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서재 - 최재천 교수와 함께 떠나는 꿈과 지식의 탐험 우리 시대 아이콘의 서재 1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 본 이 <과학자의 서재>제목에 대한 느낌은 언뜻 보기에, (아주 창피할만큼 단순하게도) '과학분야에 국한된 책 소개가 주된 주제가 아닐까' 하는 편견아닌 편견. 책을 읽기 시작하다 보니, 그것도 참 쓸데업는 기후에 불과했던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단 서재라는 책의 제목에서 조금 떨어져 보자. 실제로, '책을 추천하는 책'은 참 많기도 할 것이다. 내가 알고있거나, 혹은 갖고 있는 책만해도 벌써 몇권은 되니, 내가 모르는 세상에 그 많은 책들 중 '책을 소개하는 책'들이 오죽하겠는가. 물론 이 책의 말미엔 저자인 최재천이 소개하는 몇권의 책이 언급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책들도 직,간접적으로 언급되긴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어불성설인듯 싶다. 이 책은, 책을, 그리고 자연을 사랑했던 한 소년이 특별한 과학자로 성장해가는 성장담이다.

 

누가 보면 궁색한 과거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책 과 사람을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것은 군대 훈련소 때다. 생소한 모든 것, 내일, 혹은 잠시 후도 알 수 없는 순간순간, 그동안 해왔던 많은 것들, 정확히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통제되고 금지되고, 남은 것은, 하기 싫거나, 할줄 모르는 것들만을 남겨두었던 그때다. 아마 훈련소 입소식이 아니었을까. '이들과 함께 과연, 더 큰 소리를 낼 수는 있는걸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계속해서 예행연습을 하면서 소위 말하는 '군기'가 바짝 들어갔던 그때는, 실제 입소식 때 주먹을 쥔 손에 너무 힘이들어가서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헌데, 그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은 그때 훈련소대 대대장이 해줬던 짧은 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충 기억하기론 '다들 책을 읽을 텐데, 한 사람이 살아가는 역사는 한권의 책과 같다는 것, 즉 여러분 주변에 있는 전우들 이나 조교들 혹은 간부들 모두가 하나의 책과 같으니 많은 것들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배우라' 는 말이었던 듯 싶다. 많은 시간이 지난 이야기라 내가 어떤 말을 빼고, 어떤 말을 더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 그나마 좋은 축에 속하는 기억으로 간직하니, 미화했을 확률은 많겠다) 그때의 훈련소가 얼마나 부조리 했든, 군생활이 어땠든 간에 상관없이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니깐.

 

자, 우리가 들고있는, 종이로 되있는 종이책, 혹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태블릿PC 나 스마트폰 등으로 보는 E-BOOK 이 갖고 있는 책의 개념을 잠시만 내려놓자.

 

 

한권의 책으로 분한 그의 삶을 따라가보자!

 

 

마치 가까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듯, 따뜻하고 부드럽고, 솔직한 그의 입담은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도 하거니와, 딱딱하지 않게 설명해주는 옛날이야기와 같은 그의 이야기는,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 한다. 또한, 성인 독자뿐만 아니라 청소년 독자또한 고려한 듯한 (보통의 소설보다) 좀 더 넉넉한 줄간격은 편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기본적으로 독서는 내가 즐겁기 때문에 하지만, 때로는 곤욕이 될 때도 있는 반면에, 한 과학자의 삶을 '들어보는' 이 책은 마음 편하기만 하다. 그가 고향인 강릉에서 느꼈던 어릴적의 '편안함' 과 '그리움'만은 못할지라도 말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중학교부터 시험을 봐서 들어가던 시절, 대다수가 이제 동등하게 대졸이고, 그래서 자격증에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지금 세대와는 다르게, 공부를 잘하고, 일류대를 나오는 것이 곧 최고의 성공이라고 일컬어졌던 그 시대에 육군 간부의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그때의 어머니의 교육열과 (시대가 변해도 교육열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듯 하니 가타부타 긴말 할 필요는 없겠다.) 아버지의 발령으로 인한 이유로 서울로 전학오게 된다. 중학교부터 시험 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대학입시와 이어져 있기에, 저자는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과외도 잠깐 받아가며 공부를 하게 된다. 공부는 썩 잘하는 편이었지만, 본디 자연에서 노는 것을 좋아해서, 초,중,고등학생 동안그는 방학때마다 강릉에 내려가 자연을 벗삼아 놀았고, 서울에 있을 때도 남산에 올라가서 친구와 함께 시를 쓰며 놀기도 했단다.

