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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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

'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철학자의 지적대로 어떤 철학도 해석에 그친 적이 없으며 나름의 방식대로 세계를 변화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이 명구를 통해 철학이, 아니 수많은 지식이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일종의 '교양'이나 '지식'이 되고 마는 근대의 경향에 반하여, 철학이란 '삶'이라는 외부를 자신의 내적인 일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혹은 나중에 '정치'라고 부르게 될 철학-외부적인 지대를 지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선언적으로 표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철학은 직접적인 삶으로부터의 충분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삶에 영향을 미치는 소극적(기만적!) 관여의 방식 대신에, 삶의 현실성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능동적 개입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p.21~22)

시간의 흐름은 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바꾸나봅니다. 처음에 독서모임에 갔을 때는 독서모임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독서모임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고 즐거웠습니다. 그 모든 것이 좋았기에 계속해서 가고 싶었고, 그 욕망에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즐거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저는 변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무게감이 저를 변화시켰기 때문이죠. 이제 독서모임에 나온지 13년째가 되어갑니다. 13년이라는 시간의 힘을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지만(그걸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행동이겠죠^^;;), 확실한 건 처음 나왔을 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뭐가 다른 걸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 여러가지 중에서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아보자면, 제가 독서모임에 바라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처음 나갔을 때는 그냥 나가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지금은 나가는 것 자체도 좋지만 더 바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가서 함께한 시간 자체가 저 자신에게 의미가 있기를 바랍니다. 의미라는 게 주관적인 것이라서, 저 자신에게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 중에서 '의미'가 '어떤 의미'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앞에서처럼, 이 질문에도 뭐라고 정확하게 딱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냥 제가 느끼기에 의미가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쓰고 보니 무언가 모호하고 불확실하네요. 제가 느끼기에 의미가 있으면 된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말 같지만, 상황에 따라서 제가 느끼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기에 딱 잘라서 한가지로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야 할 것 같으니, 잠시 생각해 봅시다. 아~~ 떠오르는 것이 있네요. <교수대 위의 까치>를 읽고 참석한 독서모임의 예를 들면 될 거 같네요.

