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 시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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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4.신들의 봉우리-유메마쿠라 바쿠 

*이 책은 오랫만에 반말로 쓰려고 합니다.
반말로 써야 이 책을 읽은 감동을 조금 더 쉽게 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2010년 읽은 일본소설 중 <하늘을 나는 타이어>와 더불어 가장 재미있었고,
인상깊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읽을때의 흡입도는 <하늘을 나는 타이어>가 더 뛰어났지만,
읽고 나서의 여운은 <신들의 봉우리>의 경우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조지 맬러리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오른 등반가들처럼,
나도 책이 거기에 있으니까 책을 뽑아들어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거기에는 그저 책이 나를 끌어들이는 중력과 읽고자 하는 내 의지의 호응이 있을 뿐이다.
책을 펼치자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신들의 봉우리,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웠던 천상의 영역인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인간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그저 묵묵히 신들의 봉우리를 올라가고 있었다.
얼어붙은 대지와 인간의 발자국을 거부하는 낯설고 거친 환경,
신들의 봉우리에서조차 인간들을 얽어매는 경제적.정치적 요소들,
그리고 인간에게 정복이라는 단어를 허락하지 않기 위해
인간을 몰아붙이는 천운이라는 요소까지
그들을 압박함에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산을 올라갔다.
책의 화자인 후카마치 마코토가 용기를 내어 그들을 따라간 것처럼,
신들의 봉우리를 올라가는 등반의 여정같은 독서의 여정을 거치며,
나도 그들을 따라올라갔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남자들의 비릿한 땀냄새를 들이마시며,
그들의 불타는 열정에 내 마음이 불타며, 그들의 산에 대한 집착에 동화되며,
그들의 고독을 함께 들이마시며, 나는 어느새 얼어붙은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아, 그곳에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오직 나밖에.
아무도 없는 그 황홀한 백색의 대지는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천상을 향해 열린 공간이었다.
그곳에 인간이 올라왔다는 의미는, 인간이 그곳을 침법했다는 의미 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올라왔고, 올라올 것이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하늘이 올라오라고 그들을 재촉하기에.
상상의 힘 때문에 그곳에 도달한 나는 그저 지그시 밑을 내려다볼 뿐이다.
그곳에 아직 올라오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조지 맬러리.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해,
대영제국이 못 밟는 땅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제국의 욕망에 이끌려
신들의 봉우리를 오른 남자.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한걸음씩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그는 몇번의 도전끝에 정상을 눈 앞에 두고
사라진다. 그가 과연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았을까?
그는 세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는 사람이 되었을까?
돌아오지 않은 이에 대한 이런 질문의 메아리는 부질없다.
하지만 이 질문은 <신들의 봉우리>로 이어진다.

하부 조지. 불운한 어린 시절을 거쳐 타고난 재능을 선보이며
산에 미쳐서 끊임없이 산을 오르는 남자.
누구보다도 뛰어난 클라이머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불운했고,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어둠의 산악인이 하부 조지다.
인간이 버리고, 이 사회가 버리고, 그렇게 미친듯이 매달리던 산마저
자신을 버린 이 불운한 남자는 그러나 타고난 근성과 열정으로 산을 올라간다.
산이,자연이,인간이 자신을 버렸지만 그 버림받음을 자신의 열정과 근성,동
물적인 재능으로 기적으로 만드는 이 남자는
이번에는 누구도 도전하지 못한 불가능한 도전에 나선다.
그것은 오직 그만이, 사회에서 버림받고,
또한 스스로 사회를 버린 이 남자이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하세 츠네오. 산이,자연이,인간이,사회가 사랑한 빛의 산악인.
누구보다도 빛났고, 누구보다도 살아생전에
화려한 업적을 쌓았던 기적의 등반가가 하세 츠네오다.
숙명의 라이벌인 하부 조지가 언제나 그의 그늘에서 헤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는 확실히 행운아가 맞다.
남부러울 것 없는 것처럼 보인 하세. 그러나 그도 언제나 하부의 어둠이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고, 바로 그것 때문에 하부의 불가능한 계획을 알고 새로운 등반에 나서다
산의 부름을 받고 숨을 거둔다. 빛나는 등반가의 어이없는 죽음.
하지만 아무리 그가 빛나더라도 산을 오르는 자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 법.
그렇게 그는 천상으로 열린 산의 눈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아 세상을 떠나갔다.

