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성과 정당성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3
카를 슈미트 지음, 김도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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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0.합법성과 정당성-칼 슈미트

'전쟁이 끝나고 조사를 받기 위해 수감 생활을 한 후에도 슈미트는 히틀러를 지지한 것에 대해 그 어떤 참회도 표명하지 않았고, 나치의 잔학한 행위에 대해서도 자신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전쟁 후 교수직에 다시는 복귀하지 못했지만 서독에서 공법과 정치 이론에 끼친 슈미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1985년 타계할 때까지 그의 저술들뿐만 아니라 사적인 세미나를 통해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작용했던 것이다.

전후 서독의 많은 공법학자들은 슈미트라는 '문제적 인간'이 아니라 슈미트의 '저작'과 '이론'에 담긴 통찰력과 견해에 주목할 뿐이라고 말해왔다. 과연 슈미트가 나치에 관여했다는 점과 슈미트의 저작을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가령 「지도자는 법을 수호한다」라는 1943년의 글에서 슈미트는 1934년 6월 30일과 7월 1일에 자행된 정치적 살해 행위-그 희생자는 나치 지도부 내 히틀러의 정치적 경쟁자들, 연방 의회 의원 13인, 그 박의 나치 언론인, 파펜 부총리 공보비서, 독일 보수파 거물 정치인인 전임 총리 슐라이허 등 많은 극우 보수파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희생자 수는 200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를 정당화하는 히틀러의 의회 연설(1943. 7. 13)을 노골적으로 칭송하고 있다.(p.321~323)

나치 시대의 계관 법학자, 나치를 옹호한 법학자, 나치 시대를 대표하는 법학자. 네, 카를 슈미트는 그런 인물입니다. 그의 주장을 파고 들어가보면 의외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해석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치의 어용 법학자이자 나치를 옹호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치 시대를 대표하는 법학자이자 나치를 옹호한 대표적인 법학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가진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게, 무시무시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슈미트의 책들을 읽었지만 의외로 그의 책은 무시무시하지 않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법학적이고 법철학인 논증의 틀 뒤에 싸늘하고 냉정한 무언가가 있다고 해야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물음이 있을 겁니다. '무언가가 뭔데?'라는. 이제부터 한 번 그 물음에 대답해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칼 슈미트는 일반적인 법학자, 법철학자, 사상가, 철학자,학자와 다릅니다. 그의 글은 논증이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이들과 동일하지만, 논증이라는 형식을 이용해서 닿으려는 지점이 그들과 다릅니다. 일반적인 사상가,법학자,학자라면 논증의 형식을 이용해서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고, 인간의 이성에 가 닿아 인간들이 조금 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슈미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논증의 형식을 이용해서 인간의 감정이나 직관,본능에 가 닿으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의 감정이나 직관,본능에 가 닿아 그것을 쥐고 흔들기를 원합니다.(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무언가'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책에서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논증을 전개해나가며 정치 행위가 결국에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여 나누고, 적에는 저항하고, 동지들은 뭉치는 것이 정치 행위의 근원이라는 것이죠. 이 말은 집단적 행위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능에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해하기에 너무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편합니다. 적과 동지를 나누라. 적은 물리치고 동지끼리는 힘을 합치자. 이보다 더 쉬운 정치적 구호가 있나요? 나치를 생각해봐요. 유대인은 나쁘다. 나쁜 사람들이니까 물리쳐야 한다.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피해를 입었으니 서로 뭉쳐서 유대인들을 몰아내자. 1차 대전 이후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혼란, 대공황이 불러온 경제적 위기 속에서 허우적대며 힘들어하는 독일인들에게 이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이해하기 쉬운 구호가 있을까요? 나치의 저 정치적인 구호와 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주장하는 것이 뭐가 다른가요? 저러니 슈미트는 나치와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연적인 것처럼.

