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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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쇳밥일지-천현우

 

1.

<쇳밥일지>의 마지막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저자인 천현우 씨가 고향인 마산을 떠나는 걸로 끝납니다. 그래, 이제 과거 같은 번영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나의 친구들, 고마운 어른들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이 있다. 지금은 비록 돈을 벌러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들의 품속으로 다시 돌아 오고야 말리라. 돌아와서 고향을 위해 나 나름의 역할에 충실하리라. 비록 몸은 다른 곳에 있을지라도 오늘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쇳밥꾼들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주머니에 실패한 연인처럼 구겨져 있던 천원짜리 석장을 꺼냈다.

고향을 떠나기 전, 풀빵이 먹고 싶었다.(p.287)

 

2.

고향을 떠나는 천현우 씨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면서, 저는 책을 덮습니다. , 좋았다.. 이 말이 떠오르네요. 다시 생각해봅니다. 도대체 이 책의 무엇이 저는 좋았던 걸까요? 책이 좋은 이유는 책마다 다를 겁니다. 어떤 책은 서사의 힘으로, 어떤 책은 논리적 정합성으로, 어떤 책은 아름다운 문장의 힘으로, 어떤 책은 사유의 기발함으로, 또 어떤 책은 상황에 딱 들어맞는 비판의 유효성으로. 이렇듯 책이 좋은 이유는 무수히 많을 겁니다. 그 중에서 <쇳밥일지>가 좋았던 이유는 뭘까요? 제가 보기에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이 책에 넘쳐 흐르는 삶의 힘 때문인 것 같습니다.

 

3.

<쇳밥일지>는 삶과 밀착한 책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 공장에 다니며 쇳밥을 먹으면서 살아왔고, 그 과정을 가감없이 진솔하게 기록한 책답게, 이 책은 저자인 천현우 씨의 삶의 모습과 양상이 가득합니다. 공장 나가서 용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관계를 맺고, 그 와중에 사랑도 하고, 산재사고도 겪고, 눈앞에서 다치는 사람들을 보고, 이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마주치고, 빚덩이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아픈 부모님을 돌보고, 사랑도 떠나보내고, 독서도 하고, 세상을 더 알아가고, 운동도 하고, 친구 만나고, 어떤 때는 눈앞의 일에 안주하고, 어떤 때는 우울해하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깨달음도 얻고, 운좋게 자신이 쓴 글이 알려져 글쓰는 일도 하는 등의. 읽다보면 책 속에 가득한 삶의 힘이 독자에게 전해져옵니다. 삶의 힘을 건네받은 독자는 저자의 삶에 고개를 끄덕끄덕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의 삶 그 자체가 독자에게 설득력으로 다가오니까요.

 

4.

때로는 삶이 더 영화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니, 서평을 쓰니까 영화보다는 문학이라는 말이 맞겠네요.^^;; 때로는 삶이 더 문학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는 <쇳밥일지>의 천현우 씨의 삶이 그랬습니다. 바람기 가득한 아버지, 친모 같은 애정을 준 양어머니, 생모와 지내면서 받았던 가정폭력과 학대, 크게 다쳐서 찾아온 아버지 때문에 과거의 양어머니와 다시 살던 일, 가난했던 나날들, 서울 말씨 때문에 괴롭힘받다 게임 잘해서 괴롭힘을 극복한 일.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나가면서 공장 일을 하면서 겪은 일들, 사랑과 좋은 이들과의 만남, 부조리한 일들과 힘겨움과 고통, 글쓰기를 통한 새로운 삶의 기회까지의 과정도 마찬가지처럼 만만치 않습니다. 본인에게는 평범한 삶의 과정이었겠지만, 그 삶을 글로서 읽어나가는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삶의 영역을 들여다보며 생생하게 체험해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이 글이 되는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문학적인 효과를 낳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것에 독자가 참여해서 그 합일의 과정을 체험하는 것. 이 과정이 좋았기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 걸 혼자 가슴 속에 품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요.^^;; 아무튼 저자인 천현우 씨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축하하면서 저 또한 천현우 씨 삶과의 만남을 끝내고 저의 삶이라는 세계로 다시 떠나가겠습니다.

