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이가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어야 할, 그러니까 지나친 자기 인식, 실제로는 나에 대한 너무 예리한 인식에 의해 오염되지 말아야 할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다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다른 사람의 절대적 타자성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내게는 세계가 클로이에게서 처음으로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 나타났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 지나치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지 않다고 말하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선생님들도, 다른 아이들도, 코니 그레이스 자신도, 누구도 아직은 클로이가 그랬던 방식으로 현실이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현실이 되자, 갑자기 나도 현실이 되었다. 나는 클로이가 내 자기의식의 진정한 기원이었다고 믿는다. 전에는 오직 하나가 있었고, 나는 그 일부였다. 이제는 내가 있었고, 내가 아닌 모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비틀림, 복잡한 꼬임이 있다. 나를 세계로부터 끊어내, 그렇게 끊어진 상태에서 나 자신을 실현하게 하는 과정에서 클로이는 나를 광대한 모든 것에 대한 느낌, 나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추방해버렸다. 그때까지 나는 그 모든 것 안에서, 대체로 행복한 무지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전에는 집안에 있었다면, 이제는 열린 곳에, 탁 트인 곳에, 몸을 피할 곳이 보이지 않는 곳에 나와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점점 좁아져, 다시는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15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시절에는 행복이 달랐다. 그때는 그냥 축적하는 것, 뭔가를-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감정을-가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치 광택이 나는 기와인 양 언젠가 놀랍게 마무리될 자아라는 누각에 올려놓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쉽사리 믿지 않는다는 것, 그것 역시 행복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자신의 단순한 행운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그 행복한 상태 말이다.
-13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때도 나를 당황하게 하던 수수께끼이고, 지금도 나를 당황하게 하는 수수께끼는 이거다. 어떻게 그애는 한순간은 나와 함께 있다가 그다음 순간에는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곳에, 절대적으로 다른 곳에 있을 수 있을까? 이 점이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마찬가지다. 일단 내가 있는 자리에서 사라지면 그애는 당연히 허구, 내 기억 가운데 하나, 내 꿈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증거로 보건대 클로이는 비록 나와 떨어져 있다 해도, 늘 견고하고, 고집스럽고, 불가해하게 그녀 자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 떠난다. 실제로 사라진다. 그것이 더 큰 수수께끼다. 가장 큰 수수께끼다. 나 역시도 떠날 수 있다. 아, 그래, 나 역시 떠날 수 있다. 아, 그래, 나 역시도 당장에 떠나서는 본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어버릴 수 있다. 다만, 닥터 브라운 이야기대로, 산다는 오랜 습관 때문에 죽기가 싫어질 뿐이다.
-13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므로 내가 뜻하는 자유는 고도의 장인적 성취 속에서 가능해지는 조작가능성의 정점에서 잠시 열리는 쪽문의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바람의 맛은 대체로 사적이며 중성적이다.
-25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18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