<합법성과 정당성>이라는 책도 슈미트의 다른 책들처럼 인간의 감정과 직관, 본능에 가닿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1차 대전 이후에 독일에 세워진 의회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정치경제적인 혼란을 이해한다면, 슈미트의 말에 마음이 흔들릴 확률이 높습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을 보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했을까요? 슈미트는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에 대한 자신만의 대책을 기록한 책들을 써나갑니다. 그 중에 <합법성과 정당성>이 위치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합법성과 정당성>은 어떤 책일까요? 이제부터 여기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의회제 민주주의(또는 의회제 입법국가)라는 축이 하나 있습니다. 이 축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합법성'입니다. 의회에서 다수당이 되는 순간, 그 다수당은 합법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쥐게 되는 정치적인 구조로서의 의회제 민주주의. 슈미트가 말하길, 의회제 민주주의에서는 합법적으로 정치권력을 쥐게 되면 정당성 또한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합법성=정당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슈미트는 거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합법성을 가졌다고 필연적으로 정당성을 가지는 게 맞는 것일까요? 합법성과 정당성은 언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이제 의회제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슈미트는 국민투표를 꺼내듭니다. 간접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의 의회제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국민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국민투표. 슈미트는 의회 민주주의(또는 의회제 입법국가)보다 국민투표가 더 국민의 민의를 잘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슈미트는 이 국민투표에는 '정당성'이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국민투표가 '정당성'을 가진다는 말이죠. 슈미트는 합법성과 정당성을 비교하는 논증을 하면서, 의회제 입법국가가 구현해내는 다원주의 사회는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는 당파들이 맞물려 돌아가기에 혼란스럽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혼란스러운 바이마르 공화국의 동시대 상황이 그림자처럼 스쳐가는 건 당연하겠죠. 아울러 슈미트는 의회제 입법국가가 가진 다수결 개념에 의해서 다수당이 소수당을 억압하는 정치구조가 형성되며, 이것은 의회제 입법국가가 그렇게 강조하는 '가치중립적인 합법성'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그는 의회제 입법국가가 가진 가치중립성은 다수당이 정치적 권력을 쥐는 패권의 현실을 은폐하고 가치중립을 강요하면서 가치중립을 거부하는 이들을 적대시하고 몰아내는 가치강요적인 현실을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는 의회제 입법국가는 가치중립적이 않고 오히려 지극히 '가치추구적인 정치 제도'라고 주장합니다.이 정도까지 오면 서서히 슈미트의 의도가 보입니다. 슈미트는 의회제 입법국가가 가진 이상이나 일반적인 개념의 약점을 파고들어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대안으로 법률과 헌법에 공표된 국민투표를 슬며시 꺼내듭니다. 국민투표가 의회제 민주주의 보다 훨씬 더 민의를 잘 반영하기에 국민투표가 더 좋은 정치제도이고 그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의 정치가 훨씬 더 좋은 정치적 제도라면서. 뭔가 보이지 않나요? 의회제 민주주의가 강조하는 합법성의 논리를 무너뜨리면서 국민 투표가 가진 정당성을 우위에 두고, 그 뒤에 국민투표를 통해 선출된 연방대통령을 강조하는 식으로 갈 거 같지 않나요? 네, 맞습니다. 슈미트는 서서히 의회제 입법국가 보다 국민투표를 우위에 두면서, 대통령의 통치가 의회를 통한 통치보다 더 괜찮다는 식으로 논리를 몰고 갑니다. 그는 그러면서 독재전체주의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갑니다. 거기서 나치의 등장은 필연적이죠. 사실 슈미트의 논리는 문제점이 많습니다. 대통령을 선출한 민의와 국회의원들을 선출한 민의에는 무슨 차이가 있나요? 슈미트가 말한만큼 둘의 민의 차이가 그렇게 클까요? 슈미트는 대통령을 선출한 국민의 의지가 균질적이고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대통령을 뽑은 민의가 그렇게 균질한 것일까요? 대통령을 선출한 민의가 의회제 민주주의 선거처럼 다양하지 않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나요? 따지고 보면 슈미트의 주장에는 구멍이 많습니다. 구멍이 많지만 슈미트의 주장은 여전히 인간의 직관, 감정, 본능을 파고드는 힘이 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스런 현실 속에서, 의회제 민주주의는 혼란스러우니 좋지 않고, 국민투표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가 더 괜찮다는 발언이 사람들에게 잘 먹힐 확률이 높으니까요. 혼란 보다 강력한 통치가 좋다는 건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니까요.

여기까지 적어놓고 보면 오직 슈미트가 나치에만 연관된 인물처람 보이네요.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슈미트의 책을 파고들어가면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논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대 정치사상사, 정치철학, 법학, 법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법을 분리된 개념으로 파악하면서 법을 논리적이고 기술적이며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정립한 당대의 법실증주의에 대항하여, 슈미트는 법을 정치와 사회의 연관성 속에서 생겨나는 생동감 있는 정치적 개념으로 파악합니다. 슈미트의 품 안에서 법은 생생히 살아 있는 정치적인 무언가가 된 것이죠. 그리고 그의 사상을 재창조한 무수한 후대의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진 주제들은 아직도 충분히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만한 것들이고요. 이런 면에서 보자면 슈미트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만한 인물입니다. 물론 그의 사상의 위험성을 충분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후대의 학자들의 슈미트의 위험성을 인지하면서 그의 사상을 재창조했다면,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도 슈미트라는 인물의 사상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넘어설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게 슈미트라는 사상가의 위험성을 중화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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