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

 

자기 앞의 생 중에서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지.'

 

금지된 낙원 중에서

'하얀 어둠. 하얗다고 해도 어여쁜 순백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잿빛이 섞여 있는 묵직한 백색'

 

하얀 어둠을 걷다

 

하얀색이 순수하게 하얗기만 할까?

하얀색 안에도 여러 영역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하얀색 안에도 여러 영역이 있다.

지금은 하얗게 보이지만 언제라도 더러워질 준비가 된

하얀색도 있을 것이고,

다른 색을 품고서 겉으로는 하얗게 위장하는 하얀색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기분 나쁘게 느끼는 건

하얀 어둠이다.

 

마치 하얗고 순수한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어둠을 품고 있기에

하얀색을 위장한 어둠에 불과하다.

 

하얀색처럼 보여서 접근하면

어느새 어둠에 갇혀버린 자신을 발견하는게

하얀 어둠이다.

 

<백야행>은 하얀 어둠에 갇혀버린,

하얀 어둠의 길을 걸어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그런데...

 

소년은 소녀를 만났다.

보통이라면 그들의 만남은 아름다운 로맨스나

슬픈 이야기로 이어지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만남은 범죄로 이어진다.

이미 하얀 어둠에 갇혀버린 소녀와

그녀를 만나서 같이 하얀 어둠을 걸어가게 된 소년.

 

하얀 어둠을 같이 걸어가는 그들의 공생관계.

그들의 공생관계는 자신들의 불행에만 머무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관계하는 모든 이들을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고,

타인들도 파멸시키고 있었다.

 

소년과 소년의 만남.

그것은 파멸의 전주곡이었다.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추리 소설

 

히가시노 게이고는 냉정하게

그들의 행적과 파멸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들의 범죄와

인간들의 비극일 뿐이다.

 

소년과 소년, 료지와 유키호의 내면은

소설 속에서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그들이 겪여야 했던 상황을 통해서

그들의 내면을 추리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은 여백이 많이 남아

있는 추리소설이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이 독자들의 몫.

결국 우리는 범인 잡기가 아니라

범인의 내면 상상하기를 해내야 한다.

 

하얀 어둠은 그렇게 자신을 숨긴채

우리에게 자신을 알아내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진정한 팜므파탈, 유키호

 

팜프파탈이란 본래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요부를 가르킨다.

 

근데 이 소설의 팜므파탈 유키호는

그 정의에 정확하게 맞아들어간다.

심지어 그녀는 남녀를 가리지도 않는다.

 

악녀나 사악한 범죄자들 정도로 축소되던

팜므파탈이 유키호를 만나서

그 의마가 되살아난 셈.

 

유키호는 거미였다.

그녀는 자신의 거미줄을 치고

희생양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그녀가 거미줄을 친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녀의 품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거미줄이 몸에 다 감기면 그때서야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에게 남겨진건 파멸의 순간일뿐.

 

그녀에게 자신과 관계하는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건,

남들을 이용하고 가차없이 버리는 것은

삶 그 자체였다.

 

프로이드의 거세공포증을 구현해 낸 듯한

진정한 팜므파탈 유키호.

 

그런데 그녀가 증오스럽다거나

악마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건 아마 책에서 보여주는 아릿한 아픔 때문일 것이다.

그녀를 가리고 있는 하얀 어둠이

만들어내는 슬픔이 그녀를

순수 악으로 느끼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에도 낮과 밤이 있지.

물론 실제 태양처럼 정기적으로

일출과 일몰이 찾아오는 건 아냐.

사람에 따라서는 태양이 가득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계속 어두운 밤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도 있어.

...

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이야기는 환야로 이어진다.

 



 

<백야행>에서는 료지와 유키호는

아직 하얀 어둠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어둠과 슬픔이 혼재된

어긋난 영혼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영역은 우리의 상상력이

작용하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그 영역을

넘어서야 함을 이야기한다.

 

백야를 넘어선 유키호.

그녀는 이제 환한 어둠인

환야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백이 제거된 어둠의 영역.

그곳은 불빛을 밝혀놓은 환한 어둠의 공간.

중요한 건 그곳이 진짜 어둠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이제 진짜 어둠으로 넘어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기다린다.

 

당연하게 이 리뷰도

그녀를 따라 환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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