그날 저는 어떤 기대를 품고 갔습니다. 이 책을 읽고 참여한 독서모임의 시간이 나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참석했지만 집에 돌아갈 때는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고 기대감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허탈감이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허탈감을 느끼게 했을까요?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이 책을 논하기 전까지 이 독서모임에서 최근에 현실과 관련된 책들을 주로 읽었고 예술 관련 책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예술 관련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하는 예술 관련 책의 독서토론이, 그 이전의 현실과 연관성이 있는 책의 독서토론처럼 흘러갈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습니다. 독서토론에 참석하고 보니 아니더군요. 미술 관련 책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모임에 참석한 분들은 미술에 관한 자신의 취향과 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아, 예전에도 이랬었지'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예술 관련 책을 두고 이야기 나눈 독서토론의 시간들이 기억이 났습니다. 자신의 취향, 예술작품을 보고 느낀 감상을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한다는 독서토론의 기본적인 모토와도 맞죠. 과거에는 이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대 위의 까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과거와는 확실히 달리진 것이 있더군요. 저 자신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취향과 감상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좋았습니다. 독서모임에 참석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으니까요.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의 저는, 그분들의 이야기가 귀로 들어오기는 하지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분들의 이야기는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일종의 '교양'이나 '지식'이 되고 마는 근대의 경향'처럼 느껴졌습니다. 삶과 괴리된 취향과 감상을 드러내는 말의 향연 속에서 헤매고 나서, 저 자신도 그 경향성을 결코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허탈감이 밀려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소수의 분들이 자신의 삶에서 길어올린, 삶과 하나가 되는 자신의 생각을 말해서 숨구멍은 쉴 수 있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비평의 효용성'이나 '비평이 가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의미화 작업을 시도했지만, 삶으로부터 분리된 교양이나 지식이 되는 경향을 벗어나지도 못했고, 그 모임의 주도적인 흐름에 어떤 변화도 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느낀 허탈감과 좌절감은 거기에서 기인합니다. 내가 여기에 와서 들은 말의 대다수가 삶과 분리된 교양과 취향의 향연이라면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하는. 진짜 궁금했습니다. 저는 왜 왔던 것일까요? 무엇을 바라 여기에 와서 그런 말들을 듣고 돌아가면서 허탈감을 느끼고 독서모임을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어쩌면 제가 욕심이 과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참여한 시간이 저 자신에게 의미가 되기를 바라지만 아닐 수도 있는데, 그것이 안된다고 해서 실망한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바랍니다. 제가 참여한 독서토론의 시간이 제가 생각하는 기대의 최소치는 채워주기를. 그게 그렇게 문제가 있는 생각일까요?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릅니다. 위치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르고, 보이는 것이 다르면 생각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달라졌다는 것은 몸의 상태가 변했다는 말입니다. 독서토론을 처음 시작하여 무엇이든 즐거워하는 나의 몸과 독서토론을 13년을 겪은 나의 몸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독서토론을 처음 시작하는 나의 몸이 삶과 분리된 감상을 토해내고 그 감상만으로 만족하는 몸이었다면, 독서토론을 13년 겪은 저의 몸은 더 이상 감상이 아닌 '비평'의 단계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삶과 괴리된 비평이 아닌 삶과 연결된 비평. 삶과 분리된 교양과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삶과 연결되어 삶과의 일체성이 느껴지는 교양과 지식. 가능성만 보여줘도 괜찮습니다. 가능성만 있어도 만족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느껴지지 않고 '나 이런 그림 좋아해요', '나 이런 화가 좋아해요'라고 외치는 말들이라면 저는 자괴감을 느낄 확률이 높습니다.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하고. 모임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비평이란, 특정 영역의 전문지식을 가진 이와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한 이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한 것은,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진중권이 나름대로 노력해서 펼쳐놓은 그림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읽고, 거기서 느낀 무언가(혹은 자기만의 해석)가, 제가 생각하는 비평의 일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그런 비평을 듣고 싶다는 말을 제가 한 말을 통해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듣지 못했고, 듣지 못했기에 필연적으로 허탈함을 느꼈습니다. 허탈함은 다시 회의로 이어집니다. 그 모임에 나가는 것을 당분간 쉬어야 하겠다는. 이렇듯 <교수대 위의 까치>가 내게 남긴 흔적은 허탈함과 회의와 휴식에의 욕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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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부산고전함께읽기모임 다섯 번째 시간을 가집니다.
다섯 번째 시간에는 영혼의 불명성에 대해 논한 <파이돈>을 읽을 예정입니다
'영혼의 불멸성이 뭐지?'라고 궁금증이 드시다면 오셔서 대화를 한 번 해보시면
됩니다.^^



5회 모임
1.일시:2017년 4월 14일 토요일 오후 다섯 시
2.장소:서면 텐스
3.함께 읽을 책:파이돈(숲출판사,천병희 번역)

-고전이라는 게 이름은 들어봤지만 읽은 사람은 찾기 힘든 게 현실인데(^^;;),
함께 읽으면 분명히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혼자 읽을 때보다 부담은 덜고, 재미는 두배가 되고, 거기다 유익하기까지 한
고전 읽기를 함께하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함께 나누어보아요.^^
-나이,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든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임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만 있으시면 됩니다.
-함께 고전을 읽자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참가하기고 싶으시면 쪽지로 연락주시거나 밑에 댓글을 남겨주시면
됩니다.^^

고전 독서 모임의 목표
1.고전을 함께 읽는다.
2.고전을 통해 이 시대를 조망하는 시야를 갖는다.
3.고전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이 목표를 가지고 함께 고전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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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전함께읽기 4회 모임(2017.3.24. 크리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같지 않은 변론(??)은 끝났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지키라는 친구들과 가족들과 제자들의 제안을 뿌리칙고 묵묵히 사형을 기다리며 감옥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크리톤>은 그런 상황에서 사형이 얼마남지 않았을 때 죽마고우인 크리톤이 찾아가며 시작됩니다. 크리톤은 분명히 자기 목숨을 지키라는 제안을 할테고, 우리의 꼬장꼬장한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그걸 거부할테죠.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크리톤을 설득하는지가 담긴 이 대화편을 읽으며 모임에 참가한 우리 각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더군다나 소크라테스가 한번도 말하지 않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조작된 명언이 유래된 책으로 알려진 책이라서 더 궁금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의 대화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볼까요.^^ 

