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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위한 시간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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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2.별을 위한 시간-로버트 A. 하인라인

별을 향해 날아가는 쌍둥이는 나이가 거의 들지 않을 것이다. 설령 한 세기 동안 날아가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 남겨진 쌍둥이는 늙어간다.(59)

시간 여행과 관련된 것 중에 '쌍둥이 패러독스'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만한 것이지만, 쓸데없이 굳이 설명을 해보자면(^^;;) '쌍둥이 패러독스'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전설적인 이론인 '특수 상대성이론'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특수 상대성이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머리 아프다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네, 저도 그 의견에 공감합니다. '특수 상대성이론'이 쉬운 이론은 아니니까요. 특수 상대성이론에 사용되는 수식은 저 같은 수학에 무지한 인간에게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뭉기며 '여기서 꺼져'라는 말이 들릴 정도의 튕겨내기를 시전하고, 이 이론과 관련된 논의들은 명성과 달리 복잡한 면이 있으니까요.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잘 모르지만, 몇 권의 과학책을 읽고 대충 그러려니 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그래도 몇 권의 과학책을 읽고 오류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나마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른다면 빛의 속도에 가까울 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길이는 수축하게 됩니다. 아마 너무 쉽게 말해서 서술상 일반화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감안해야할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을수도 있지만, 대충 이 정도만 알면 이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인 '쌍둥이 패러독스'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쌍둥이 패러독스'는 '특수 상대성이론'이라는 이론에 기반한 과학적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식과 논증, 설명이 있을 뿐이고 생생한 삶의 모습은 없죠. <별을 위한 시간>은 '쌍둥이 패러독스'를 이야기화한 소설입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서사의 흐름이 있고,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이 있죠.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하나의 과학적 역설을 이야기화해서 생명력을 불어넣고 생생한 삶의 모습으로 되살려낸 것이 이 소설이라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SF의 3대 그랜드 마스터 중에서 가장 스토리텔링 강한 로버트 A. 하인라인이 소설을 썼으니,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강할지는 쉽게 예측이 됩니다. 읽어보니 제 예측대로 였습니다. 일단 이 소설은 쉽게 읽혀집니다. 물론 SF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소설의 전개도 빠르고, 이야기의 구성에서 복잡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없습니다. 소설 자체에 가독성이 높고,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이 소설은 SF답게 소설 부분부분에 과학적인 이론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론이라는 게 현실에서는 아직 구현되지 못한 가상이자 낭만에 가까운 이론이라 해도 소설은 실제 구현된 이론인 것처럼 현실감을 가지고 설명됩니다. 그래서 과학소설이라고 불리는 거 겠죠. 다른 부분은 이 소설에 나오는 것들의 생명력입니다. 빛에 가까운 속도로 운행되는 우주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실제 삶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계의 지구형 행성을 탐사하는 모습에서도, 지구에 있는 쌍둥이와 교신하는 모습에서도, 지구와의 시간차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에서도. 물론 마지막은 동화같은 모습도 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쌍둥이 패러독스와 연관된 우주 비행의 삶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실제 체험하는 것처럼.

과학이라는 영역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과학을 통해 발명된 기술이나 물건들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과학이론 자체는 일반인들의 삶에 가까울 수 없습니다. 거기 등장하는 수식이나 설명, 이론을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럴 때 과학소설이라고 불리는 SF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론과 일반인들을 이어주는 가교로서. 저는 <별을 위한 시간>이 '가교로서의 역할'에 가장 잘 들어맞는 SF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쌍둥이 패러독스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서 보여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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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열쇠의 계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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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1.책과 열쇠의 계절-요네자와 호노부

아무리 훌륭한 규칙이라도 언젠가 어기게 된다. 그렇다면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고 싶다고. 맞아, 나도 언젠가 이상론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될 날이 오겠지. 그래도 마쓰쿠라, 조금만 더 지켜줄 수 없을까?(365)