 

하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강릉에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안의 남는 시간에 읽었던 책들이다. 물론 무슨 책을 읽었느냐는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얼마나 책을 사랑했었는지는 중요한 사실 같다. 온갖 다양한 것들이 담겨있는 '백과사전'에 엄청난 흥미를 느끼고 접했던 그의 책과의 인연은 '동화전집'으로 이어진다. 그것들이 그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더 풍부하게 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않게 짐작이 가능하다. 나아가, 자연과 한데 어울리길 좋아했던 그는, 그런 감수성 때문인지, 중학교 때 충동적으로 친구따라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詩)를 통해 장원을 하게 되면서 시인을 꿈꾸게 되기도 하고, 고등학교때는 미술선생님에게 스카웃되서 미술반에 들기도 한다. 그리고 '노오벨상수상전집' 을 통해, 어렴풋하게 과학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이야기가 길게 풀어져 버렸다. 어쨌든 중요한 요는, 소싯적부터 '자연을 벗삼아' 놀며 시 와, 미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좋아하며, 그러니깐, 기성세대가 본다면 소위 그냥 '놀기 좋아하는' 아이였던 그가 처음부터 과학자의 꿈을 꾸게 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위에 설명한, 그가 기술한 삶의 반정도 되는 대학입시 무렵까지 그는 시, 소설, 미술, 등 꽤 다른 분야에서 많은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의 모습과 언뜻 닮기도 하면서도, 또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그의 방황은 계속된다. 전공분야는 있었지만, 거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그 계열에서 그가 자신의 진로를 명확히 결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데에, 여전히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의 길을 인도해준 것은 '한권의 책' 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이고, 그 일화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은 내게 생물학이 그저 흰 가운을 입고 세포나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파헤치고 철학을 논할 수 있는 학문이란 걸 알려줬다. 그 책은 내게 생물학에 몸바쳐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155p

 

내가 그의 삶의 태도 에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나는 무엇을 할 사람'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태도다. 그것이 어떤 확고한 삶에 대한 의지와 자세로 이어지고, 나아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멋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삶은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제약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꿈꾸던 것이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시인이 될 사람' 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지금 과학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때의 감수성, 언젠가의 철학적 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차가운 증명과 무한실험'에 그치는 과학자가 아닌, 감성 풍부하고 철학적이고, 마음 따뜻한 과학자가 된 것이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많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했고, 그런 순간순간들은 책이 길을 가르쳐준, 혹은 책을 통해서 바뀌게된 태도가 많이 눈에 띤다. 하지만 내게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어떤 구불구불하고 불확실한 길을 걸으면서 방황하고 또 방황하며, 머뭇거리다가도 달리고 마는,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이었다. 지금의 내가 그런 길 위에 서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렇게 자신만의 삶을 찾은 저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멋졌다. '최재천 이라는 책'을 읽어보니, 정말로 과학과 사회, 인간에 대한 종합적인 통찰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의 다른 저서도 얼른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 만약, 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실패'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쩌면 거기서, 우리가 꿈꿔오던 꿈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거기에는 어떤 '각성'이 필요하고, 또한 그 각성이 그저 자신에 대한 '위로'로 여겨지면 안될 것이다. 길을 찾는데 책이 전부는 아니지만, 또 책이 아닌것도 아니다. 어떤 한권의 책을 '잘' 만나는 것은 가장 저렴한 대가를 통해 삶을 바꾸는 일이 아니겠는가!?

 

저자인 최재천이 풀어놓는 아주 솔직한 삶의 애환과 방황을 통해서, 삶에 대해 조금은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꿈을 찾으며 방황하던 그의 나날, 그리고 선택의 연속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을 바꾼 요소요소에 있는 몇권의 책들, 그리고 그가 추천해준 몇권의 책들을 꼭 한번 읽어봐야 겠다. (신문에서 서평을 쓰기도 했던 그의 경력대로, 소개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 또한 아주 재미나다) 읽다보면 언젠가는, 내게도 그런 책들이 있겠지. 어쩌면, 한권의 책들에서 느꼈던 작은 울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과 더불어 책과 같은 사람, 어느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치열하게 읽고, 치열하게 방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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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이재익 장편소설
이재익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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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타 지역에 살던 여학생을 속여서 불러와, 일년동안 구타 및 집단 성폭행, 학대 등.. 인간이 입에 담는것이 민망할 정도일때 머뭇거리는 일들을 자행해왔다. 무려 41명이나 되는 이들이 이 사건의 가해자였지만, 모두 적당한 처벌은 커녕, 길가다 싸움 붙은 것에 대한 것만도 못한 처벌을 받고 풀려났고, 오히려 피해자는 신원을 보호받지 못하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가까스로 전학간 곳에서까지 가해자 부모에게 시달리다가, 현재 실종상태다. 대략적으로 이렇게 간추린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아 나는, 정말 이 시대와 이 세계가 절망스럽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2004년, 지금보다 더 머리가 비어있을 때다. 생각이 없었다기 보단,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허세를 크게 떨었다. (물론 지금도 가끔 그러지만) 정치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정치는 사실 도덕적으로 완벽한 현정권이 잘 가르쳐줬고) 남을 대하는 태도도 지금보다도 더 부족했다. 그때 내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가!? 2004년 12월...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복잡했을 시기다. 아무튼 그 당시 내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혹은 별 충격을 주지 못했거나.