00: ‘제도가 자기에게 불리하더라도, 정해진 제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생각이었음을 알았다. 그는 그게 정의라고 생각했다. 정해진 법을 지키는 게 아름다움이다라는 것이 그 시대의 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억울하게 느껴졌다.
000: 대화편이 토론의 한 형태라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논리를 주고 받으며, 소크라테스의 말을 크리톤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좋았다. 소크라테스가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000: 짧아서 부담없이 읽었다. 만약에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을까. 나는 친구에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이 국가권력에게 당하는 폭력을 얼마만큼 참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00: 소크라테스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격이 대화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여겨진다. 소크라테스는 친구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을 수 있었다. 내가 정말 바르게 살아야만 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봤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자기들이 만든 법이니까 지켜 주는 것이 맞다.
000: 분량이 작아서 읽기가 편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데 거절한 건 소크라테스 자신의 원칙에 따라서 선택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와 대비해서 살펴봤다
  
00: 저한테 유리한 법이면 한다. 아니면 나는 그 법을 따를 수 없다. 철저하게 제 위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 입장은 동의가 된다. 그는 명예롭게 죽기를 원했다. 도망가는 건 비굴하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육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00: 법이 어떻게 만들어줬는지 살펴봐야 한다. 유신헌법을 봐라. 국민을 억압해서 만든 법이면 저항해야 한다. 그런 법이라면 끊임없이 바꾸려고 노력할 것 같다. 민중은 잘못된 상황이면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만든 법이기에 따랐던 것 같다.
000: 악법도 법은 맞다. 다만 민중의 상식에 반한다면 바꿔야 한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뀐 것 같다.
000: 원칙은 지켜줘야 한다. 거기서 합리적인 부분이 필요하다. 원칙 속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합리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000: 법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법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 시대적 맥락 속에서 법이 어떻게 적용되느냐가 중요하다. 소크라테스의 나이와 책임감이 그런 결론을 이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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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8-03-27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읽기...재미없고 어렵지만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짜라투스트라 2018-03-27 21:29   좋아요 0 | URL
아 지금까지는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화폐의 몰락
제임스 리카즈 지음, 최지희 옮김 / 율리시즈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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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화폐의 몰락-제임스 리카즈

<은행이 멈추는 날>의 제임스 리카즈 책을 또 읽었습니다. 아마도 전에 제가 그의 책을 읽고 토해낸 감정을 담은 글을 보고 또 그의 책을 읽을리는 없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다시 그의 책을 읽게 됐습니다. 흠~~ 써놓고 보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라서 '이러저러한 인연'에 대해서 밝혀야겠습니다. 모든 것은 우연에서 시작됐습니다. 알라딘에서 책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화폐의 몰락>이라는 제목을 봤습니다. '화폐의 몰락'이라고? 제목에 끌리는데 한 번 읽어볼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니 없었어요. 없네? 어떻게 하지? 살펴보니 그 책을 쓴 저자의 다른 책이 읽는 거예요. 그게 <은행이 멈추는 날>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며칠 뒤에 가서 <화폐의 몰락>이라는 책을 빌려왔죠. 일단 <은행이 멈추는 날>이라는 책을 읽고 저자에 대한 연습을 하고 뒤이어 <화폐의 몰락>을 읽을 생각이었습니다. 계획에 따라 책을 펼쳐 <은행이 멈추는 날>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일단 책 앞부분의 저자 소개에서 '폭스뉴스' 부분에서 멈칫거렸습니다. '극우 매체이지만 뭔가 큰 문제는 없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임스 리카즈는 경제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전문가답게 멀쩡합니다. 물론 경제 이야기를 할 때도 음모론과 비관론의 기미가 보이지는 하지만 그것은 전문가적 식견에 의해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경제 문제 이외의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정치 이야기를 할 때 그는 광기를 발휘합니다. 음모론과 비관론이 결합된 정치적 광기. 책을 정상적으로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읽기로 했으니 꾹 참고 다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이 책에 큰 의미는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책을 의미깊게 읽은 분들에게는 참으로 죄송한 얘기이지만, 저에게는 이 책이 음모론자의 광기에 가득 찬 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책 정도에 불과해서요.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습니다. <화폐의 몰락>이라는 양장본의 두꺼운 책이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거죠.

