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수상작품집 (특별보급판)
이신주 외 지음 / 아작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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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수상작품집-이신주 외

 


1.

부끄럽다. 이 글을 쓴다고 해도 10월에 쓴 서평이 고작 세 편이라니. 받아들이는 입력에 비해서 나오는 출력은 비할 바가 못된다는 것이. 읽은 책을 꾸준히 서평으로 써내는 네이버 블로그 이웃이나 알라딘 서재 이웃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게으름은 고칠 수 없는 수준인가라는 한탄을 할 수밖에 없다. 한탄을 하면서도 글을 쓸 수밖에 없으니 써본다.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2.

나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후로 한국 장르문학의 풍향이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처음에 내가 한국소설을 읽을 때는 SF 같은 장르문학은 문학계의 변방으로서, 문단에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런 문학계의 현실을 여러차례 개탄해왔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평가에서나 나오는 양에 있어서나 한국 장르문학은 그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무엇이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확신할 수는 없다. 쌓이고 쌓인 것들이 어느 순간 특이점을 불러 일으켜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장르문학을 꾸준히 좋아해 온 내 입장에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좋다. 부담없이 다양한 작품들을 읽을 수 있으니. 더 이상 박한 평가를 의식할 필요도 없고.

*다시 또 강조해보면, 내 개인적으로는 그 변화를 확연히 느낀 건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후였다.

 

3.

<2회 문윤성 SF문학상 중단편 작품집>도 한국 장르문학의 변화된 흐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수상작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좋은 SF 이전에 좋은 소설로 보이는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과거를 둘러보면, 한국 SF 작품들 중에서 기발한 설정이 있거나 플롯의 흥미는 있었지만 소설로서의 만듦새나 짜임새는 약한 작품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책의 수상작들은 대체로 좋은 SF 이전에 좋은 소설로서 느껴졌다. 아마도 심사위원들이 좋은 SF 이전에 좋은 소설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상작인 <내 뒤편의 북소리>도 그렇지만 우수상 수상작인 <궤적 잇기>, 가상작인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것에 대하여>,<사어들의 세계>,<신의 소스코드>도 마찬가지다. 특히 <궤적 잇기>,<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것에 대하여>,<사어들의 세계>는 인간의 중요한 감정인 사랑, 우정, 고독을 SF의 형식으로 변주한 소설처럼 보였다. SF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감정이 핵심인 소설들. 그건 SF가 소설의 계보에 속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내 뒤편의 북소리><신의 소스코드>는 내가 좋아하는 SF 특유의 기발한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대 서사의 흐름까지 가지고 있었서 좋았다. 특히 <신의 소스코드>는 같이 차원을 넘나드는 작품의 흐름을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기발한 형식에 담아내서 너무나 좋았다.

 

4.

위에 쓴 글을 보면 마치 내가 무슨 심사위원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나는 심사위원이 아니고, 일개 SF를 좋아하는 팬일 뿐이다. 팬심으로서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했을 뿐이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국 SF의 좋은 흐름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적었을 뿐이다. 적고 보니 내가 여전히 심사위원인 줄 착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나는 조금 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앞으로 조금 더 정신을 차린 채 책 읽고 글을 써보겠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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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마음 - 지치지 않고 세상에 말 걸기
위근우 지음 / 시대의창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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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뾰족한 마음-위근우

*10-210월달에 두번째로 쓰는 서평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위치가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위치는 상황과 자신이 처한 조건에 따라 달라지죠. 누군가는 어떤 이의 아버지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의 자식이 되고, 그들이 같은 직장에서 상사가 되거나 부하직원이 되는 것처럼. 대중문화를 대하는 이들의 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는 단순한 대중문화 소비자가 되고, 다른 누군가는 대중문화 생산자가 되고, 또 다른 이는 대중문화를 비평하는 비평가가 되기도 합니다. <뾰족한 마음>의 저자 위근우는 대중문화 비평가입니다. 대중문화 비평가로서 활동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평범한 대중문화 소비자와 위근우의 위치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책 제목을 보면 느껴지는 것처럼, 위근우는 대중문화를 대할 때 뾰족한 마음을 내세우기에, 그의 대중문화를 보는 시선은 날카롭지 그지없습니다. 글을 들여다보는 평범한 대중문화 소비자의 마음을 벨 것처럼.

