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주니어 클래식 11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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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0.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강신준(4)

두 달 넘는 기간을 쉬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두 개의 서평을 써왔습니다. 하나는 책의 내용을 대충 정리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책에 관한 내 감정이나 느낌, 떠오르는 생각들을 쓰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책의 내용을 대충 정리하는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그래서 두 번째 글을 쓰려고 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 생각도 안 떠오릅니다.^^;;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면 안 쓰면 되는데, 내 원칙을 버릴 수 없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면 안 나는 대로 글을 씁니다.^^;; 쓴 걸 보니 진짜 아무렇게나 막 쓰고 있습니다. 막 쓰다가 보니,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가 떠오르네요. 제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던 때는, 제가 고전 읽기에 도전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원전을 몇 번 읽다가 도저히 못 읽어서 해설서 위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해설서로 기초체력을 쌓고, 기초체력을 쌓은 뒤에 다시 원전을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자본> 해설서 읽기도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들은 다 그 시기에 읽는 책들입니다.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는 너무 편하게 읽어서 인상이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너무 편했기에 중간중간 계속 읽었고요, 읽다보니 네 번째 독서가 됐네요.

생각해보면 다시보기는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일단 제 기억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으면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읽다보면 아는 것도 나오고. 그래서 다시보기는 모른 것 같은데도 알고, 아는 것 같은데도 모르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또 다른 좋은 점으로는 지속적으로 뇌 속에 지식이 쌓인다는 점이죠. 한 번 읽으면 스쳐지나가는 지식이 되기 쉬운데, 재독,삼독,사독까지 하면 제 뇌 속에 그 책에 대한 지식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죠. 지식이 남아 있는만큼 더 알게 되고요. 그런데 분명 아는데 다시 읽으면 왜 새책 같은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책 내용에 관해서도 써야 하는데, 앞에 길게 써서 별로 쓰고 싶지 않네요. '<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는 '<자본>이 자본주의 교환과정에서 자본가들이 이득을 취하는 기적의 과정을 파헤친 책'이라고 말하는 책' 정도의 글은 쓸 수 있네요. 더 이상은 제 뇌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네요. 제 뇌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이만 쓰겠습니다. 앞으로 이 책의 오독 이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는 하지 말라고 해도 이것보다 더 길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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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30.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강신준(4)

총페이지:240p

읽는 기간:2021.4.26~2021.4.27

읽은 책에 대하여:

다시 자본의 세계로 돌아왔다. 자본의 세계로 돌아와서 '어서오세요.' 하고 나를 반긴 책이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였다. 책을 펼치고 내 기억과 독서노트를 뒤져봤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 책을 네 번째로 본다는 사실을.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독서모임에서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을 찾다가였다. 독서모임 사람들과 같이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을 찾다가 이 책을 만났고, 함께 읽으면서 이 책만큼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이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첫 만남이 행복해서였을까. 나는 주기적으로 이 책을 한 번씩 펼쳐서 읽어본다. 신기한 건,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는 점.^^;; 내 기억이 <자본>을 잊어갈 때 즈음에 다시 만나서 기억을 떠올리고,또다시 잊어버리면 이 책을 읽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의 반복이랄까.

반복 속에서 지속적으로 떠올리는 건 이 책의 쉬운 난이도다.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자본>을 해설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고 해야할까.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이 품고 있는 사상을, 마르크스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개미와 배짱이의 비유를 함께 섞으면서. 그럼 마르크스가 열었던 판도라의 상자는 무엇일까? 미흡하지만 네 번째 읽은 기념으로 한 번 적어본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였다. 자급자족 사회에서는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가 삶의 기반이 되고,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의 경제 생활은 생산한 사람이 자신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자기가 농작물을 심어서 키우고, 그걸 직접 먹는 식으로. 말 그대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는 자급자족. 교환이 있을수도 있지만, 그건 자급자족의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자급자족 중심의 사회는 교환 중심의 사회로 변화한다. 생산자가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고, 그걸 시장을 거쳐 소비자와 교환을 하는 식으로. 여기서 생산자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로,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통해 물건을 생산하면, 그걸 시장에서 소비자와 교환을 통해 이득을 얻는다. 마르크스의 말을 이용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자는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소비자는 시장에서 생산자가 생산한 제품을 사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소비자는 주로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분리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에서, 생산자가 이득을 얻는 건 생산과 소비의 중간 단계인 교환이다. <자본>은 그 중간 단계인 교환의 비밀을 푸는 책이고.

