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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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

책을 읽다보면

종종 책 제목과는 다른

내가 생각하는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이 책도 그런 경우인데,

나는 이 책에 이런 제목을 붙이고 싶었다.

<사라진 운동권을 찾아서>.


한때 전공투로 대변되는 일본의 운동권은

우리나라의 운동권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과격하고 거칠게 기성정치를 비판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운동권은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보다 훨씬 더 이념적이었던

일본의 운동권은

79년에 구소련이 행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인해

구소련이 자신들이 생각한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급격하게 몰락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꺼리는 상황이 도래했다.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순수한 운동권 생활인을

등장시키는 소설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남쪽으로 튀어>이다.

 

2.

지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프리라이터를 자처하며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기본이고,

지로에게 학교는 자본주의의 노예를

양성하는 곳으로 다니지 말라고 강요하고,

세금을 내라고 집에 온 공무원에게

국민연금 따위는 못 내겠다고

큰 목소리로 외치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가정방문을 온 담임 선생님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와 기미가요 제창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당황케 하고,

국가 공무원과 경찰에 대한 위험한 발언을

거침없이 하는 인물이다.

 

이런 아버지를 지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부끄러워하며

그는 아버지를 감추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지로를 둘러싼 상황은

그의 가족을 가만 놔두지 않는 쪽으로

흘러간다.

 

지로와 그의 가족들은

어떤 일들을 겪을까?

 

단, 하나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그의 가족이 진짜 남쪽으로 간다는 점이다.

 

"그럼 나는 국민을 관두겠어."

아버지가 가슴을 쭉 젖히며 말했다.
"예?"

아주머니의 목이 앞으로 쑥 내밀어졌다.
"국민이기를 관두겠다고.

애초부터 원했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디, 해외로 이주하시려고요?"

갑자기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내가 왜 해외에 나가?

여기 거주한 채로 국민이기를 관둘 거야."
...

 "사람을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 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층이라는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

  

3.

한때는 저항과 이상의 분위기가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뭐라해도

자본이 부르는 승리의 찬가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쉽게 복종하고,

그렇게 쉽게 체제의 의지대로 끌려간다.

 

우리는 이제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학생은 토익과 자격증을 이야기하고,

성인들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만

외치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살기 위한

생존욕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기 위한 욕망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해도

사회가, 우리의 삶이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스트레스는 늘어나고

사회는 불만으로 가득차고 있는 실정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사회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는

일본의 기성 세대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소설을 쓴 듯하다.

 

젊은 시절 간직한 이상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좌파의 중앙집권적 경직성을 탈피한

이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지로의 아버지는

그런 오쿠다의 분신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배집단의 부조리에 항거하던

지로의 아버지가

남쪽 섬에서까지 쫓겨나며

진짜 남쪽의 이상의 섬으로 떠나는

모습은 현실에 대한

오쿠다의 외침처럼 들려온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p245)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2권 288~9쪽)

 

“하지만 너는 아버지 따라할 거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

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2권 245~6쪽)


 

4.

이 책은 재미있다. 경쾌하다.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오쿠다는 특유의 유쾌함으로

재미있는 소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시종일관 즐겁다가도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생각의 여운을 남긴다.

 

남쪽으로 떠나버린 이상주의자들.

이상주의자가 떠나버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맞을까?

 

아마도 그건 우리만의 삶이리라.

그 우리만의 삶은

우리가 그려나가는 삶의 궤적이다.

그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자들을 남쪽으로 몰아내는 삶일 수 있고,

안보이는 한 구석에 그들이

남겨질 수도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현실만 가득한 삶일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이든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현실과 삶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리라.

그러면 다시 남쪽을 꿈꾸고,

남쪽을 꿈꾸는 또다른 소설을 만나리라.

 

그렇게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5.

남쪽으로 떠나는 꿈을 한번 꾸어본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

지로의 가족들이 다투지 않고

뛰어다니는 그런 곳을.

우리 모두가 뛰어다니는 그런 곳을.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개인적으로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 중에서

이 소설을 가장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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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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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물기가 쫙 빠진 걸레와 인테리어 없는 초실용적인 건물

 

상상을 한번 해보자.

 

첫번째 상상

상상의 공간 속에 걸레가 하나 있다.

그런데 이 걸레에 잉여 물기는 거의 없다.

마치 인간이 아닌 기계가 한 것 같은 걸레의 물기짜기.

그러나 이 걸레의 물기를 짠 인물은 인간이다.

