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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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전1

고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결점이 없는 것일까? 고전은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이 되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고전은,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점을 덮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걸작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고전을 만날 때는 그 결점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고전이 가지고 있는 고전 특유의 강력한 힘에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고전의 힘에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 고전의 힘에 끌릴 수 있는 사람이, 고전의 힘에 끌릴 수 있는 상태에서 고전을 만나야 고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만남이 언제나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고전을 만나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실낙원>, <오이디푸스 왕> 같은 이름이 너무나 유명하지만,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작품들을 읽는 것처럼. 정확하게 말하면 이름과 내용은 익숙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들을 읽었느냐의 여부는 작품의 유명세와 별개다. 이 작품들을 읽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책의 이름을 아느냐와 상관없이 책을 꺼내어 읽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런 작품들을 읽지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을 읽기 위해서는 작품을 읽고자 하는 의지와 더불어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읽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지가 있다고 해도 고전을 읽기는 쉽지 않다. 먼저 고전의 특성상 과거에 만들어진 작품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특성을 품고 있어서 그 시대와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접근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고전의 경우에는 그 나라 특유의 분위기와 상황을 담고 있어서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번역의 문제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더 고전 읽기는 어려워진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읽어나간다면, 우리는 고전의 속살에 가닿을 수 있다. 우리가 고전의 속살에 가닿을 수 있다면 고전은 자신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고전은 진짜 너무나 유명하지만 읽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매혹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

 

<신곡:지옥편>은 충분히 매혹적인 작품이다. 중세를 넘어서서 근대를 연 지식인 단테의 대표작답게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담으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사상적 궤적을 자신의 상상력에 맞춰서 재구성하여 기독교적인 틀 속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에는 중세의 향기와 중세를 넘어서서 근대로 넘어가려는 시대의 기운이 모두 꿈틀거리고 있다. 중세다운 중세와 중세를 넘어서려는 시대의 기운이 어른거리는 작품의 힘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한국인을 14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데려가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 타임슬립의 힘 앞에서 나는 즐거워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힘은 중세적인 편협함도 충분히 품고 있다. 그 편협함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도 고전을 읽으면서 경험하는 타임슬립의 힘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곡>에 대해서 나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아직 연옥편도, 천국편도 읽지 못한 나에게 이 작품에 대한 총평이나 종합적인 감상을 표현하는 것은 성급할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작품인 연옥편으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따라서 넘어가보려 한다.

 

버전2

지옥, 너무나 두려운 단어이다. 과거에 개신교에 속했던 유치원에 다녔던 나에게는 지옥이라는 말 자체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유황불이 활활 끓고, 악마와 마귀들이 죄지은 영혼을 고문하면서 괴롭히고, 영혼들이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그 장소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 시절 상당히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개신교의 틀을 벗어나서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게 된 지금의 나에게 지옥이란 말은 과거와는 다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지옥이란 과거의 낡은 기억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 무언가다. 동시에 그것은 나의 추억을 자극한다. 과거의 아련함이 느껴지는 단어. 지옥이라는 말에서 과거의 아련함을 느낀다는 상황이 이상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지옥을 생각하면 과거의 나가 떠오른다. 겁많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순수했던 한 시절의 상징과도 같은 단어.

 

단테의 <신곡:지옥편>은 과거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은 책이다. 분명히 과거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로 열어놓은 책. 과거의 공포가 스며있지만, 나의 과거와는 다른 단테의 형상과 14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황이 아로놓인 이 책은 단테 상상력의 문학적 형상화이면서 나의 과거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기회였다. 인간 삶의 연장선상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이지만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틀 속에서 구현된 단테의 지옥은 나의 과거를 헤집고 짜깁기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어떤 죄인지가 더 중요하며, 그 죄 속에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기에서는 공포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슬픔과 아픔, 세계관과 이 세계의 현실, 구원의 몸부림이 더욱 더 중요했다. 죄를 넘어서서 구원의 가능성을 볼 것. 아직 끝나지 않는 삶의 지평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을 것. 단테가 속삭이는 이 말들 속에서 나는 새롭게 지옥을 본다. 아니 나의 과거를 본다. 거기서 구원을 찾을 것. 삶의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과 구원을 꿈꾸어 볼 것. 그러면 언젠가 나에게도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가 나타나지 않을까? 아직도 끝나지 않는 단테의 여정과 함께하며 그 가능성의 지평을 찾아볼 생각이다. 언젠가 나타날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를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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