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민구



가로등 불빛이

작은방 창으로 들어온다

밥상을 타넘고

안방으로 걸어와서 어머니 가슴에

발을 올려놓는다

괘씸하지만

꽁꽁 언 발을 끄집어낼 수도 없어

그대로 둔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도

잠을 깨시는 어머니

늘 걷어차던 이불을 웬일로

한 번 안 차고 주무신다


네가 붙잡았나 싶어서

불빛이 시작한 자리를 가만히

오래오래 본다


저리 보면

달이 뭐 별건가





민구, 『배가 산으로 간다』, 문학동네. 2014.11.



198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 간단한 시인의 소개에 '태어났다'라는 말을 좋아서 자꾸 읽는다. 태어났군요. 1983년에 태어나셨군요. 그러니까 인천에서요 태어났군요. 음. 지금 어디 있다는 거지요. 이걸 읽는 나 역시 '있음'을 함께 생각한다. 혼잣말을 잇는다.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다. 가로등, 어머니. 낡고 낡은 이야기를 하려나 읽어가면. 달이 맹렬하게 이를 드러내고 오줌발을 갈기던 시「움직이는 달」이 떠오른다. 시집 앞쪽에서 읽었던 패기와 확연히 대비되는 관조다. 한 시집에 들어 있다. 단정은 이르이, '저리 보면/ 달이 뭐 별건가'라는 말을 마지막에 놓는 시인의 손을 생각한다. '시가 뭐 별건가' 가볍게 놓을 줄 아는 얼굴이다. 다음 시집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기대가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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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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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창비, 2014.


'술과 햇볕에 목덜미가 벌겋게 익은 쉰일곱의 육체노동자경구는 자신에게 없는 여자를 생각한다개 같은 년 매정한 년 육시랄 년그리고 불쌍한 년까지그녀들의 이름을 잊은 걸까. 아니다. 그가 부르고자 하는 마음이 소화 되지 못하고 년놈으로 '육화'되어 나온 까닭이다. 그는 그년들에게 말도 못하고 씹어 넘기는 밥 새로 들릴 듯 말듯 욕지거리를 웅얼거린다. 자신이 욕한 걸 자신이 듣는다그가 말하는 방식이다속으로 이렇게이런 식으로울화가 가득 차 있는 그에게 평화는 술밖에 없다일 끝나면 다음 일 걱정에 마시고 일 하면 일의 고됨에 마신다술로 절은 몸을 끌고 들어오면 불 꺼진 집아비를 아는 척 하지 않는 딸년이 있어서 경구도 마찬가지로 제 딸에게 아는 척 하지 않는다대신 불쌍하다고 욕을 좀 하며딸년의 매정함에 이혼한 아내를 생각한다.


처음엔 사장님이더니 결국 씨발 놈이 되었다이 바닥에서 돈 내면 사장님이고 개털이면 개새끼였다. p. 125


단편 어디에도 '몇 차례'라는 말은 없지만 경구가 술값 외상값을 갚지 않아서 욕 먹고 어깨를 들이키는 일이 하루 이틀이었을 것 같지 않다. 해서 그날의 부딪힘을 유독 확대 분석할 이유 역시 없어 보인다그러니까 그가 살아온 시간 모두가 축이 되어 그날 칠면조를 들어 올렸던 것이다시마이 하고 오는 길 윤가가 경구에게 쥐어준 꽁꽁 언 칠면조이걸 어디에 쓸까 고민했지만 이렇게 쓸 줄 그는 알았을까외상값으로 시비를 걸던 쌍놈의 새끼상판을 오함마로 내리치듯 칠면조로 찧었을때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을 경구는 알았을 것이나 한편으론 그 잘못이 어디 나에게서만 있는건가라는 물음도 스물스물 올라와 더 힘껏 패대기 칠 수 있었으리. 57그의 등에 매어진 하나로 짜부 된 시간그 틈을 들추어 잘못된 시작점 '어디서'를 찾을 수 없고 설사 그걸 안대도 생을 거꾸로 살 수도 없다이쯤되니 경구가 달고 다니는 욕에서 그년들에 대한 울화와 함게 '나도 내 인생의 피해자라'는 분노가 보이는 것 같다.