여기까지 말하면 대충 책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된다. 그러나 책을 네 번째로 읽은 사람인 나는 멈출 수 없다. ^^;; 이번에는 어떻게든 더 나아가보려고 한다.

교환은 분리된 생산과 소비를 연결해준다. 중요한 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합의를 통해 교환을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말로 하면, 두 사람 사이의 합의로 교환과정에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가격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서 이 책에 나온 마르크스의 사상을 더 따라가보자. 마르크스는 가격은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이 길면 상품의 가격은 비싸고, 반대로 노동시간이 짧으면 가격은 낮다. 경제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딴지를 걸 수도 았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는 거 아니야?'라고. 마르크스는 마치 그런 질문이 제기되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수요와 공급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가격을 변동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말을 따라가보면 시장에서 나타나는 부의 크기는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이걸 교환과정에 대입해보면, '생산자기 제시한 노동량을 소비자가 받아들여 상품을 구입할 때 가격이 성립한다'라는 말이 된다. 이것만 놓고보면 교환과정은, 동등한 것이 교환되는 등가교환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은,자본주의 하에서의 교환과정은 결코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본주의하에서의 교환은 등가교환이 아니라, 자본가가 이득을 얻는 불균등한 과정이 된다. 그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교환에서 자본가가 이득을 챙기는 교환의 마법은 가치를 변동시키는 생산요소에 달려 있다. 생산요소는 본래 인간의 노동력과 다른 물적 요소(원료나 기계)라는 두 가지로 구성된다. 그 중에서 노동력만이 가치를 변동시킬 수 있다. 물적 요소는 노동력이 가치를 변동시키는 걸 도와줄 뿐, 직접적으로 가치를 변동시키지 못한다. 그러니까 교환의 마법은 노동력에 달려있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력을 이용하여 교환과정에서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크게 노동력을 이용한 두 가지의 방법을 쓴다.

1.노동시간을 늘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품의 가격은 인간의 노동량이 결정한다. 상품에 들어가는 인간의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격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게 말해서 노동시간을 늘이면 된다. 노동자라는 인간을 걸레 쥐어짜듯이 쥐어짜면서. 19세기 런던에서 마르크스가 마주한 자본주의의 풍경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걸레 짜듯이 쥐어짠 풍경이었다.

1863년 6월 마지막 주, 런던의 모든 일간 신문은 '단순한 과도 노동에 기인한 사망'이라는 (...)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것은) 20세의 여성 모자 제조공 메리 앤 워클리의 사망(에 대한 기사였다.) (...) 이 젊은 여성은 매일 평균 16시간 30분 동안 노동했으며, 더구나 성수기에는 30시간 동안이나 중단 없이 노동하곤 하였다. 그리고 과로로 그녀의 노동력이 마비될 때는 종종 셰리주나 포트와인 또는 커피를 먹여가며 노동력을 되살려 내곤 하였다.(95~96)

그 당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죽을 때까지 노동시켰다. 1분 1초가 돈이니까. '1840년에 작성된 영국 의회의 보고서도 랭커셔 지역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이 겨우 15세에 불과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103)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가 아닌데 기계처럼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것에 반발이 나오지 않을리가 없다. 당연히 무수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과도한 노동시간은 '근로기준법'을 탄생시키며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 자본가들은 시간을 쓸 수 없게 되자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한다.

2.생활필수품 가격을 낮추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내린다.