 

청년공으로 살아가기란 생각보다는 힘들고 꾸역꾸역 생존은 가능한 나날이었다. 그때의 시간들. 고와 낙이 있었고, 땀과 눈물이 있었으며, 희망과 좌절이 공존했고, 꿈이 짓이겨졌다가 다시금 피어났던 과거를 문자로 남겨보고자 한다.’(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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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썼다 지웠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글이라 적고 보니 뭔가가 잘못 됐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도 좋았던 건, 

부정적인 경험에 관한 느낌을 글로서 털어내고 보니

내 마음 속 부정적인 감정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역시 글쓰기는 치유의 힘이 있나봐요.

앞으로도 종종 이런 경험을 시도해보겠습니다.

저 자신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서도 좋은 경험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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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1-31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이성복 시인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된 짜라투스트라님의 부정적 감정이 물러간 빈 자리에 긍정적인 감정이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짜라투스트라 2023-01-31 23:55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메데이아
에우리피데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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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메데이아-에우리피데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봤습니다. 송혜교가 연기한 문동윤이라는 인물이 잔혹한 학교폭력을 당하고, 그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신의 평생의 삶을 바치는 이야기로서. 드라마를 보다보니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을 문동윤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 그 사람의 복수를 응원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게 흡입력 있는 드라마의 힘이겠죠? 그런데 <더 글로리>를 보다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떠올랐습니다. 똑같은 복수극이지만 <더 글로리>와는 어딘가 다른 복수극으로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더 글로리>의 복수는 어떤 점이 다른 걸까요? 저는 이걸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일반적인 복수. <더 글로리>도 그렇지만 <메데이아>도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복수극이 나옵니다. 주인공이 무언가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일을 당하거나 큰 배신을 당합니다. 배신 이후에 각성한 주인공은 사력을 다해 복수를 하며 자신이 당한 걸 상대방에게 되돌려줍니다. 이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응익주의는 뿌리가 깊습니다. 고대 합무라비 법전부터 고조선의 8조법까지 뿌리 깊은 이 응익주의는 복수극의 사고방식의 원형을 이룹니다. 응익주의에 기반한 복수극은 몬테크리스토 백작부터 무협소설의 다양한 복수이야기까지 무수한 이야기를 변주해냅니다. <메데이아>도 일반적인 복수극에 충실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아손을 따라나선 메데이아. 시간이 지나 성공을 위해 메데이아를 버리는 이아손. 그에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아손을 파멸시키려 나선 메데이아의 복수극. 이아손과 결혼하는 여인을 죽이고, 죽인 것도 모자라 여인의 아버지까지 죽이면서 이아손을 파멸로 몰고가는 메데이아의 행동. 여기까지 보면 <메데이아>는 일반적인 복수극에 충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다릅니다. 왜냐구요? ‘메데이아의 복수는 더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복수. <메데이아> 속 메데이아의 복수는 더 나아갑니다. 이아손의 배신에 대한 복수로서 당한 만큼 돌려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메데이아는 또다른 행동을 합니다. 바로 이아손과 메데이아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물론 메데이아가 이아손과 결혼할 공주를 죽이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독 묻은 예쁜 옷과 황금 머리띠를 공주에게 주는 도구로서 사용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후 상황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로서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손수 죽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가족주의가 공고한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더 쉽게 이해할 수 없겠죠. 하지만 저는 이 상황을 나름의 오독으로 이렇게 해석해봅니다. 메데이아가 아이들을 죽이는 행위는 완벽한 복수에 가깝다고. 복수가 뭡니까? 당한만큼 돌려주는 겁니다. 당한만큼 돌려주는 행위에 숨겨진 복수자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요? 어쩌면 복수자는 복수라는 행위를 하며 자신이 당하기 전의 삶을 갈구하거나 그때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죠. 이미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복수자의 복수는 어쩔 수 없는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메데이아는 당한만큼 갚아주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아이들마저 죽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의미입니까? 어쩌면 메데이아에게 아이는 자기 삶에 미친 이아손의 흔적이자 그림자였겠죠. 위의 글을 떠올려보세요. 복수자에게 복수라는 행위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벌이는 어떤 몸부림에 가까운 것입니다. 메데이아에게 복수의 완성은 자기 삶에 남은 이아손의 흔적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데이아는 아이들을 죽이면서 자기 삶에서 이아손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습니다. 그것이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죽인 것이라고 해도. 과거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으니 이것이 완벽한 복수가 아닌가요? 물론 과거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메데이아가 이아손을 만나기 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자신의 삶의 상황을 만든 것도 맞습니다. 이 정도면 저에게 메데이아의 복수는 완벽에 가까운 복수로 여겨집니다.