 

그러니깐, 이 <41>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정확히 알게되었다. '그런 일'에 대해서. 가해자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수사를 했던 경찰의 태도, 가해자 부모들의 태도 등... 정말로 끔찍하고 철저하게 그 아이를 짓밟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보였다.

 

시나리오와 소설을 함께 쓰는 이의 글 이라서 그런지, 그의 글이 더욱 궁금했다. 우선,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밌다. 순수문학을 읽을 때의 그런 언어로부터의 사색까지는 없다 치더라도, 적당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읽는 내내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야기는 심플하다. 밀양 사건이 터지고 몇년 후,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들의 공통점은 밀양 사건 가해자들 중 핵심멤버 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용의주도하고 증거를 남기지 않는 범행으로 인해 합동수사본부, 형사인 정태와 제훈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 범죄의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시윤은 우연히 사랑을 시작함과 동시에 슬슬 일을 마무리 해간다. 이윽고 쫓는자는 포기하고 쫓기는 자는 일을 끝마쳤을 즈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정말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 책은, 실제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살고있는,(그러니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혹시나 당신이 지지리도 운이 없어서 그 귀한 시간에 내 글을 읽는 이 시간에도 말이다! 멀리 있다는 보장도 없다.) 41명에게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이제는 그들을 다시 처벌할 수 없기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상상속 처벌같은 느낌이다. 작가는 어떠한 마음으로 썼을지 몰라도, 독자는 충분히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불타오르는 복수심 만이 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형사들이 갖고 있는 가정에 대한 문제 - 불규칙하고 위험한 생활로 인한 불만의 폭발이나, 범행을 저지르는 시윤이 겨우 찾아낸 사랑앞에서 자신의 거취를 고민한다던가 하는 경우를 통해, 비단 피해자나 가해자의 관계자들이 아니더라도, 아니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일과의 우선순위에서 머뭇거리는 모습 처럼, 우리네가 살면서 어떤 흉악범죄나 사건, 혹은 정치적 문제와 맞닥뜨렸을때, 우리를 직접적으로 둘러싼 문제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과정은 당연히 우리의 망각과도 직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가해자를 법적으로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도 끝끝내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적절한 심판을 받지 못한채로, 그러니깐 아무런 죄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아니하고, 사회에 내놓게 된다.

 

'모든 사건의 수사에 있어서 시간은 가장 큰 적이다. 증거는 흐릿해지고 용의자의 혐의는 희석되고 수사진의 의욕도 떨어진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미스터리의 문이 닫히고 만다.' (158)

 

이렇다할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며 범죄가 더이상 늘어나질 않자 수사본부가 축소될 위기에 처한 모습을 그린 이 대목은, 우리의 관심과 망각의 과정을 잘 드러내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을 우리는 인정하되, 극복하고자 애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 옆에 범죄에 대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단 한발짝의 생각도 나아가지 않은 사람이 우리 옆에서 우리의 소중한 누군가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인간을 예의 바르게 만드는 힘은 관용이 아니라 공포야. 죄의식 역시 충분한 벌을 받아야만 생기는 일종의 공포야. 함부로 행동하다간 혼난다는 공포. 너희들은 그 공포가 결여된 놈들이지.' (240)

 

