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 책에 대해, 작가의 해설을 요구하지 않아야 하는 책에 대해 '소극적인 방법'으로만, 그러니까 그 책에 도달하기 위해 버린 책들의 계획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11)

 

한 사람이 현명함에 도달하기 위하여 조금씩 나아간다. 그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14)

하나의 파도는 언제나 다른 파도와 다르다. 하지만 각각의 파도가, 설령 바로 옆이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도, 다른 파도와 동일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시간과 공간 속에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형태와 연쇄가 있다.(18)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보는 것의 거부를 과시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도 결과적으로 가슴을 보는 걸 부당하다고 간주하는 관습을 강화하고 있는 셈이지....간단히 말해 내가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그 나체를 생각했다는 걸 전제하지. 걱정스럽게도 그건 근본적으로 경솔하고 반동적인 태도야.(23)

 

눈이 달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따라오는 반사광을 볼 수 있어. 감각과 정신의 착각은 언제나 우리 모두를 죄수처럼 붙잡아 두지.(26)

 

나는 검을 붙잡을 수 없어. 그것은 언제나 저 앞에 있지. 나의 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내가 그 안에서 수영하는 것은 될 수 없는 거야. 내가 눈으로 보고 있다면 나는 그것의 외부에 있고 그것도 나의 외부에 있는 거지.(27)

 

모든 것이 유래하는 원리를 확신함으로써 편파적이고 의심 많은 자아를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놓일까! 그것은 행위와 형식이 유래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원리일까, 아니면 매 순간 보이는 그대로 유일한 세상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면서 상호 교차하는 힘의 계열들, 일정한 숫자의 서로 다른 원리들일까?(28)

 

팔로마르의 수여하는 자아는, 합류하고 분리되고 부서지는 직선 무더기들, 벡터 도형들, 힘의 영역들이 상호 교차하는 형체 없는 세상 속에 잠겨 있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는 모든 것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지점이 덩어리처럼, 뭉치처럼, 응어리처럼 남아 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존재하는 세상 안에서, 너는 여기 있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29)

 

에로스는 정신의 전자적 뒤엉킴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이지만, 정신은 피부이기도 하다. 만져지고 보이고 기억되는 피부 말이다.(34)

 

침묵으로 말하기나 휘파람 소리고 말하기는 언제나 가능하다. 문제는 서로 이해하는 것이다.(37)

 

하나의 집합은 구별되는 요소들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만 존재한다. 그것들을 헤아릴 필요는 없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눈길로 그 작은 개별 식물 하나하나를 고유한 특수성과 차이와 함께 포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생각해야 한다.(45)

 

달은 눈에 보이는 우주의 천체 중에서 가장 변화무쌍하며, 자신의 복잡한 습관에 가장 규칙적이다. 약속을 절대 어기지 않으며 언제나 약속 장소에서 기다릴 수 있지만, 어느 한 장소에 있는가 싶으면 언제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고, 특정 방식으로 돌린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면 많든 적든 벌써 자세를 바꾸고 있다. 어쨌든 한 걸음씩 그 뒤를 따르다 보면 감지할 수 없게 달아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만 구름이 개입하여 빠르게 달려가고 변신한다는 착각을 하게 할 뿐이다. 정확히 말해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48)

 

만약 내가 지금 보는 것처럼 고대인들이 볼 수 있었다면, 플라톤은 이데아들의 하늘을, 유클리드는 원리들의 비물질적 공간을 보았다고 믿었겠지. 그런데 어떤 실수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 모습이 나에게 이르렀어.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현실 세계에 속한다기에는 내 상상의 우주가 너무 즐거운 것이 아닌지 두려워. 하지만 어쩌면 감각에 대한 이러한 불신이 바로 우주 안에서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걸 방해하는지도 몰라. 나에게 제시해야 할 첫 번째 규칙은 아마 이런 걸 거야. 내가 보는 것에 매달려라.(51)

 

상상력이 시력의 약함을 돕는 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불붙이는 시선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어야 한다.(53)

 

사물의 표면을 알고 나면 그 아래에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지. 하지만 사물의 표면은 끝이 없군.(67)

 

만약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땅바닥이나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까지 모든 물질이 투명하다면, 모든 것은 감지할 수 없는 베일들의 펄럭임이 아니라, 분쇄하고 소화하는 과저들의 지옥으로 보일 것이다.(70)