 

저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죽이면서까지 복수를 행하는, 완벽에 가까운 복수를 하는 복수극을 본적이 없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이야기도 그렇고, 무협소설의 다양한 복수극에서도 그렇고, 메데이아의 단계까지 복수를 밀어넣는 복수극은 없었어요. 그래서 저에게 <메데이아>는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복수를 달성한 유일무이한 복수극처럼 여겨집니다. 어느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복수를 행한 복수자이자 완벽하게 주체적인 복수자가 나오는 복수극으로. 아마도 저에게 <메데이아>속 메데이아는 복수의 극에 도달한 복수자의 표상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또다른 완벽한 복수자가 나오는 복수극을 보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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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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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영민

 

인간에게는 희망이 넘친다고, 자신의 선의는 확고하다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해맑게 웃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p.10~11)

 

독서 모임 때문에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펼쳐 읽었습니다. 읽는데 초반부에 저 문장들을 만났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데 문장을 읽으면서 어떤 인상들이 남습니다. 어떤 문장은 아무 인상도 없이 내 정신에서 흩어져 가고, 어떤 문장은 내 영혼에 스며들어 매력을 남기고, 또 어떤 문장은 참을 수 없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으면서 만난, 저 문장은 제게 매혹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문장을 만난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책이 저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으리라는 걸.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p.292~293)

 

독서 모임에 나오신 분들도 이 책이 인상 깊었나 봅니다. 모임에 나온 분들이 서로 합의한 것도 없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에게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자발적으로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모임의 흐름이 흘러 갔습니다. 자신이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분들의 대화 속에서 저는 독서 모임의 빛을 본 것 같습니다. 책에게서 좋은 것을 보고 그것을 남들과 나누고자 할 때 생겨나는 대화에서 생겨나는 빛. 그렇게 모임에 참석한 우리들은 독서 모임의 시간을 찬란한 성좌의 빛처럼 빛내고 있었습니다.

 

목적 없는 삶을 바란다고 하면, 누워서 꿀 빨겠다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오해다.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아니던가. 소극적으로 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목적도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p.291)

 

저자는 허무와 더불어 사는 삶을 주제로 산문집을 내겠다고 마음먹었고, 그에 관련된 생각의 편린을 다양한 지면에 발표하고 그 글들을 모아 이 책을 냈다고 합니다. 어쩌면 모임에 모인 우리는 허무와 더불어 사는 삶을 주제로 모인 글들을 보면서, 삶의 허무에 대항하는 어떤 몸부림을 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몸부림이 책을 읽는 독자의 삶과 겹쳐 보인 게 아닐까요. 겹쳐 보였기에 우리가 이 책과 공감했던 게 아닐까요. 공감했기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좋았고, 좋았기에 독서 모임에 나와서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시간을 가진 게 아닐까요. 너무 좋은이라는 말을 많이 해서 거짓말 같겠지만(^^;;) 실제로 좋은 독서를 하고 좋은 경험을 하고 좋은 독서 모임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좋은이라는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좋은 이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는 건 과장이라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어쨌든 좋았고, 좋아서 다음에도 좋은 독서 모임 시간 가지기를 기대해봅니다. , 어쩌면 이 모든 게 저자처럼, 허무에 대항하는 우리만의 방식이 아닐까요. 허무에 대항하는 우리만의 바식이 독서모임이라면, 우리는 삶의 허무에 대항하기 위해 독서 모임을 하고 또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허무에 대항하는 좋은 방식이니까요.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소.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되오, 그것들은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소.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고갈되지 않는 창고)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외다.(부록인 소식의 <적벽부>중에서,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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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1-29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무상한 것이기에 세상의 많은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허무함으로 자신 안으로 침잠하기 보다는 올해 피는 꽃은 다시는 피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아이의 눈으로 보듯 세상을 경이롭게 보는 것이 삶의 허무를 이겨내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3-01-29 14:08   좋아요 2 | URL
참 좋은 말이네요 여기서도 또 무언가 얻어갑니다^^

DYDADDY 2023-01-29 14:32   좋아요 2 | URL
김영민 교수님의 책 담아갑니다. 저도 김교수님이 어떻게 허무를 대하는지 공부하겠습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3-01-29 20:04   좋아요 1 | URL
^^
 
근본중송
나가르주나 지음, 이태승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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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근본중송-나가르주나

 

<1>

이미 간 것은 가는 것이 아니며 또 아직 가지 않은 것도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이외에 현재 가고 있다는 것도 가는 것이 아니다.

