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 책에 대해, 작가의 해설을 요구하지 않아야 하는 책에 대해 '소극적인 방법'으로만, 그러니까 그 책에 도달하기 위해 버린 책들의 계획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11)

 

한 사람이 현명함에 도달하기 위하여 조금씩 나아간다. 그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14)

하나의 파도는 언제나 다른 파도와 다르다. 하지만 각각의 파도가, 설령 바로 옆이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다른 파도와 동일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시간과 공간 속에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형태와 연쇄가 있다.(18)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보는 것의 거부를 과시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도 결과적으로 가슴을 보는 걸 부당하다고 간주하는 관습을 강화하고 있는 셈이지....간단히 말해 내가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그 나체를 생각했다는 걸 전제하지. 걱정스럽게도 그건 근본적으로 경솔하고 반동적인 태도야.(23)

 

눈이 달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따라오는 반사광을 볼 수 있어. 감각과 정신의 착각은 언제나 우리 모두를 죄수처럼 붙잡아 두지.(26)

 

나는 검을 붙잡을 수 없어. 그것은 언제나 저 앞에 있지. 나의 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그 안에서 수영하는 것은 될 수 없는 거야. 내가 눈으로 보고 있다면 나는 그것의 외부에 있고 그것도 나의 외부에 있는 거지.(27)

 

모든 것이 유래하는 원리를 확신함으로써 편파적이고 의심 많은 자아를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놓일까! 그것은 행위와 형식이 유래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원리일까, 아니면 매 순간 보이는 그대로 유일한 세상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면서 상호 교차하는 힘의 계열들, 일정한 숫자의 서로 다른 원리들일까?(28)

 

팔로마르의 수여하는 자아는, 합류하고 분리되고 부서지는 직선 무더기들, 벡터 도형들, 힘의 영역들이 상호 교차하는 형체 없는 세상 속에 잠겨 있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는 모든 것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지점이 덩어리처럼, 뭉치처럼, 응어리처럼 남아 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 너는 여기 있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29)

 

에로스는 정신의 전자적 뒤엉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이지만, 정신은 피부이기도 하다. 만져지고 보이고 기억되는 피부 말이다.(34)

 

침묵으로 말하기나 휘파람 소리고 말하기는 언제나 가능하다. 문제는 서로 이해하는 것이다.(37)

 

하나의 집합은 구별되는 요소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만 존재한다. 그것들을 헤아릴 필요는 없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눈길로 그 작은 개별 식물 하나하나를 고유한 특수성과 차이와 함께 포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생각해야 한다.(45)

 

달은 눈에 보이는 우주의 천체 중에서 가장 변화무쌍하며, 자신의 복잡한 습관에 가장 규칙적이다.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으며 언제나 약속 장소에서 기다릴 수 있지만, 어느 한 장소에 있는가 싶으면 언제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고, 특정 방식으로 돌린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면 많든 적든 벌써 자세를 바꾸고 있다. 어쨌든 한 걸음씩 그 뒤를 따르다 보면 감지할 수 없게 달아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만 구름이 개입하여 빠르게 달려가고 변신한다는 착각을 하게 할 뿐이다. 정확히 말해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48)

 

만약 내가 지금 보는 것처럼 고대인들이 볼 수 있었다면, 플라톤은 이데아들의 하늘을, 유클리드는 원리들의 비물질적 공간을 보았다고 믿었겠지. 그런데 어떤 실수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모습이 나에게 이르렀어.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현실 세계에 속한다기에는 내 상상의 우주가 너무 즐거운 것이 아닌지 두려워. 하지만 어쩌면 감각에 대한 이러한 불신이 바로 우주 안에서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걸 방해하는지도 몰라. 나에게 제시해야 할 첫 번째 규칙은 아마 이런 걸 거야. 내가 보는 것에 매달려라.(51)

 

상상력이 시력의 약함을 돕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불붙이는 시선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한다.(53)

 

사물의 표면을 알고 나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지. 하지만 사물의 표면은 끝이 없군.(67)

 

만약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땅바닥이나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까지 모든 물질이 투명하다면, 모든 것은 감지할 수 없는 베일들의 펄럭임이 아니라, 분쇄하고 소화하는 과저들의 지옥으로 보일 것이다.(70)

 

즐거움이나 신선함 없는 탐욕이 그들을 이끈다. 그렇지만 그들과 음식 사이에는 깊고 유전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그들의 동질적인 음식은 바로 그들 육신의 고기이다.(80~81)

치즈와 고객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존재한다. 치즈는 각자 자신의 고객을 기다리면서 약간 거만하게 입자가 있거나 견고한 모습으로, 아니면 반대로 연약한 무관심함에 의해 용해되는 모습으로 고객을 유혹한다.(83)

