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 시작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4.신들의 봉우리-유메마쿠라 바쿠 

*이 책은 오랫만에 반말로 쓰려고 합니다.
반말로 써야 이 책을 읽은 감동을 조금 더 쉽게 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2010년 읽은 일본소설 중 <하늘을 나는 타이어>와 더불어 가장 재미있었고,
인상깊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읽을때의 흡입도는 <하늘을 나는 타이어>가 더 뛰어났지만,
읽고 나서의 여운은 <신들의 봉우리>의 경우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조지 맬러리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오른 등반가들처럼,
나도 책이 거기에 있으니까 책을 뽑아들어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거기에는 그저 책이 나를 끌어들이는 중력과 읽고자 하는 내 의지의 호응이 있을 뿐이다.
책을 펼치자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신들의 봉우리,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웠던 천상의 영역인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인간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그저 묵묵히 신들의 봉우리를 올라가고 있었다.
얼어붙은 대지와 인간의 발자국을 거부하는 낯설고 거친 환경,
신들의 봉우리에서조차 인간들을 얽어매는 경제적.정치적 요소들,
그리고 인간에게 정복이라는 단어를 허락하지 않기 위해
인간을 몰아붙이는 천운이라는 요소까지
그들을 압박함에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산을 올라갔다.
책의 화자인 후카마치 마코토가 용기를 내어 그들을 따라간 것처럼,
신들의 봉우리를 올라가는 등반의 여정같은 독서의 여정을 거치며,
나도 그들을 따라올라갔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남자들의 비릿한 땀냄새를 들이마시며,
그들의 불타는 열정에 내 마음이 불타며, 그들의 산에 대한 집착에 동화되며,
그들의 고독을 함께 들이마시며, 나는 어느새 얼어붙은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아, 그곳에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오직 나밖에.
아무도 없는 그 황홀한 백색의 대지는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천상을 향해 열린 공간이었다.
그곳에 인간이 올라왔다는 의미는, 인간이 그곳을 침법했다는 의미 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올라왔고, 올라올 것이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하늘이 올라오라고 그들을 재촉하기에.
상상의 힘 때문에 그곳에 도달한 나는 그저 지그시 밑을 내려다볼 뿐이다.
그곳에 아직 올라오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조지 맬러리.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해,
대영제국이 못 밟는 땅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제국의 욕망에 이끌려
신들의 봉우리를 오른 남자.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한걸음씩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그는 몇번의 도전끝에 정상을 눈 앞에 두고
사라진다. 그가 과연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았을까?
그는 세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는 사람이 되었을까?
돌아오지 않은 이에 대한 이런 질문의 메아리는 부질없다.
하지만 이 질문은 <신들의 봉우리>로 이어진다.

하부 조지. 불운한 어린 시절을 거쳐 타고난 재능을 선보이며
산에 미쳐서 끊임없이 산을 오르는 남자.
누구보다도 뛰어난 클라이머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불운했고,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어둠의 산악인이 하부 조지다.
인간이 버리고, 이 사회가 버리고, 그렇게 미친듯이 매달리던 산마저
자신을 버린 이 불운한 남자는 그러나 타고난 근성과 열정으로 산을 올라간다.
산이,자연이,인간이 자신을 버렸지만 그 버림받음을 자신의 열정과 근성,동
물적인 재능으로 기적으로 만드는 이 남자는
이번에는 누구도 도전하지 못한 불가능한 도전에 나선다.
그것은 오직 그만이, 사회에서 버림받고,
또한 스스로 사회를 버린 이 남자이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하세 츠네오. 산이,자연이,인간이,사회가 사랑한 빛의 산악인.
누구보다도 빛났고, 누구보다도 살아생전에
화려한 업적을 쌓았던 기적의 등반가가 하세 츠네오다.
숙명의 라이벌인 하부 조지가 언제나 그의 그늘에서 헤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는 확실히 행운아가 맞다.
남부러울 것 없는 것처럼 보인 하세. 그러나 그도 언제나 하부의 어둠이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고, 바로 그것 때문에 하부의 불가능한 계획을 알고 새로운 등반에 나서다
산의 부름을 받고 숨을 거둔다. 빛나는 등반가의 어이없는 죽음.
하지만 아무리 그가 빛나더라도 산을 오르는 자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 법.
그렇게 그는 천상으로 열린 산의 눈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아 세상을 떠나갔다.

후카마치 마코토. 믿었던 애인과 친구의 배신에 충격받아
신들의 봉우리로 떠나간 산악 전문 기자.
그는 실패한 등반의 아픔을 안고,
네팔 카트만두의 거리를 헤매다 사라진 맬러리의 카메라를 발견한다.
어쩌면 맬러리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장면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는
그 카메라에 홀린 그.
그러나 그 카메라는 그의 손을 떠나가고,
그는 그것을 쫓아 다시 카트만두를 헤매다 하부 조지를 만난다.
그때부터 그는 하부 조지의 불가능한 도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는 발견한다. 자신안에 불타고 있는 산에 대한 열정을.

그들이 보인다. 그들은 지금도 올라오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영원히 올라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의 여정 자체가 위대하기에, 도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위대하고 빛난다는 사실을.
신들의 여정에 가닿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 품고 있는 그 위대한 신성이
이 세상의 어떤 별들보다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20년간에 걸쳐서 그들의 등반을 세밀하게 그려낸
유메마쿠라 바쿠의 세밀한 숨소리가 내곁에 들려온다.
이제 떠나야 할 순간이다. 올라오고 있는 그들을 놔두고 떠나는 내 발걸음.
그 발걸음을 내딛자, 나는 깨닫는다.
이것이 독서의 진정한 쾌감이라는 사실을.
신들의 봉우리를 그들과 함께 오른 강렬한 느낌이야말로 문학을 읽는
독서의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을.

'암벽에서 올려다보면 산 정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파란 하늘 뿐이다.
그 파란 하늘을 꿈꿨던가. 정상보다 더 높은 그곳.
아마 우리는 그때, 이 지상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꿈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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