후카마치 마코토. 믿었던 애인과 친구의 배신에 충격받아
신들의 봉우리로 떠나간 산악 전문 기자.
그는 실패한 등반의 아픔을 안고,
네팔 카트만두의 거리를 헤매다 사라진 맬러리의 카메라를 발견한다.
어쩌면 맬러리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장면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는
그 카메라에 홀린 그.
그러나 그 카메라는 그의 손을 떠나가고,
그는 그것을 쫓아 다시 카트만두를 헤매다 하부 조지를 만난다.
그때부터 그는 하부 조지의 불가능한 도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는 발견한다. 자신안에 불타고 있는 산에 대한 열정을.

그들이 보인다. 그들은 지금도 올라오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영원히 올라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의 여정 자체가 위대하기에, 도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위대하고 빛난다는 사실을.
신들의 여정에 가닿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 품고 있는 그 위대한 신성이
이 세상의 어떤 별들보다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20년간에 걸쳐서 그들의 등반을 세밀하게 그려낸
유메마쿠라 바쿠의 세밀한 숨소리가 내곁에 들려온다.
이제 떠나야 할 순간이다. 올라오고 있는 그들을 놔두고 떠나는 내 발걸음.
그 발걸음을 내딛자, 나는 깨닫는다.
이것이 독서의 진정한 쾌감이라는 사실을.
신들의 봉우리를 그들과 함께 오른 강렬한 느낌이야말로 문학을 읽는
독서의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을.

'암벽에서 올려다보면 산 정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파란 하늘 뿐이다.
그 파란 하늘을 꿈꿨던가. 정상보다 더 높은 그곳.
아마 우리는 그때, 이 지상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꿈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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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
고데마리 루이 지음, 김대환 옮김 / 잇북(Itbook)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23.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고데마리 루이

불륜과 살인과 폭력과 질투와 찌질남과 비정상적인 행동이 넘쳐나는  

올해 나의 일본소설 독서편력에
드디어, 드디어 단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는 순수의 비입니다. 네, 순수의 시대가 아니라 순수의 비가 맞습니다.
불륜과 살인과 폭력과 질투와 찌질남과 비정상적인 행동을 양분삼아 자라난 올해 나의 일본소설
독서편력이라는 나무에 너무나 드물게 순수한 사랑이라는 양분이 덧대어진 거죠.
아하, 순수의 비를 맞고 순수한 사랑을 떠올리는 독서를 하다보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물론 제가 솔로로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미쳐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지극히 정상입니다.
지극히 정상으로서 순수한 사랑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이죠. 일본소설을 읽다가 너무 오랫만에
이런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만나서 너무 기분이 좋네요.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순수해서가
아니라 고데마리 루이라는 장인의 글 솜씨에 의한 것이라서 더욱 기분이 좋네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별미도 일반적인 음식을 먹다 먹어야 별미지, 별미만 먹다 보면
그건 더 이상 별미가 아니겠죠. 저의 일본소설 독서가, 특히 사랑관련 소설들의 독서가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별미 위주였기 때문에, 저에게는 이제 더 이상 별미가 별미가 아니었습니다.
불륜하면 '아!! 불륜이야!'가 아니라 '아, 불륜이구나' 정도로 그칠 정도였죠.  