 

여기에서 그에게 하나의 틈새가 열릴 수 있는데, 인간의 삶의 당혹감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과 같은 틈새이다. 말하자면 사물에다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며, 기호들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며, 세상을 상징들의 총체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마치 기나긴 생물학적 밤에 문화의 첫 여명이 비치는 것처럼 말이다.(93)

 

충류관 안에서의 삶은 스타일도 없고 계획도 없는 형태들의 낭비처럼 보인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동물과 식물과 바위가 비늘과 가시, 결석을 서로 교환하지만 무한하게 가능한 한 조합들 중에서 단지 일부만, 아마 가장 믿을 수 없는 일부만 고정되어, 그것을 해체하고 뒤섞고 다시 형성하는 흐름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런 형태들 각각은 곧바로 세상의 중심이 되고, 여기 동물원의 길게 늘어선 유리 우리들 안에서 그렇듯이 다른 형태들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으며, 각자 자기 고유의 기괴함, 필연성, 아름다움으로 확인되는 이 무한하게 많은 존재 방식들 안에 질서가, 세상에서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질서가 있다. 파리 식물원의 조명이 비추는 유리로 된 이구아나 홀, 파충류들이 꿈속에서 자신의 원래 숲이나 사막의 나뭇가지와 바위, 모래 사이로 숨는 그곳은 세상의 질서를 반영한다. 그 질서가 관념의 하늘에 땅에 반영된 것이든, 아니면 사물의 본성, 존재하는 것의 바닥에 숨겨진 규범의 비밀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든 말이다.(96)

 

고유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나의 돌, 형상, 기호, 낱말은 단지 그 돌, 그 형상, 그 기호나 낱말이며, 우리는 그것을 그 자체로 묘사하고 정의하고자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그것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얼굴 너머에 감추어진 얼굴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 돌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이상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들의 비밀을 존중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추측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며, 잃어버린 진정한 의미를 배반하는 일이다.(106~107)

 

경험이란 전달할 수 없고 우리가 이미 저지른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피하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세대 사이의 연속성 문제가 해결되지. 두 세대 사이의 거리감은 마치 생물학적 유전으로 전달되는 동물들의 행동처럼 공통으로 갖고 있으면서 똑같은 경험을 순환적으로 반복하도록 만드는 요소들에 의해 만들어져. 반면에 우리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이한 요소들은 모든 시대가 갖고 있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결과야.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에게 전달해 준 역사적 유산, 때로는 무의식적이지만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진정한 유산에 달려 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가르칠 것이 전혀 없어. 우리의 경험과 아주 비슷한 것에 대해 우리는 영향을 줄 수 없어. 우리의 흔적을 지닌 것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확인할 수 있어.(114~115)

 

자아는 창문에 불과하며 그 창문을 통해 세상은 세상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팔로마르의 눈과 안경을 필요로 한다.(121)

 

이제부터 그는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볼 것이다. 그는 곧바로 실험을 시도한다. 이제 그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세상이 외부를 바라본다.(122)

 

누구도 자신을 넘어서는 외부의 것을 알 수는 없어. 우주라는 거울은 우리가 자기 안에서 알게 된 것만 관조할 수 있게 하지.(126)

 

사람의 삶은 사건들의 총체로 구성되는데 거기에서 마지막 사건은 그 모든 전체의 의미를 바꿀 수도 있다. 이전 사건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단 하나의 삶 안에 포함되면서 사건들은 연대적인 질서보다 내적 구조에 상응하는 질서로 배치되기 때문이다.(130)

 

만약 시간이 끝나야 한다면 매 순간 그 시간을 묘사할 수 있고, 묘사되는 그 순간은 그 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확장되지.(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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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1.1950년대에 출간된 로버트 A. 하인라인의 SF고전

2.읽은 시기:2017년 1월4일~1월5일

3.1950년대 미국인들은 희망과 믿음과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다. 경제는 계속 성장할 것이고, 과학과 기술도 계속 발전하여 인간들의 삶을 이상적으로 바꾸어줄 것이고, 개인이 열심히 한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이 신념은 1950년대 미국에서 나온 SF에도 반영되어 있다.  SF속 주인공들도 희망에 차서 우주여행과 시간여행을 하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이상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구체화한다. 당연하게도 <우주복 있음,출장 가능>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2017년은 어떠한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1950년대 미국인들같은 희망과 믿음과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들의 삶을 이상적으로 바꾸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쇠퇴해가고, 개인이 열심히 한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개인의 꿈에 대한 희망과 믿음과 확신은 사라져가고 있다. 희망과 믿음과 확신이 사라져가는 자리에는 대신 좌절감과 상실감과 분노가 가득차 있다. 2017년의 나는 지금과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주복 있음,출장 가능>에 가득한 희망과 믿음을 들여다보며 '상실된 낙원'을 보는 것 같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이 책에 나오는 희망과 믿음이 다시 돌아올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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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 나한테는 우주복이 있어.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이지...(11)