지금 여기, 나는 경구 인생의 분기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을 엿보고 있는데도 비장함이나 엄숙함같은 것은 느낄 수가 없다예예 굽신거리던 저 밑바닥 노가다꾼이 사람 하나 곤죽으로 만들고 있는데 우스꽝스럽다칠면조 모가지를 잡고 사람 면상에 패대기치는 모습이라그의 인생에서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장면을 이렇게 멋대가리 없이 그렸다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칠면조 어디 흔하게 손에 쥐어지는것이던가경구 손에 오함마를 들리지 않고 칠면조를 쥐어줌으로써 소설은 '환상'의 가능성을 가진다아무래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쥐어주고 작가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처럼 경구가 갖고 싶은 현실(꿈이었으면 싶은)을 그려주는 것이다그러니까 칠면조는 경구의 분노를 해갈하면서도 소설 속 현실에서 그에게 닥쳐올 위험을 좀 덜어주는데나는 칠면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면서 그냥 칠면조라는 이름에 조금 고마웠다.


인생 뭐 있나백반 좀 먹고 빠구리 좀 치다 가면 그뿐이지. p. 110


소설의 처음 경구가 다짐처럼 했던 말을 끝에 와서 부르는 것은 그에게 '그뿐'이 아주 어려운 일 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그저 저 두가지만 할 수 있어도 '인생'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지만 어디 쉬운가경구는 마음으로 차린 백반 하나 제대로 챙긴 적이 없고 빠구리라니 역시 마음이 채웠던 일 없다싸구려 돼지부속집에서 일하는 찬모의 뭣 같은 냉대에 이를 갈뿐이다그가 대책 없는 인생이 되 버린 것은 끝 없는 가난 때문이다가난뱅이로 만든 사회다라는 말은 그러니까 해서 뭐하나 싶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다만그가 도저히 품을 수 없는 '희망'에 대해서 좀 말하고 싶다그는 자신이 있는 곳을 탈출하고 있다탈옥이나 탈출은 더 나은 곳을 향해 가는 여정이어야 하는데그의 탈출은 비참하다사람을 패대기치고 트럭을 훔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도착할 곳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희망경구가 오래전에 버린 이 말의 뜻은 '마음이 바란다'는 것인데 너덜한 육체에는 그 마음이 도저히 자라질 않는다질주하는 그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행복했던 날의 아내를 찾는 일뿐이다시간여행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만날 수 없는 죽어버린 희망옆에선 얼었던 칠면조가 서서히 녹는다그걸 또 선물이라고 아내에게 주겠다고게다가 그걸 받고 좀 웃어주었으면 하는 경구의 마음을 생각한다. 자신안에서 싹틀 수 없는 희망을 뭐라고 해야할까. 이곳을 떠나면 무엇이 있을 거라고 믿는 마음을 어떻게 지켜봐야할까.


이 이판사판에 "자신을 지키는 것이 큰일이다나는 ''를 허투루 간수했다가 ''를 잃은 사람이다."라는 다산의 고백을 적는다. 이 말은 다산이 40세, 앞으로 시작될 18년의 유배생활을 앞두고 한 말이다. 외견상 그의 인생은 끝났다*. 그러나 다산은 이제껏 자신의 삶이 나를 잃었던 삶이라고 깨달으면서 '수오'(守吾)라는 말을 되새긴다. 모든 것을을 잃어도 '나'를 지키는 희망까지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나는, 아직도 자신의 외부에서 무엇을 더 찾으려는 경구의 위험한 탈출이 멈추길, 트럭이 온전히 세워지길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트럭이 어쨌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사이 소설은 끝나 버렸으므로. 내게는 걱정만이 남는다. 그래서 뒤를 좀 이어서 써본다. 속 시원하게 두들겨 패던 환상은 끝났다. 칠면조를 들고가던 경구는 처치곤란한 그것을 어느 곳에 줘 버린다. 대신 양념치킨 한 마리를 산다. 말 없는 딸과 아들이 한 조각씩 먹는 것을 구경하다가 들어간다. 술을 하루 이틀 거른다. 외상값을 갚고 하루 걸러 하루 있을지언정 일판에 초연하게 나간다. 인생 60부터 시작이라는 뻔한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들려주고 싶다. 혹시 모를 수도 있으니까. 나는 경구가 자신이 쓴 줄 모르는 경구(警句)를 좀 받아 적는다. 소설의 끝이 걱정되어 그 다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 '교훈'이란 말을 딱 질색할 것 같은 천명관이지만 어쩌랴.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경구 덕분에 수오라는 말을 알아간다. 빌어먹을 세상은 예전부터 틀려먹었고, 그런걸 딱지치듯 엎어보겠다는 젠장맞을 포부도 없으나 다만. 나를 지키려고 하는 것만은 온 천지도 어쩌지 못할 일이다. 



