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 작가의 <동주>, 배수아 작가의 <서울의 낮은 언덕들> 작품을 연재했던

[자음과 모음] 네이버 카페에서 새로운 3작품이 연재중입니다!

 

권하은, 남인숙, 최정우 작가 들 모두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보여서,

3인 3색 이라는 말이 정말 적절하게 들어맞는 작품들이 탄생할 것 같습니다.

(바로 똭- 봐도 스타일부터 다르신^^;)

 

또한 7월 13일까지 연재오픈기념 이벤트도 진행중!

 

[자음과 모음] 카페 주소

http://cafe.naver.com/cafeja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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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여전히 비오고 푹푹 찌는 2011년 7월, 추천하고픈 신간들!

<영화로 보는 제스처> 

 심리학적으로도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무의식중에 여러 제스처로 표현하고 있다. 어떨땐 그것이 인간관계를 푸는 해법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때도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모든 인간을 대변하진 못할지라도, 많은 인간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우리가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영화에서도 배우들의 제스처들이 효과를 얻고 상징성을 띌 수 있게되는 것이다. 영화와 인간의 심리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을것 같은 이 책이 궁금하다.

 

 

 

<서울 미술 산책 가이드>  

 모든 미술이 대중적이될 순 없지만, 많은 미술이 대중적으로 변하고 있는것은 사실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여가활동시간과 더불어, 대중을 위한 각종 현대전시들이 늘어나고, 그것들의 마케팅도 점차 우리와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지만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 흐름에서 미술관과 미술에 대해 이해하는 가이드 북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을 법 싶은데. (미술관, 미술에 대한 개괄적인 이야기가 있겠지만 '서울'이라는 한정성은 아무래도 좀 단점이겠다.)
 

 

 

  <페이스 헌터>

  앨범속의 사진으로만 남아있던 모습들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패션은 자연히 그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 활발한 인터넷 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보편화되고 간편해졌다. 사람들의 관심이 패션에 미치는 것 또한 무리도 아니다. 그 중, 패션과 그에 따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병행했으리라 보이는 이 책은 내가 패션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아닌, 좀 더 알고싶기에 한번 호감을 갖게 되는 책이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사상> 

굉장히 궁금하긴 한 책이다. 제패메이션 이라고 불릴정도의 만화왕국 일본. 때론 서정적이거나, 때론 자극적이거나 한 일본의 애니메이션들은 가볍게 즐긴다면 그저 그렇게 끝나버리지만, 그것을 파고들어보면 인간 본성과 현대 일본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패전으로 인한 트라우마 등 여러 담론거리들이 묶여있는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점들은 항상 발견하면서도 놀랍고, 대단하단 생각을 한다. 헌데 이렇게 궁금은 하지만.. 800페이지의 분량이, 선뜻 이 책을 들게하는것을 주저하게끔 만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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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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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돌아온 뒤, 나는 내게 한번 더 기회가 생긴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큰 기적은 일생에 한번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어쩜, 그때 나를 살린 것은 당신들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고 싶은 바람, 혹은 당신들과 함께 꾸는지도 모른 채 같이 궜던 꿈들이었을까....."(58p) 

왜인지 글을 쓰기가 머뭇거려져서 짐짓 딴청을 피우고 딴짓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수많은 감정을 오르내리고, 숱한 상념들을 여백안에 채워넣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책장이 뒤로 넘어갈 수록 하고싶은 말도, 듣고싶은 말도 너무나 풍만해졌다. 

여기저기서 느꼈던 감정과 감동이 겹쳐보였다. <혜화,동>이 내게 주었던 그 애잔함, <1리터의 눈물>이 내게 가르쳐준 생의 열망, <나비효과>의 안타까움,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준 반전된 사색, 그리고 내가 지나쳤던 수많은 아픈사람들이 이야기가 올망졸망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딴짓을 하다가 금새 까먹어버린 여러 영화와 소설들. 이것은 이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소설이 그것들의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단 얘기가 아닌, 그 모든것들이 내게 주었던 아련한 감성들이 모두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도 예쁘장한,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 파스텔톤의 풍선들이 표지에 채워져있다. 아, 이 책은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 이길래 표지또한 이토록 아름다울련지 내심 기대가 일었다. 프롤로그에서 이야기의 중심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한권의 이야기들의 시작과 끝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크게 그려지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아름다움'. 그렁그렁 흐려지는 시선속에서도 왜인지 그 단어가 맴돌았다.  
 