이 방법은 도구를 이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구를 이용하는 식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 발전에 따라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생산력이 증대되면 물건 생산에 들어가는 시간은 줄어들고, 시간이 줄어들만큼 상품의 가격도 낮아진다. 자본가들은 도구를 이용한 생산력의 증대를 생활필수품 가격을 낮추는 데 사용하고, 생활필수품 가격이 낮아지는 만큼, 소비자들인 노동자들의 임금도 낮춰버린다.

얼핏 보면 이 방법은 아주 유용하다. 과도한 노동시간처럼 눈에 보이는 노동자들의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반발도 크지 않고, 도구의 발전 같은 기술의 증대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나 문제는 기계의 발전이 극대화되면서 인간의 노동력이 예전보다 많이 쓰이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자본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기계를 이용한 기술의 발전, 생산력의 증대에 힘을 쏟는다. 그것이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드는 지점에 다다르고,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들면 줄어들만큼 자본가들의 부의 원천인 노동시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득을 얻기 위한 행동이 자신의 부를 줄어들게 만드는 국면으로의 전환. 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은 줄어든 전체 몫에서 자신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은 자본가들의 몫을 또다시 줄어들게 만든다. 이 책에서는 이 이야기 뒤에 공황 부분으로 이어지고 마르크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평소의 나보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이쯤에서 그치려 한다.

사실 네 번째 읽은 책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번째라는 의무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무언가 하게 만들었다. 네 번째 읽었으면 이제 그만두어도 되건만, 내 예감으로 앞으로도 종종 이 책을 기회가 날 때마다 읽을 것 같다. 그때에 내가 다시 서평을 쓰게 된다면, 이것과 다른 서평을 쓸 것 같다. 그때의 분위기와 내 기분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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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 8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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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9.인간 불평등 기원론-루소

*​서평을 쓰기 전에 하는 말.

두 달 넘게 쉰 이후에 읽은 책 서평을 쓰면서, 책 제목 옆에 계속 숫자를 붙였습니다. 이게 제가 미쳐서 제 멋대로 붙인 게 아닙니다.^^;; 제목 옆에 붙인 숫자가 나타낸 것은 제가 책을 읽은 횟수입니다. 2를 붙여다는 건, 제가 그 책을 두 번 읽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두 달 넘어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미 읽었던 책들을 계속 읽어왔습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옆에 숫자가 붙지 않았다는 건, 제가 처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제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만난 재독을 하지 않은 책입니다. 저와 이 책의 만남은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마르크스 이전에 루소가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루소가 있은 뒤에 마르크스가 있었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에 루소는 마르크스의 조상격인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루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묘합니다. <자본론> 관련된 책들을 열광적으로 읽은 뒤에, 더 이상 <자본론> 관련 책들이 아닌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이 <자본론>의 조상 같은 느낌이 드니까요. 지금 저의 독서 상황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본론>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자본론>을 벗어나든, 벗어나지 않았든, 저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도 느꼈고, 읽은 뒤에도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이지만,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마르크스의 사상과 <자본론>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자연상태에서 평등하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문명사회로 삶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소유권과 사유재산제를 등장시키면서 불평등해지고, 가진 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고 안정화시키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는 루소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주장에 이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급진적인 사고와 태도도 비슷하고요. <자본론>에 나오는 사고실험 같은 경우도,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이미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자연인이 문명인이 되어 불평등해지고 예속 관계의 노예가 되었다는 주장은, 마르크스 말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수공업자가 공장제 대기업의 등장으로 자본가에게 예속된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닮아보입니다.

