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김연수란 작가는, 되는대로 읽어대는 줏대없는 독서습관을 가진 내게도 가장 좋아하는 몇몇의 작가중 한명이다. 당연히, 그 작가의 글에 대해 충분한 신뢰를 갖고 있다는 뜻. 그래서 김연수 작가의 신작 에세이가 나온다는 이야기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괜히 내가 아는 사람이 책을 내는 것 마냥 즐겁다.(쌍방 알지 못할뿐 내가 아는건 맞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런 작가의 책들은, '읽을까 말까'의 문제가 아닌, (늘 읽고싶은 책을 바로 읽을 수 있는 여건은 아닌지라), '언제 읽을까'하는 문제가 되곤 하는데, 기회가 좋아 비교적 빠른 시간내에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소설이 아닌지라, 그가 어느 한 시간 한 공간에서 느낀 것들을 뭉텅이로 한꺼번에 받아들일 깜냥이 없어 천천히, 읽어갔고, 여차저차한 핑계로 서평을 쓰는 것은 또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런 유명작가들의 에세이 같은 장르를 읽을때면, 창작자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물론 창작자들부터 '작품으로 보여줘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창작자의 시각과 자세에서 비롯되지만,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래서 틀린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것은 분명 멋지고, 또 원대한 일이며, 사실 위대한 많은 예술가들이 걷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창작자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는게 즐겁다. 인간은 어찌되었든 사회적으로 한가지 일을 주업으로 삼긴 하지만, 그 한 인간이 가진 능력과 재주,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며, 한 인간이 한가지 창작을 잉태하기까지는 결국 수많은 이야기가 농축되기에, 창작자를 만나는 것은, (특히 미술작품의 경우) 창작품을 이해하는 범위를 넓혀주기도 한다. 작품 하나에 정말로 누구나 인정할만한, 인간 이상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것들도 있겠지만, 결연한 예술혼을 논외로 한다면, 인간의 가치는 결코 창작의 가치에 뒤쳐지지 않는다. 그 어떤 드라마도 삶보다 아름답거나 슬플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린 결국, 우리가 사는 드라마에 출연할 뿐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생각의 차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가가 아닌, 평범한 김연수란 사람이, 걸어온 길에서 사색한 것들을 만날 수 있음이 즐거웠던 것이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삶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 <지지 않는다는 말>에 녹아있다. 어떤 것은 그가 한참전에 지나온 꿈결같은 시절을 돌아보며 이야기 하고, 어떤 것은 얼마되지 않은, 나와 같은 동시대의 자신과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신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나간 추억을 음미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한 계절을 살아가고, 잠시 스쳐가는 모든 것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 다양한 시간과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말해지지만,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아마도 마라톤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실제로 마라톤에 관한 이야기와 거기에서 얻는 통찰은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세상에는 비슷하게 보이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한명 한명의 삶은, 비슷한 듯 보임에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그 분명히 다른, 한명한명의 개인이 써내는 삶은 그리고 그 삶에서 만난 사람과 순간을 통한 통찰들은 얼핏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연수가 풀어내는 삶의 이야기가 다른이와 또 다른 점은, (정말 끈질기게도) 달린다는 행위를 통해서 삶을 만나고 있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웬만한 독자라면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함께 떠올리겠지만, 나는 아직 집에 있음에도 못읽었으니, 김연수의 '달리기' 만을 갖고 말하자면, 이것은 완벽한 예찬이다. 달리기에 대한, 달리는 동안에 대한, 달리는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그의 글 속에 녹아있음에도, 개인적으로 몇가지 추려내보자면,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 내게도 달리기는 내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그걸 육체의 지리학이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길의 생김새와 각도와 냄새를 경험한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들의 지저귐과 사람들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경험할 수는 있게 되는 것이다. (272)

 

결국 우리가 그렇게도 매번 쏟아져 나오다시피하는 책을 고르고 골라서, 읽고있는 이유는, 바로 나, 너, 우리, 세계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그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몸으로 이해하기를 역설한다. 글자를 읽는다고 해서 모두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뿐더러,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니냐 따지고도 싶지만, 나또한 속으론 인정할 수 밖에. 가령, 아무리 가슴아픈 사랑이야기라도, 지구상에서 우주상에서 가장 가슴아픈 사랑이야기라도 내 사랑이야기보다 슬프지 않듯 말이다. 머리가 경험해야만 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고, 몸으로 경험해야 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실제'들이 실제와 같은 '가상현실'로 하나하나 차곡차곡 대체되고 있는 시대에 분명 작가의 말은 더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시대는, 머리와 몸으로 배우던 것들의 조화가 무너져가며, 방 안에 앉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스마트'한 세상이 되어가니깐.