TV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빙과>의 원작소설가인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은 저에게 복합적이고 독특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덧없는 양들의 축연>이나 <보틀넥>,<추상오단장> 같은 작품들은 무겁고 어두운 감정의 파고로 저를 내려앉히는 느낌이고요(특히 <보틀넥> 같은 작품은 어찌나 우울하고 어둡던지 읽다가 우울의 계곡 속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인사이트 밀>이나 <부러진 용골> 같은 작품들은 익숙한 장르의 공식을 해체하는 신선한 느낌의 세계로 저를 인도하면서도 어딘가 복합적이고 묘한 감정을 불러왔고요, <빙과>가 속한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는 청춘 소설 같으면서도 청춘 소설 같지 않은 씁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모든 감정들을 종합해 봤을 때,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들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을 들게 만드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책과 열쇠의 계절>도 요네자와 호노부 특유의 복합성이 가미된 '청춘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일반적으로 청춘 미스터리 소설이라면, 청춘 소설에 미스터리를 가미한 소설입니다. 이 때의 청춘은 우리가 아는 청춘입니다. 이미 지나간 버린 젊음의 향수를 간직한, 청춘만의 낭만과 희망이 펼쳐지는 그 청춘. 하지만 요네자와 호노부의 청춘 소설은 일반적인 청춘 소설과 다릅니다. 그는 낭만과 희망, 추억의 공간인 청춘 소설에 냉정한 현실을 덧붙입니다. 밝고 희망적인 청춘의 이면에는 냉정한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죠. 청춘이라는 낭만의 무대에 차가운 현실의 무게를 더함으로써 그의 청춘 소설은 따스한 청춘과 차가운 현실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그의 청춘 미스터리 소설은 씁쓰레하고 쓰디쓴 맛이 납니다. 상쾌하고 밝은 맛의 청춘소설과는 다른.

이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춘의 낭만, 십대시절의 향수가 어른거리지만 그 주위를 맴도는 현실의 무게감이 어울러진 소설로서. 책에는 두 명의 십대소년이 등장합니다. 3학년이 사라진, 한가한 고등학교 도서실을 지키고 있는 2학년 출신 두 명의 도서위원. 이 둘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자 탐정역할을 합니다. 홈즈-왓슨 콤비 같은 탐정과 조수가 아니라, 탐정이라는 대등한 관계에 놓인 홈즈-홈즈 느낌의 탐정 콤비로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해나갑니다. 둘이 협력하면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데 둘의 스타일과 소설에 차지하는 역할은 조금씩 다릅니다. 키크고 잘 생긴 마쓰쿠라 시몬은 놀라운 추리력을 가진 인물로서 냉소적이고 어두운 구석이 있는 인물로, 사건을 냉정한 현실의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그의 동료이자 소설에서 화자인 '나'로 나오는 호리카와 지로는 소극적이며 순진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마쓰쿠라 시몬 못지 않은 추리력으로 시몬과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합니다. 시몬과 다른점이 있다면 지로는 사건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인간들의 따스함과 희망을 지켜줄려고 합니다. 시몬이 현실을 상징한다면, 지로는 낭만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겠죠. 흥미로운 부분은 이 둘이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킵니다. 혼자 있을 때 보다 함께 있을 때 더욱 더 빛을 발하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낭만과 현실은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든다'라고. 저만의 오독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보니 이 소설이 현실과 낭만의 이중주로 빛나는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그 이중주는 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현실을 견뎌낼 힘을 주는 낭만과 낭만의 공허함을 가라앉혀주는 현실의 무게감의 조화로, 삶을 살아나갈 힘을 얻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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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성과 정당성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3
카를 슈미트 지음, 김도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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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0.합법성과 정당성-칼 슈미트

'전쟁이 끝나고 조사를 받기 위해 수감 생활을 한 후에도 슈미트는 히틀러를 지지한 것에 대해 그 어떤 참회도 표명하지 않았고, 나치의 잔학한 행위에 대해서도 자신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전쟁 후 교수직에 다시는 복귀하지 못했지만 서독에서 공법과 정치 이론에 끼친 슈미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1985년 타계할 때까지 그의 저술들뿐만 아니라 사적인 세미나를 통해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작용했던 것이다.

