임에만 맞는 것은 아니다. 내딛을 바닥을 신뢰할 수 없는 곳에서 몇 발자국을 시험 삼아 뻗는 것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버려진 발자국들과 제법 길게 가져왔던 발자국을 떠올리자. 움직이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이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 신문을 구하려고 몇 개의 도시 몇 백킬로미터를 차로 달렸던 장면은 분개, 어처구니 없음, 조소같은 것이 아니라 쓸쓸하다. 그 많은 도시를, 신문 하나를 위해 돌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했다. 무엇이 바보 같은 것인가? 그 신문을 쉽게 구할 수 없는 빌어먹을 자연에 있는 삶이, 아니면 내가 서 있는 땅에게 욕을 해댔던 광기 어린 모습이? 이들의 저편에는 이런 삿대질과 증오에 비켜서 사람들이 있다. 갈 수 없는 곳에 가려는 움직임을 평생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웃는다

 

숨을 편히 내쉴 수 없는 문장들, 그런 곳을 만들지 않았던 베른하르트와 파울의 이야기는 그 웃음에 대한 증오는 아니었을까. 나는 빛에 조금씩 둔감해져서 여기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모니터에 가려진 나만한 그림자를 나를 치우지 않아도 더듬거리며 올라오는 글자를 그럴만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전복은 아니다. 버려질 발자국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렇다고 걸을 필요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정신병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했듯이, 나는 폐병을 내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한 것처럼. 33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도 결국 움직임이었고 있어야 할 모습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기 어려웠던, 그리고 결코 이해를 요구하지 않았던 그들의 '살아있음'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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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numsa님의 "[판미동]「죽음의 식탁」서평단 모집"

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먹는 것으로 살고 먹는 것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밥이 가장 큰 독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독에 가까운 음식을 먹을 것으로 권장하는 사회는 어떤 치유하기 어려운 독에 물든 것일까요. 이 노골적인 제목과 표지가 말하는 엄중한 경고를 들여다 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말하고 싶은 것이겠고, 이런 경고가 아니라면 귓등을 스칠 수 없었던 이유였겠지요. 입에 들어가는 것의 문제가 사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또한 연계해서 알고 싶어요. 위태로운 것은 우리의 목숨뿐만이 아니라는 포괄적인 말, 들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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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패러디다 -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 우리시대 고전읽기 질문 총서 5
조현준 지음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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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 수 있는 삶의 가능성*

 

 

 

젠더는 한 개인에게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한 개인의 인간됨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젠더는 내가 철저히 의존하고 있는 사회와 협상하려는 나의 노력이다. 214

 



이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읽기 위한 책이다젠더 트러블을 개설하는 1장과 주디스 버틀러가 각 연구자들의 논의를 비판한 5장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버틀러의 기본적인 입장은 개략적이지만 성실하게 소개했다. 이것은 조금 길지만 다음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옮길 필요가 있다. 그의 입장은 '결정적인 토대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 남녀의 성차통일되고 안정된 범주로서의 여성근친애의 금기에 전제된 이성애 중심주의는 사실상 지배 이데올로기가 반복된 규제적 이상의 각인 행위를 통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산해낸 사법 권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동성애적 욕망은 억압되기에 앞서 애초에 배제되어 욕망으로서 인정도 인식도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버틀러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 '동성애적 욕망'을 밝히는 과정인데, 여기서 그는 '원본'이 없고 재현만 있는 관계를 발견한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관계는 복사본 대 원본의 관계가 아니라 복사본 대 복사본의 관계라는 설명이다. '원본조차 자연스럽거나 본래적이라는 관념의 패러디'에 불과 하다는 주장은사회에 의존적이다 못해 '우리 속에 허물어지는 나'32를 발견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 중요한 까닭은 '규범'의 허구를 밝히고 원본조차 원본이라고 여기는 것의 패러디일 뿐이라는 논의를 수면 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보통이라고 여겨지는 이성애적 ''과 그것과 '다른 움직임'이라는 까닭으로 인간으로 간주될 가능성에서 배제되는 '소수자들의 삶'을 조명하기 때문이다정언으로 받들여지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다움'속에서 ''라는 젠더와 어떤 섹스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도 전에 규정 지어지는 삶을 받들고 있다이것을 깨닫는 일이 위험하지 않는 사회는 어디에 있을까. 버틀러는 혼란을 가속해 해체에 닿자는 주장으로도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규범을 탈출해 비로소 ''라는 젠더와 섹스를 구성해 나가며 성립할 수 있는 해방으로서의 '가능성'에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소수자라고 부르는(불리는) '장애인과 크로스젠더퀴어와 성적 소수자들'은 '그냥존재 할 수 없다단단한 '규범'과 싸워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이것과 아무 유사한 문장을 발견했다. 다음 문장과 비교해 보길 바란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노동 규범을 지킬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생존 가능성을 제시하며 그런 방식으로 노동계급을 의존하게 만들어 이익을 창출한다허나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215 


위의 문장은 시대를 바꿔나가려고 하는 이들의 등은 얼마나 연약하면서 강한것이며, 연대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묻는다. 게이이면서 레즈비언인 주디스 버틀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또는 여성이라면, 게다가 이성애자라면, 사회에 자신의 젠더를 타협하고 맞춰나가면서 탈락되었던 나 '다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고, 만연한 섹스와 젠더의 구별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고 알아나갈 수 있었던 이들이 가졌던 그들 '다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더 가혹한가. 그리고 가혹한 곳을 더욱 가혹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없는 우리'를 생각해본다. 생각과 유불리의 '홈을 평평하게 만들기'. 이것은 결국 생존할 수있는 영토를 넓히는 일과 귀결된다. '내가 있는 우리'가 되는 일의 가능성은 함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제목은 '후기 버틀러가 주장하는 공존하는 삶, 살기 좋은 삶, 살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이다.'216 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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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할 힘이 없는 것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말을 할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인지 생각한다.


아마도 말을 할 '준비'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내 최초 운문 번역 셰익스피어 희곡전집.

 











뛰어난 동물문학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서경식의 발문이 반갑다.












'기억'에 관한 열세 개의 단편.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한데 모였다. 쟁쟁한 이들.

특히 정용준의 글이 기대된다.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라는 한 인간에 대한, 한 편의 산문.' 이라는 책소개. 한 눈에 들어왔다.


 











토머스 핀천의 유일한 소설집. 국내 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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