 

그가 달리기에서 말하고자 함은 고통과 아픔의 가치다. 운동중에서 특히 달리기란, 다른 운동처럼 지난한 연습을 거쳐서 한 순간에 그것을 펼쳐내는게 아니라 연습과 같이, 실전에서 또한 고통의 연속을 거쳐서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긴 시간을, 매 순간 순간 고통을 넘어서는 일이다.

 

에밀 자토펙은 "아픔과 고통의 경계선을 넘어서면서 어른들은 아이들과 헤어진다."고 말했다. 흔쾌히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완주할 때마다 나는 고통과 아픔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 고통과 아픔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의 삶에서 겪은 고통과 아픔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건 바로 그때다. 누구라도 35킬로미터 지점까지만 가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285)

 

지금은 친구들과 달리기를 할 일도 없을 뿐더러, 뛰는 것 자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뛰는 것은 심장과 폐와, 다리, 게다가 요즘같은 날씨에는 온몸이 고통이다. 더욱이 지금 뛴다는 것은, 어딘가에 늦었단 경우가 많으니깐. 중학교 때에는 반 대항 계주도 나가고, 오래달리기에서 1등도 해봤다. 계주야 그저 앞만 보고 미친듯이 바닥을 찼던 순간이라 잘 기억도 나질 않고, 기껏해야 경기가 끝나고, '아이들이 나도 응원해 주더냐?'라고 물을 처지였지만, 오래달리기는 인내 그 자체였다. 막판까지 접전을 벌였던 친구를 두고, 나는 정말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속도를 붙여 결승점을 들어왔다. 그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내게 치사하다고 말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때에 나는, 내가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번 더 힘을 쥐어 짜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공원 잔디에 누워 얼마나 숨을 헐떡였겠는가.

 

그 후로 내가 달린 것을 기억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을 때다. 어디에 있던 고통이었다. 살아있으면서 하는 모든 것, 만나는 모든 것, 보고 듣는 모든것이 고통이었다. 그러니깐 내가 살아있다는 자각이 고통이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을 때, 나는 (비록 졸업한 초등학교 운동장일 지라도) 달렸다. 때론 친구와 달리고 때론 혼자 달렸다. 누군가와 달릴땐 결국 누군가와 이야기기 했지만, 혼자 달릴땐, 또 나 자신과 이야기 했다. 얼마 후엔 곧 러닝머신 위를 달리긴 했지만, 그래서 사람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오롯이 만나진 못했을 지라도 분명 난, 내 막연한 심경을 달리면서 더 정확히 맞닥뜨리고 위로했음은 분명하다. 지나간 시간속에서 후회하며 가슴을 치는 나에게서 멀어져, 늘 제자리 같지만 또 한번 어딘가로, 누군가에게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이후의 삶의 방향을 완고히 했다고 말은 못할지라도 분명, 그 순간을 살 수 있게한 중요한 순간임은 분명하다.

 

인생이 마라톤으로 비유되는 이유는 결코 그것이 페이스를 조절하며 끝까지 완주해야만 하는 특징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마라톤과 인생은 누군가를 앞질러가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자신이 목표로한, 혹은 필연적으로 가야만 하는 그 지점 어딘가까지 가 닿아서, 우리가 사랑하는 혹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로써 같다. 그리고 김연수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어디를 보고, 어떤 마음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는지 그의 삶을 증거로 들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김연수의 삶에서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억에 남을 일은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칭커' 였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어딘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무슨 책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리더스다이제스트'나 '좋은생각' 같은 책에서 만난 '칭커'에 관한 이야기는 문득 기억속에서 남아있는 물음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 뜻을 다시한번 찾으려 했었지만 원론적인 뜻풀이를 만났을 뿐 내가 그때 만난 깨달음은 없었다. 언젠가는 한 모임자리에서 중국어에 능통하고 종종 번역을 하고 있는 분에게 '칭커'의 뜻을 물어보기도 했었다. (공교롭게도 그분은 나보다 김연수 작가에 대해 몇십배의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이다) 그때에는 내가 그 '칭커'란 말을 만난 배경을 설명하지 못했기에, 그저 '한턱 쏜다'는 농담아닌 농담에 낚였지만, (혹시 이 글을 보고 얘기해주신다면 가볍게라도 한턱 쏘겠다. '칭커'로써) 드디어 많은 시간이 흘러 나는 잊다, 잠깐 기억하다 살아온 그 뜻을 마치 그때처럼 완벽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마치 어떤 것들의 의미는, 오랜시간이 지나서 우연찮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말이 모든 것을 바꾼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삶에 '칭커'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요령은 간단하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 (93) 