고민 따위는 없었습니다. 저는 지체없이 <화폐의 몰락>을 펼쳐 읽었죠. 책이 있으니까 읽는다는 듯이. 음모론은 문제없다는 듯이. 다 읽고보니 생각보다 훨씬 정상적인(??) 책이었습니다. <은행이 멈추는 날>과 비교해보면, 음모론의 강도는 훨씬 약해졌습니다. 저자 자신의 정치적인 광기는 잠깐씩 드러날 뿐, 거의 대부분은 저자 자신의 전문분야인 경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도 특유의 비관론은 여전했습니다. 저자인 제임스 리카즈는, 현재 달러 중심의 국제 화폐 시스템이 무너지고 새로운 국제 화폐 시스템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합니다.(책 제목에 나오는 <화폐의 몰락>이 가리키는 화폐란, 세상의 모든 화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달러 중심의 국제 화폐 시스템을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2007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의 최악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미국이 달러화를 시장에 마구 푸는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한 이래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달러화의 가치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달러화가 시장에 너무 많다 보니 가치가 하락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외의 다양한 원인들이 뒤얽혀서 달러화 약세가 이루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국제 경제의 관점에세 국제 경제에 관여하는 이들이 과거보다 달러화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과거보다 다수의 사람들이 달러화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달러화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죠.(단기적인 의미에서는 달러화의 가치가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꾸준히 하락하는 추세라는 말입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미래에 달러화 중심의 국제화폐 시스템이 무너지고 새로운 국제화폐 시스템이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래의 가능성으로서의 사건은 절대적인 것은 없거든요. 저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가능성이 가능성을 넘어서서 확신으로 가게 된다면 그건 위험한 것입니다. 반론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인 확신이 역사에서 얼마나 잘못된 일들을 저질렀는지 너무 많이 봤거든요. 때문에 저는 어느 정도의 확신은 인정하지만, 어느 정도의 확신을 넘어서 절대에 가까운 확신이 된다면 저는 두려움에 가득한 채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구분이 모호하긴 하지만, 저는 제 나름의 판단에 따라서 그것을 구분하려고 합니다.(저도 전문가가 아니라서요^^;;) 그런데 이 책에서 나오는 제임스 리카즈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제 입장이지만 아주 강한 확신처럼 보입니다. 제임스 리카즈는 당연히 달러화 중심의 세계화폐 시스템이 무너지고, 그것을 엘리트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의 시스템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아주 확신하고 있습니다. 강한 확신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방식으로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논증을 통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정해놓고 논증을 그쪽으로 이끌고간다는 말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연준에 대한 비판, 유로화의 강세 주장이나 유럽에서 경제 위기를 겪은 나라들에 대한 입장, 긴축정책에 대한 지나친 긍정, IMF가 발행하는 특별인출권(SDR)의 강세 주장, 케인스주의에 대한 비판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달러화 중심의 국제 화폐 시스템이 몰락해야 한다는 당위에 따라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이죠. 특히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발은 심각하게 균형을 잃은 상태입니다. 케인스주의의 성공 사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리카즈는 실패 사례만 나열하며 케인스주의는 성공할리 없다고 말합니다. 케인스주의식으로 정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재정정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중앙은행격인 연방준비위원회(줄여서 연준)의 경제정책이 실패한다는 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준은 특성상 미국이 중심이 되는, 현재의 달러화 중심의 국제화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밖에 없는데, 연준의 개입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 달러화 중심의 국제화폐 시스템이 무너진다는 것이 되고, 그 말은 제임스 리카즈의 '화폐의 몰락'론이 옳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유로화가 강세라고 주장하며 유로화 강세의 미래예측을 합니다. 실제 현실은 다릅니다. 과거의 유로화 강세에 대한 예측과는 달리 지금 유로화는 생각보다 국제 화폐 시장에서 예측보다 못한 상황입니다. 그것은 유럽의 경제 위기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리카즈는 이 책에서 계속해서 경제 위기를 겪은 유럽 국가들의 구조조정이 성공적이라고 얘기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구조조정이 경제 위기를 겪은 유럽국가들에 큰 성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리스는 따로 두더라도, 위기에서 벗어난 국가도 있지만, 위기에서 벗어난 국가라도 과거의 경제에 미치지 못하는 힘겨운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유럽공동체가 강요한 긴축정책이 유럽 전부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죠. 제임스 리카즈는 의도적으로 긴축의 장점을 부각합니다. 정부의 공공지출을 강력하게 줄이고, 국가 부채 삭감에만 매달리는 긴축은 서민들의 고통을 만듭니다. 실업, 복지삭감, 공공정책의 축소, 불평등과 빈곤의 확대로 이어지는 긴축 정책이 야기하는 서민의 고통을 제임스 리카즈는 완벽하게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이야기합니다.(왜냐하면 유로화가 강세가 되어야 달러화 중심의 국제 화폐 시스템이 몰락할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의 상황이 괜찮아졌다고 말합니다. 그리스가 괜찮아졌다고요? 글쎄 제가 아는 한에서는 그리스의 경제를 두고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게 옳은지 의문이 드네요. 경제가 쪼그라든 것도 그렇고, 엄청난 실업률과 지속되는 서민들의 빈곤, 긴축으로 인해서 정부가 시민들을 제대로 돕지도 못하는 현재의 상황과 과거 경제 위기 전의 그리스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괜찮아졌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이네요. 흥미로운 부분은 저자인 제임스 리카즈가 동유럽 국가들 이야기를 하며 경제 위기를 겪은 남유럽 국가들(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의 긴축이 좋지 않다는 천기 누설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했던 말을 자기가 반박하는 상황을 책에서도 볼 수 있다는 거죠. 더 흥미로운 건 저자는 시위를 아주 안 좋게 보고 있습니다. 힘겨운 고통 속에서 불만을 드러내는 시민들이 잘못됐다고 말하며 그는 시위 같은 것은 하지 않고 현실을 잘 받아들여 생존에 힘쓰는 게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 이거 어디서 많이 듣는 말 아닌가요? 세상에 불만을 드러내지 말고 '노오력' 하면 더 나아진다는 말은 한국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하잖아요? 제임스 리카즈도 어쩔 수 없는 무책임한 기성세대군요. 현실의 고통 따위는 무시하고 개인의 생존만 강조하는 그런 기성세대.

