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과 달빛 민음사 세계시인선 35
롱펠로 지음, 김병익 옮김 / 민음사 / 197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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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햇빛과 달빛-롱펠로

 

는 음악이 되고 싶어 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시는 음악이 되고 싶어 했다. 과거에 음악과 하나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음악과 분리되어 나와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시는 계속적으로 음악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리듬과 운율을 통해서 시는 음악이 되려는 시도를 지속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시가 음악이 되는 순간 시 자체의 고유한 영역이 사라지고 음악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가 음악이 되면 시는 사라진다는 슬픈 진실은, 시가 품고 있는 음악이라는 시원에 대한 욕망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추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영원히 필패라는 것을 알기에 시는 음악이 되고 싶었나 보다. 문학사에서 많은 시인들이 걸어간 이 불가능의 여정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실패의 기억처럼 보인다. 불가능하기에, 필패할 수밖에 없기에 도전했고, 실패했지만 그 여정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운 별처럼 빛나는 기억들.

 

그러나 19세기 상징주의를 거쳐서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의 등장은 시가 지속적으로 품어 왔던 음악에 대한 욕구가 사그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모더니스트들은 시가 음악이 아니라 시 자체가 되기를 바랐고, 철저한 이성적 창조 행위를 통해서 시가 하나의 이성적이고 상징적인 구조가 되게 만들었다. 아니면 그들은 시가 음악이 아니라, 그림이 되기를 원했다. 시에 대한 인식의 변하는 시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뒤엎고 새로운 평가가 득세하게 만들었고, 그 와중에서 기존에는 최고의 평가를 받던 시인들에 대한 평이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이 경향의 변화에서 최대 피해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19세기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시인 롱펠로였다.

 

‘그리고 시인의 노래가

음악처럼 내 머리를 꿰뚫었고

밤이 그 모든 은총과 신비를

내게 풀어주었네.‘

 

에드거 앨런 포가 무명과 가난의 설움 속에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고, 절친이었던 호손이 가난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고,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철저한 무명의 그림자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롱펠로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를 거쳐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누린 시집의 저자로서 인세로만 떵떵거리며 살면서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바다 건너 영국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라는 두 개의 대학 모두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영국에 갔을 때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그를 반겼으며, 사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묘역에 흉상이 세워진 미국 최초의 시인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이 모든 건 내면의 감정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은 언어를 구사하고, 거기에 실생활에 적용될 만한 교훈을 포함시키면서 리듬감과 운율이 살아 있는 그의 시가 동시대 대중의 취향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음란하지도 않고, 포처럼 기분이 나쁘거나 어둡지도 않고, 멜빌처럼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호손처럼 깐깐한 윤리를 강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충분히 아름다우면서도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글을 쓰고, 충분히 실생활에 쓰일 교훈을 주면서 음악성이 살아 있는 그의 시를 동시대 대중이 사랑하고 아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러나 그 당연함은 세기가 바뀌고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신비평이 득세하는 모더니즘의 시대가 오면서 큰 약점으로 모습을 바꾼다. 포처럼 뭔가 특별하지도 않고, 멜빌처럼 해석의 다양성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호손처럼 윤리의 문학적 형상화에 큰 공을 들인 것도 아닌 롱펠로의 시는 개성도 없고, 철학적인 통찰력도 없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면도 약하고, 언어적 조형성도 예술이라고 보기에는 허술한 면이 강하고, 고전 작품의 표현이나 문구를 사용할 때 그냥 그대로 쓰는 엉성한 면도 있고, 메시지를 그냥 그대로 전하는 표어 같은 면까지 있기에, 혹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망각의 그늘로 사라진다. <검은 고양이>,<주홍 글씨>,<모비 딕>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때, 롱펠로의 시들은 잊힌 채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그의 시집을 읽지 않았다면 롱펠로라는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를 황홀케 하는 것은 미지의 신비.

우리는 여전히 변덕스럽고 욕심내는

어린아이들.‘

 

어두운 망각의 그늘 속에 숨어있던 그의 시를 만난 것은 몇 년 전의 일. ‘이런 시인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에 무심코 펼쳐든 <햇빛과 달빛>에 쓰여 있는 시들의 순수함과 단순성, 서정적인 아름다움, 생생히 살아 있는 리듬감과 운율에 감탄해서 읽어나갔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나치게 이성적인 언어적 구성과 독특하다 못해서 엽기적으로까지 여겨지는 표현과 실험에 지쳐갈 때 만난 그의 시들은 시원한 청량음료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래, 이런 시가 있었지! 시란 노래에 가까운 것이었지! 연어가 온갖 고난을 겪고 자신의 고향에 다다르는 것과 같은 기분. 시 그 자체가 아니라 노래가 되고 싶어 하는 시들과의 만남, 이 시의 시원을 향한 여정에서 만난 순수함과 단순함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에 행복감을 스며들게 했다. 햇빛과 달빛이 마음속의 공간이 찾아들고, 눈송이가 하늘의 ‘구름 낀 가슴에 오래 감춰 둔 절망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을 대장장이의 성실하고 순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자연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을 만나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비평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피하지 않고 나의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그의 시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20세기 신비평을 하던 비평가들이 놓치고 있던 그 삶에서 창조된 시의 단순한 아름다움이 내 마음으로 허겁지던 파고들어오던 순간의 기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느꼈던 그 기쁨을 나도 느끼면서 한 번 말해본다.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시만을 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만들고 성찰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만을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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