그리고 또 한가지는, 법원, 병원 같이 우리가 우리와 같은 사람을 앉혀놓고도, 신처럼 모셔놓은 어떤 체제에 대한 반성이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거나 바라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무소불위 와 같은 권력을 주고 있는 것은 이미 위험천만한 선을 넘었다. 그래서 그런 곳은 일반인이라면 대부분 약자가 되는 곳이다. 대부분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알지못하는 것은 당연히 두렵고, 또 그런 것들이 겹쳐셔 우리는 법을 잘 아는 이들에게 항상 약자의 위치가 되어버린다. 이번에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배우 안성기가 맡은 역할이 왜 그렇게 통쾌하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법은 이미 어떤 의무나 책임보다는, 아는 자들, 소유한 자들이 갖는 하나의 '권위'와 '권력'으로 파생되어있다. 권리를 주는 것과 권위를 주는 것은 다르다. 사실상, 자신있게 '법대로 해라'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죄를 안지은 사람이 아니라, 막 살거나 혹은 법을 아주 잘 알거나, 돈이 많아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일 뿐아닐까? 우리는 착각한다. 우리가 법에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물론 보호받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지금의 생활은 불가능할 테니깐.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론, 그것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당연 조건이지, 우리를 위한 조건은 아니다. 본래 유지되기 위해 그런 위치를 만들어 놓았다고 보는 셈이다.

 

상위 몇 퍼센트를 위한 정당을, 그런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찍는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잘 살겠지, 혹은 그렇게 잘 살게 해주겠지, 하며 미래를 기약하며 투표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인 것이다. 마지막 한가지는, 법은 언제나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할수록 사람이 변하고 사건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법은 언제까지 고정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옛날에 만들어진 법은 그 사람들이 신이기에 완벽한 법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법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만들었던, 그 시대의 룰 일 뿐이다. '법이 이러니깐 안돼' 라는 것은 때론, 어릴 적 옷을 입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의 범죄들중에서 아직 법이 없어서 제대로 된 단속이나 처벌을 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현재에서 머무른다면 안정적이긴 하나, 그것이 최고의 생활이라고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마치 '악법도 법이다'라고 우길 것이라면 나는 묻고싶다. 그저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정말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법은 완벽하고, 판사는 완벽한지. 만약 아니라면 그 완벽하지 않은 것들은 대체 언제 바로잡아야 하는지. 우리는 항상 법을 감시하고, 개선하는 태도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꼬마비, 노마비 작가의 <살인자ㅇ난감>을 읽었을 때만 해도, 여러가지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 이들을 보면서도, 불확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법의 판단'에 맡기고, 우리가 그 법이 올바르게 집행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감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근본적인 생각에 변화는 없다. 하지만 실화가 모티브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 범죄가 그토록 끔찍하고 울분터지기에 그런 것일까? 잔인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했지만, 결국 당해도 싸다 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깐, 여기서 또 한가지 웃기는 점이 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법이 똑바로 집행되지 못했을때, 우리는 뒤틀린 심판을 옹호하게 되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우리의 뒤툴린 심성은 곧 삐뚤어진 법이 만들고 있기도 한 셈이다. 새삼 결론은 같은 듯 하다. 우리가 우리와 같은 인간을 데려다놓고 신처럼 떠받드는 그곳의 권위를 밀어내고, 그것이 우리와 같은 높이에서 우리를 지키는 울타리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감시하고, 개선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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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와 선배의 이야기 : 두 번째 이야기 나와 그녀와 시리즈 2
토지츠키 하지메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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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육체가 소멸해도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상황이 바뀌면 거기에 따르겠지만 다른 길을 통한다 해도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누나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스즈키는 언제부터 어떻게 , 죽은지 7일이 지나기 전에 몸의 일부를 취해두면 혼의 절반을 잡아둘 수 있으며, 살아서 저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낸다면, 즉 생과 사의 경계를 찾아낸다면, 그로인해 누나의 나머지 혼을 불러내어 완벽히 살려낼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일까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 보다 늦게 출간된 작품이지만, 시간적으로는 그 전의 이야기를 다룬 <나와 그녀와 선배의 이야기>는 전편에서 누나를 살리기 위해 생과 사의 경계를 파헤치는 스즈키 선생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어떻게 그의 가문에서의 여성의 액받이로서 역할을 알게 되었으며, 어떻게 그런 주술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는 그를 인도한 것과 다름없는 나카무라 칸과 그의 여자친구 코바야시 메이사를 만나게 되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자신의 엄마가 죽고나서, 스즈키는 의문을 갖게 된다. '왜 이 집안의 여자들은 일찍 죽는가.' 그는 할아버지를 통해서 여자들이 남자들의 액운을 대신 짊어지고 종국엔 그로인해 일찍 죽을 수 밖에 없는 집안의 내력을 알게되고, 나아가 그녀의 누이또한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알게된다.