전후 서독의 많은 공법학자들은 슈미트라는 '문제적 인간'이 아니라 슈미트의 '저작'과 '이론'에 담긴 통찰력과 견해에 주목할 뿐이라고 말해왔다. 과연 슈미트가 나치에 관여했다는 점과 슈미트의 저작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가령 「지도자는 법을 수호한다」라는 1943년의 글에서 슈미트는 1934년 6월 30일과 7월 1일에 자행된 정치적 살해 행위-그 희생자는 나치 지도부 내 히틀러의 정치적 경쟁자들, 연방 의회 의원 13인, 그 박의 나치 언론인, 파펜 부총리 공보비서, 독일 보수파 거물 정치인인 전임 총리 슐라이허 등 많은 극우 보수파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희생자 수는 200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를 정당화하는 히틀러의 의회 연설(1943. 7. 13)을 노골적으로 칭송하고 있다.(p.321~323)

나치 시대의 계관 법학자, 나치를 옹호한 법학자, 나치 시대를 대표하는 법학자. 네, 카를 슈미트는 그런 인물입니다. 그의 주장을 파고 들어가보면 의외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해석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치의 어용 법학자이자 나치를 옹호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치 시대를 대표하는 법학자이자 나치를 옹호한 대표적인 법학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가진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게, 무시무시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슈미트의 책들을 읽었지만 의외로 그의 책은 무시무시하지 않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법학적이고 법철학인 논증의 틀 뒤에 싸늘하고 냉정한 무언가가 있다고 해야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물음이 있을 겁니다. '무언가가 뭔데?'라는. 이제부터 한 번 그 물음에 대답해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칼 슈미트는 일반적인 법학자, 법철학자, 사상가, 철학자,학자와 다릅니다. 그의 글은 논증이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이들과 동일하지만, 논증이라는 형식을 이용해서 닿으려는 지점이 그들과 다릅니다. 일반적인 사상가,법학자,학자라면 논증의 형식을 이용해서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고, 인간의 이성에 가 닿아 인간들이 조금 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슈미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논증의 형식을 이용해서 인간의 감정이나 직관,본능에 가 닿으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나 직관,본능에 가 닿아 그것을 쥐고 흔들기를 원합니다.(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무언가'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책에서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논증을 전개해나가며 정치 행위가 결국에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여 나누고, 적에는 저항하고, 동지들은 뭉치는 것이 정치 행위의 근원이라는 것이죠. 이 말은 집단적 행위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능에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해하기에 너무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편합니다. 적과 동지를 나누라. 적은 물리치고 동지끼리는 힘을 합치자. 이보다 더 쉬운 정치적 구호가 있나요? 나치를 생각해봐요. 유대인은 나쁘다. 나쁜 사람들이니까 물리쳐야 한다.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피해를 입었으니 서로 뭉쳐서 유대인들을 몰아내자. 1차 대전 이후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혼란, 대공황이 불러온 경제적 위기 속에서 허우적대며 힘들어하는 독일인들에게 이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이해하기 쉬운 구호가 있을까요? 나치의 저 정치적인 구호와 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주장하는 것이 뭐가 다른가요? 저러니 슈미트는 나치와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연적인 것처럼.