*정약용, 박혜숙 편역, 『정약용 산문 선집 다산의 마음』, 돌베개. p. 2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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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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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허기를 견뎠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빵 봉지는 안이 투명했다구겨진 포장에 빛이 잘 들어왔고 작게 쓰인 글씨가 흔들렸다입가에 묻은 우유속이 빈 것들을 앞에 두고 말이 없었다참이 끝나가는 오후골판지 위에 드러누운 황갈색 작업복은 몸을 하나 둘 일으키기 시작했다. “백주대낮에는하느님이 정하신 일만 일어나므로” 교실에서부분현장은 다시 흙먼지와 날것의 온도로 뒤섞였다. 천안 아산역에는 하루 열 세대의 기차가 지났다.


어떤 구절은 어느 날의 신문기사처럼 간결하게 '그날'이었다현장은 도로가 잘 보였다. “앰뷸런스와 소방차로 거리는 활기차다열차는 수백 명을 태운 채강물로 뛰어들 뻔했다” 그것은 아주 흔한 소리여서 어쩌면 도로의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문장으로 시마이 할 때까지 다시 부푼, 빵 봉지만큼의 허기를 대신해 견뎠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가질 수 있었다. 컨테이너 숙소 이불에 피곤을 뉘이고 무엇을’ 알기 위해 시집을 피곤했다그러나 우리는 책을 덮고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본다” 로 시작하는 시시가 책을 덮으라고 하는 것인가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며칠 밤을 졸았었나. “하루종일 침묵한 일을 위해우리는 서로에게강철로 된 드롭프스를 넣어준다”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강철로 된 드롭프스*'라고 쓴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그런 날들에 기대 읽기 시작했다.


그 저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니

진은영은 서른 살에 등단했다그리고 3년 후첫 시집을 냈다이 시퍼런 시집을 보면서 벽과 머리의 관계를 생각한다물렁한 살로만 지탱된 생이 없듯이 내게도어떤 굳건함이 있을거라 믿었던 것은 모두 착각인 듯 싶어서시는 너에겐 어떤 방패도 없다는 듯 작정하고 들어왔다가령 이런 물음들. "자 그러니 말해봐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고요한 저녁의 시부분그 저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니찧지 않고서 견딜 수 있겠니그러니 벽과 머리의 관계를 생각하고비로소 머리의 쓸모를 생각한 것이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


모름지기 시인의 포부란 고작 일곱 개의 단어로 사전을 만들고 고작 몇 마디의 말로 거대한 이름을 설명하려 드는 것세상에 사전만큼 무모한 노력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그러나 어떤 사전보다 깊은 갈래를 냈으니이 두 쪽 짜리 사전에 금방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슬픔이라는 말에서 물에 불은 나무토막을 부르는 걸 보자처참함나무는 쓸모를 잊어버리고 물속에서 헤풀헤풀 풀어질 것이다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그것도 모자라 그 위로 ’ 비가 내린다참혹함몇 마디 하지 않았으나 그 몇 마디조차 막아버리고 싶은 구절이다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슬픔다음으로 오는 단어가 자본주의라는 점인데오늘이 외면하는 '오늘'을 시가 바로 보겠다는 선언 아닌가시가저 나약한 가지가,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긴 손가락의 부분이라며 머리가 아니라 ''으로 온다.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주소가 없다당신의 기억이 그렇듯 장소보다 시간에 기대 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보았다는 회상의 흔적은 그의 영혼 속에 있고그의 지적 활동의 발현이 작용한다는 것은 그의 행동에서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앞을 보태줄 수 있을지.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이처럼 있다는 곳에서 살지 못하는 것이 또 하나 있어서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름 '가족'이다누구나 긴 말 하나씩 품는 단어시인도 한 마디 했다긴 말 할 것 없다는 듯 간단히. “밖에선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집에만 가져가면꽃들이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 전문이렇게 쉬운 비유가 이때까지 어디에 있었나밖에서 빛나는 것이 어째서 한 집에 들어가면 서로를 쏘아보는 날이 되어야 했나이 짧은 시를 쉽게 넘길 수는 없다. 