한아름, 마치 여성의 분위기를 풍기는 그 이름, 여느 소녀, 그리고 여느 소년 모두의 감수성이 고스란히 내제되어 있을법한 그이름. 아름이는 미혼의 십대부부에게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이미 조로증이라는 병을 안고있던 아름이는, 훌쩍 자라버린 바깥의 나이만큼이나 성숙해 있었다. 극심한 고통도, 절망과 원망도 그가 가진 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거둬가진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빠와 엄마와 함께 하루하루, 다가오지 않은 내일이 가져다주는 불안과, 기대를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득담아 오늘을 살아간다. 

 
이미 신체의 나이로는 부모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린 아름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티없이 아름답고, 따뜻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선입견을 통해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아름이의 눈에서는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차있다. 아마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는 내내, 두근거리게끔 하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자신을 탄생시킨 부모에 대한 어떤 원망도 미움도 없이, 사랑하기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며 살아가는 아름이의 떨리는 심장고동소리는, 내 심장까지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책을 읽을 그 누구의 심장또한 두근거리게 할 것임이 분명할것이란 확신이 들 정도로 말이다.   

 

"당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언젠가 내게 제 발로 걸어와 '나야......'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넬 터였다. 마치 인생의 중요한 교훈들이 대부분 그런식으로, 나중에야 도착하듯 말이다. 시인들과의 테니스, 극작가들과의 바둑, 과학자들과의 배구도 마찬가지 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달리기를 하지 않고도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52p) 

아름이는 자신을 탄생시키고, 둘러싼 그 모든 세계를 더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시선으로 이해하고 바라봤다. 혹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어른들보다 그 이해의 한쪽 귀퉁이에라도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몸이 받는 고통과 마음이 받는 절망이 그가 세상의 온갖 것들을, 모든 감각과 모든 관심을 동원해 조금 더 이해에 가까워지라고 채찍질 했으리라 느껴진다. 자신을 세상에 있게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그만큼 살아갈 수 있게,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준 부모들을 사랑할 뿐이다. 그런 마음의 아름이가, 부모들의 사랑을 그토록 아름답게 그려내고자 함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남들과 다르게 자신앞에 놓여진 짧은 삶, 늙어버린 육신, 그로인해 남들처럼 갖지못한 수많은 기쁨, 그리고 그보다 더 갖고 싶었던 무념과 방탕들을 간직한 채로.

아름이를 통해, 십대부모 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들을 다시금 돌아본다. 그들이 책임지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것보다 귀한 것이었음을. 부모가 됨으로써 (혹 부족할지라도) 어른이 되어가는 그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한 생명이 한 생명을 절망으로 빠뜨릴 수 있는만큼, 반대로 얼마만큼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지 느꼈다. 

 
자신을 속인 허상 앞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했던 아름이의 따스함이 대견하고 안타깝다. 비록 거기에 있는 그것들이 '진짜'는 아니었음에도 그것이 아름이의 인생을 잠시나마 더 빛내 주었다면, 어쩌면 그것으로도 괜찮았던 것일까. 아름에게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품은, 이성을 향한, 아니 그보다 더 높은, 숭고한 사랑이었을 테니깐. 자신을 낳은 부모들의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었던 그 '감정'에 대해서 말이다.



예전에 난, 십대부부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모습을 보며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철없다, 자기가 벌려놓은 일이다. 그리고 한창 마음껏 이것저것 하고싶은 나이임에도 측은하다. 하지만 제가 뿌린 씨앗이지' 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젠가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시간속에서 변화했다. 자신이 하고싶은 다른 많은 것들, 이루고 싶은 많은 것들 미뤄두고, 한 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고 대견했다. 그리고 오로지, 그것만로도, 자신의 생을 위해, 자신이 만든 생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존경에 가깝게 지켜보게 되었다. 아마 그것은, 그저 좀 더 자란 아이들이 한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응당 가졌을 수 밖에 없는 '관계'를 바라보던 비웃음, 비난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들이 포기하지 않은 생명에 대한 책임이 보여주는 용기를 바라볼 수 있게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서로를 당기는 마음이, 몸이 규정짓는 경계를 넘으려 할 때, 그 앞에서 머뭇거리다,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취할 수 밖에 없는 남녀간의 성적관계가, 세상이 으레 바라보듯 비난의 범주에 머물러 있음은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거예요" 