 

그렇다. 칭커란 누군가에게 정말 푸짐하게 (배가 터지도록)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선 '그 자리의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마치 삶처럼,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며, 상대가 여기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고, 우리가 이 귀한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곧 각자 모두가 이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과 닿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어느 한 순간도 허투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경험할 수 있는 그 끝까지 가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막한 벽이 나온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은 바로 거기다.(...) 다들 먼저 온몸으로 경험하기를. 온몸으로 수없이 부딪히고 실패하고 좌절하기를.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가 보기를.(...) 아마 거기까지 갈 수 있다면 왜 상상력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의 전기가 실패담으로 가득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81)

 

그렇게 자신이 왜 이 삶에 '칭커' 당해 여기에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존재 그 자체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가 봄으로써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어떤 일들을 겪든, 자신에 대해 실망하든 절망하든, 피로하든 죽고 싶든, 한 번이라도 결승점에 들어가 본 러너라면 그 사실을 이해하기를. 결승점은 어떤 경우에도 충만한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이 아니면서 동시에 그 순간의 충만함은 어떤 경우에도 파기되지 않는다. 삶의 희망 역시 마찬가지다. (289)

 

그리고 아마도 더이상 갈 수 없는 막막한 벽에 서기까지 우리는 충만한 상태일 수 없을 것이지만, 그 '갈 수 없는 바로 앞' 이라는 결승점의 경계를 만나는 찰나의 순간의 그 충만함은 오직, 심장이 뛰고 있을때만 가능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 순간 속에 우리 삶의 모든 의미가 담긴다는 것을. 천국이란 다른 게 아니다.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뛰었던 어느 한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는 일을 뜻한다. (...) 천국은 대단히 빨리 뛰는 심장으로만 맛볼 수 있다. (291)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을, 몸으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일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최고의 순간은 현재고, 먼 훗날엔 또 그 당시의 현재가 곧 최고의 순간일 것이다. 그렇게 늘 우리가 사는 지금을 사랑하고, 가슴뛰게 산다면,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김연수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깐, 오늘 하루도 가슴 뛰게 하는 일을, 가슴 뛰게 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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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캡틴
치카 지음, 추지나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6월
품절


미소년 같은 외모에 죽도를 손에 쥔 당돌한 소녀, 뭔가 딱 봐도 학원물의 분위기가 풍기는데..큼지막한 제목에는 순정이란 단어가 떡하니 들어가 있으니, 학원로맨스물인가 싶다. 하지만 여기에는 코믹이란 요소가 포함, 학원로맨스코믹만화가 탄생했다. 짧고 쉽게, 그리고 유쾌하게 사랑이란 감정을 풀어내는 만화가 바로 이 <순정캡틴>이다.

서클활동에 열심히였던 중학교를 졸업하고, 달콤한 연애의 부푼꿈을 안은 란코가 입학한 고등학교는 작년까지 남고였던 (게다가 문제도 많은)공업고등학교. 남녀공학으로 바뀌었음에도 결국 다니는 여학생은 란코가 유일. 온통 이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들만 가득한 그곳에서 연애를 꿈을 접고 있던 란코는 이미 자신의 출중한 무술실력으로 학교에서 '캡틴'이 되어있던 상황..

그러던 어느날, '타카미네'라는 잘생긴 남학생이 전학오며 (게다가 연상!) 란코의 마음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하지만, 무술실력 외에는 아직 많은 것이 서툴기만한 란코.

란코의 집안은 도장을 운영하는데다, 그 자신의 무술실력도 빼어나서 이런저런 빈정과 놀림을 받기도 하지만

소꿉친구에게 '이론'으로써 사랑에 대한 완벽한 조언을 얻게 된다. "사랑은 '하는'것이 아니라 '빠지는'거야"

그럼에도, 경험없는 이론은 앙코없는 찐빵인지.. 란코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뿐이고,

테스트에 홀딱 넘어가버릴 정도로 정신도 없는 상태.. 어쨌든 이런저런 이론들을 습득하며, 뭔가 사랑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천천히 배워가는 것 같기도 한데..

(이거 순정만화 맞거든;;액자식 구성이라도 할 셈인가!;;)

새로온 교생선생 마사히코가 또한번 란코의 마음을 흔든다! 하지만 그 마사히코는 란코가 짝사랑하던 타카미네 와 구면인듯 하고.. 드디어 나름 삼각관계;로 진입한 란코, 타카미네, 마사히코..이들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문제는, 란코가 누굴 선택하느냐가 아닌, 어떻게다!