 

두번째 상상

이번에는 상상의 공간 속에 건물을 하나 떠올려 보자.

이 건물은 오직 주거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것을 희생한 초실용적인 건물이다.

인테리어는 하나도 없는 아주 삭막한 건물.

 

물기가 쫙 빠진 걸레와 인테리어 없는 초 실용적인 건물.

<호숫가 살인 사건>를 읽고 내가 떠올린 이미지였다.

 

모든 것이 결말로 연결되는 소설

 

<호숫가 살인사건>은

미사여구나 수사, 잉여적 주장이

거의 배제된 채 하나의 결말로 달려가는

꽉 짜인 구성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냉정하게

결말과 주제를 위해서 모든 것을 거세시킨 상태로

분산된 조각들이 하나의 퍼즐을 완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퍼즐 속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떠오른다.

 

사람잡는 교육현실.

 

사람잡는 교육

 

한국의 교육이 심각하게 과열된 상태인 것은 맞다.

그러나 <호숫가 살인 사건>에서 드러난

일본의 교육현실은 한국의 교육보다

더한 모습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때 이미 유명 사립중학교에 가기 위해서

부모들끼리 그룹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칠 과외선생을 뽑고,

과외스케줄을 작성하며

과외합숙을 시키고,

 

아이가 입시에서 혹시라도 떨어질까봐

사립중학교의 임원들을 매수하고,

성접대까지도 하는 교육 현실.

 

이미 이것은 교육이 아니라

광기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광기의 블랙홀은

인간들의 인성을 잡아먹는 것도 모자라

사람의 목숨까지 삼켜 버린다.

 

호숫가를 맴도는 원혼

 

아이들의 과외합숙을 따라서 호숫가로 온 부모들.

그들은 평온하고 별일없는 나날을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사태는 그들의 예상을 벗어난다.

갑자기 들이닥친 살인사건으로 인해서

그들은 모두가 공범이 되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한다.

 

<호숫가 살인사건>은 그 은폐의 과정을

생생하고 기록한 소설이다.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아닌,

인성과 사람을 죽이는 교육과

과열된 교육 현실이 불러일으킨 참사.

 

그 속에서 살해당한 원혼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호숫가를 맴돌고 있었다.

 

동시에 영혼이 파괴된 아이들과 부모들의 영혼도

호숫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

 

책을 덮고 나서

피할 수 없는 무거움이 나를 덮쳤다.

 

*마지막의 반전은 히가시노 게이고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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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미야 형제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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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가오리 소설에 정상인들이 주인공으로 드디어 출현!!

 

내가 지금까지 읽은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녀의 소설속 주인공들은

불륜과 소수자의 사랑같은

감당하기 힘든, 보기드문 상황을

겪고 있었다. 

 

나 같으면 미치고 팔짝 뛸 상황에서

그들이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이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미야 형제>는 내가 지금까지 읽은

가오리의 소설과 거리를 두고 있다.

거기에는 정상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완벽하게 정상적이지는 않다^^;;)

 

연애랑은 거리가 먼 마미야 형제

 



히가시노 게이고의 <흑소소설> 중에

'사랑가득 스프레이'란 에피소드가 있다.

 

이 에피소드에는 절대 연애를 할 수 없는

유전자를 가진 다카시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는 여자에게 좋은 사람이지만

연인으로는 발전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이 에피소드의 다카시랑

마미야 형제랑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미야 형제는 여자랑 사귄 적도 없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항상 차이는

백전 백패의 연애 전적을 보이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과 다카시는 다르다.

다카시가 절대,절대 연애를 할 수 없는데 반해

(동성간의 연애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ㅎㅎㅎ)

마미야 형제는 희박한 가능성이나마

연애가 가능하다.

 

<마미야 형제>는 바로 이 희박한

가능성에서 시작한다.

 

마미야 형제의 솔로 탈출 프로젝트

 

마미야 형제는 마음씨가 좋다.

마미야 형제는 남들에게 친절하다.

마미야 형제는 서로간의 사이도 좋고,

가족들을 지극히 사랑한다.

마미야 형제는 취미 생활도 풍부하고,

그들만의 여유 시간을

충분히 재미있게 보낸다.

마미야 형제는 참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미야 형제는 결정적으로

여자랑은 거리가 멀다.

형인 아키노부는 음습한 눈빛과 소심함으로

여자들로 하여금 거리를 두게 만들고,

동생인 테츠노부는 조금 살이 붙은 몸매와

지나친 솔직함으로 항상 고백했다가

쓴잔을 마신다.

