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행복이 달랐다. 그때는 그냥 축적하는 것, 뭔가를-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감정을-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치 광택이 나는 기와인 양 언젠가 놀랍게 마무리될 자아라는 누각에 올려놓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쉽사리 믿지 않는다는 것, 그것 역시 행복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자신의 단순한 행운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그 행복한 상태 말이다.
-1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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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나를 당황하게 하던 수수께끼이고, 지금도 나를 당황하게 하는 수수께끼는 이거다. 어떻게 그애는 한순간은 나와 함께 있다가 그다음 순간에는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곳에, 절대적으로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을까? 이 점이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마찬가지다. 일단 내가 있는 자리에서 사라지면 그애는 당연히 허구, 내 기억 가운데 하나, 내 꿈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증거로 보건대 클로이는 비록 나와 떨어져 있다 해도, 늘 견고하고, 고집스럽고, 불가해하게 그녀 자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 떠난다. 실제로 사라진다. 그것이 더 큰 수수께끼다. 가장 큰 수수께끼다. 나 역시도 떠날 수 있다. 아, 그래, 나 역시 떠날 수 있다. 아, 그래, 나 역시도 당장에 떠나서는 본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릴 수 있다. 다만, 닥터 브라운 이야기대로, 산다는 오랜 습관 때문에 죽기가 싫어질 뿐이다.
-1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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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내가 뜻하는 자유는 고도의 장인적 성취 속에서 가능해지는 조작가능성의 정점에서 잠시 열리는 쪽문의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바람의 맛은 대체로 사적이며 중성적이다.
-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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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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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회를 목표 지점으로 잡다 보니 근대 이전의 모든 사회는 기껏해야 ‘근대 사회의 미숙아‘들이 되고 만다. 근대의 잣대로 이전 역사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화를 내며 내뱉었던 말을 기억한다. "우리는 걸핏하면 ‘전근대적‘ 이라는 말을 욕설처럼 사용합니다. 전근대적 노사 관행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노사관계는 근대적이고, ‘전근대적‘이라고 말하는 그런 관행은 근대사회인 우리 사회의 병폐이지 전근대사회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치부를 과거 사회에 책임 지우는 우리 시대의 못된 습관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한탄에 공감이 간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 무려 오백 년을 지속한 조선의 체제가 가진 ‘힘‘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잘 모른다고 말한다. 조선이 가진 ‘힘‘에 대한 그의 해석에는 유보할 대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조선을 그것이 가진 ‘힘’으로부터 사유하려는 태도에 나는 완전히 공감한다. 나는 여전히 해석과 무관한 사실을 믿지 않지만, ‘사실을 해석에 동원‘하는 역사주의에 맞서 ‘해석에 저항하는 사실들‘을 드러내는 기록학사로서의 그의 태도를 지지한다(내 생각에는 그것이야말로 ‘해석에 맞서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49p, <힘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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