쓰고보니 또 엄청난 불만을 늘어놓네요. 뭐 그 외에도 비판할 구석이 여러 개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것중에서 금의 영향력 증대는 아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러화가 약해지는만큼, 금이 강세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거든요. 그리고 세계의 강대국들이 금을 모아놓고 있는 현실도 그것을 반영하고 있고요.

어찌되었든 <은행이 멈추는 날> 정도의 비판은 하지는 않았습니다. 비판할 부분은 비판했지만, 저자의 음모론이 상당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강력한 비판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비판은 일단 결론을 정해놓고 거기에 현실을 끼워맞추는 부분에 집중됐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으니까요. 책을 덮고 보니 최근에 제가 경제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조금 쉬는 기분으로 가벼운 책을 읽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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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숏-마이클 루이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나를 분노하게 만든 책들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글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좋게 느끼거나 감동시킨 책들에 대해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마치 감정은 느끼는데, 내가 느낀 감정을 글로 쓰려고 하면 백지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빅숏>도 마찬가지다. 나는 <빅숏>을 읽고 좋은 감정을 느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건 기쁨이나 즐거움, 감동과는 다른 감정이다. 그건 이상한 쓸쓸함, 서글픔, 슬픔, 상실감 같은 감정들이 뒤섞인 이상하게 '좋은' 감정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미국 경제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한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 어쩌면 언어는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정이란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될 수 없는 복합적인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지금까지 그 감정의 근사치를 언어로 표현해놓고 그것이 진짜 감정이라고 주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말에 따른다면 내가 <빅숏>을 읽고 느낀 이상하게 '좋은'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글을 쓰기로 다짐했으니까. '순환의 오류' 같은 말이지만, 나는 쓰기로 했기에 쓸 수밖에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불가능하든. 하여 나는 앉아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쓰고 보니 역시 떠오르는 건 없다. 잠시 가만히 있어 본다. 떠오르는 건 '폐허, 재난, 재앙, 어리석음 ' 같은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을 가지고 뭘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은 계속된다. 아, 뭔가 떠오른다.

