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

'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철학자의 지적대로 어떤 철학도 해석에 그친 적이 없으며 나름의 방식대로 세계를 변화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이 명구를 통해 철학이, 아니 수많은 지식이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일종의 '교양'이나 '지식'이 되고 마는 근대의 경향에 반하여, 철학이란 '삶'이라는 외부를 자신의 내적인 일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혹은 나중에 '정치'라고 부르게 될 철학-외부적인 지대를 지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선언적으로 표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철학은 직접적인 삶으로부터의 충분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삶에 영향을 미치는 소극적(기만적!) 관여의 방식 대신에, 삶의 현실성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능동적 개입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자본을 넘어선 자본>, 이진경, p.21~22)

시간의 흐름은 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바꾸나봅니다. 처음에 독서모임에 갔을 때는 독서모임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독서모임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고 즐거웠습니다. 그 모든 것이 좋았기에 계속해서 가고 싶었고, 그 욕망에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즐거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저는 변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무게감이 저를 변화시켰기 때문이죠. 이제 독서모임에 나온지 13년째가 되어갑니다. 13년이라는 시간의 힘을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지만(그걸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행동이겠죠^^;;), 확실한 건 처음 나왔을 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뭐가 다른 걸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 여러가지 중에서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아보자면, 제가 독서모임에 바라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처음 나갔을 때는 그냥 나가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지금은 나가는 것 자체도 좋지만 더 바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가서 함께한 시간 자체가 저 자신에게 의미가 있기를 바랍니다. 의미라는 게 주관적인 것이라서, 저 자신에게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 중에서 '의미'가 '어떤 의미'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앞에서처럼, 이 질문에도 뭐라고 정확하게 딱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냥 제가 느끼기에 의미가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쓰고 보니 무언가 모호하고 불확실하네요. 제가 느끼기에 의미가 있으면 된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말 같지만, 상황에 따라서 제가 느끼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기에 딱 잘라서 한가지로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야 할 것 같으니, 잠시 생각해 봅시다. 아~~ 떠오르는 것이 있네요. <교수대 위의 까치>를 읽고 참석한 독서모임의 예를 들면 될 거 같네요.

그날 저는 어떤 기대를 품고 갔습니다. 이 책을 읽고 참여한 독서모임의 시간이 나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참석했지만 집에 돌아갈 때는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고 기대감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허탈감이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이 저로 하여금 허탈감을 느끼게 했을까요?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이 책을 논하기 전까지 이 독서모임에서 최근에 현실과 관련된 책들을 주로 읽었고 예술 관련 책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예술 관련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하는 예술 관련 책의 독서토론이, 그 이전의 현실과 연관성이 있는 책의 독서토론처럼 흘러갈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습니다. 독서토론에 참석하고 보니 아니더군요. 미술 관련 책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모임에 참석한 분들은 미술에 관한 자신의 취향과 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아, 예전에도 이랬었지'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예술 관련 책을 두고 이야기 나눈 독서토론의 시간들이 기억이 났습니다. 자신의 취향, 예술작품을 보고 느낀 감상을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한다는 독서토론의 기본적인 모토와도 맞죠. 과거에는 이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수대 위의 까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과거와는 확실히 달리진 것이 있더군요. 저 자신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취향과 감상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좋았습니다. 독서모임에 참석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으니까요.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의 저는, 그분들의 이야기가 귀로 들어오기는 하지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분들의 이야기는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일종의 '교양'이나 '지식'이 되고 마는 근대의 경향'처럼 느껴졌습니다. 삶과 괴리된 취향과 감상을 드러내는 말의 향연 속에서 헤매고 나서, 저 자신도 그 경향성을 결코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허탈감이 밀려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소수의 분들이 자신의 삶에서 길어올린, 삶과 하나가 되는 자신의 생각을 말해서 숨구멍은 쉴 수 있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비평의 효용성'이나 '비평이 가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의미화 작업을 시도했지만, 삶으로부터 분리된 교양이나 지식이 되는 경향을 벗어나지도 못했고, 그 모임의 주도적인 흐름에 어떤 변화도 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느낀 허탈감과 좌절감은 거기에서 기인합니다. 내가 여기에 와서 들은 말의 대다수가 삶과 분리된 교양과 취향의 향연이라면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하는. 진짜 궁금했습니다. 저는 왜 왔던 것일까요? 무엇을 바라 여기에 와서 그런 말들을 듣고 돌아가면서 허탈감을 느끼고 독서모임을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어쩌면 제가 욕심이 과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참여한 시간이 저 자신에게 의미가 되기를 바라지만 아닐 수도 있는데, 그것이 안된다고 해서 실망한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바랍니다. 제가 참여한 독서토론의 시간이 제가 생각하는 기대의 최소치는 채워주기를. 그게 그렇게 문제가 있는 생각일까요?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갑니다. 이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릅니다. 위치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르고, 보이는 것이 다르면 생각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달라졌다는 것은 몸의 상태가 변했다는 말입니다. 독서토론을 처음 시작하여 무엇이든 즐거워하는 나의 몸과 독서토론을 13년을 겪은 나의 몸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독서토론을 처음 시작하는 나의 몸이 삶과 분리된 감상을 토해내고 그 감상만으로 만족하는 몸이었다면, 독서토론을 13년 겪은 저의 몸은 더 이상 감상이 아닌 '비평'의 단계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삶과 괴리된 비평이 아닌 삶과 연결된 비평. 삶과 분리된 교양과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삶과 연결되어 삶과의 일체성이 느껴지는 교양과 지식. 가능성만 보여줘도 괜찮습니다. 가능성만 있어도 만족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느껴지지 않고 '나 이런 그림 좋아해요', '나 이런 화가 좋아해요'라고 외치는 말들이라면 저는 자괴감을 느낄 확률이 높습니다.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하고. 모임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비평이란, 특정 영역의 전문지식을 가진 이와 전문지식을 가지지 못한 이 사이에 다리를 놓은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한 것은,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진중권이 나름대로 노력해서 펼쳐놓은 그림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읽고, 거기서 느낀 무언가(혹은 자기만의 해석)가, 제가 생각하는 비평의 일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저는 그런 비평을 듣고 싶다는 말을 제가 한 말을 통해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의 듣지 못했고, 듣지 못했기에 필연적으로 허탈함을 느꼈습니다. 허탈함은 다시 회의로 이어집니다. 그 모임에 나가는 것을 당분간 쉬어야 하겠다는. 이렇듯 <교수대 위의 까치>가 내게 남긴 흔적은 허탈함과 회의와 휴식에의 욕망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