 

그런 그들이 드디어 솔로 탈출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마음에 들은 여자들의 초대 승낙을 얻어낸 상태에서

파티를 연 것이다.

 

그들의 평생 염원인 솔로 탈출은 가능할 것인가?

그들은 과연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미워할 수 없는 그들, 마미야 형제

 

이 소설은 가오리의 예전 소설들과

분위기를 달리한다.

 

우선 이 소설은 밝다.

주인공들의 연애는 시련 투성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밝게 하려고 노력하며

그 힘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살아나갈 힘을 준다.

 

그리고 가오리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비정상적이고, 소수적인 상황이나 인물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는 평범한 고민을 겪고,

평범하게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평범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가오리의

문체까지 바뀌지는 않았다.

 

밝고 즐거우며 힘을 내는

형제와 주변인의 모습을

가오리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그리고 있다.

 

읽다보면 웃음까지 나오는

(가오리 소설에서 웃음이

나올줄은 정녕 알지 못했다.^^;;)

형제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솔로들이여 힘을 내자.

마미야 형제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으니

분명히 솔로들의 삶에도

즐거움과 희망이 있을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연애에 연연하지 말자.

숨을 가다듬고, 때를 기다리며

찬스가 오면 딱 잡아라.

기회가 아니라고 여겨질 때에는

지나친 갈망을 자제하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라.

 

삶을 즐겁게 만들고

좋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

연애는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연애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즐거워질 것이다.

 

마미야 형제는

내게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가오리가 숨고르기를 하는 걸까?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솔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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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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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에게 낯선 공간, 부엌

 

부엌은 항상 나에게 낯선 공간이었다.

그곳의 향기, 모양, 물건의 배치와 분위기등은

나와 멀리 떨어진 곳의 느낌이었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향기와 숨결이 배어 있었고,

나는 기껏해야 설거지와 단순한 음식을 만드는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그것은 불편하다기 보다는

낯설음이 지배하는 공간이었고,

내가 활보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소설 <키친>의 주인공은

나랑 달랐다.

 

부엌, 치유와 위로의 공간이 되다.

 

<키친>의 주인공 미카게는

부엌을 가장 좋아하고

부엌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는 인물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

 

그녀는 유일한 혈육 할머니의 죽음으로

세상에 혼자남는 상황에서

다나베 유이치의 도움으로

그의 가정에 들어와 살게 된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부엌을 통해, 부엌을 이용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더군다나 유이치와 그의 예쁜 아빠의 도움까지

겹치며 그녀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지금까지 한 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아왔다.'

 

키친의 표제작인 <키친>속에서

상처받은 누군가는 키친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이후에

다시 소중한 누군가를 얻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이 글속에서

부엌은 치유와 위로의 공간이 된다.

 

'인생이란 정말 한 번은 절망해 봐야 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다른 두편의 단편

 

<만월>은 치유와 사랑의 이야기이다.

키친의 후속편인 이 단편소설은

키친 이후의 이야기이다.

 

상처를 치유하고 살아나가는 미카게가

이번에는 아버지를 잃는 상황에 처한

유이치를 만나고 그를 돕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일반적이지 않은

독특한 사랑이야기도 펼쳐진다.

 

<달빛 그림자>는 키친의 이야기와 상관이 없지만

앞으로의 바나나의 행보를 예고하는

신비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으로 상처를 받은 사츠키가

오컬트적인 신비한 능력을 가진 우라라의 도움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앞으로 바나나의 작품에

오컬트적이고 신비한 분위기가 들어갈  것임을 암시한다.

 

치유의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

 

누구나 외롭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다.

그러나 현대라는 시간에서, 도시라는 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껴안아주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럴때 요시모토 바나나는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외롭다고

우리 모두가 사랑을 원한다고

그러면서도 서로간에 소통을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자신의 글을 통해

치유와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우리에게 치유의 힘을 불어넣는다.

그것이 그녀 소설이 일관되게 말하는

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겠다.

나도 외롭고 어리석은 존재이기에.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키친이 있다.

 

<키친>을 치유와 위로의 장소로 이용하는

미카게의 삶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녀가 키친을 자신만의 장소로 정하고,

치유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의 장소를,

우리만의 키친을 가지고

자신을 치유하고 위로하며

살아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치유가 우리에게 주는 구원이다.

그것을 알기에

요시모토 바나나는 계속 글을 통한 치유를 시도한다.

 

나도 그것을 알기에

계속 책을 읽고자 노력한다.