 

킵,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20)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찾아서 그걸 해.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너 자신에게 강요하지 마.(43~44)

오스카, 넌 아무 문제 없어. 너와 난 동료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자.(55)

 

믿기 힘들 정도로 넓디넓은 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는 거칠고 눈부신 절벽들과 어두운 그림자와 까만 하늘, 그리고 끝도 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일밖에 없었다.(156)

 

우리는 당신네 경찰과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어요. 우리는 뒤뜰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어요. 난 우리 집 뒤뜰에 있었다고요! 이 벌레머리가 와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켰을 때 말이에요. 우리는 당신들을 해친 적이 없어요.(361)

 

'행운'은 꼼꼼하게 준비했을 때만 따라오는 거야. '불운'은 일을 대충 처리했을 때 따라오지.(384)

 

이 우주선에서는, 한 번 도약하면, 어떤 도약이든 상관없이, 돌아가는 지름길은 길게 돌아가는 거예요. 출발한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똑바로 앞으로 가는 식이죠. 뭐, '똑바로'는 아니에요. 우주는 굽어 있으니까요. 그래도 가능한 한 똑바로이긴 하죠. 그러면 모든 게 제로로 돌아가요....그건 '거리'가 아니라 '상태'라는 의미에 더 가까웠어요. 저는 여행 했던 게 아니라 그냥 갔던 거였잖아요. 살펴볼 틈이 없어 그냥 휙휙 지나갔어요.(387~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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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1.하루키의 작가론,문단론,문학론이 집대성된 에세이

2.읽은 기간:2017년 1월3일~1월4일

3.역시 하루키의 책은 읽기가 쉽다. 부담없이 휙휙 페이지가 넘어간다.

하지만 책의 가독성과는 달리, 내용은 분명히 무게감 있고, 의미가 있다. 

쉽게 읽히면서도 자신의 문학적인 '핵'을 전하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하루키는 소설은 소설적인 방식으로, 에세이나 여행기는

에세이나여행기의 방식으로 자신이 쌓아올린 문학적인 '핵'을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하루키 문학의 핵을 접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여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드는 건 독자 자신의 몫일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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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만의 ‘무언가‘는 리뷰가 될 수 있겠군요. ^^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작가는(대략 92퍼센트일거라고 나는 예상하는데) 그걸 실제로 입 밖에 내느냐 마느냐는 제쳐두고, '내가 하는 일, 내가 쓰는 글이 가장 올바르다.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다른 작가들은 많든 적든 모두 틀려먹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에 준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자들과 친구나 이웃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극히 조심스럽게 표현해서, 그리 많지 않은 거 아닐까요.(10)

 

소설이라는 건 누가 뭐라고 하든 의심할 여지 없이 매우 폭이 넓은 표현 형태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폭넓음이야말로 소설이 가진 소박하고도 위대한 에너지의 원천의 중요한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라도 쓸 수 있다'는 건 내가 보기에는 소설에게는 비방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입니다.(15~16)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일단 못할 짓, 이라고 말해버려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거기에는 뭐랄까, '어떤 특별한 것'이 점점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16)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었던 형태와 거기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 사이의 '낙차'를 통해서, 그 낙차의 다이너미즘을 사다리처럼 이용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20)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한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집니다. 한없는 패러프레이즈의 연쇄지요. 꺼내도 꺼내도 안에서 좀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같은 것입니다.(23)

 

효율성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중층적으로 성립합니다. 그중 어느 쪽이 빠져도(혹은 압도적인 열세여도) 세계는 필시 일그러진 것이 되고 맙니다.(24)

 

아무리 거기에 올바른 슬로건이 있고 아름다운 메시지가 있어도 그 올바름이나 아름다움을 뒷받침해줄 만한 영혼의 힘, 모럴의 힘이 없다면 모든 것은 공허한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때 몸으로 배운 것은, 그리고 지금도 확신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은 올바른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공정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제멋대로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40~41)

어차피 멋진 소설은 쓸 수 없어. 그렇다면,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기성관념은 버리고 느낀 것,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써보면 되지 않을까(48)

 