 

어떻게 보면, 뾰족함 마음을 가지고 대중문화를 들여다보며 날카롭게 파악하는 것을, 평범한 대중문화 소비자가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컨텐츠를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피면서 작품이 가진 이데올로기나 개념, 작품이 생산되어 소비되는 사회적 양태를 파악하면서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작품의 용법을 파악하는 걸, 삶에 찌들어 있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피곤한 현대인들은 대중문화 컨텐츠를 꼼꼼하게 따지는 것보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쉬운 일이죠.

 

현대의 대중문화 소비자들과 비평가들의 차이가 메워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대중문화 비평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누군가는 해야할 일을, 그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다수는 지친 심신을 이끌고 쉬기 위해 대중문화 컨텐츠를 소비할 수밖에 없는 게 이 사회의 구조라면, 소수의 누군가는 그들이 소비하는 대중문화 컨텐츠를 꼼꼼하게 살피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죠. 쉽게 소비되는 대중문화 컨텐츠의 관성을 비판하고, 그것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이나 개념의 폭력성을 성찰하고, 새롭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거나 컨텐츠 창작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식으로. 다수가 할 수 없는 걸 하는 소수, 다수의 삶의 방식을 어떤 식으로든 보완해주는 소수. 제가 보기에 대중문화 비평가의 몫은 거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위근우씨의 몫도 거기에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위근우씨가 <뾰족한 마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은 크게 공감하지만, 어떤 부분은 비판합니다. 독서모임 같은데서 항상 하는 말이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가치판단으로 보는 건 피곤하고 힘든 일입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하기 때문에 그들의 몫을 인정하지만, 반대로 보면 내가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위근우 같은 대중문화 비평가들은 저게 잘못됐다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다른 무엇을 해야 한다고, 저같은 대중문화 소비자들을 채찍질하고 채근합니다. 하지만 평범한 대중문화 소비자인 저는, 학교 선생님 같은 그들의 간섭에 때로는 동의하고,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비판하면서, 저만의 뾰족한 마음을 가다듬어 나갑니다. 그렇게 저같은 이들의 뾰족한 마음과 위근우 같은 비평가들의 뾰족한 마음이 합쳐져서 하나의 사회가 이루어지는 거겠죠. 물론 둘의 뾰족한 마음이 합쳐질 때 나타나는 양사이 긍적적인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들이 언젠가는 합쳐지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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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을 때 쓰자.

언제 쓰려는 욕망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쓸 수 있을 때, 쓰려고 할 때 반드시 써야 한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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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이 미술관이다 -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현대 미술 읽기
이문정 지음 / 현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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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이 미술관이다-이문정


단언해서 말할께요. 저는 현대미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너무 간단합니다. 제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관해서 과거의 추억이 있습니다. 한 때 저에게는 지금은 생각하기 힘든 러브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인물은 미술관 관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인물을 따라 저는 용기를 내어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현대 미술 전시회를 관람하러 갔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현대미술이 무엇인지를. 러브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가지 않았을 그 전시회에서 저는 현대미술이라는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신세계를 경험하면서 저는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현대미술 이라는 신세계에 푹 빠져들었을까요?^^;; 그럴 리가요. 만약에 그랬다면 지금의 저는 현대미술을 좋아하고 있었겠죠. 첫문장에 적은대로, 저는 그 전시회를 통해 현대미술을 싫어하게 됐습니다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는 전시물들과 퍼포먼스 사이를 걸어다니며 저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무지와 무식과 미지라는 단어들이 내리누르는 공포를 절감하면서. 러브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당장 뛰쳐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러브가 저를 살렸습니다. 그 감정은 참, 공포가 나를 압박함에도 불구하고 전시회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 전시회 관람은 좋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었고, 사랑했던 그 사람이 있어서. 반대로 전시회 자체에 대한 저의 인식만 봤을 때 저는 현대미술 전시회를 다시는 찾아가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공포도 공포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관람하는 데 너무 돈을 많이 쓴 것 같아서요.^^;;