 

그렇게 치유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한다면

세상 어디에서나 치유는 가능하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 힘을 내자.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고, 치유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그리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키친이 있음을 생각하자.

 

지금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만의 키친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나나가 내게

남긴 메시지였다.

 

*<키친>은 바나나의 첫 단편집으로서

바나나 소설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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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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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자기 앞의 생 중에서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지.'

 

금지된 낙원 중에서

'하얀 어둠. 하얗다고 해도 어여쁜 순백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잿빛이 섞여 있는 묵직한 백색'

 

하얀 어둠을 걷다

 

하얀색이 순수하게 하얗기만 할까?

하얀색 안에도 여러 영역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하얀색 안에도 여러 영역이 있다.

지금은 하얗게 보이지만 언제라도 더러워질 준비가 된

하얀색도 있을 것이고,

다른 색을 품고서 겉으로는 하얗게 위장하는 하얀색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기분 나쁘게 느끼는 건

하얀 어둠이다.

 

마치 하얗고 순수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어둠을 품고 있기에

하얀색을 위장한 어둠에 불과하다.

 

하얀색처럼 보여서 접근하면

어느새 어둠에 갇혀버린 자신을 발견하는게

하얀 어둠이다.

 

<백야행>은 하얀 어둠에 갇혀버린,

하얀 어둠의 길을 걸어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그런데...

 

소년은 소녀를 만났다.

보통이라면 그들의 만남은 아름다운 로맨스나

슬픈 이야기로 이어지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만남은 범죄로 이어진다.

이미 하얀 어둠에 갇혀버린 소녀와

그녀를 만나서 같이 하얀 어둠을 걸어가게 된 소년.

 

하얀 어둠을 같이 걸어가는 그들의 공생관계.

그들의 공생관계는 자신들의 불행에만 머무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관계하는 모든 이들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고,

타인들도 파멸시키고 있었다.

 

소년과 소년의 만남.

그것은 파멸의 전주곡이었다.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추리 소설

 

히가시노 게이고는 냉정하게

그들의 행적과 파멸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들의 범죄와

인간들의 비극일 뿐이다.

 

소년과 소년, 료지와 유키호의 내면은

소설 속에서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그들이 겪여야 했던 상황을 통해서

그들의 내면을 추리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은 여백이 많이 남아

있는 추리소설이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이 독자들의 몫.

결국 우리는 범인 잡기가 아니라

범인의 내면 상상하기를 해내야 한다.

 

하얀 어둠은 그렇게 자신을 숨긴채

우리에게 자신을 알아내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진정한 팜므파탈, 유키호

 

팜프파탈이란 본래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요부를 가르킨다.

 

근데 이 소설의 팜므파탈 유키호는

그 정의에 정확하게 맞아들어간다.

심지어 그녀는 남녀를 가리지도 않는다.

 

악녀나 사악한 범죄자들 정도로 축소되던

팜므파탈이 유키호를 만나서

그 의마가 되살아난 셈.

 

유키호는 거미였다.

그녀는 자신의 거미줄을 치고

희생양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그녀가 거미줄을 친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녀의 품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거미줄이 몸에 다 감기면 그때서야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에게 남겨진건 파멸의 순간일뿐.

 

그녀에게 자신과 관계하는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건,

남들을 이용하고 가차없이 버리는 것은

삶 그 자체였다.

 

프로이드의 거세공포증을 구현해 낸 듯한

진정한 팜므파탈 유키호.

 

그런데 그녀가 증오스럽다거나

악마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건 아마 책에서 보여주는 아릿한 아픔 때문일 것이다.

그녀를 가리고 있는 하얀 어둠이

만들어내는 슬픔이 그녀를

순수 악으로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에도 낮과 밤이 있지.

물론 실제 태양처럼 정기적으로

일출과 일몰이 찾아오는 건 아냐.

사람에 따라서는 태양이 가득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계속 어두운 밤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어.

...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이야기는 환야로 이어진다.

 



 

<백야행>에서는 료지와 유키호는

아직 하얀 어둠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어둠과 슬픔이 혼재된

어긋난 영혼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영역은 우리의 상상력이

작용하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그 영역을

넘어서야 함을 이야기한다.

 

백야를 넘어선 유키호.

그녀는 이제 환한 어둠인

환야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백이 제거된 어둠의 영역.

그곳은 불빛을 밝혀놓은 환한 어둠의 공간.

중요한 건 그곳이 진짜 어둠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이제 진짜 어둠으로 넘어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기다린다.

 

당연하게 이 리뷰도

그녀를 따라 환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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