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별을 먹자 - 일본 세계숨은시인선 4
나나오 사카키 지음, 한성례 옮김 / 문학의숲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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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별을 먹자 - 나나오 사카키

 

 

1.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들을 좋아한다. 신선 같은 품격을 풍기며 아이 같은 동심의 세계와 이 세상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이백의 한시와, 순수한 열정과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이상을 가열차게 노래하는 월트 휘트먼의 시와, 평범한 일상의 삶을 소재로 삼아 순수하고 아이같은 삶의 면모를 노래하는 프랑시스 잠의 시와, 극도의 불운하고 슬픈 삶을 살았지만 일상의 평범한 사물과 삶을 통해서 삶의 풍경을 슬프지만 즐겁게 만드는 힘을 간직한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같은.

 

 

이제 여기에 또 한명의 시인을 추가해야 겠다. 나나오 사카키. 우리 별을 먹자고 외쳤고, 죽을 때까지 전세계를 무소유로 돌아다니며 배낭 하나를 유품으로 남겼으며, 지구와 지구의 자연과 지구의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인간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과 그 생명들이 포함된 지구와 지구를 포함하는 모든 별들이 포함된 우주가 하나라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아서 그 하나됨을 삶으로서 표현했으며, 전쟁과 살육과 폭력과 환경 파괴로 얼룩진 현대 문명을 풍자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해서 그 감정을 시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한,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는, 자유인이자 방랑자이자 무소유의 철학자이자 실천가이자 전 세계를 고향으로 삼은 유목민이자 자연인인 시인.

 

 

2.

그의 시를 읽었다. 정확하게 읽었다는 표현보다는 만났다는 표현이 옳겠다. 삶과 시가 하나가 되는 시인이 ‘걷기의 신’인 발바닥 따라서 걸어다니며 움직인 삶에서 흘러나온 것들을 노래라는 흔적으로 남겼고, 나는 거기에 운좋게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운명의 힘 앞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내게 남은 것은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삶을 맛보고 느끼며, 그의 삶과 시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와 같이 우리 별을 먹었고, 그와 같이 걸어다녔고, 그와 같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고하고 상상했으며, 그와 같이 자연을 집이자 벗이자 연인으로 삼았으며, 그와 같이 자연의 아픔을 공감하며 아파했으며, 그와 같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문명사회의 모순적인 면모를 풍자하고, 그와 같이 숲에 살며 자아와 자연의 부자가 되었고, 그와 같이 세상을 세상 그 자체로 느끼려 했다.

 

 

자연과 세상과의 하나됨이 불가능 현대라는 시대에 이런 경험은 그 자체가 기적이고 경이다. 아니, 그것은 선물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났지만 자연에서의 삶은 지속되고 있는 한 시인이 후대에게 보낸 선물. 평가하거나 분석하려고만 하는 사람은 느낄 수 없는 마음과 마음, 삶과 삶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마음과 삶의 선물.

 

 

3.

어느새 시인은 나에게 너가 되어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타인이 아니라 내 곁에 서 있는, 나와 함께 하는 너. 당신이 아닌 ‘너’라는 의미 속에, 내가 시를 읽으며 느꼈던 행복과 즐거움과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서 외쳐본다. 너라는 존재가 된 시인이여, 살아줘서, 시를 남겨줘서, 그것을 내게 가닿게 해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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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펭귄클래식 9
생 텍쥐페리 지음, 윌리엄 리스 해설,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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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생텍쥐페리

 

우리는 모두 대지의 자식이다. 대지의 자식이자 흙의 자식인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 흙의 결집체인 대지로 흘러들어가 생을 마감하게 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대지에 묶여 있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대지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 발버둥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지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하늘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몸짓이, 하늘을 넘어 우주를 꿈꾸고 우주로 향하는 행동이, 단지 대지에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행동들은, 그 몸부림들은, 그 몸짓들은, 대지로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룰 수 없는 지평으로의 발돋움은 우리 삶의 시선을 확장시키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지속적으로 대지를 벗어나려는, 불가능하지만 유의미한 행동을 이어나간다. 인간의 역사에는 그런 행동들이 무수히 아로새겨져 있다.