그러나 둘은 다릅니다. 전제군주제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입니다. 마르크스는 전제군주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힘을 쥐고 휘두르는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적인 구조에 대해서 비판의 칼을 겨눕니다. 반대로 루소는 불평등의 최후 지점으로서 전제군주제를 언급하면서 비판하고, 자연인인 인류가 그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타락했다며, 거기까지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둘의 결정적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인간입니다. 마르크스는 역사적으로 절대왕정의 몰락을 지켜본 인물로서, 왕정의 힘보다는 자본가의 힘이 강력해진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결론적으로 마르크스는 19세기의 인간이죠. 그에 비해 루소는 프랑스 대혁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절대왕정이 힘을 발휘하던 시대의 인간으로서 절대왕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절대왕정 같은 전제군주제의 힘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18세기의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사상사적으로 봤을 때, 앞에서도 말했지만 루소 없이는 우리가 아는 마르크스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비판적 사고의 흐름에서, 루소는 앞선 흐름을 만들어낸 이니까요.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그 사고의 흐름은 19세기의 비판적 사고로 이어지고, 그 세례를 받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뒤를 이어 마르크스가 등장하는 것이니까요. 물론 헤겔이나 포이어바흐를 빼고 마르크스 사상을 말할 수 없긴 하지만, 급진적인 사고의 흐름에서 루소가 마르크스에게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어찌되었든 루소라는 급진적인 사고의 앞선 흐름을 읽었으니, <자본론>으로 복귀할 시간이네요. 이제 저는 <자본론>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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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9.인간 불평등 기원론-루소

총페이지:188p

읽은 기간:2021.4.25~2021.4.26

읽은 책에 대하여:

드디어 <자본론> 관련한 책이 아닌, 다른 책을 읽었다. 그런데 분명, 다른 책인데, 왜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거지?^^;; 제목에 불평등이 들어간 것도 심상치 않고, 루소가 책에서 주장하는 것도 무언가 <자본론>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것 같고. 책이 나온 시기와 주장을 생각해보면, 19세기에 나온 <자본론>은 18세기에 나온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후손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이전에 루소가 있었다고 해야할까.

루소는 마르크스 이전에 이 책을 통해 이 사회에 발생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찾아나선다. 그는 가상의 역사를 전개하며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최초에 원시 상태의 자연인이 있었고, 그 자연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신이 발전하며 선악을 알게 되고, 자기 보존에 대한 불안 의식을 가지면서 홀로 떨어져 사는 것의 위험과 불행을 깨닫게 된다. 그 상태가 이어지면서 자연인들은 모여서 살게 되고, 모여서 살면서 타인을 의식하게 된다. 타인의 눈치를 보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고, 타인의 시선에 따라 자신을 정의하고, 타인의 마음에 들려 하는 식으로. 루소는 이것이 문명이 시작된 것이라 한다. 문명의 시작은 '타인에 대한 비교'로 연결되고, 타인에 대한 비교는 원초적인 자연인들이 가지고 있던 평등을 사라지게 만든다. 비교의식과 남들보다 우월하고 싶다는 욕구가 결합하면서. 필연적으로 소유욕이 생기고, 노동이 생긴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등장하고, 그 등장은 불평등을 탄생시키며, 더 많이 가진 자들에게 얽매인 예속 관계도 만들어진다. 정치와 사회적 구조가 탄생하고, 더 이상 인간은 자연인이 아닌 문명인의 삶을 당연시 여기게 된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법과 제도를 탄생시킨다. 불평등과 빈곤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명분과 상관없이 가진 자들이 만든 법과 제도는 불평등을 영속화시킨다. 자연상태에서 원시적이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평등하게 살았던 인류는, 문명 상태에서 불평등과 노예의 예속 관계에 얽매인 채 살아가게 된다. 루소는 이것을 인류가 자연상태와 결별한 것이라고 한다. 자연 상태의 낙원에서 추방되어 비참 속에서 허덕인다는 의미로.