".........."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인 걸 알아요." (143)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그런 소식에서, 멸시와 힐난의 시선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 생을, (비록 한 생을 감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짓 예상도 못했음에도) 탄생시킬 것이고, 키울 것임을 확신하는 모습을 보며 경외심이 일었다. 그들이 탄생시키는 생명은, 한낱 혈기왕성하게 뿜어내는 성에 대한 탐미의 부산물이 아닌, 두 사람이 서로를 끊임없이 끌어당긴 이후의, 사랑의 결정체 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나는 어떤, (오로지) 육체에 대한 탐미로 인한 '결정적 실수'에 대해 면죄부를 늘어놓고자 함은 아니다. 게다가, 그들의 행위를 '실수'로 명명짓더라도 생명 그 자체를 '실수'로 명명 지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깐. 그리고 홀로 한 생명을 짊어진 모든 이들이 갖는 비애, 혹은 포기해버린 이들을 이미 세상이 규정한 잣대로 판단하는것이 과연 옳기만 한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물론 그들 모두를 이해한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십대든 이십대든 어느 나이든, 처음부터 부모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욱이 그것들을 채 생각도 해보지 못했음에도, 그것들에게서 도망치려 하지 않고 무던히 애쓰는 '우리 주변, 옆의' 부모들을 너무나 간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을련지...
 

학창시절의 언젠가 내게, 한 친구가 곤란한 표정으로 툭 던진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 엄마 아빠도 그걸 했을까"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남들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행위' 라는 관점이 우리를 있게하고, 보살핀 부모들을 향했을 때 나또한 난감하지 않았을리 없다. '그래 그랬을테지' 하며 속으로 생각했고, 나는 아마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탄생이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으니깐 말이다. 그 왠지 모를 당혹감과 부끄러움은, 내가 아름이처럼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겨우 전형적인, 호기심 왕성한 남학생이었으니깐. 내가 생각하는 그 행위는, 포르노에서 나오는 그런 말초적인 행위의 의미 외에는 없었으니깐. 그런데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한 생명이 갖는 가치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 모든 아기가 아름답고, 소중하듯, 우리 또한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친 한 인간이다. 우리가 자랐다고 해서 우리의 가치가 하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있게한 부모들의 사랑은 당연히 아름답고 고귀하게 여겨져야 되는 것 아닌가? 왜 그렇게 단순한 진리를 찾기가 이토록 힘들었을까? 이제와서라도 아름이에게 한수 배우려고 그랬던 것일까? 
 
 

세상의 강에 흩뿌려진 모든 슬픔, 두손 가지런히 모아 아름다움으로 길어올린 <두근두근 내 인생>


산재한 어떠한 절망, 고통, 아픔... 그리고 슬픔, 도저히 아름다움 이란 단어로 표현할 길이 없을 것 처럼 어둠속에 방치된 그것들을 이토록 눈부신 파스텔의 컬러로 그려낸 작가에 대해 고마움까지 느껴진다. 자신을, 그리고 그 부모들을 몰아붙였던 슬픔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준 아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우주를 유영하는 모든 존재는, 아니 어쩌면, 우주 그 자체도 누군가의 두근거림으로 탄생된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새삼 나를 있게한 나의 사랑하는 부모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부,모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두근거림을 그려본다.

 
하고싶은 말들이 머릿속에, 가슴속에 엉킨 실타래 처럼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풀어놓는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수 있을텐데. 아직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모자란 능력이 안타깝다. 이렇게 하고싶은 말들이 입에 고이게하는, 내가 그 복받친 감정을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지는 책을 읽은게 얼마만인가. 그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기쁨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나를 몰아세운다... 어른, 그리고 철듬... 내가 의문시했던 것들이 다시금 새로운 시선,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아름이는 분명, 그 부모인 대수 와 미라 에게 더 깊어질 수 없는 슬픔과, 더 높아질 수 없는 기쁨을 '한아름' 선사했던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 생명이, 그 생명을 있게한 근원적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아, 그렇지. 그래. 나는 이제라도,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아름'이 스럽게. "'아름' 답게". 
 