 

즐거움이나 신선함 없는 탐욕이 그들을 이끈다. 그렇지만 그들과 음식 사이에는 깊고 유전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그들의 동질적인 음식은 바로 그들 육신의 고기이다.(80~81)

치즈와 고객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존재한다. 치즈는 각자 자신의 고객을 기다리면서 약간 거만하게 입자가 있거나 견고한 모습으로, 아니면 반대로 연약한 무관심함에 의해 용해되는 모습으로 고객을 유혹한다.(83)

 

여기에서 그에게 하나의 틈새가 열릴 수 있는데, 인간의 삶의 당혹감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과 같은 틈새이다. 말하자면 사물에다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며, 기호들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며, 세상을 상징들의 총체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마치 기나긴 생물학적 밤에 문화의 첫 여명이 비치는 것처럼 말이다.(93)

 

충류관 안에서의 삶은 스타일도 없고 계획도 없는 형태들의 낭비처럼 보인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동물과 식물과 바위가 비늘과 가시, 결석을 서로 교환하지만 무한하게 가능한 한 조합들 중에서 단지 일부만, 아마 가장 믿을 수 없는 일부만 고정되어, 그것을 해체하고 뒤섞고 다시 형성하는 흐름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런 형태들 각각은 곧바로 세상의 중심이 되고, 여기 동물원의 길게 늘어선 유리 우리들 안에서 그렇듯이 다른 형태들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으며, 각자 자기 고유의 기괴함, 필연성, 아름다움으로 확인되는 이 무한하게 많은 존재 방식들 안에 질서가, 세상에서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질서가 있다. 파리 식물원의 조명이 비추는 유리로 된 이구아나 홀, 파충류들이 꿈속에서 자신의 원래 숲이나 사막의 나뭇가지와 바위, 모래 사이로 숨는 그곳은 세상의 질서를 반영한다. 그 질서가 관념의 하늘에 땅에 반영된 것이든, 아니면 사물의 본성, 존재하는 것의 바닥에 숨겨진 규범의 비밀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든 말이다.(96)

 

고유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나의 돌, 형상, 기호, 낱말은 단지 그 돌, 그 형상, 그 기호나 낱말이며, 우리는 그것을 그 자체로 묘사하고 정의하고자 할 수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그것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얼굴 너머에 감추어진 얼굴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그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 돌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 이상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들의 비밀을 존중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추측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며, 잃어버린 진정한 의미를 배반하는 일이다.(106~107)

 

경험이란 전달할 수 없고 우리가 이미 저지른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피하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세대 사이의 연속성 문제가 해결되지. 두 세대 사이의 거리감은 마치 생물학적 유전으로 전달되는 동물들의 행동처럼 공통으로 갖고 있으면서 똑같은 경험을 순환적으로 반복하도록 만드는 요소들에 의해 만들어져. 반면에 우리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이한 요소들은 모든 시대가 갖고 있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결과야.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에게 전달해 준 역사적 유산, 때로는 무의식적이지만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진정한 유산에 달려 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가르칠 것이 전혀 없어. 우리의 경험과 아주 비슷한 것에 대해 우리는 영향을 줄 수 없어. 우리의 흔적을 지닌 것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확인할 수 있어.(114~115)

 

자아는 창문에 불과하며 그 창문을 통해 세상은 세상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팔로마르의 눈과 안경을 필요로 한다.(121)

 

이제부터 그는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볼 것이다. 그는 곧바로 실험을 시도한다. 이제 그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세상이 외부를 바라본다.(122)

 

누구도 자신을 넘어서는 외부의 것을 알 수는 없어. 우주라는 거울은 우리가 자기 안에서 알게 된 것만 관조할 수 있게 하지.(126)

 

사람의 삶은 사건들의 총체로 구성되는데 거기에서 마지막 사건은 그 모든 전체의 의미를 바꿀 수도 있다. 이전 사건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단 하나의 삶 안에 포함되면서 사건들은 연대적인 질서보다 내적 구조에 상응하는 질서로 배치되기 때문이다.(130)

 

만약 시간이 끝나야 한다면 매 순간 그 시간을 묘사할 수 있고, 묘사되는 그 순간은 그 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확장되지.(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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