 

 

대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 세상의 모든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이는 대지가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물과 겨룰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p.9)

그러나 때때로 대지에서 태어났지만, 대지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분명히 대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대지의 자식에 어울리기 보다는 대지를 벗어난 곳들에 어울리는 존재들이다. 존재의 근원이 다른 곳에 있는 듯, 그들은 끊임없이 대지를 벗어나 자신의 존재에 어울리는 곳으로 나아간다. 생텍쥐페리. 그도 대지에서 태어났지만 대지의 자식에 어울리기 보다는 다른 곳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그는 하늘을 꿈꾸며 계속해서 하늘을 날아다녔고, 지속적으로 하늘을 묘사하고, 하늘에 관련된 삶에 대해서 글을 써나가면서 자신이 하늘에 어울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늘의 자식 생텍쥐페리.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늘의 자식 생텍쥐페리는 하늘을 날면서 하늘뿐만 아니라 대지도 끊임없이 바라봤다. 하늘의 자식으로 하늘을 날 수밖에 없지만, 대지의 삶이라는 중력에 이끌리는 역동적이고 모순적인 그의 삶. <인간의 대지>는 생텍쥐페리의 그 모순적인 삶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기록이다.

 

 

생텍쥐페리는 하늘을 날아야 한다는 자신의 숙명을 따라서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대지를 바라본다. 그의 눈 아래에 펼쳐진 대지. 아름답고, 순수하고, 장엄하고, 놀랍고, 위험하고, 신비하고, 이상하고, 숭고한 대지. 벗어나고 싶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고, 인간을 묶어두면서도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용인하는 넓고 넓은 대지. 그에게 그 대지는 그저 그런 대지였지만 또한 인간의 대지였다. 그 자신이 살아가는 대지이자 그 자신이 바라보는 대지이자 그 자신을 얽어매는 대지이자 벗어나고 싶은 대지이자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대지. 인간의 대지는 그에게 감옥이자 낙원이었고, 유배지이자 은신처였다. 저주이자 축복인 대지에서의 삶을 극복하고자 선택한 하늘에서의 삶도, 대지에서의 삶의 모순적인 역동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생텍쥐페리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날고, 날고, 날고, 또 날았다. 그리고 그 삶을 쓰고, 쓰고, 쓰고, 또 썼다.

 

 

대지에 저항하면서 끊임없이 대지를 바라보는 비행사의 삶을 살면서 보고 듣고 겪고 느낀 것들에 대한 기록이자 그런 삶의 총체적 발자취로서의 글인 <인간의 대지>는 서정적인 철학의 대지이자 성찰적인 아름다움의 하늘이 펼쳐진 책이었다. 비행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생과 사를 경계를 넘나들고,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동료들과 살면서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것이 삶이 된 남자의 삶은 당연하게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삶의 철학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서정적인 글이 되어 표현된다. 그것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삶의 모습이자 현재라는 고정된 시간을 벗어나서 바라보는 삶의 모습이었다. 그건 아름답지만 깨달음을 주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의 충격이었다.

 

가장 위대한 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으며 가장 작은 것에 의해서도 포용되는 것, 그것이 신적인 것이다.(p.7)

나도 대지를 벗어나고 싶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대지로 상징되는 삶의 중력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삶은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삶의 관성에 찌들어갈수록 삶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질수록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닫힌 순환. 여기서 맴돌다 참을 수 없을 때 <인간의 대지>를 펼쳐든다. 책 구절구절, 구석구석 마다 삶의 닫힌 순환을 깨부수는 힘이 스며 있어 그것이 마음으로 파고들어 삶의 활력이 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대지>가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벗어남과 더불어 되돌아감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 이 삶의 지혜를 절절히 전해주는 <인간의 대지>를 읽다보면 삶의 중력이란 삶에서 벗어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책을 덮으면 내가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 무섭지만 친근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새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향하고 있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인간의 대지’를 떠나 ‘나의 대지’로 돌아간다. 그런데 문득 또다른 깨달음이 떠오른다. <인간의 대지>를 읽는 것이 나만의 비행이라는 깨달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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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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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배명훈

 

2013년의 새해가 밝았다. 극심한 정신적인 충격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 새해가 전혀 새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전과 다름없음을, 증명하는 건 내가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과 다름없이 계속해서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새해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책들은 스티븐 킹의 <11/22/63 1>과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배명훈의 <은닉>,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횔덜린의 <휘페리온>이다. 이 중에서 <황야의 이리>, <인간의 대지>, <휘페리온>, <11/22/63 1>은 나중에서 다시 글을 쓰기로 하고 먼저 <은닉>에 대해 말해보겠다.