 

시간은 꿈결처럼 흘러갔습니다. 사랑했던 그 사람은 떠나갔고, 저는 저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현대미술을 좋아하지 않고, 현대미술 전시회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인가봐요. 현대미술을 쉽게 이야기해주는 <세상 모든 곳이 미술관이다> 같은 책을 제가 부담없이 읽고 있는 걸 보면. 미술평론가 출신의 저자 이문정 씨는 <세상 모든 곳이 미술관이다>라는 책에서 현대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전문가와 대중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정말 좋았습니다. 어려운 용어나 개념의 없어서요. 미술평론이나 미술관련서에서 종종 보이는 어려운 개념이나 용어없이 이문정 씨는 현대미술을 설명합니다. 친근함과 쉬언 말로서. 책이 술술술 익히는데 당황했습니다. ‘현대미술 책 맞아?’ 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현대미술 하면 생각나는 전문가주의나 엘리트주의 같은 것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이문정 씨가 설명하는 현대미술을 전체적으로 보니 액체근대라는 개념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는 용어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설명하는 바우만의 개념입니다. 바우만이 보기에 우리가는 살아가는 시대는 고정되고 딱딱한 시대가 아닙니다. 바우만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현대인들이 과거의 고정되고 안정된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삶 속에서 살아간다고 바우만이 주장하며 그는 그걸 액체근대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 단어를 <세상 모든 곳이 미술관이다>에서 저자인 이문정이 설명하는 현대미술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현대미술은 과거의 미술과 달리 단지 보여주는미술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현대미술은 관람자들의 참여를 유발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미술작품이 많습니다. 재료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캔버스라든지 물감 같은 몇 가지의 한정된 재료만 썼던 미술과 달리, 현대의 미술은 세상의 온갖 재료를 다 써서 만들어집니다. 변기, 동물시체, , 깡통, 쓰레기... 그뿐만 아닙니다. 현대미술은 음악, 영화, 사진, 만화, 애니메이션, , 공연, 건축 같은 온갖 다른 예술을 다 가져다 쓸 수도 있습니다. 미술관의 개념 자체도 달라집니다. 과거와 같은 미술관만이 현대 미술의 관람 장소는 아닙니다. 세상 모든 곳들을 현대 미술을 자신의 관람 장소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과거의 단단하고 고정된 개념틀에 갖춰 있던 미술에 비해서 볼 때 현대미술은 훨씬 유동적이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술이 현대미술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현대미술이야마로 액체근대의 표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봅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현대미술에 대한 저의 비호감을 조금 무너뜨렸습니다. 진입장벽을 낮추었다고 해야할까요? 그래도 막상 현대미술 전시회에 갈래?라고 질문한다면 조금 머뭇거려지기는 하네요.^^;; 조금 더 알려고 노력한 뒤에 가보겠다는 비겁한 변명을 하며 이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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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1-09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짜라투스트라 2022-11-10 09:43   좋아요 1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서니데임님도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11-10 0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짜라투스트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짜라투스트라 2022-11-10 09: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2-11-10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짜라투스트라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짜라투스트라 2022-11-10 09: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01님도 행복한 한 주 되세요.^^
 

2.

의도 했던 건 아닌데, 읽다보니까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가장 사적인 러시아><푸틴의 러시아>

푸틴 이전의 러시아와 푸틴 이후의 러시아로 이어진다.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

<지금 다시, 일본 정독>

위기에 빠진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반영한다.

물론 일본 내부의 시선과 외부의 시선이라는 차이도.

<짱깨주의의 탄생><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

중국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의 차이를 바라보며,

중국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

여전히 세상에 읽을 책은 많고,

알아야 할 것들은 많다..

마치 무한한 책들을 형상화한 단편소설 <바벨의 도서관>처럼

책들의 미로에 빠져 헤매는 이들은

이 무한한 헤매임에서 빠져나올 재간이 없다.

마치 출구 없는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헤매고 또 헤맬 뿐이다.

책이라는 미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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