 

사람들에게서 심령사진을 촬영하고 있던, 슬픈 눈을 가진 나카무라 칸은 우연히 그런 스즈키를 촬영하면서 그의 주변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있음을 알게된다. 물론 스즈키 또한 그런 점에 대해서 크게 놀라는 기색이 없다. 그 자신의 집안의 내력을 스스로 알고있으니깐 말이다.

 

 

 

 

 

스즈키의 학교 선배였던 나카무라 칸은 스즈키의 누이의 액운을 반 대신 해줄 수 있는 주술을 부린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칸 또한 작은 부성을 입게 되고, 그런 칸의 여자친구이자 무녀인 코바야시 메이사는 그런 칸이 걱정될 뿐이다. 스즈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녀에게도 여실히 느껴졌고, 그런 그를 도와주는 칸이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사실 누이의 액운을 대신 짊어질 누군가를 찾고 있던 스즈키에게 우연히 나타난 칸과 메이사는 처음에는 도구적인 존재로 느껴졌고, 계속해서 그런 태도를 취하고는 있지만, 스즈키는 칸이 하는 일에 또한 관심을 보인다. 모두 자신의 누이를 위한 일이 될테니깐 말이다. 물론 칸 또한 그런 스즈키 집안 주술의 기원을 통해서 자신이 찾고있는 '무언가'를 확장하려 한다.

 

스즈키는 자신의 집에 온 칸과 메이사와 함께 집안 여성들의 내력(액받이)의 기원을 알게된다. 오래전, 전쟁에 나간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든 좋다고 생각했던 한 무녀의 주술적인 힘이 그 집안의 여성에게 계속해서 내려오며, 모두가 그 의식을 행해왔던 것. 물론 그녀들은 모두 그 '진정한 힘'은 모르고서 말이다.

 

 

그렇다면 칸은, 언제부터 이런 주술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또 주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까. 수석을 사고파는 일을 하는 집안에 살고있던 칸은, 종종 정원에 쓸모없는 수석을 갖고 오기도 했는데, 그 돌 밑에서 왼손이 들어있던 나무상자를 가져온 후, 칸의 왼손은 그의 것이면서도 또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 이후로 칸의 삶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 한 것.

 

 

칸은, 강력한 주술을 사용하던 누군가가 그렇게 나눠서 매장된 것으로 추측하고, 나머지 신체부위가 매장된 곳을 찾아, 그것들을 모음으로써 왼손으로서는 하지 못했던 좀 더 완벽한 주술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알고 그것들을 찾고 있던 것이다. 스즈키의 집에는 그것에 대한 근원은 없었지만, 유일하게 자신과 동질성을 갖고 있었기에 칸은 이제 나머지 작업을 스즈키와 함께 한다. 누이의 액운을 막으려고 하는 스즈키와, 칸은 이제 모종의 계약을 하고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칸의 여자친구 메이사.

 

 

 

 

칸은 과연 나머지 신체를 찾아서 완벽한 주술을 사용할 수 있을까? 스즈키는 그런 칸에게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스즈키의 과거인 이 이야기는 좀 더 스산하고 슬프다. 누이의 액운을 막아보려고 하는 스즈키와 왼손을 발견한 후에는 마치 그 왼손에 이끌리기도 한 것처럼 나머지 부위를 찾아내고자 하는 슬픈 눈을 가진 나카무라 칸, 그리고 그런 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코바야시 메이사의 이야기는 묶어서 본다면 결국, 누군가를 지키거나, 혹은 그리워 하는, 그러니깐 (포괄적 범위에서의) 사랑하는 누군가와 계속해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여전히 웃음을 주는 포인트는 건재하지만, 이전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와 같지는 않다. 확실히 좀 더 본격적인 기담의 분위기로 흘러간 것 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누구도 막지 못할 것 같이 나아가는 칸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메이사의 모습은, 이전 작품에서 누이의 삶을 향한 스즈키의 애처로운 감정에서 이어져, 보는 동안 마음을 시큰거리게 만든다. 분위기는 좀 더 차분하고 무거워졌지만, 작가가 추구하는 분위기는 여전한 것 같이 느껴졌다.