 

배명훈의 장편 SF 소설 <은닉>은 거짓이 가득한 세상을 작가 자신이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SF적으로 형상화한 소설이다. 거짓이 가득해서 진실을 뒤덮고, 거짓이 또다른 거짓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거짓이 진실의 자리를 꿰차는, 이 정보 과포화 사회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을 은닉하며 거짓을 통해서 상대방을 이용하는 이들의 얘기인 것처럼 우리에게 전달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인 한 여자를 지키려는 킬러와 자신의 모든 것을 은닉하고 숨어 살면서 의중의 계획을 숨기고 있는 여자와 킬러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걸고 킬러를 돕지만 역시 진실을 은닉하고 있는 킬러의 동성친구, 그리고 역시 자신의 진짜 계획을 은닉한 채 이들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는 세력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기술은 발달했지만 인간적인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대 사회의 앙상한 몰골을 드러낸다. 발달된 과학기술을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인간 본연의 권력욕과 지배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모순적인 모습이 세 사람의 슬픈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과거와 인간적이 본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현재가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라면 , 우리가 가야하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 우리는 과연 달라질 수 없는가 하는 질문. 이 질문은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뇌리를 맴돌고 있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작가가 이 소설에서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악마를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이미 <신의 궤도>에서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신을 SF적으로 형상화했던 작가는 이 작품에서 악마의 SF적 형상화에 도전한다. 그 도전의 끝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건, 현대의 발달된 기술과 정보의 집약체인 창조물과 인간의 유전자에 내재한 본성과 만나서 빚어진 악마의 모습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그것을 이용해서 얻은 정보가 집약되어 만들어진 창조물과 인간의 유전자에 숨겨져 있던 본능이 만나서 빚어진 악마의 모습은,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권력의지 그 자체였다. <은닉>에서 말하는 악마란 순수한 지배욕과 권력욕 덩어리인 것이다. 작가는 니체가 언급했던 권력의지의 순수한 구현에서 악마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덧붙여 생각해야 할 사실은 그 악마의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악마가 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 모든 애기들은 문학이라는 샘으로 모여든다. 거짓과 진실, 은닉, 현대 사회의 앙상한 몰골, 악마, 권력의지 같은 것들은 문학이라는 샘으로 모여들어 용해되어서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으로 형상화된다. 거기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삶이고 그 삶에서 생생히 빛을 발하고 있는 만남과 이별, 진실한 사랑과 희생 같은, 너무도 낡고 낡았지만 여전히 인간과 인간의 삶에서 보물같은 소중한 인간적인 가치였다. 결국 거짓과 진실이 어떻고, 은닉이 어떻고, 현대 사회의 앙상한 몰골이 어떻고, 악마와 권력의지가 어떻고를 떠나서 작가는 아직도 빛이 바래지 않은 인간적인 가치들을 말하고 있다. 과거와 인간적인 본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현재가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라고 해도 우리 곁에는 우리를 빛나게 할 수 있는 인간적인 가치들이 있기에 그것에 희망을 걸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희망을 본다. 절망을 은닉하고, 희망을 바라보고 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얻는 것이다. 살면서 절망을 맞본다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이 절망과 희망의 변주곡을 삶으로서 받아들이고 죽을 때까지 희망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 사실 그건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삶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삶을 살아가겠다. 그게 내가 선택한 삶이고 인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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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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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전1

고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결점이 없는 것일까? 고전은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이 되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고전은,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점을 덮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걸작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고전을 만날 때는 그 결점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고전이 가지고 있는 고전 특유의 강력한 힘에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고전의 힘에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 고전의 힘에 끌릴 수 있는 사람이, 고전의 힘에 끌릴 수 있는 상태에서 고전을 만나야 고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만남이 언제나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고전을 만나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실낙원>, <오이디푸스 왕> 같은 이름이 너무나 유명하지만,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작품들을 읽는 것처럼. 정확하게 말하면 이름과 내용은 익숙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들을 읽었느냐의 여부는 작품의 유명세와 별개다. 이 작품들을 읽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책의 이름을 아느냐와 상관없이 책을 꺼내어 읽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런 작품들을 읽지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을 읽기 위해서는 작품을 읽고자 하는 의지와 더불어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읽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지가 있다고 해도 고전을 읽기는 쉽지 않다. 먼저 고전의 특성상 과거에 만들어진 작품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특성을 품고 있어서 그 시대와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접근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고전의 경우에는 그 나라 특유의 분위기와 상황을 담고 있어서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번역의 문제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더 고전 읽기는 어려워진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읽어나간다면, 우리는 고전의 속살에 가닿을 수 있다. 우리가 고전의 속살에 가닿을 수 있다면 고전은 자신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고전은 진짜 너무나 유명하지만 읽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매혹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

