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 - 인문연대의 미래형식
김영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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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똑똑함은 우아하고 심오하게 공전(空轉)하는 ‘자기피폐‘의 모습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 똑똑함은 결코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적 현명함이 아니다. 하버마스의 또 다른 설명처럼, 그 공전은 한편 물화(物化)이기도 하다. 20세기의, 그리고 20세기가 생산한 인간들의 똑똑함은 대체로 그런 종류의 것들이다. 한나 아렌트가 깨끗하게 정리해주었듯이, 그것은 "쓸모없이 극점에 이른 인식의 피폐"일 것이다.
_2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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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 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_이성복

"동사가 약한 단어의 조합이 엉성하면 문장은 산산이 부서진다. 표현력은 단어와 단어의 연결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도라지 백 뿌리를 심는다고 산삼 한 뿌리가 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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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모인 덩어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발생한다. 문학예술은 그런 복잡성을 표현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스타일, 즉 작동하는 상상력의 힘으로 그에 대응하는 복잡성을 구축할 수 있으며, 삶과 닮은 상태라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환상을 제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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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출생과 죽음이라는 고정된 양극 사이에 아른거리는 뉘앙스들이다. 여기 우리의 존재라는 그 반짝임은, 비록 짧지만 무한히 복잡하여 겉치레, 자아기만, 덧없는 현현, 그릇된 출발과 더 그릇된 마무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삶에서는 삶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은 자신이지 단순한 등장인물, 자신들이 모인 덩어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발생한다. 문학예술은 그런 복잡성을 표현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스타일, 즉 작동하는 상상력의 힘으로 그에 대응하는 복잡성을 구축할 수 있으며, 삶과 닮은 상태라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환상을 제공할 수 있다.
-<해설> 250~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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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가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할, 그러니까 지나친 자기 인식, 실제로는 나에 대한 너무 예리한 인식에 의해 오염되지 말아야 할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다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다른 사람의 절대적 타자성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내게는 세계가 클로이에게서 처음으로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 나타났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 지나치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지 않다고 말하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선생님들도, 다른 아이들도, 코니 그레이스 자신도, 누구도 아직은 클로이가 그랬던 방식으로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현실이 되자, 갑자기 나도 현실이 되었다. 나는 클로이가 내 자기의식의 진정한 기원이었다고 믿는다. 전에는 오직 하나가 있었고, 나는 그 일부였다. 이제는 내가 있었고, 내가 아닌 모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비틀림, 복잡한 꼬임이 있다. 나를 세계로부터 끊어내, 그렇게 끊어진 상태에서 나 자신을 실현하게 하는 과정에서 클로이는 나를 광대한 모든 것에 대한 느낌, 나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추방해버렸다. 그때까지 나는 그 모든 것 안에서, 대체로 행복한 무지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전에는 집안에 있었다면, 이제는 열린 곳에, 탁 트인 곳에, 몸을 피할 곳이 보이지 않는 곳에 나와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점점 좁아져, 다시는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1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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