제가 일본의 연애소설을
읽는다는 건 언제나 '사랑과 전쟁'의 식의 이야기만 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간간이 순수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건 정말 미약한 수준이었죠.
하지만 이 미약한 수준의 이야기가 제게 주는 힘이란 어찌나 크던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 것 같지만, 그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좋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구요.
이 책의 작가인 고데마리 루이는 한국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연애소설의 달인으로 통하는 작가입니다.
저도 처음 읽어봤는데, 이 작가의 이야기 구성 능력과 필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실로 오랫만에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가슴에 북받치는 감성의 울림이 전해지더군요.
(어쩐지 이제부터 이 작가의 작품을 찾으며 읽어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헤어진 두 연인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현실의 이야기와
헤어진 남자가 헤어진 여자를 위해 만든 동화의 내용이 교차되어 펼쳐집니다.
현실의 이야기는 덴고와 아오마메가 만나는 <1Q84>가 연상되더군요. 

하지만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두 연인이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점에서만 비슷하고,
나머지 부분에서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은 <1Q84>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Q84>와 달리 여자가 가끔씩 모르는 남자랑 만나 섹스를 하지도 않고,
남자가 미성년자인 소녀와 종교적 의식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조교제에 가까운 행위도 하지 않고,
선구라는 종교 집단의 리더가 보여주는 것 같은 파렴치한 성범죄 행위도 없고,
리틀피플이 '호우호우'라고 외치지도 않고, 

공기 번데기에서 갑자기 사랑하는 연인이 출현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책을 다 읽고 나서 '이건 뭐지?'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게 됩니다.
(<1Q84>에서는 이 '이건 뭐지?'라는 식의 모호함이 최대의 매력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은 모호함과 불확실함보다는  

정직한 스트레이트 펀치를 독자에게 날립니다.
두 사람이 사랑하고,헤어졌지만,다시 만나게 된다라는 펀치 말이죠.
하지만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라는 현실성만을 이 책이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책에는 사랑의 환상성을 강조하고, 두 사람의 사랑에 감성을 더욱 더 빛내주는 동화가 있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이 동화는 오직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쓴 동화로서, 외롭고 사랑에 상처받은
유목민과 도둑 고양이(이건 번역어인데, 길냥이로 해주면 더 좋을 것 같군요.^^)의  

슬프고,아름답고,감동적인 유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동화가 있었기에 두 사람의 사랑과 이 소설
자체의 감동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동화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바,
저는 이 동화보고 울컥 감정의 물결이 샘솟더군요.
그러나 이 유목민과 도둑 고양이의 동화는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틀속에서 바라보면  

더욱 우리의 감정을 진하게 만듭니다.  

결국 이 동화라는 게 두 사람의 사랑의 파생물이거든요.
어쨋든 사랑에 이끌려 다시 만날 수 밖에 없는 연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실로 오랫만에 연애소설에서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감정을 소중히 간직해 보렵니다. 아마도 그러다 보면 미래의 저도
누군가에게 감동적인 동화 한편 써줄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음, 욕심이 너무 큰가?

'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텅 빈 그릇이 되어줘.
그러면 넌 그 사람 평생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거야.
처음부터 내용물이 꽉 들어 찬 그릇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을 수 없겠지. ...
그릇은 속이 비어 있으니까 쓸 수 있어.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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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작은 거짓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21.달콤한 작은 거짓말-에쿠니 가오리 

<밀실살인게임>-살인,<설계자들>-살인에 이어 <좀비들>-좀비 얘기까지 갔다가
갈곳은 사후 세계나 순교,해부학의 영역일 것 같지만,
저는 과감하게 삶의 욕구 중에서 가장 생의 의지에 가까운 사랑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이야기가 순수한 사랑이나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륜이라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합니다. 역시 저라는 인간은 정상적인 이야기에 끌리지 않는 걸까요?