언어가 가진 가능성을 생각나는 한 모든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것은, 그 유효성의 폭을 가능한 한 넓혀가는 것은, 모든 작가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입니다.(52)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은, 혹은 태도로서 표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참된 작가에게는 문학상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주 많다'라는 것이겠지요. 그 하나는, 자신이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실감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그 수의 많고 적음은 제쳐두고-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실감입니다. 그 두 가지 확실한 실감만 있다면 작가에게 상이라는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입니다.(72~73)

 

내가 진지하게 염려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 사람들을 향해 어떤 작품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뿐입니다.(77)

 

그것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들의 그림이 오리지낼리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각이 그 오리지낼리티에 동화하고 그것을 '레퍼런스'로서 자연스럽게 체내에 흡수했기 때문입니다.(94)

 

나는 일반론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감히 일반론을 말하게 해주신다면(죄송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다지 보통이 아닌 것, 남들과 다른 것을 하면 수많은 네거티브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일단 틀림이 없겠지요? 일본이라는 나라가 좋든 나쁘든 조화를 중시하는(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체질의 문화를 가졌다는 것도 있고, 문화의 일극 집중 경향이 강하다는 것도 있습니다. 말을 바꾸면, 프레임이 공고해지기 쉽고 권위가 그 힘을 휘두르기 쉬운 것입니다.(103)

 

나는 1960년대 말의 이른바 '반란의 시대'를 뚫고 나온 세대의 사람이라서 '체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라고 할까,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104~105)

 

오리지낼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109)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 혹은 자기 자신까지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110)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수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110~111)

 

이것이 오리지낼리티의 정의로서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선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그리고 틀림없이 그 사람의 자신의 것인 어떤 것.'(113)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을 말합니다.(125)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예술가가 되어서 세간의 시건을 의식하거나 부자유한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극히 평범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이면 됩니다.(150~151)

 

어떤 장소가 됐든 인간이 소설을 쓰려고 하는 곳은 모두 다 밀실이고 이동식 서재입니다.(176~177)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188)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그 어둠 속에는 때로는 위험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서식하는 것은 때때로 다양한 형상을 취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려 합니다. 또한 표지판도 지도도 없습니다. 미로 같은 곳도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맙니다. 그대로 지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집합적 무의식과 개인적 무의식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태고와 현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경우에 그 패키지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189)

 

자신의 내적인 혼돈을 마주하고 싶다면 입 꾹 다물고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혼자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혼돈은,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된 혼돈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발밑에 깊숙이 잠복하고 있는 것입니다.(195)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225~226)

 

나 자신을 분할하고 스토리 안에 던져 넣는 것을 통해 나라는 인간을 검증하고 나와 타자와의-혹은 세계와의-접점을 확인했던 것입니다.(246)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설가는 소설을 창작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에 의해 스스로 어떤 부분에서는 창작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53)

 

지금 현재진행형의 나 자신은 웬만해서 파악하기 어려워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다양한 사이즈의 내 것이 아닌 구두에 발을 밀어 넣고, 그것으로 지금 이곳에 있는 나 자신을 종합적으로 검증해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삼각법으로 위치를 측정하는 것처럼.(256)

 

아울러 거기에는 아마 '자기 치유'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 행위에는 많든 적든 스스로를 보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형식에 끼워 맞추는 것을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다양한 모습이나 뒤틀림, 일그러짐 등을 해소해나간다-혹은 승화해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잘되면 그런 작품을 독자와 공유한다는 것입니다.(260)

 

중요한 것, 교환 불가능한 것은 나와 그 사람이 이어져 있다, 라는 사실입니다. 어디서 어떤 상태로 이어져 있는지, 세세한 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졌다고 감지합니다. 양분이 오고 간다고 실감합니다.(271~272)

 

스토리란 본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들은 변동하는 주변 현실의 시스템을 따라잡기 위해, 혹은 거기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내적인 장소에 앉혀야 할 새로운 스토리=새로운 메타포 시스템을 필요로 합니다. 그 두 가지 시스템(현실 사회의 시스템과 메타포 시스템)을 제대로 연결하는 것에 의해, 다시 말해 주관 세계와 객관 세계를 오고 가면서 상호 간에 제대로 적응하도록 하는 것에 의해, 사람들은 불확실한 현실을 겨우겨우 받아들이고 평정심을 유지해나갈 수 있습니다. 내 소설이 제공하는 스토리의 리얼리티는 그러한 적응의 톱니바퀴로서 우연히 글로벌한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 아닌가-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305)

 

텍스트의 역할은 각각의 독자에게 저작되는데 있습니다. 독자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풀어서 저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만일 독자의 손에 건너가기 전에 저자에 의해 풀리고 저작된다면 텍스트로서의 의미나 유효성이 대폭적으로 손상됩니다.(320)

 

이야기=스토리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욱더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32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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