은근 사랑이란 감정과 동경이란 감정의 혼란이 중심 화두인 이 <순정캡틴>은 그런 혼란을 처음으로 맞딱드릴 사춘기 소녀에게 더 좋을 만한 만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이란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의 그 기초적 혼란과 고민을 풀어나가는 란코의 모습이 너무나 코믹하고 유쾌하게 또 사랑스럽고 귀엽게 그려져 있어, 누구나 부담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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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수사대 박스 세트 - 전4권 - 진정한 협객의 귀환!
이충호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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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세상이 어지럽지 않다면 영웅들이 드러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인 즉, 어지러운 세상과, 그것을 바로잡을 영웅은 언제나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말일 터. 인류역사를 따져보면, 세상은 늘 어지러웠고 어두웠다. 평화는 짧았고,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만이 길었다. 혹 평화와 비교해서 전쟁과 수탈의 역사가 단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단발적인 기간안에서의 고통의 파급은 헤아릴 수 없다. 국가끼리 충돌하지 않으면 국가 안에서 충돌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언제나 어두운 먹구름은 늘 사람의 머리 위, 하늘의 한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더 부유한 삶을 살거나 살고싶은 영악한 이들은, 그 기준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거기에 현혹되어 계속해서 높은 욕망을 향해갔다. 작정하고 자신의 사욕을 지향하는 이들을,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혹은 거기에 자의든 타의든 만족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에겐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당연히) 많은 이들의 뜻이 모여야만 가능할 텐데, 그것은 일정의 '양보'를 필요로 했고, 그 '양보'를 수긍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이들은 '자신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뒤에 줄섰다. 그리고 타인에게 하나도 내어줄 것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 가져다줄 욕망에 대한 기대는 엄청난 집중력과 단결력을 가져다 주었다.

 

 

 

 

현대에는 그런 왕이나, 귀족들이 사라졌다. 표면적으로. 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권력' 과 '재벌'이라는 형태로 다시 새롭게 태어났고, 사람들은 왕족이나 귀족들과의 신분차이를 태어날 때 부터 인정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리석게도, 그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것들을 '능력' 혹은 (그저 자본주의라는 미명아래) '당연한 것' 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선망하며 살고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보상을 거두는 이들은 그 '정도'를 지켜가기에 우리 삶을 헤집어 놓진 않는다. 문제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당하지 않은 보상을 가져가려는 이들이 결국 우리의 삶을 좀먹는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여전히 쥐가 치즈를 갉아먹듯, 조금씩 수탈당하고 있다. 나무와 숲이 저멀리 밀려가고,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더 높은 곳으로만 뻗어나가려는 현대의 빌딩 숲 속에서도 당연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깐, 난세는 여전하니, 영웅도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영웅'을 꿈꾸고 있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도 작은 영웅이 되고자 한다. 무협의 세계에서는 그 '영웅'이란 것이 '협객'이라는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말로 표현되는 듯 싶다. 포털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영웅이란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을 일컫고, 협객이란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영웅은 보통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을 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협객은 다르다. 의협심으로 행한다면 누구나 협객이 될 수 있다. 이제 현명한 이들은, 누군가에게 영웅을 '기대하지 않고' 제 스스로 '협객'이 되어야 함을 직시하고 있다.

 

이 <무림수사대>는 진정한 '협객'이 사라진 시대에서 다시한번 '협객'이 '판치는' 세상을 꿈꾸는 한 작가가 완벽한 현실에서의 완벽한 판타지를 그려낸 만화다. 방대하고 무구한 역사를 지닌 무협의 세계가 이 네권에 모두 담겨 있단, 그런 가당찮은 말은 하지 않겠지만, 이 어두운 현실이 어떻게 협객과 연결되어 질 수 있는지는 분명히, 빼어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이 읽은 지 채 얼마지나지 않았건만 다시한번 이 만화를 읽게한 동력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 만화가 완벽하단 얘긴 아니다. 가끔 보이는 올드한 표현들과 같이 아쉬운 점이 있다. 수많은 예술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은, 꿈은, 협객의 모습은 분명 적확하고, 정직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 모두 한명 한명이 협객이 되어, 의롭게 살아가는 일, 그것이야 말로 완벽한 판타지가 아닌가? 그 완벽한 판타지가 완벽한, 그러니깐 아주 리얼한 현실속에서 벌어진다면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내가 느낀 주요 흐름대로 이 <무림수사대>를 이야기 해보겠다.