 

 

 

 

전작을 통해서 작가가 마치 좀 더 따뜻한 세미-기담 의 이야기만을 펼칠것이라 예상했던 내겐 본래 작가의 능력또한 깨닫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를 이끌어 낼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할 뿐이었던 것, 이랄까.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각각 다른 분위기를 띔으로써 두권을 읽었을 뿐인데 마치 다른 작품을 읽은 것 처럼도  느껴지는게 꽤 신선했다. 이것은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후속편 또한 나올 것으로 알고있는데, 이후에는 누구의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된다. 전편인 <나와 그녀의 선생의 이야기>에서 주인공 타카하시 켄신과 편의점에서 함께 일하는 타나카 노부토 또한 범상치 않던데, 그렇게 한번 추측해볼까? :)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또 도와주던 전편에서의 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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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 : 첫 번째 이야기 나와 그녀와 시리즈 1
토지츠키 하지메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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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를 정확히 보지않는다면, 이 깔끔한 표지와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은 아마 '삼각관계'가 아닐까. 주인공인 나 와 그녀와 선생의 삼각관계, 이 얼마나 흔하지만 또 골치아프면서, 또 여전히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인가! 사실 어쨌든, '삼각관계'이기는 하다. 서로 얽혀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 세 인물을 얽혀놓은 끈은 '사랑'이 아닌 '주술'이다. 그것도 죽은 이를 이승과 저승 사이에 묶어두고, 나아가 다시 산 사람으로 돌아오게끔 하는 주술 말이다.

 

 

 

 

 

소중한 사람과 사별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꾸어보았을지도 모를 '꿈' 같은 이야기 아닐까.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은, 공유할 수 없는 그 '같은 시간'을 함께 나눴던 유일한 한 사람을 결코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기때문에, 사별은 언제나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세운다. 다만 그 절망을 버티는 방법과 시간만이 모두 각자 다른 법.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는 주술을 소재로 한 기담이야기 지만, 핵심은 그 사별에 대한 절망을 대하는 이들의 모습을 반추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타카하시 켄신'은 루로우니 켄신과는 전혀 다르게 (이건 뭐 망언수준의 개그랄까;) 귀여운 여고생들이나 보자며 시작한 여고 앞 편의점의 새벽파트 알바생이다.(이런 경쟁률 쎈 편의점에서 일하다니, 실은 진정 능력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주변을 보아하니 정말로 '보는 정도' 에 그친 것 같은 일상(OTL), 그런 켄신에게 난데없이 한 여고생이 나타나 염주로 '딱밤'을 때리며 건네는 한마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가 아니고;

 

 

 

"당신,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면 일찍 죽게 될 거야."

 

쓸데없는 일이란 무엇일까? 모던한 올 블랙으로 깔맞춤한 수수께끼의 미소녀 코마치는 그렇게 도도하고 난데없이 켄신에게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지고, 집에 돌아간 켄신은 할머니에게 요바나시(동지 즈음에 입춘 무렵까지 해가 진 뒤에 이루어지는 다도 모임을 이르는 말)의 한도(다도 모임에서 주인의 보좌역을 맡는 사람을 이르는 말)역할을 부탁받게 된다. 왠지 유유자적하게 자유로운 영혼(!) 같아 보이는 이 켄신은 다름아닌 삼대를 이어온 유라쿠류 다도 집안의 남자 였던 것!

 

일본 문화에 박식한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나처럼 일본문화에 '관심'만 쬐금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다도라고 하면 그저 엄숙한 분위기에서 차한잔 하는 것, 혹은 기껏해야 그 엄숙한 분위기에서 차리는 격식같은 것으로 알고있을 지도 모르는데, 여기서는 물론 그런 '실내'에서의 다도의 모습이 아닌, 거기까지의 '과정' 이 주 무대가 되지만, 그것만으로도 흥미를 느끼면서 다도에 대해 최소한 좀 더 나아간 겉핥기를 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다도 그 자체는 엄숙하고 딱딱할지 모르나,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라는' 켄신의 태도 때문인지, 일본의 다도 문화에 대해서 좀 더 다가가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는 선에서, '기묘하게' 진행된다. '쓸데 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코마치의 말이 조금 난데없었다면, 켄신이 로지(다실로 통하는 정원의 통로)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길은 마치 피안(흔히 사후세계를 가리킴) 으로 건너는 길처럼 기묘한 느낌을 잘 보여주며, 동시에 슬슬 본격적인 기담으로 안내한다. 이제 켄신은 불현듯, 자신에게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던 코마치의 말을 떠올릴 수 있는 것.