 

너는그곳에 살지 않는다.

센 언어는 기세가 꺾이지 않고 1,2장 내내 읽는 이에게 처들어 온다가족에서의 충격은 청춘에서 다다르는데, 청춘」은 연작이다아마도 더용서 할 수 없었던 모양인가익지 않아 무서운 말들에 흠씬 두들겨맞는다서른 세살에 나온 시집이므로서른 세살 이후에 쓰인 단어는 이곳에 하나도 없다분명하게 금 그어진 서른 셋 이전의 날들은 독자와쓰는 이를 따라 무섭도록 쪼아댄다.

 


청춘 2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청춘 2」 전문.

 

어질한 뒷목을 쓸어 정신을 차리면 다른 시. 이제는 더 정확히 '서른 살'이라고 겨눈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뜻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부분서른 살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당신이 생각해야 하는 거고내가 알려 줄 수 있는 말은 다만 이것 뿐이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스무살의 끝에 몰린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나도 없다. 시인이 말하는 방식이 이렇다이런 일갈이 어디 청춘에게만 한정돼 있으랴뒤를 넘기면 "유신론자는 매일 확인한다어디에나 똑같이 찍힌 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무신론자」부분. 보우하사유약한 나를 또 꾸짖고 뱉고 달린다. 시인은 달려서 마침내 이 세상에 없던 포도송이를 하나를 그리는데. 이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 시집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일 것이다. 처참하게도 무용한 시가 폭력에 부딪힌다. 일어났던 폭력과 그것을 침묵했던 폭력, 모두에게 말이다.

 

 ...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

 네가 흘린 눈물은 다 어디로 갈까

 네가 떨어뜨린 물방울은 다 포도송이가 되었다

 건물들 사이로 솟은 첨탑 꼭대기에

 매달린 포도송이

 누구의 그늘이 될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입을 축일 수도 없다

 열매가 투명해서 아무도 따먹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쓴다

 너에게 수천 개의 물방울이 모여든 이유를

 

 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노동자들이 분신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된 이후로도 다른 스무 살들이 어디론가 끌

려갔다 이곳에서

 빈방의 아이들은 불타 죽고 이곳에서

 철거촌 사람들은 깡패에게 맞아 죽고 이곳에서

 라고 나는 쓴다 이곳은 조용하다

 라고 쓰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

 라고 쓴다 보랏빛 젖은 안개로 쓴다

  

 네 투명한 포도알 위에

 스무 살 메마른 입술 위에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부분.


''는 누구인가너는 스무 해 첨탑 꼭대기 매달린 포도송이이고포도송이가 떨어뜨린 물방울이다스무 살 메마른 입술을 가진이다그래서 너는 스무 해 동안 일어났던 이 땅을 모두 알고 있거나전혀 알지 못한채로 그 땅을 걷는이다너는 누구인가그러나 너는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며 투명할 포도알과스무 살 메마른 입술 위에 이 일들을 '쓰는 행위'나는 포도를 알고 있다포도는 작고물이 많고입에 쏙 들어간다그러나 이것은 열매가 투명하다포도라고 할 수 있을까까맣게 가지에 차 오르는 풍성한 부풀음이 아닌 것을 말이다열매가 투명한 포도는 원래 알알이 있다고 믿어졌던 것이나 점차 흐려졌다. 학살과 노동자들의 분신과 다른 스무 살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보지 못하면서, 그 모든 일이 있었던 이곳을 조용하게 만들면서. 이 투명한 포도는 언제 과육과 검은 껍질을 갖게 될 것인스무 살이 되어 그곳을 걷는 '그'가 마침내 한 개의 '몸'을 채워가고 있을것인가절망에 몰린 희망을 시인은 "보랏빛 젖은 안개로"쓴다. 그것 참 지워지기 쉬워라처음으로 돌아가시는 책을 덮으라고 했다. "교실 밖에서"일어나는 삶을 보라고 했다. 배움에 뜻이 있다면 "하루종일 침묵"하느라 "메마른 입술"에 "보랏빛 안개"로 이곳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보랏빛 안개가 내 입술 위에도 내렸을 일을 생각한다. 조용히, 입을 벌려 따라 읽는다.***