언젠가 더러, 이 글을 조금씩 덧붙이리라 생각한다. 내가 바라본 것들이 너무나 많고,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으니깐. 내가 느낀 아름다움이 너무나 벅차서 누군가에게, 아니 무엇보다 나에게 다시한번 꼭 이야기해주고 싶으니깐. 잊지 않게끔. 이 책을 꼭 안아주고 싶었던, 꼭 안아주었던 그날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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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놀러왔습니다. ^^ ㅋㅋ

<두근 두근 내 인생>은 많은 분들이 읽는 책들이신 것 같더라구요. 저 역시 책을 읽으며 메모리즈님의 글처럼 하고 싶은 말이 입에 고이는 그런 현상을 너무나 많이 느껴요. 게다가 표현할 단어도 잘 못 찾고 말이죠. 이 소설을 아름답게 감성적으로 읽으신 것을 보니 감정이 풍부하시고 여린 분이신 것 같아요. 물론 저랑 동성이라는 사실은 잘 압니다. ㅋ

문학의 힘은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잊고 있고 지나가고 스쳐가는 것들은 정지 사진을 찍어 나에게 증명해 주듯, 매일의 일상 속에서 느끼는 못한 것은 확 잡아채서 내 눈 앞에 들이미는 전 그런 소설이 참 좋더라구요. 느끼는 것도 많구요. ^^ 저도 자주 놀러올께요. 만나 뵈서 너무 반가워요!!

기다리는 자 2011-07-06 10:02   좋아요 0 | URL
앗!!! 반갑습니다^^!!덧글이 아니고 이렇게 답방을 오실줄이야..ㅎㅎ
<두근 두근 내 인생> 저는 사실 다른분들같이 큰 기대하고 읽은게 아니었는데..너무 좋았네요^^;;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감성이 풍부하고 여리다니요.ㅋㅋ 그냥 능력이 부족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두근두근 내인생>같은 책 리뷰쓸때는 정말 잘 칭찬해주고 싶은 책이 괜히 제 칭찬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막 안타깝고 그래요.ㅋㅋ

문학에 대해서 말씀하신것 공감합니다. 아무리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이야기를 꼬아놔도 결국 우리 일상에서 뻗어나간 것들이겠죠. 우리가 정말 놓치는 것들은 멀리있는게 아니곤 하니깐요..

아무튼, 참 정말 반가워요!!! 제꺼는 서평만 가끔 올려서 볼게 별로 없으니.. 종종 놀러갈께요^^
 
[사유 속의 영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유 속의 영화 - 영화 이론 선집 현대의 지성 136
이윤영 엮음.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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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만큼 짧은 역사를 갖고, 엄청난 파급력과 논란거리를 제공하는 매체가 또 있을까 싶다. 그 태생이 어떻든 영화는 이제 만인의 오락거리로 자리 잡은지 (나름) 오래다. 그 시간에 비한다면 가히 폭발적인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중성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매체임과 동시에 예술적 담론에서 그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하는 '영화'.  

이미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은 '음악 감상', '독서'등과 같이 하나의 보편적인 여가생활의 한 방편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으레 대중들이 선택하는 영화는 어느정도 한계에 머무른다. 아니 어쩌면, 그 한계가 대중이 소화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계이기 때문에 더 깊게 들어갈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대부분(나 또한) 영화의 시놉시스와 감독, 배우, 스케일에 따라서 영화를 선택한다. 그것이 비단 나쁘거나 부적절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다. 일반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서 판단하는 기준은 (솔직히) 그게 전부니깐 말이다.  

그 어떤 예술양식보다도 대중에게 쉽게 다가온, '영화'라는 매체는 이렇듯 가장 쉬운 가십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 반면에 '연구'로써의 쉽지 않은 담론거리를 제공한다. 이 책에 실린 15편의 논문들이 그러하다. 