 

 

 

 

어찌되었든, 스즈키 선생의 집에서의 요바나시에서, 한도 역할을 하게 된 켄신은 '손님' 마음에 들게되며, 더불어 스즈키 선생의 호의를 받게되고, 세가지 소원을 이뤄주는 이상한 상자까지 선물을 받는다. 처음엔 그것을 믿지 못하다가 말미에, 돌아가신 할머니(아까 전화를 했던!) 를 살려내기에 이르고, 그 할머니는 이제 켄신을 찾아온다고 하는데... 가까스로 그 위기를 코마치로 인해 모면하게 된다.

 

사실 '딱밤의 귀재인데다 머리뽑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수수께끼의 미소녀 코마치는 사라져버린 의식이나 주술 같은걸 되살리기 위한 - 민속학을 연구한다는 스즈키의 조카였던 것. 그런 코마치의 눈돌아가게 휘황찬란한 생일파티에서 켄신은, 코마치와 함께 있으면서스즈키 선생 家의 놀라운 사실을 알게된다.

 

스즈키 선생은 그의 누나이자, 돌아가신 코마치의 엄마인 한 여인을 되살리려 하고 있었는데, 이유인 즉 그 집안의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액운을 대신 받아주는 액받이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코마치는 죽은 엄마와 아빠는 분명 행복하게 살았었다며, 스즈키 선생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은 누이를 살려내려는 스즈키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코마치, 그리고 그 사이에 '쓸데없이 끼어들어 버린' 켄신, 이 세 사람은 과연 어떤 광경을 보게 될 것인가!?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스즈키를 보고 있노라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별을 쫓는 아이>에서의 모리사키가 떠오른다. 죽은 자신의 아내를 잊지 못하고, 결국 신화적 지하세계인 아가르타 를 찾아내서, 아내를 되살리려 처절하게 몸부림 치는 그의 모습이... 물론 이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의 스즈키는 약간 더 절제된 느낌이지만, 결국 그 마음은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저, 그 감정을 그리는 작가의 방식이 다를뿐.

 

 

이 만화를 다 읽고 버뜩 든 생각은 '부담없이 즐겁게 볼 수 있었다' 란 점이다. 기본적으로 베이스를 기담(奇談)에 두고 있긴 하지만, 여타의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와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기담의 형식 자체에, 유머러스 함이 합쳐진 이야기다. 번역의 센스라고 생각되는 현대(특히 한국)식의 개그 대사 들은, 우리가 이야기를 즐겁게 따라가는데 충분히 감초역할을 해준다.

 

 

 

 

이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는 누군가 악역 혹은 큰 피해를 주는 일 없이, 복수나 원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사별한 누군가를 다시금 만나고자 하는, 어쩌면 서글픈 주술에 얽힌 이야기 인지라, 이야기를 이해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기담보다는, 그리움과 애절함의 감정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 기묘한 일들을 예상보다 덜 기묘하게 받아들이는, 어딘가 조금 덤벙대는 듯 보이는 켄신과 이미 세상 다 아는것처럼 시크한 코마치, 그리고 교회오빠 스타일인줄 알았더니 그도 아닌 스즈키 선생 각자 모두가 미워 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태도는 부딪힐 지라도, 모두가 각자의 선함과 옳음을 갖고 행동하는 이들이니깐. 그리고 그것이 결국 누군가 혹은 서로를 위한 일이니깐.

 

 

초반에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의 기묘함을 묘사하는 연출력 또한 빼놓을 순 없다. 마치 청춘만화의 그것처럼 시작하는 켄신과 코마치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켄신이 다도 중에 로지를 걸으며 손님을 안내하는 그 순간, 본격적인 기담의 분위기를 풍겨댄다. 그럼에도 또 거기에 함몰되어 어둡게 진행되지도 않는 것이 <나와 그녀와 선생의 이야기>다. 가벼운 일상과 무거운 기담의 중심을 잘 잡은 이 이야기는 결국, 생과 사의 경계를 인위적으로으로 어찌 해보려는 안타까운 인간의 모습을 비추어 우리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것을 보여주기위한 스틸은 본문에 포함시키지 않음)

 

토지츠키 하지메 작가가 펼치는 이, 가볍게 시작해서, 가볍다 때론 살짝 무겁게 뒤섞인 이야기, 부드럽게 뜬 분위기의 말미엔, 모두가 한번 쯤은 바랄법한,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 결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갈망하는 간절한 어떤 순간, 그 순간을 바라마지 않는 '감정'을 살짝 어루만져준다. 누구든 분명, '어느 순간'의 그 '감정'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다도로 시작해서, 일본 전통의 주술적 이야기와, 동양적 저승 신화에 대한 소소한 지식들은 덤이다. (아래 컷도 그냥 덤..;)