 

 

 

 *사탕

**프란시스 위스타슈, 이효숙, 『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알마. 26p

원문 : "그 사람을 보았다는 회사의 흔적이 그의 영혼 속에 있고, 그의 지적 활동의 발현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그의 행동방식 속에서 알아볼 수 있다."


***따라 읽는 글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계간 문학동네 201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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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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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을 모른 척 하는 마음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침에 들어온 다네다. 오자마자 쓰러져 자는 다네다에게 메이코는 유성매직을 든다. 다네다의 얼굴에 가면 같은 그림을 그리고 깔깔, 재밌다. 스물네 살. 그들은 6년을 만났고, 동거 1년 차다. 메이코는 구질구질하기로는 세계 제일인 그냥 그런 회사에 다니고 있고 다네다는 신문사에서 그림을 그린다. 다네다는 생활을 일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급여를 받는데. 이들이 동거하는 이유는 둘이 떨어진 시간을 견딜 수 없는 '사랑'을 위해서라기보다 둘이 함께 있지 않으면 제대로 지속될 수 없는 '생활'을 위함이다. 물론,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미래...? 를 생각해 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식사 당번은 정할 수 있다. 카레와 생선구이 카레, 다시 생선구이와 카레로 묘하게 바뀌는 날들에 함께 앉을 수 있다. 평화로운가. 그러나 일상의 '평화'는 무엇이 일어날리 없다고 확신하는 상태다. 이들의 생활은 평화롭다는 포장아래 무엇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모른척한다. 다만 그 속에서 익숙한 기쁨을 느끼는 것을 주저하지는 않을 뿐이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라고나 할까_다네다

 

가면을 모르는 다네다, 가면을 보는 메이코

아침에 들어온 다네다는 점심 무렵에도 자고 있다. 조퇴를 하고 돌아온 메이코는 오늘이 얼마나 좆같았는지, 그런 건 말하지 않는다. 생각할 뿐이다. 이 회사의 어른들은 별 것도 아닌 일로 호통을 치며 체신을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희롱을 일삼는다. 함께 다니는 후배는 (이걸 패줄 수도 없고)엿을 먹인다. 도대체가 재미라는 것이 없다. 이러려고 어른이 되었나. 혼자 중얼거린다. 다행히 다네다는 자고 있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본다. , 회사 그만 둘까...미안해서 푸념이라도 하지 못했을 말. 회사를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은, 생활이 되지 않아 함께 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다네다를 출구 없는 곳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러나 자고 있어야 할 다네다는 갑자기 일어나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그려진 얼굴로 대답한다. '그만 둬. 정말 네가 그만 두고 싶다면.' 메이코는 눈이 커지며 놀란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메이코는 다네다를 껴안는다. 다네다라고 생각하고 싶은 다네다를, 껴안는다. 그리고 다음 날 메이코는 회사를 그만 둔다.

 