초기 고전영화사에서, 몽타주 기법을 펼쳐낸, <전함 포템킨>의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의 논문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로 시작된 이것은, 몽타주 기법에 대한 에이젠슈타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된다. 한자로 대표언급된 표의문자와 일본의 하이쿠 등을 통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에 관한 담론은 영화기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아무것도 모르고 '의무로써' 한번 봤던 영화의 감독이 펼쳐놓는 철학은, 그 일본의 여러 문화에 대한 접점으로 인해 꽤 관심이 가는 시작이었다.

이 후에, 14편의 논문에서는 감독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의 인문학자들이, 각자가 생각하는, 주장하는 영화에 대한 갖가지 이야깃거리를 펼쳐놓는다. 영화에 대한 기계적 분석을 통한 관객, 배우를 조망함과 동시에 회화와 사진과 연결되고 대립되는 영화의 속성에 대해 고유의 주장을 펼친다. 지금에서야 그 불법성으로 영화사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는 '복제'에 관한 담론또한 꽤 오래전에 다뤄졌음을 알게되고(물론 그 문제의식이 지금과 같지 않고, 예술로서의 가치판단의 근거지만) 이제는식상한 담론처럼도 느껴지는 '영화가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있는 근거와 사유거리를 제시한다. 

영화사의 거의 초창기 인물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학자들의 논문이 묶여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공통된 주제를 제시하는것이 아닌, 마치 릴레이식으로 연결된 듯한 (편집의 영향이겠지만) 인상을 준다. (사실 주제적으로 아주 약간 중첩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거의 다른 주제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초기에는 영화의 존재론적 주제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가다가, 관객이 받아들이는 방식, 감독과 카메라, 그리고 배우의 (기계적인 의미가 아닌)위치와 역할을 나눠본다. 무엇보다 동시에, 전반적으로 영화 메커니즘의 해체와 이해를 통한 예술양식으로서의 고민과 그 역할, 그리고 영향을 분석해본다. 

 

마치 쉽게 읽은 것처럼 쉽게 써내려 갔지만, 꽤 쉽지가 않은 논문들이다. 사실 도저히 본인의 깜냥으로는 다 받아들일 수 없는 구문들(꽤 많은)부분들은 이해의 끈을 놓고선 포기하고 휙 읽어내려 갔음을 고백한다. 1/3은 거의 속독과 통독의 버무림 수준으로 읽었고,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거의 넘기다 시피한 부분이 없잖아 있다. 그래서 내가 이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에 대해서 솔직한 자신이 없다. 적당히 없는것이 아니라 꽤 없다. 혹, 영화를 좀 봤다고, 혹은 본다고 자부하는 현대의 사람들이 그 '영화사랑'을 믿고선 섣불리 달라들었다간 고전을 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 용어에 대해서 좀 안다고 해서, 고전영화들을 좀 봤다고 해서, 간단히 이해될 이야기들은 아니란 것이다.

영화의 대중화 만큼, 소위 '전문가에 준하는 비전문가'를 표방하는 이들이 많다. 확실히 그들중엔 평론가 못지않게 날카로운 영화분석과 비평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공부하는' 영화이다. 영화사가들 만큼은 아니더라도, 학문으로써의 영화를 대하는 이들에게 적합하리라 보여진다. 