우리는 재난을 어떻게 아는 걸까? 예언 같은 초능력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라면, 재난이 닥치기 전에는 그게 재난일지 모를 것이다. 평범한 이들에게 재난이란 닥치고 나서야 그게 재난인 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재난이 닥쳐서야, 재난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게 재난인 줄 아는 것이다. 전문가라면, 평범한 이들보다 조금 일찍 재난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도 평범한 이들보다 조금 일찍 아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예외는 존재한다. 다수가 아닌 지극히 소수 중에 재난을 빨리 눈치채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외친다. '재난이 닥치고 있어요'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한다. '무슨 재난이 오냐'라고 하면서. 아폴론의 저주를 받아, 미래를 알지만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는 그리스 신화 속의 예언가 카산드라처럼. <빅숏>은 그 '소수'의 이야기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불러올 재난을 미리 눈치챈 사람들이 바라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재난의 이야기. 경제나 금융에 관심없는 평범한 이들뿐만 아니라 소위 난다긴다 하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업자,애널리스트,관련인물들과 경제학자들도 파악하지 못한 그 재난의 모습을 파악한 이들이 파멸로 질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야기. 여기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있을까? 아니, 단언하지만 여기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은 없다. 여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 회의감, 서글픔, 상실감 같은 감정들의 회오리가 있다. 

'우리가 실패할리 없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돈을 맡기면 당신의 돈을 불려드리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추호의 의심도 없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팔고 사고 그것을 이용해 다시 복잡하기 그지없는 금융파생상품을 만들어 다시 팔고 산 월가의 금융업자들과 그들을 따라 돈을 굴린 전세계의 금융업자들과 투자자들.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돈을 얻기 위해 금융업자들의 의사에 따라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좋게 평가한 신용평가기관들.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이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지만 시장을 안 건드리면 좋다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맹신해서 수수방관했던 규제기관의 관료들. 금융업자들에게 속아서 투자했던 평범한 사람들. 이들 모두는 알지 못했다. 빚에 빚을 더해서 만들어진 경제 호황의 끝에 어떤 재난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가정부 일을 하던 이가 빚에 빚을 더해 집을 15채 사고, 영어라곤 한마디도 못하는 라틴계 불법 이주자가 대출을 갚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빚을 내어 집을 사고, 그 사람의 채권이 신용평가기관에 최고로 높은 AAA등급을 받아 다시 팔려나가고, 미국의 JP 모건,골드만삭스 같은 유수의 금융회사가 이 위험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호황은 이어질 것이라고 외치고, 미국의 중앙은행격인 연방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인 앨런 그린스펀이 그에 호응하여 미국 경제는 안전하다고 외치는 기막힌 현실.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눈치채지 못한 채 모두가 최악의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현실. 괴짜이자 세상과 다른 시각을 가진 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파악하여 사람들에게 외친다. 이것은 위험하다고. 당신들은 미쳤다고.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이 이상하다고 말한다. 좋게 돌아가고 있는데 왜 이상한 소리 하냐고 하면서. 그들은 파국이 닥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이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모든 걸 지켜본 파국을 미리 눈치챈 소수의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내가 앞에 말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 회의감, 서글픔, 상실감 같은 감정들의 회오리를 느끼지 않을까? 책을 읽은 독자가 느끼는 감정 또한 그들과 비슷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감정은 책에 나오는 파국을 미리 눈치챈 소수와는 다르다. 우리는 이미 그 재난을 지나왔기 때문에. 하물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직접 겪지 않은 한국의 독자들의 경우는 더 거리감이 있을 것이다. 한국의 독자들이 느끼는 감정의 회오리는 직접 그 사건을 지나온 그 소수의 사람들이나 재난을 겪고 몰락한 이들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시한 한국의 독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근사치에 불과할 것이다. 중요한 건, 책을 읽은 독자로 하여금 근사치라도 느끼게 한다는 점. 파멸의 구렁텅이를 운좋게 비켜간 이들이나 파멸을 맞은 이들의 감정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게 하다는 점. <빅숏>의 미덕은 그것에 있다. 우리는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어떻게 사람들이 파멸해갔는지를. 파멸을 피한 이들은 어떻게 피해갔는지를.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경제적 재난에 대처하는 능력이 생긴다.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계만이 우리가 위기에서 벗어날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무언가를 쓰기는 썼다. 내가 한 다짐을 지킨 것에 안도한다. 글이 어떻든 썼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나는 이제 글을 끝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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