 

<신곡:지옥편>은 충분히 매혹적인 작품이다. 중세를 넘어서서 근대를 연 지식인 단테의 대표작답게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담으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사상적 궤적을 자신의 상상력에 맞춰서 재구성하여 기독교적인 틀 속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에는 중세의 향기와 중세를 넘어서서 근대로 넘어가려는 시대의 기운이 모두 꿈틀거리고 있다. 중세다운 중세와 중세를 넘어서려는 시대의 기운이 어른거리는 작품의 힘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한국인을 14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데려가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 타임슬립의 힘 앞에서 나는 즐거워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힘은 중세적인 편협함도 충분히 품고 있다. 그 편협함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도 고전을 읽으면서 경험하는 타임슬립의 힘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곡>에 대해서 나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아직 연옥편도, 천국편도 읽지 못한 나에게 이 작품에 대한 총평이나 종합적인 감상을 표현하는 것은 성급할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작품인 연옥편으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따라서 넘어가보려 한다.

 

버전2

지옥, 너무나 두려운 단어이다. 과거에 개신교에 속했던 유치원에 다녔던 나에게는 지옥이라는 말 자체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유황불이 활활 끓고, 악마와 마귀들이 죄지은 영혼을 고문하면서 괴롭히고, 영혼들이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그 장소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 시절 상당히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개신교의 틀을 벗어나서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게 된 지금의 나에게 지옥이란 말은 과거와는 다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지옥이란 과거의 낡은 기억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 무언가다. 동시에 그것은 나의 추억을 자극한다. 과거의 아련함이 느껴지는 단어. 지옥이라는 말에서 과거의 아련함을 느낀다는 상황이 이상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지옥을 생각하면 과거의 나가 떠오른다. 겁많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순수했던 한 시절의 상징과도 같은 단어.

 

단테의 <신곡:지옥편>은 과거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은 책이다. 분명히 과거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로 열어놓은 책. 과거의 공포가 스며있지만, 나의 과거와는 다른 단테의 형상과 14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황이 아로놓인 이 책은 단테 상상력의 문학적 형상화이면서 나의 과거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기회였다. 인간 삶의 연장선상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이지만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틀 속에서 구현된 단테의 지옥은 나의 과거를 헤집고 짜깁기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어떤 죄인지가 더 중요하며, 그 죄 속에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기에서는 공포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슬픔과 아픔, 세계관과 이 세계의 현실, 구원의 몸부림이 더욱 더 중요했다. 죄를 넘어서서 구원의 가능성을 볼 것. 아직 끝나지 않는 삶의 지평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을 것. 단테가 속삭이는 이 말들 속에서 나는 새롭게 지옥을 본다. 아니 나의 과거를 본다. 거기서 구원을 찾을 것. 삶의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과 구원을 꿈꾸어 볼 것. 그러면 언젠가 나에게도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가 나타나지 않을까? 아직도 끝나지 않는 단테의 여정과 함께하며 그 가능성의 지평을 찾아볼 생각이다. 언젠가 나타날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를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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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달빛 민음사 세계시인선 35
롱펠로 지음, 김병익 옮김 / 민음사 / 197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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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달빛-롱펠로

 

는 음악이 되고 싶어 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시는 음악이 되고 싶어 했다. 과거에 음악과 하나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음악과 분리되어 나와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시는 계속적으로 음악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리듬과 운율을 통해서 시는 음악이 되려는 시도를 지속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시가 음악이 되는 순간 시 자체의 고유한 영역이 사라지고 음악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가 음악이 되면 시는 사라진다는 슬픈 진실은, 시가 품고 있는 음악이라는 시원에 대한 욕망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추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영원히 필패라는 것을 알기에 시는 음악이 되고 싶었나 보다. 문학사에서 많은 시인들이 걸어간 이 불가능의 여정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실패의 기억처럼 보인다. 불가능하기에, 필패할 수밖에 없기에 도전했고, 실패했지만 그 여정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운 별처럼 빛나는 기억들.