아니,아니 그럴리가 없습니다. 저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밝고, 화사한 세상을 꿈꾸는 인간입니다.
(윽,거짓말 하려니 갑자기 속에서 올라오네요.)
어쩌면 너무 평범하게 살아가기에 간접경험인 책에서만은 조금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이라면 가오리의 책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저는 의외로 가오리의 책도 종종 읽습니다.
 

여기서 의외라는 면이 중요합니다. 대체적으로 가오리의 책은 여성 동지들이 좋아하고, 많이 읽습니다. 그에 반해 남성 동지들은 가오리의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오리의 여린 감성과 드라마틱한 면이 없이 물 흘러가듯 흘러가는 잔잔한 일상의 묘사가 자신의 몸 속에
사바나의 전사의 피가 아직도 흐르고 있는 남성 동지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하나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가오리의 소설을 꾸준히 읽어오고 있습니다. 읽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있으면 읽게 되는 것인데요, 이게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요상합니다. 크게 끌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이상한 약을 먹은 것처럼 계속 읽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읽다보면 이게 이상하도 묘한 매력이 있는 겁니다. 미약에 취한 것처럼, 물 흐르듯이 읽다보면 어느새 다 읽어버리는 소설이 저한테는 가오리의 소설인 셈이죠.

저는 이번에도 그렇게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이 <달콤한 작은 거짓말>입니다.
이 책은 <빨간 장화>의 뒤를 이은 결혼에 관한 연작 장편 소설인데요, 그 내용이 가오리 특유의
미묘한 감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실 <빨간 장화>는 큰 변화없이 담담하게 흐르는 권태기 부부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서 드라마틱과는 거리가 있는, 한국의 주말 드라마와 아침 드라마에 도저히 쓸 수 없는 너무나도 소소한 작품입니다.


그에 비해 <달콤한 작은 거짓말>은 잔잔하게 흐르다가 갑자기 반전의 신호가 울려 펴지는 작품입니다. 앞 부분에 남편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이미 어느 정도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는데, 중반부를
넘어가면 그 이상한 기운이 현실이 되어, 부부는 거짓말이 일상이 된 거짓투성이 결혼 생활을 이어갑니다.

자신들만의 고독하고 쓸쓸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부부의 메마른 생활에 불륜이라는 비가 내린 것이죠. 부부에게 그 불륜은 달콤합니다. 불륜은 권태로운 부부의 결혼 생활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물론 부부는 서로의 불륜을 감춥니다.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죠. 이렇게 부부는 자신에게
달콤한 작은 거짓말로 결혼 생활의 균형을 맞추어 갑니다. 이 부부에게 지금의 결혼이란 거짓의 토대 위에 축한 환상의 성인 셈이죠.
'사람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해. 혹은 지키려는 사람에게.'

통념상으로 생각해본다면,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결혼 생활. 그러나 이것 또한 결혼의 서글픈 진실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서늘해집니다. 세상의 모든 부부가 반드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으리란 말을 자신있게 내뱉을 수 있을까요? 세상 모든 부부가 낭만적 열정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을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우리는 쉽게 '네'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결혼에 대해 씁쓸한 감정이 드는군요.
하지만 씁쓸하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랑 곁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혹은 그녀의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가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거짓말을 할때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게 사랑이고, 결혼의 의미 아닐까요?

씁쓸하게 결혼의 뒷맛을 씹다 보니, 저는 거짓말 투성이 책을 덮고 있더군요. 아아, 저는 이제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오고 보니 제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더군요.
거짓말로 넘쳐나도 좋으니 누군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잘못된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 생각에 제가 젖은 것은 가오리의 소설이라는 미약에 제가 이번에도 넘어갔기 때문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다음 번에는 내 핏속의 사바나 전사를 소환해서 그때만은 넘어가지 않게 해보렵니다. 물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만의 달콤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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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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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좀비들-김중혁 