가면이 지워진 풍경

다음 날 함께 밥을 먹으며 메이코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말을 듣고 다네다는 화들짝 놀란다. 어떻게 하려고? 우리의 생활은, 돈은, 빗발치는 물음이 다네다를 조른다. 그러나 메이코는 즐겁다. 모아둔 돈도 있고, 무엇보다 다네다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다네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생각도 못했을 용기가 다네다 자신을 누르고 나왔던 것을 말이다. 그가 잠결에 일어나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면을 잘 쓰는 에스키모족에 대한 연구를 보면 가면을 쓰는 일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고, 가면이나 역할은 쓰는 사람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보는 관중의 집합적 힘의 확장을 뜻한다고 한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다네다 자신이 원해서 쓴 가면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인 메이코에게 얼굴을 무방비하게 내줌으로써 그려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스물네 살, 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 꿈이나 현실은 모두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멀다. 생활을 위한 아르바이트는 답이 없고 그냥 다니는 회사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할 수도 없게 한다. 꿈이 없는 삶. 답답함에 몸에 독소가 쌓이고 시퍼런 뿔이 나온다. 감자의 먹지 못하는 싹 솔라닌. 메이코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다네다의 얼굴에 '가면-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신'을 그린다. 자신이 원하는 말을 겨우 하고 그에 합당한 대답을 듣게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말을 발화한 이를 다네다 같은 인물이라고 '혼동'해 버린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세수를 하고 가면이 지워진 다네다는 '그랬다'는 설명에 경기 같은 반응을 보인다. 어느 인류학자의 논의를 참고해 보면 다네다는 '가면'으로 자기 자신을 벗어났으며(그러나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니며) 가면이 보여주는 ''은 가면을 쓰는 사람의 확장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메이코'의 힘이 확장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감자에 싹이 나서...이파리에 감자감자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고 장난스러운 일로 이날은 지나가지만 이들에게 변화를 꾀는 사건으로 중요하게 기록된다. 이렇게 다네다 자기가 자신을 벗어나고 그것을 종용한 메이코의 들뜸이 일상을 채워갈 때 한쪽 베란다에 쌓인 감자는 소라닌이라는 독을 가진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땅속의 감자는 과연 알맞게 익었지만 밭을 떠나자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모르며 혼잡한 도쿄, 빌딩과 빌딩, 길가와 길가에 덩그러니 놓인다. 무엇이 되기 전에 빛을 받으면 먹을 수 없게 되어 쓸쓸하게 버려지는 이 작물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 자신을 뜻하면서, 만화의 첫 장 메이코의 고향집에서 한 박스 날라져 온 '실제' 생활에 곤란함, 고민거리에게도 작용한다. 박스를 보며 메이코는 턱을 괸다. 이걸 어쩌지. 이걸 어쩌지, 자신을 향해 발화된 말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꼈을지 모르면서 말이다.




 길이 막혔잖아?


입을 다물게 만드는 말

대학시절 밴드를 했던 다네다는 곡 하나는 끝내주게 쓴다는 세간의 평가를 모른 척 하고 자신의 재능이나 욕망을 그저 '취미'로 포장해 숨긴다그래서 다네다의 꿈속에서 넥이 없는 기타바디만 남은 기타를 등에 지고 걷는 것은 웃음보다 안타까움이 출몰하는 것이다넥이 없는 기타를 지느라 손이 묶여 버렸다연주를 할 수 없는 미래를 들고서그의 손은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자신을 배고프고 가난하게 할 뿐이다그런 건 재능이라고 할 수도 없고꿈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어른스러움', 아직 어른이 아닌 이들이 느끼는 어른스러움을 보일 수밖에 없는 도쿄에서의 생활.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묻는 것이 때로 사치스러운 상황에 있는 이들의 마음이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때로는 폭력적인 마음들

메이코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아직 모르지만 다네다가 하고 싶은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 다네다에게 음악을 다시 하라고 권유한다. 때로는 이러한 권유가 폭력적이라는 것을. 생활에 대해서도 자리를 빼앗긴 다네다는 이제 꿈이라는 약점, 꿈이라는 보기 좋은 이름을 흔드는 메이코, 흔들리는 다네다. '어떻게든 될 테니까' '젊으니까' 다시 할 수 있으니까. 요금이 밀려서 가스가 끊기고 찬 물이 나오고 에어컨이 고장 나는 여름을 넘기며, 다네다는 함께한 친구들과 녹음을 하기로 한다. 죽어라 해보고, 안되면 이번이 마지막이다. 씨디를 보내서 데뷔를 하자.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포기, 라는 다네다의 말. 6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베이스와 가업으로 물려받은 약국을 하는 드러머, 모두 삶이 그와 같기는 마찬가지다. 곡을 쓰고 노래를 하는 다네다가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네가 움직인다면 어디든 가야지. 여름날, 이들은 치기와 열정이 섞인 노래를 부른다.