<합법성과 정당성>이라는 책도 슈미트의 다른 책들처럼 인간의 감정과 직관, 본능에 가닿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1차 대전 이후에 독일에 세워진 의회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정치경제적인 혼란을 이해한다면, 슈미트의 말에 마음이 흔들릴 확률이 높습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을 보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했을까요? 슈미트는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에 대한 자신만의 대책을 기록한 책들을 써나갑니다. 그 중에 <합법성과 정당성>이 위치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합법성과 정당성>은 어떤 책일까요? 이제부터 여기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의회제 민주주의(또는 의회제 입법국가)라는 축이 하나 있습니다. 이 축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합법성'입니다.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는 순간, 그 다수당은 합법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쥐게 되는 정치적인 구조로서의 의회제 민주주의. 슈미트가 말하길, 의회제 민주주의에서는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쥐게 되면 정당성 또한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합법성=정당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슈미트는 거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합법성을 가졌다고 필연적으로 정당성을 가지는 게 맞는 것일까요? 합법성과 정당성은 언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이제 의회제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슈미트는 국민투표를 꺼내듭니다. 간접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의 의회제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국민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국민투표. 슈미트는 의회 민주주의(또는 의회제 입법국가)보다 국민투표가 더 국민의 민의를 잘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슈미트는 이 국민투표에는 '정당성'이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국민투표가 '정당성'을 가진다는 말이죠. 슈미트는 합법성과 정당성을 비교하는 논증을 하면서, 의회제 입법국가가 구현해내는 다원주의 사회는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는 당파들이 맞물려 돌아가기에 혼란스럽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혼란스러운 바이마르 공화국의 동시대 상황이 그림자처럼 스쳐가는 건 당연하겠죠. 아울러 슈미트는 의회제 입법국가가 가진 다수결 개념에 의해서 다수당이 소수당을 억압하는 정치구조가 형성되며, 이것은 의회제 입법국가가 그렇게 강조하는 '가치중립적인 합법성'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그는 의회제 입법국가가 가진 가치중립성은 다수당이 정치적 권력을 쥐는 패권의 현실을 은폐하고 가치중립을 강요하면서 가치중립을 거부하는 이들을 적대시하고 몰아내는 가치강요적인 현실을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는 의회제 입법국가는 가치중립적이 않고 오히려 지극히 '가치추구적인 정치 제도'라고 주장합니다.이 정도까지 오면 서서히 슈미트의 의도가 보입니다. 슈미트는 의회제 입법국가가 가진 이상이나 일반적인 개념의 약점을 파고들어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대안으로 법률과 헌법에 공표된 국민투표를 슬며시 꺼내듭니다. 국민투표가 의회제 민주주의 보다 훨씬 더 민의를 잘 반영하기에 국민투표가 더 좋은 정치제도이고 그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의 정치가 훨씬 더 좋은 정치적 제도라면서. 뭔가 보이지 않나요? 의회제 민주주의가 강조하는 합법성의 논리를 무너뜨리면서 국민 투표가 가진 정당성을 우위에 두고, 그 뒤에 국민투표를 통해 선출된 연방대통령을 강조하는 식으로 갈 거 같지 않나요? 네, 맞습니다. 슈미트는 서서히 의회제 입법국가 보다 국민투표를 우위에 두면서, 대통령의 통치가 의회를 통한 통치보다 더 괜찮다는 식으로 논리를 몰고 갑니다. 그는 그러면서 독재전체주의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갑니다. 거기서 나치의 등장은 필연적이죠. 사실 슈미트의 논리는 문제점이 많습니다. 대통령을 선출한 민의와 국회의원들을 선출한 민의에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슈미트가 말한만큼 둘의 민의 차이가 그렇게 클까요? 슈미트는 대통령을 선출한 국민의 의지가 균질적이고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대통령을 뽑은 민의가 그렇게 균질한 것일까요? 대통령을 선출한 민의가 의회제 민주주의 선거처럼 다양하지 않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요? 따지고 보면 슈미트의 주장에는 구멍이 많습니다. 구멍이 많지만 슈미트의 주장은 여전히 인간의 직관, 감정, 본능을 파고드는 힘이 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스런 현실 속에서, 의회제 민주주의는 혼란스러우니 좋지 않고, 국민투표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가 더 괜찮다는 발언이 사람들에게 잘 먹힐 확률이 높으니까요. 혼란 보다 강력한 통치가 좋다는 건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니까요.