이번에는 살아있는 시체들인 좀비들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살인,살인 하다가 그 다음이 시체이야기라니..
이러다가 다음에는 해부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는 유령이야기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시한번 말하는 데, 이런 순서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런 식의 순서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저를 이상하게 보지 말아주세요. 저는 살인이나 피 이야기에 질색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좀비들>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좀비들>은 김중혁이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입니다. 
저는 이 작가의 단편집 두권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펭귄뉴스>와 <악기들의 도서관>이 그 책들인데요,
톡톡 튀는 상상력과 기발한 이야기 구성 능력에 감탄했었습니다.
특히 <악기들의 도서관>의 몇몇 단편들은 정말 기발하고 젊은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독서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중혁이라는 작가가 내놓은 최초의 장편소설인 <좀비들>을
'김중혁이 만든 좀비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라는 기대를 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제가 처음 가지고 있었던 질문은
'김중혁이 만든 좀비는 뭔가 다르다'라는 문장으로 변화되더군요.
 

그러면 김중혁이 만든 좀비는 어떤 점이 다른가?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좀비들이 단순히 죽이기 위한 괴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이오 해저드><사일런트 힐> 같은 게임부터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나는 전설이다>같은
영화에 이르기까지의 좀비들은 죄다 흉측하고,사고능력이 없고,오직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존재하는 괴물들 입니다.
그것들은 느릿느릿 움직이며 사람들을 죽이고,공포심을 갖게 하는,
이해할 필요 없는 이물질로만 존재하며, 언제나 인간들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좀비들>의 김중혁이 이야기하는 좀비들은 오직 인간들을 죽이려하는 괴물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죽었지만, 완벽하게 죽지 못한 존재로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들은 한때는 우리의 형제.자매.부모.자식이었던 존재들로서,
우리가 사랑했던 존재로서, 우리의 삶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과거의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망각하고 사는 죽음을 상기시키는 존재이고,현재만 보고 매달리는
우리에게 잊혀진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죽고 나면 그만이거든. ... 잊혀지고 나면 모든 게 똑같아지는 거고,
똑같아지고 나면 아무도 기억을 못해.'  

<좀비들>에서 좀비들은 미약하고,힘없고,무기력하고,불쌍하고,슬픈 존재들입니다. 
바라보고 있으면 애잔하고,처량하고,슬퍼지는 존재들이 김중혁의 <좀비들>인 것입니다.
소설에서 <좀비들>은 괴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좀비들을 이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좀비들을 마구 죽임으로서 막강한 군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들이 더욱 괴물에 가까운 존재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김중혁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바꾸어 좀비들에게 슬픈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좀비들을 죽이고,
기뻐하는 인간들과 그에 반대해 좀비들을 살리려 하는 인간들을 포함한
소설 속 모든 인간들의 삶까지 함께 쓸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어쩌면 김중혁이 말하는 대로 우리네 삶이란 겨우 힘없는 좀비 따위나 죽이며 만족을 얻는,
분명히 과거가 존재함에도 과거같은 것은 없다는 듯이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그런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삶이 우리네 삶이라면, 우리는 이제 조금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체불명의 좀비가 나타나면
먼저 죽이려 하거나,무서워하지 말고,
먼저 저게 뭔지 관찰해보고 판단해 보는 자세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만약 우리가 그 정도의 포용력과 열린 자세를 가진다면,
우리네 삶이 조금이나마 덜 쓸쓸해지지 않을까요.
 

저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좀비가 나타난다면 먼저 그게 어떤 존재인지 파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고나서 좀비가 위험하다면 미친 듯이 도망치겠습니다.
도망치고 나서 저를 구해줄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요비치 같은 여전사를 찾아보겠습니다.
(음, 이런 생각을 하니 웬지 덜 쓸쓸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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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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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설계자들-김언수 

<밀실살인게임>에 이어 또다시 살인과 관련된 책에 관해 글을 써보려 합니다.
물론 저는 살인 관련 책만 전문적으로 읽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읽었던 책들을 무작위로 골라서 적어나가다보니 어쩌다가 살인관련 책이
연이어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이점 오해하지 마시고 말아주세요.^^;;
(저는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아니랍니다. ㅠㅠㅠㅠ)