 

<2>

현재 가고 있는 것에 가는 것이 [있다]. [가는 것은] 현재 가고 있을 때에 [있는 것이지]. 이미 지나간 때나 아직 가지 않은 때에 [있는] 아니다. 실로 가는 것은 현재 가고 있을 때 가는 것이다.

(p.18~19)

 

<1>

만약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의존한다고 한다면,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2>

현재와 미래가 과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그[과거]에 의존해서 존재할 것인가.

 

<3>

더욱이 과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 양자[현재와 미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현재와 미래의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p.124~125)

 

머리가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어디가 앞과 뒤인가... 혼란이 끊이지 않네요. 인도 대승불교 사상의 철학적 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한 불교 사상가 나가르주나의 대표 저술인 <근본중송>을 읽은 후유증 탓입니다. 책을 펼쳐 읽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들만 가득하네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필사적으로 참아가며 꾸역꾸역 읽어가다 보니 머릿속에 혼란스러워 지네요. 저라는 존재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지,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있는지, 이 책은 존재하는지, 아니 나라는 존재는 존재하는지, 세상은 존재하는지, 모든 게 혼돈 속에 빠져드네요. 읽다보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말들의 흐름에 빠져서 제가 살아가는 세상도 잊고 저 자신도 잊고 모든 게 사라져가는 경험을 하게 되네요.

 

, 정신을 차려봅니다. 정신을 차려야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 제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거죠. 정신을 차려야지 하는데 혼돈은 쉽게 가시지 않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앉아서 글을 써봅니다. 뇌 속에 가득한 혼돈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읽은 책에 대해서 서평을 쓰면 혼돈이 사라지고 무언가 정리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정리하려고 보니 뭘 정리해야할까요. 뭘 알아야 정리를 하지. 책을 분명히 읽었는데 알아낸 것도, 이해한 것도 없습니다. 알아낸 것도 없고 이해한 것도 없는데 무슨 정리를 하고 글을 씁니까. 하지만 언제나 해답은 있는 법. 알아낸 것도 없고, 이해한 것도 없다면 그 무지와 혼돈의 과정을 글로 쓰면 되죠. 생각해보니 무지와 혼돈의 과정을 어떻게 글로 쓸 수 있나요. 그 방법조차 혼란스럽네요.

 

무지와 혼돈이라도 조금은 알아야 쓸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아는 게 진짜 없는데요. 잠깐, 잠깐, 아는 거라도 정리를 해봅시다. 나가르주나는 연기설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연기설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불교 교리의 근본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연기설이란 무엇인가. <근본중송>의 해설에 따르면 연기란 연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으로, 무엇인가 생겨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연, 즉 조건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 무엇인가가 생겨나려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서 무엇인가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죠. 아니, 인과의 법칙이라고 하면 되지 왜 연기설이라고 하냐고 할 수 있는데, <근본중송>의 말을 따라가 보면 이 인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설은 결코 단순한 게 아닙니다. 나가르주나는 연기를 여덟 가지의 부정, 즉 팔불로 서술하고 있는데, 저는 여기서부터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도 아닌. 이런 식의 논의가 이어지는데... 음 무슨 말인가요, 이게?

 

책의 해설에는 이어서 나가르주나가 연기의 개념과 대립되는 실체의 개념을 비판한다고 써 있습니다. 실체란 변하지 않고 항상 존재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아트만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하네요. 실체, 자성, , 아트만, 푸드갈라, 본성 같은 단어들이 비슷한 개념에 속한다며 <근본중송>은 지속적으로 비판을 한다네요. , 비판하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뭘 어떻게 비판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혼돈 속에서 <근본중송>을 통한 미지의 불교 지식 대륙 탐사는 끝났습니다. 이 탐사 쉽지 않네요. 불교 지식 대륙을 감싼 무지의 안개를 뚫기가 쉽지 않아 보이네요.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포기는 없습니다. 힘들어도, 쉽지 않아도 다른 서양철학 대륙 탐사나 동양철학 대륙 탐사 때처럼 계속해서 전진할 수밖에요. 계속 시도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게 저의 경험에서 얻은 방법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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