 

메이코와 다네다


소라닌, 자신에게 보내는 레퀴엠

그날 이후 메이코가 다네다의 기타를 치는 것은 이 둘을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은유로 이해된다. 무엇을 위해 태워야 할지 모르는 열망을 갖고서,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가면을 그려 나의 욕망을 대입하고, 생활로서의 끝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모자라서 마지막 남은 한 자락 꿈에게까지 다네다를 밀어붙이고 말았던 비극적인 결과다. 이 둘은 하나인데, 비유적으로 한 몸이라는 것이 아니다. 결코 두 번 살 수 없는 청춘의 두 얼굴을 연인이라는 두 사람에 화한 것이다. 애인의 죽음 이후, 자신이 꾸릴 수 있는 현실을 되살기를 거부하고 메이코는 애인의 꿈을 집어 든다. 한번도 쳐보지 않았을 기타를 부르트게 치면서 노래를 한다.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자신을 위해 던져진 이별의 노래나 다름없는 가사를 부르며 메이코는 마침내 무대에 서는 것을 목표 삼는다. 소라닌은 다네다가 메이코에게 보낸 미리 쓰여 진 이별 노래가 아니라, 자신과 메이코와, 베이스와, 드럼에게 보내는 청춘과의 이별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싹을 언제까지 틔우는지 자신을 다 소진해 버리고 마는 바보 같은 젊음이 돼버린 우리들, 헤어질 수 없는 끈질긴 날들, 퍼렇게 썩어버린 20대를 노래로 부르며 마음과, 몸을 버리고 가지 못하는 자신에게 떠나보내는 '레퀴엠'이다.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짙은 보라색의 날들에게

그래서 비로소 메이코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이 노래는 내가 서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불리고 있다. 스물세 살, 메이코와 같은 나이일 때 이 책을 처음 보았고 지독한 우울이 밀려왔었다. 일 년에 딱 한 번만 읽겠다는 약속을 두고 책등을 뒤로 꽂아 놓았고 매년 나이를 먹지 않고 똑같은 어리석음과 똑같은 죽음을 반복하는 이들을 봐왔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2권이 없다. 1권만 읽고 쓰는 리뷰가 미완성임에 분명할 청춘을 대변이라도 하듯 라임이 맞아든다. 비로소 이 책을 보고 무엇을 쓰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내가 그곳을 나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수차례 여름마다 읽었던 기억을 되살려서, 아픔이 점점 아프지 않게 되는 것을 문득 '아프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을 하지 못했던 나의 이십대를 연민하지 않고 나를 믿지 못해 내게서 물러나고 당신에게서 물러났던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면서, 기울고 멀어진 그림자에게 전한다. 소라닌. 징그럽게도 나를 다 뒤덮었던, 다른 감자를 키워낼 수 있을 것처럼 속이며 자랐으나 실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짙은 보라색의 날들에게 말이다.

 


*클라이브 갬블, 『기원과 혁명』, 사회평론. 142쪽 요약 발췌.

#소라닌1,2는 영화가 개봉된 후, 개정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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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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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의 행방-신중한 사람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설명할 수 없다그럴만한 능력이 없거나의지가 없거나간혹 둘 다거나그래서 다만 '어쩔 수 없이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때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가 모여서 결국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 볼 때가 있다. (천천히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씀해 보세요설명을 하려고 하면 막상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고그래서 풀게 되는 한 토막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기 쉬워서 맥이 풀린다. (그런 호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좀 더 객관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나 젠장자신에게 객관적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대체로 억울함은 여러 곳에서 도착한 불가피함이 모여 만들기 때문에 손 쓸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그는 자신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가장 먼저 버리거나 포기해야 할 것을 끝내 간직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되는 일에 실패한다그것만은 늘 성공적이다.

 