 

그러나 19세기 상징주의를 거쳐서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의 등장은 시가 지속적으로 품어 왔던 음악에 대한 욕구가 사그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모더니스트들은 시가 음악이 아니라 시 자체가 되기를 바랐고, 철저한 이성적 창조 행위를 통해서 시가 하나의 이성적이고 상징적인 구조가 되게 만들었다. 아니면 그들은 시가 음악이 아니라, 그림이 되기를 원했다. 시에 대한 인식의 변하는 시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뒤엎고 새로운 평가가 득세하게 만들었고, 그 와중에서 기존에는 최고의 평가를 받던 시인들에 대한 평이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이 경향의 변화에서 최대 피해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19세기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시인 롱펠로였다.

 

‘그리고 시인의 노래가

음악처럼 내 머리를 꿰뚫었고

밤이 그 모든 은총과 신비를

내게 풀어주었네.‘

 

에드거 앨런 포가 무명과 가난의 설움 속에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고, 절친이었던 호손이 가난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고,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철저한 무명의 그림자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롱펠로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를 거쳐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누린 시집의 저자로서 인세로만 떵떵거리며 살면서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바다 건너 영국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라는 두 개의 대학 모두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영국에 갔을 때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그를 반겼으며, 사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묘역에 흉상이 세워진 미국 최초의 시인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이 모든 건 내면의 감정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은 언어를 구사하고, 거기에 실생활에 적용될 만한 교훈을 포함시키면서 리듬감과 운율이 살아 있는 그의 시가 동시대 대중의 취향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음란하지도 않고, 포처럼 기분이 나쁘거나 어둡지도 않고, 멜빌처럼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호손처럼 깐깐한 윤리를 강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충분히 아름다우면서도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글을 쓰고, 충분히 실생활에 쓰일 교훈을 주면서 음악성이 살아 있는 그의 시를 동시대 대중이 사랑하고 아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러나 그 당연함은 세기가 바뀌고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신비평이 득세하는 모더니즘의 시대가 오면서 큰 약점으로 모습을 바꾼다. 포처럼 뭔가 특별하지도 않고, 멜빌처럼 해석의 다양성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호손처럼 윤리의 문학적 형상화에 큰 공을 들인 것도 아닌 롱펠로의 시는 개성도 없고, 철학적인 통찰력도 없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면도 약하고, 언어적 조형성도 예술이라고 보기에는 허술한 면이 강하고, 고전 작품의 표현이나 문구를 사용할 때 그냥 그대로 쓰는 엉성한 면도 있고, 메시지를 그냥 그대로 전하는 표어 같은 면까지 있기에, 혹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망각의 그늘로 사라진다. <검은 고양이>,<주홍 글씨>,<모비 딕>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때, 롱펠로의 시들은 잊힌 채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그의 시집을 읽지 않았다면 롱펠로라는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를 황홀케 하는 것은 미지의 신비.

우리는 여전히 변덕스럽고 욕심내는

어린아이들.‘

 

어두운 망각의 그늘 속에 숨어있던 그의 시를 만난 것은 몇 년 전의 일. ‘이런 시인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에 무심코 펼쳐든 <햇빛과 달빛>에 쓰여 있는 시들의 순수함과 단순성, 서정적인 아름다움, 생생히 살아 있는 리듬감과 운율에 감탄해서 읽어나갔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나치게 이성적인 언어적 구성과 독특하다 못해서 엽기적으로까지 여겨지는 표현과 실험에 지쳐갈 때 만난 그의 시들은 시원한 청량음료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래, 이런 시가 있었지! 시란 노래에 가까운 것이었지! 연어가 온갖 고난을 겪고 자신의 고향에 다다르는 것과 같은 기분. 시 그 자체가 아니라 노래가 되고 싶어 하는 시들과의 만남, 이 시의 시원을 향한 여정에서 만난 순수함과 단순함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에 행복감을 스며들게 했다. 햇빛과 달빛이 마음속의 공간이 찾아들고, 눈송이가 하늘의 ‘구름 낀 가슴에 오래 감춰 둔 절망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을 대장장이의 성실하고 순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자연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을 만나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비평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피하지 않고 나의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그의 시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20세기 신비평을 하던 비평가들이 놓치고 있던 그 삶에서 창조된 시의 단순한 아름다움이 내 마음으로 허겁지던 파고들어오던 순간의 기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느꼈던 그 기쁨을 나도 느끼면서 한 번 말해본다.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시만을 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만들고 성찰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만을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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