여기까지 적어놓고 보면 오직 슈미트가 나치에만 연관된 인물처람 보이네요.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슈미트의 책을 파고들어가면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논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대 정치사상사, 정치철학, 법학, 법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법을 분리된 개념으로 파악하면서 법을 논리적이고 기술적이며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정립한 당대의 법실증주의에 대항하여, 슈미트는 법을 정치와 사회의 연관성 속에서 생겨나는 생동감 있는 정치적 개념으로 파악합니다. 슈미트의 품 안에서 법은 생생히 살아 있는 정치적인 무언가가 된 것이죠. 그리고 그의 사상을 재창조한 무수한 후대의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진 주제들은 아직도 충분히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것들이고요. 이런 면에서 보자면 슈미트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만한 인물입니다. 물론 그의 사상의 위험성을 충분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후대의 학자들의 슈미트의 위험성을 인지하면서 그의 사상을 재창조했다면,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도 슈미트라는 인물의 사상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넘어설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게 슈미트라는 사상가의 위험성을 중화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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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하여 - 난세를 타개할 현실 정치철학의 귀환
임건순 지음 / 시대의창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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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9.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요성에 대하여-임건순

 

원래는 이 책에 대하여 길게 쓴 글이 있었습니다. 왜 내가 별점으로 별 한 개를 주었는지에 관한. 그러나 다 써놓고 보니 너무 욕만 한 거 같아서(^^;;) 지우고 짧은 글으로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뭐 특별한 건 아니고요. 독서는 어차피 주관적인 것이고, 주관적인만큼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기에,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책에 쓰여진 내용과 의견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에 따라 별점을 매길 수 밖에 없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써놓고 보니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ㅎㅎㅎ, 여하튼 이 책에 대한 제 인상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길게 쓰기 싫어서 이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부디 다음 독서에는 조금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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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 실증적 <노자> 읽기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14
리링 지음, 김갑수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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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8.노자-리링(글항아리)

너무 오랜만에 서평을 쓰려고 보니 너무 힘드네요.^^;; 뭘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서. 그래도 차근차근 예전을 생각하며 한 번 써보려 합니다. 어떻게든.

생각을 다듬어 봅니다. 어떻게 써야 하는가. 여러가지 방안이 떠오릅니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에 그 방안 중 몇 가지에 따라 글을 써봤습니다. 결과는 쓰다가 맘에 들지 않아 몇번을 지우고 다시 쓰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는 쓰는 것도 지겹고 힘들어서 이 글은 그대로 두려 합니다. 그대로 두려고 보니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있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지 않는 것이 지금의 저에게는 너무 힘들네요.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그에 따르겠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머릿속으로 그동안 저의 노자 독서에 대한 흐름들이 스쳐 가네요. 그 순간들을 단순하게 몇 글자로 정리하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도 해보자면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진짜 제 '노자 독서사'(^^;;)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제가 처음 '노자'를 읽었을 때의 노자는 신비롭고 오묘하며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느낌의 책이었습니다. 제가 그때 얼마나 노자라는 책의 신묘함에 빠져들었는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노자를 통치철학이자 정치철학이자 처세서로 바라보는 해석서들을 읽으면서 저의 노자에 대한 생각은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게 맞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한 책에 대한 해석의 느낌이 변화한 것이죠. 어쩌면 최근에 나오는 노자 해석서들의 경향을 제가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흐름이 대세를 이루고 그에 다른 이들이 따라간다면 저도 어쩔 수 없는 것이죠.

리링의 <노자>도 이런 흐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반어적이고 은유적이고 오묘하고 신묘한 표현들이 가득하지만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통치자의 통치술이자 정치철학이라는. 단지 리링답게 특유의 실증적인 노력들을 글속에 담아내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더하면서, '리링스럽다'는 느낌이 더해죠 있죠. 이미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은 저에게는 익숙해서 부담없는 책이었고, 저의 변화한 노자 해석에 확신을 더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쓰고 보니 이전에 봤던 어떤 정치인의 대화가 기억납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에 가득했던 욕심을 버리고 나니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라고. 그 말을 보고 <노자>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운만큼 채울 수 있고, 버린만큼 더 얻을 수 있다라는. 일견 철학적이고 초월적으로 보이는 '노자'의 말은 실생활에 잘 적용될 수 있는 말인 것이죠. 물론 이 해석이 무조건 옳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활의 여러 상황들을 들여다보면 <노자>에 나오는 말들이 얼마나 잘 적용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제가 그 말대로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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