 

말을 하면 안되는 상황에서의 켄신과 스즈키의 의사소통. '러브액츄얼리' 뺨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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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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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얼마나 연약한지 너는 아니? 그것들은 곧 사라지게 돼 있어. 언제나 무너지고 부서지고 잊힐 뿐이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결국은 무의미한 것이 되버리는 것만큼 우주는 광활하단 표현만으로도 부족하다. 그 공간속에 우리는 결국 지구라는 공간에 사는 아주 작은 미물일 뿐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면서도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더불어,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는다. 김연수 작가는 일련의 논리와 비논리로 우리 인간이, 세계가, 나아가 인류가 어떻게 성장해왔고, 어떻게 더 성장해야만 하는지 한 소년의 지난한 삶을 통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소년이 살았던, 죽고 다친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하늘의 별이 아니라, BH에 있는 별을 보고 고통보다 더 큰 두려움에 침묵했던 80년대. 그때의 밤의 어둠은 더욱 짙었고, 우리 가슴속의 어둠도 더욱 짙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한 소년의 이야기이면서, 시대의 관한 이야기이고, 나아가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대부분 나이를 먹어가며 어느 시점에서 외부와의 문을 걸어잠그고, 자신의 세계를 탐험한다. 그리고 어느덧, 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땐, 태초에 가졌던, 외부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관찰의 능력을 잃어버린 후다. 잃고, 잊었던 그 능력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고독에 함몰되어 고단한 삶을 버텨내며 중요한 그 어떤 능력을 이제는 초능력이라 부른채로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왔던 인류가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약간은 다르게(결국은 같게) 겪은 한 소년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타인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게 아닌, 대부분을 스쳐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천개의 별이 나를 위해 멈추고, 비추는 것처럼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번쯤 있었음직 함에도, 인류는 그동안 너무나 고독해왔다. 

 

결국 인류의 유전자가 택한 최선의 방법은,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인의 눈물로 시작해서, 자신의 눈물로 끝나는 과정은 그렇다. 우리는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지금껏 존재해왔던 인류에 비한 자신의 비율만큼 타인과 다른 삶을 살아왔거나, 살아가기 때문이다. 먼지같은 시간, 때로는 그것조차도 공유할게 없어보이는 타인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얼핏보기엔 비극이다. 거기에 우리가 유일무이하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류가 여태껏 병처럼 끌어안고 살아왔던 고독뿐 이다. 하지만, 그 고독과 더불어 그렇게 서로에게 비어있는 시간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다가갈 수 있는 열쇠였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여백을 공유하다보면, 그것이 어느덧 사회가 되고 시대가 되듯이 말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비극으로 남은 한 시대는 부족했던 그것들의 합이었던게 아닐까.

 

“어느 쪽이든 나의 시간과 다른 사람의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른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인류를 차치하고서라도, 개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첫걸음은, 그 살아온 시간의 양과 비례한 시간을 요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주어지진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을때, 그러니까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 타자와 나란히 생을 걷게 되는 것 아닐까. 소년이 자신의 아빠를, 엄마를, 희선, 무공/재진아저씨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더듬어 가는 것이었듯 말이다. 마치 기어이 소주를 두병째 따고서야 그 안에서 슬픔이 새어나오듯, 늦었지만 또 늦지 않은 일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시대나 밤은 어두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외롭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여전히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바 일 것이다. 어둠으로 인해, 우리는 어딘가를 건너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만 하고, 맞잡은 손의 체온을 느끼고,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인이 살아온 시간을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 결국, 소년이 깨닫는 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 중요한 것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들이는 것이었으니깐.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경계를 넘어가며 성장하니깐.

 

“...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소년의 짧은 일대기를 중심으로 엮어나간 이 이야기 자체가 바로 ‘이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갔던 것 아닐까.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었으니깐. 이해라는 단어를 이해시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닌, 이 이야기가 바로 이해 그 자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는 내면의 우주, 타자라는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비행사와 다름없다. 인류는 나름의 이해를 통해 지금껏 살아왔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부족하다. 자신의 집을 등지고 서있는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동상 뒤로 숨겨진 그의 왼손엔 꽃 한송이가 쥐어져있다. 멀고 먼, 크고 큰 우주를 유영한 우주비행사가 인류에게서 가장 먼곳에서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를 바라본 인류가 우주라는 먹먹한 고독앞에서 알게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어쩌면 우리의 답은 그 작은 손 안에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깐, 연약해서 사라지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잊힐 뿐이라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는 나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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