앞서 누누이 언급한 '영화 좀 보는' 사람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영화평론가를 지망하거나, 그에 준하는 영화이론 공부를 희망하는 이들, 석/학사 학위로써의 영화이론과 비평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만한 책이다. 그저 가벼운 오락거리로써가 아닌, 하나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심도있게 들여다볼 준비, 또는 의지가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이나 영화 외적의 많은 요소들을 차용해서 영화를 해석한 이들의 고민들이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끝으로, 본인의 부족한 능력이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하진 않았기를 바란다. 무지한 나에게 이해가 될듯 말듯 한 이, 15명의 논문들이 영화를 심도있게 공부하려는 이들에겐, 더 높은 단계로 상승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고지가 되리라 생각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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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버빌가의 테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아마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던 책, 중에 이 책 또한 포함되었으리라 싶다. 평소 책좀 읽는분들을 보면, 대략 다 학창시절에 접했던 듯 싶은데, 난 도통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학창시절에 그토록 책하고 친하지 않았던 나날들이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들은 이전에 다 접했고, 이제 또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읽는 책을 나는 지금에서야 읽게되었다. 하지만 아마, 내가 중고등학교때 이 책을 읽었던듯 무슨 감흥을 받았을까 싶다. 학창시절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친구에게 선물 받아서 겨우겨우 '읽어내고서' 난 거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걸 읽고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대학다닐 땐?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좋은 고전들 다 미뤄두고 뭐 읽었나 싶다. 물론 독서량이 바닥을 치기도 했지만, 지금에서야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건 고작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었었던게 전부겠다. 어쨌든, 이런 책들을 접할때마다, 진작에 책좀 읽고 정서를 함양할껄 싶지만, 이제와서 후회해서 뭣하리. 더 안늦게 만나기를 다행으로 여길뿐이다. 그리고 지금이 딱,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말이다.

 

테스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특별난 것은 아니었다. 요즘같은 시대엔 워낙 고전 이야기들이 여러 형태로 각색되고 짜집기 되다보니 그리 느껴지는 듯 싶다. 하지만 여전히 유효한 여러 담론거리들과 동일한 질량의 정서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유효한,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었고,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느 농촌마을의 더버벌가(家)의 맏딸 테스에 관한 이야기다. 과음해서 못일어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을 나간다는 것이, 사고로 수레를 끄는 말을 잃게 되고, 그렇잖아도 그 아버지가 마을의 한 성직자에게 자신 가문의 뿌리를 들은터라, 밥벌이의 핵심수단인 말을 잃게됨으로써 겪는 여러 재정적인 문제들을, 부유한 더버빌가문을 테스가 방문함으로써 해결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의 시초였고, 아직 바깥의 여러 위험들에 대해 교육받지못하고, 배우지못한 테스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종교적 관점의 순수를 뺏겨버린다. 하지만 후에 진정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지만, 그때의 사고가 계속해서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위대한 많은 고전들이 그렇듯, 한세기가 넘게 지났음에도 이 책들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들은 여전하다. 물론 그때와 동일한 만큼은 아닐지언정, 여전히 의식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들 말이다. 대표적으로 그것은 종교와 계급, 순결에 집착들 일 것이다.

 

더버빌가는 몰락한 가문의 향수를 안고있다. 그는 그것을 복원시키고, 그것으로 인해 덕을 입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헛된, 아니 심각한 오판이었다. 자신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한 마을의 성직자에게 들은 후, 그 테스의 아버지가 보이는 미묘한 태도의 변화는, 실체는 없고 이름만 남은 허황된 계급의식에 겉멋든 인물을 상징시켜 보여준다. 정작 본질은 빼놓은, 이름과 허례의식에만 집착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고, 또 그것으로 덕을 입으려 하는 모습 말이다. 또한 기독교의 성직자들은 어떤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교리에 따라서 서로를 경계한다. 사실 서양 종교의 역사에선 기독교가 갖는 위치는 매우 견고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이의 기준에 부합된것은 아니었으며, 그만큼 열린 사고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비극을 가져온 가장 큰 사회적 편견은, 남성이 여성에게 기대하는 순결에 관한 것이다. 테스의 경우 자의적인 것도 아닐뿐더러 강제적으로 순결을 빼앗긴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후에만난, 사랑하는사람으로부터 따뜻한 위로는 커녕 살을 베는 듯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실은, 맏딸로 인해 덕을 보겠다는 부모들의 어긋난 기대, 그리고 험악한 현실에 대해 미처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그리고 그 테스의 사랑인 클레어가 진작 그 마을을 들렀을때 그녀에게 춤을 제의하지 않은 것 등.. 여러 많은 요소들이 그 결과를 만들어 냈음에도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순결은 점차 감소하는듯 보여진다.(하지만 그것이 그렇게나 시대를 탈까? 현대의 발빠른 매체로 인해 더 눈에 띄는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성은 날로 저연령에게 개방되고 노출되고 있다. 여러 이유들을 통해서 그것을 벗어날 루트가 다양해지고 있으며, 그로인해 그런 의식마저도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순결을 희망하는 입장에서의 남성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크건작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시대에 따른 의식변화에 따라서, 그만큼 강요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한 인물의 내면과 진정성을 바라보지 않고 육체로 드러나는 흔적에 집착하는 사고는 여성만을 비극으로 몰아넣는것은 아니란 점이다. 감히 남이 흉내내지 못할만큼의 사랑과 진심을 바치는 상대방을, 과거의 이력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 상대방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비극이란 것이다. 진심을 다해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을 잃는다면 그것이 비극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것의 질량이 같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판단하는 이와 판단받는 이의 처지가 같을수는 없으니깐. 하지만 그 차이가 얼마가 되건간에, 과거에 존재했던 상흔의 의미가 현재를 뒤덮어 어떤 관계를 전복시킨다면, 그것이 양쪽 모두에게 비극이란 점은 자명하다.