<밀실살인게임>과 <설계자들>은 전혀 다른 책입니다.
두 소설이 살인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구성과 성향을 가진 소설입니다.
<밀실살인게임>이 살인 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고,
살인의 과정과 살인의 트릭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설계자들>은 살인 자체보다는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들의 슬픈 삶에 포커스가 맞춰진 소설입니다.
요약해보면, <밀실살인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보다 살인이고
(저는 이게 진정 <밀실살인게임>의 끔찍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계자들에서 중요한 것은 살인보다는 인간입니다.
인간과 인간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설계자들>인 셈이죠.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끔찍하기 보다는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주어진 삶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설계의 덫에서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래생의 삶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슬픔의 정서를 샘솟게 합니다.
이건 정치적이거나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정서적인 이야기입니다.
거대한 설계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밟으면 꿈뜰대는 지렁이처럼 꿈뜰대고, 발버둥치는 래생의 삶은
지배와 피지배.계급.이데올로기.공공성.사회계약.담론.경제논리같은
개념들과 연관 있기 보다는 인간 생존의 문제,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기본적인 의지와 더욱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래생은 단지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되는 상황인거죠.
그러니 몸부림치고, 몸부림치다 보니 그게 또다른 비극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구조가 평범한 이들의 마음에
정서적 울림을 던지는 것입니다. 설계자들은 그런 정서적 울림을 가진 실존적인 소설인 셈이죠.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없어.
맨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겠지. ...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그 의자가 모든 걸 결정하지.'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정서적 울림이란 게 그냥 나올리 없습니다.
작가의 역량이 없다면 울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계자들>은 그런 점에서 아주 훌륭합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올해 본 한국소설 중에서 이 <설계자들>은 가장 흡입력이 있었습니다.
읽는 내내 손에 접착제를 붙히게 만든 것처럼, 책에 얼굴을 갖다 붙이게 하는 자력이 있는 것처럼,
<설계자들>은 충실하게 저를 이야기의 세계에 묶어두었습니다.
너무 전형적이라 자칫하면 고리타분하고,지루할 수 있는
살인자와 살인자를 조종해서 살인을 이뤄내는 설계자들의 이야기를 <캐비닛>이라는 독특한 상상력의 장편소설 하나만 달랑 쓴 소설가 김언수가 훌륭하게 요리해서
재미있는 이야기 결과물을 만든 것이죠.
 

무겁게만 가면 한 없이 무거워질 수 있는 살인과 살인의 설계,
그리고 그것들을 용인하고 이용하는 구조의 문제를 단지 무겁지만은 않게, 
그렇다고 또 한없이 가볍지도 않게 균형을 잡은데다, 거기에다 마지막에 가서
따스한 인간의 이야기를 집어넣은 소설가 김언수의 노력이 빚은 게 <설계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담없이 그가 설계한 래생의 이야기를 즐기면 됩니다.
(물론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건 취향과 팔자소관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저는 <설계자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고,즐거웠습니다.
설계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빠진 킬러 래싱의 몸부림,
그 불가능을 향한 시시포스의 몸부림에서 바라본 시도 자체의 위대함.
그 위대함이 주는 깊은 여운에 젖어 다시 일상으로 나가볼렵니다.
그 일상이 일상의 설계자들에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 <설계자들>과 가장 비슷한 소설은 <컨설턴트>입니다.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해보자면 <컨설턴트>가 <설계자들>에 비해 조금 더 정치적이고,
<설계자들>은 <컨설턴트>에 비해 훨씬 더 인간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만간 <컨설턴트>리뷰도 써볼 예정입니다.
(계속 이어서 쓰기에는 <컨설턴트> 도 살인이야기라서 무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정상이기에 살인 이야기만 계속 쓰는 게 찔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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