<신중한 사람>은 그들의 삶이 "왜 그렇게 됐나"를 말한다논리학의 썰이라도 푸는 듯 그렇게 되었다를 '설명하는 중에 '그'의 큰 잘못이 그다지 없다는 점이 잘 드러나 고통스럽다. (결론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자연스러운 가운데 부자연스러운 ''가 있을 뿐이라는데그렇다면 이런 문제 제기는 어떤가그의 부자연스러움 가운데 자연스러운 바깥이 어째서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바깥이 자연스러움이 정당한 나머지 그에 반하는 이들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 버리고그것은 그의 인생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 소설의 역할은 무엇인가. (응원일까요지친삶에 대한?) 예상했다시피 그런 건 하나도 없다그렇다고 비꼬거나 조롱하는 것도 아니다다행이라고 해야 하나그저 보여줄 뿐이다더 잘 볼 수 있도록덕분에 독자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어디에도 없는>을 읽으며 금기의 질문을 하나 생각했는데비웃음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이 사람은 네이버도 안하나'였다. ‘는 비자 발급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비자 발급 얼마나 걸리나요"를 한 번 물어보지 않는다용감하다고 해야 하나언제 나올지나오기는 할지 모르는 비자를 순진하게 '21일 후에 나온다'는 직원의 말만 듣고 월세방을 정리한다그리고는 하루에 만원하는 여관방에 들어가서 3주를 기다리기로 한다이해할 수 가 없다그래서 당면한 문제는 당연히 '비자가 나올지 모른다'는 거다비행기표도 예약만 해놓고 발권을 하지 않은 상태여서 언제 돈을 넣을거냐취소해버린다 라는 독촉문자가 날아오고 어떻게 된 일인지 유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이국의 외삼촌뿐이다.

 

여기서 문제는 '혼신을 다해 기다리는 일을 하고 있는유를 이상하다고 여기는 나의 시각이다바깥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 역시 바깥에 길들여진 나의 시선이다그러나 의 사고는 흠 잡을 데가 없다비자를 신청했다비자는 21일 후면 나온다바로 떠나기 위해 집을 정리했다흡사 코끼리 냉장고에 넣는 것 같은 방법이지만 이것만 놓고 보자면 잘못을 딱히 꼬집을 수는 없다.

 

외삼촌이 우려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집을 정리했다는 말부터떠나기로 한 수단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거주를 내 손으로 치워버리는 것은 무슨 짓이냐는 거다미리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고 유의 신중하지 못함을 걱정하지만 그러나 코끼리 냉장고에 넣는 방법처럼 외국에 나가기 방법을 밝게 이야기 하는 그에게 (그리고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나 버린 후에별로 해줄 말이 없다굿럭이라고 빌어주는 수밖에그는 자신의 시계를 바깥과 맞출 줄 몰랐고읽을 줄 몰랐던 것 같다더불어 자신의 것을 읽을 수 있는지도 의심이 든다자신의 돈을 잘 챙겼으며 불안하나마 여관에서도 요식을 잘 해결하고 있다는 변호를 해보지만. ‘3주라는 일시적인 시간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닌지.

 

시계를 맞추지 못하는 유의 생태는 끊임없이 똑딱이며 나가는 세계와 불화한다다음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난 벌써부터 여기 없다고요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난 여기 없는 사람이라니까그런데 왜 이래있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이래." 비자센터의 직원은 끄떡하지 않았다누구라도 흔들릴 만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더 기다려보세요다른 방법이 없어요." p. 245

 

그의 몸은 벌서 외삼촌 집에 가 있다비행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곳에 말이다그러나 그가 가고 싶은 곳과 도착할 곳이 같겠는가그의 시계는 그에게만 통용된다그래서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일 없는 자연스러운 바깥과 대립하는 것이다유의 외삼촌이 부르는 초밥집과 그가 일해야 할 생각 속의 초밥집이 다를 것이 뻔하다후에 일어나는 일은 더 기가 막혀서 풀어갈 방법은 마땅치 않다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티켓을 흔들면서이미 날아가 버렸다는 것처럼 안타까운 그를 바라보면나의 시계를 생각하고더불어 바깥의 시계를 떠올리고차이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포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가를 생각한다당신들은 '여기는 이런 곳입니다'라는 설명을 들어 본 일 없이 이곳에 왔다. 그렇게 맞춰서 돌아가기로 한 거대한 침묵 앞이다들어 본 적 없는 법칙에 나를 넣고 잘 갈려 세계에 잘 화되는 것이 훌륭한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좁은 입구에 줄을 선다바깥으로 튀는 콩을 잡아다 다시 입구에 집어넣는 늙은 손이 잽싸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아뿔사, 어처구니*가 없다. 돌아가길 멈춘 맷돌 위로 햇빛이 길다.

 

 

어처구니 맷돌의 손잡이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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