 

한 가족구성원으로 시작해서, 한 남성으로 인해 몰락할 뻔 했던 한 여인의 삶이, 또 다른 남성으로 인해 구원될 것 같았던 이 처량한 아름다움의 이야기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관념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여전히 유효한 담론거리들을 얘기하고, (나만 몰랐던) 걸출한 명성에 어울릴만한 아름다운 문장들을 보여준다. 그 수려한 문장들로 인해 마치 테스의 비극적인 삶이 빛을 담아내서 반짝이는 듯 말이다. 인물의 간헐적인 희망과 지속적인 비극을 표현하는 수많은 문장들은, 때론 모든 희망을 걸만큼 아름다웠지만, 때론 모든 절망을 담아낸 것 만큼 무거웠다. 마치 작가가, 문장들을 빗어내느라, 테스를 구원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 정도로 말이다.

 

나는 영화든 소설이든, 그 어떤것이든 미리 이야기의 전말을 아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부류의 사람이 더 많겠지만, 보면 이야기의 전말을 알아도 개의치 않는 대인배들이 있는데, 나로써는 이야기의 전말을 알면 그 감흥이 꽤 떨어지는 편이란 얘기다. 주변의 쏟아지는 극찬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이 <더버빌가의 테스>가 더 좋았을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다면 내가 이책을 읽기까지 앞으로 몇년이더 걸렸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토머스하디는 충분히 독자가 테스의 비극에 집중할 수 있고, 등장인물에 자신을 대입할 수 있게끔 빼어난 문장들을 보여줬다. 책을 읽는동안 황홀감에 빠져들 정도로 말이다.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이런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를 읽는듯한 순간들을 빠져나왔다. 좋은 책들은, 그 치밀한 계산과 완숙한 감정, 빼어난 문장들 덕분에 한번에 읽기가 쉽지가 않다. 앞의 정보가 지워지고 덧씌워지는것이 싫을정도로 좋은 순간순간을 느끼게끔 해주니 말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길 요구할 정도의 흡입력을 보여준다. 이 <더버빌가의 테스>도 몇안되는 그런작품들 중에 하나였다. 누군가가 학창시절에 이 책을 읽었을 당시의 회고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여졌다. 좋은 책을 만나느냐 아니냐 의 문제만큼 중요한 것이 그 책을 언제만나느냐 하는 것 이다. 사람이나 책이나 매한가지 인듯 싶다. 지금에서야 처음 읽는 이 <더버빌가의 테스>를 통해서, 난 채 다 자라지 못한 감성이 겪을만한 풋풋한 열병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재는 영원히 다시 찾을 수 없을것이다. (소싯적에 이 이야기를 읽었다고한들 내가 온전히 이해했으리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 얼마나 부족하겠나 싶기도 하다. 나는 '테스'의 비극을 충분하게 느꼈고, 무엇이 여전히 얼마나 잘못 되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모두에게 어떤 커다란 비극을 만들 수 있는지 지켜봤다. 그리고 사랑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가로지르는 지혜를 읽었다. 작품전반에 깔린 문장들은 더이상 언급하기도 입아플정도로 빼어남은 말할것도 없고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 만족하려고 한다. 지금, 현재에 <더버빌가의 테스>를 읽은 나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 읽었으면 된것이다. 어쩌면 지금이기 때문에 이만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 일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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