루소의 주장을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보인다. 가진 자를 자본가로, 못 가진 자를 노동자로 바꾸면 마르크스의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마르크스 사상의 원시적인 형태라고 할까. 사유재산제의 탄생과 그로 인한 불평등의 탄생, 법과 제도가 사유재산제를 보호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마르크스가 루소의 영향을 받았음을 추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비록 그것이, 과학적인 관측의 결과가 아니라 가상의 사고실험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비판적 사고의 기원으로서 루소가 서구 사회에 던진 영향력은 지대하다. 급진적 사고, 급진주의의 원조로서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담고 있는 사고의 핵폭탄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며 역사의 큰 격랑을 만들어낸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그 격랑을 만들어내는 사고의 흐름으로서의 이 책을 훑어내는 것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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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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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8.자본론 공부-김수행(2)

저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시대는 확실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사상도 철학도 문화도 이론도. 저는 확실성보다 불확실성이, 안전성보다는 불안정성이, 확신보다는 회의하는 태도가 일반적인 세상에서 살며 그것을 삶의 태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세상의 흐름과 상황을 '액체근대'라는 이름으로 명명했습니다. 바우만은 무언가 확실하고 고정적인 고체 근대 세계에서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회의적인 흐름을 따르는 유동적인 액체 근대 세계로 세계가 변화해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제 삶이 그러하니까요.

한 마디로 말해 저는 액체근대를 살아가는 액체근대인입니다. 저 같은 인간에게는, 회의가 일반적이기에 확신은 드뭅니다.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설명된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는 저와 반대입니다. 그는 안정적이고 견고하고 확실성이 있었던 고채 근대 세계를 살았던 고체근대인입이다. 그의 인식 속에서 근대 세계는 정확하게 자본가와 노동자로 양분됩니다.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채로, 노동자를 임금을 주어 고용합니다. 자본가는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상태로 임금을 조절하고, 역시 최대한의 이득을 얻기 위해 노동자를 이용합니다. 동시대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정치경제학을 이용하여 자본가들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자본가는 자신들의 사상과 생각을 그 시대의 주류적 사상이자 생각으로 만듭니다. 노동자는 그에 따라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저항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것을 바꾸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가들이 가진 힘을 노동자들이 빼앗아 자신들의 힘으로 삼아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면 된다고 자신의 이상이 이루어. 너무도 확신을 가지고서요. 당연히 고체근대인에 가까운 마르스크주의자로 살아온 김수행이 쓴 <자본론 공부>도 그런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액체근대인인 제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그런 확신은 익숙한 일이 아닙니다. 1990년의 소련 몰락과 프랜시스의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출간, 2000년 초반의 닷컴 버블, 2008년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유럽에서의 극우파의 득세와 미국의 새로운 우파의 등장,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 같은 일들을 바라본 제게는 확신이라는 게 일반적인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 시대의 확신이란, 현실을 왜곡하다 못해 맹신이라는 도그마를 가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액체근대의 세계에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으니까요. 제게 혁명은 전혀 익숙한 말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의 이상을 따라 혁명을 외치던 마르크스주의는 거의 멸종한 상태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자본론 공부>가 신기했습니다. 당연하게 혁명을 외치고, 혁명을 하면 이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니까요. 물론 그 외에도 이 책의 장점은 많습니다. 앞의 세 책과 달리 이 책은 <자본론1,2,3> 권 내용을 알려주며 자본론 전체의 밑그림을 큰 틀에서 보여줍니다. 산업자본뿐만 상업자본, 금융자본, 토지자본의 행태까지 알려주면서. 실업에 대한 설명과 이윤율,기계화, 하나의 현상이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영향을 불러오는 모순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면서. 아마도 지금까지 제가 읽은 책 중 가장 <자본론>의 내용을 폭넓고 다양하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공식이나 수식이 너무 많이 나와서 오리지널 문과인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읽기 어려운 면이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단 <자본론>을 가장 폭넓게 알려주면서, 액체근대인인 저는 가지지 않은 확신으로 가득한 <자본론 공부>는 이상하면서도 신묘한 책입니다. 책의 내용이 액체가 아니라 고체에 가까우니까요. 액체근대인인 제게 고체근대인의 사상을 알려주는 '고체의 낭만'을 꿈꾸게 하니까요. 믿지는 않지만 저는 그 딱딱하고 견고한 고체의 낭만이 그립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삶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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