(전권 내용을 거의 다 다루기에, 스포일러 당연 포함)

 

 

 

 

세상은 여전히,

푸른 숲은 빌딩 숲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돈과 권력만이 최고다. 하지만 이 세계가 우리가 현재 사는 세상과 확연히 다른게 하나 있다면 무술과 검술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무림계가 하나의 거대한 권력을 쥐고, 사람들 속에 자리잡고 있고, 또 경찰에서도 무술/검술 등을 이용한 '무림수사대'가 있다. 문제는 거대 재벌가처럼, 국가보다 더 무소불위의 권력을 만든 무림계 또한 썩어가고 있었던 것. 그리고 거기에 검을 들이대어 '징벌'하는 자가 있었으니...

 

 

 

 

 

혼자 아픈 세상,

 '지후'는 마포경찰서 무림수사대로 발령받고, 전설적인 유랑검객 백운의 파트너가 되지만, 계속해서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그 이유인 즉, 과거 지후의 파트너였던 '현' 과 제룡련주 '연우'의 지원요청을 묵살함으로써 그들이 목숨을 잃은 것. 그 이후로 그는 고장난 시계를 계속 차고 다니며 자신이 속죄하지 못한 과거에 얽매여 더이상 누군가의 등을 맡고, 맡기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처음엔 무림계 오대신군에 대한 연쇄살인 용의자를 잡는 임무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 거대한 세상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하는 지후의 발을 붙잡는 것은, 다름아닌 개인적인 상처다. 지후를 무림수사대로 이끈것도 개인적인 선망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많은 상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주는 것.

세상의 많은 이들은, 젊은이들이 현실의 모든 불합리들을 헤쳐나가고 살아가길 바란다. 모든 원인은 자신한테 있고, 현실은 '원래 그런거니깐'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만을 다독여 나가길 바란다. 그래야 '기득권 체제'가 유지되니깐. 그리고 지후도 현과 연우의 죽음을 모두 자기탓으로 여긴다. 셋중에서 자신만이 배제된다는 생각을, 파트너로써 인정받고 있지 않다는 불신이 그 지원요청을 거절하게끔 만들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과 연우를 그 죽음보다 더 잔인한 상황으로 직접몰아간 것은 무엇인가. 바로 뒤틀린 권력이고, 범죄이자, 음모였다. 그러니깐 그것은 비뚤어진 권력과 음모가 먼저였지, 지후의 치기어린 선택의 문제가 먼저가 아니었다.

 

현재 개봉하고 있기도 한 '스파이더맨'이 탄생할 수 있었던 심리적 배경을 떠올려보면, 개인의 선택과 세상의 부조리가 어떻게 관계되는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외면했던 '부조리'. 사실은 세상의 그 '부조리' 함은 분명 우리 각자의 개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런 상처를 근본부터 진료하기 위해선 개인의 성찰만을 강요하는게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더 좋게 바꾸기위해 협객이 필요하다.

그런 부패한 권력들이 평범한 이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림수사대>는 존재하는 것이다. 영웅의 무소불위 힘까지는 없지만, 정의(正義)의 실현을 위해서 밤낮으로 애쓰는, '협객'들 말이다

 

 

 

 

 

그 협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성장해야만 하는데,

'무림수사대'와 같은 협객들이 되기위해서는 개인 각자의 수행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서로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 한명의 부족함이 곧 다른 한명을 사지로 빠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명이 '더' 특출난 것은 괜찮지만, '덜' 특출난 것은 분명한 위험이 될 수 있다. 이 '무림수사대'원들은 서로 개성 뚜렷한 자신만의 특기들을 갖고 있고 그것들이 서로의 등 뒤를 보호하기에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 지나간 것을 딛고 얼어서서, 현재를 살고, 미래를 향해 갈 줄 아는 용기. 칼을 드는 용기가 아니라, 칼을 내려놓을 줄 아는 진정한 용기.

 

 

 

 

 

 

그 성장은 반드시 서로의 '신뢰'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성장이 무공의 수준으로만 판가름 나는 것은 아니다. 등 뒤를 맡기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선행되야 할 것은, 등 뒤를 맡기고 마음놓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신뢰'를 주는 것이다. '무림수사대'원들은 서로 그런 신뢰를 통해서 존재하는 집단이다. 지후가 결국 현의 요청을 거절한 것 또한 그 믿음과 신뢰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치기어린날 한순간의 선택이긴 했지만, 현과 연우, 지후 이렇게 셋의 관계에서 자신은 배제된다는 소외감, 그리고 무엇보다 현이 자신에게 등을 내맡기지 않고 있다는 자괴감, 그리고 거기서 연결되는 자존감의 붕괴는 지후의 판단을 순간적으로 흐리게 한 것이다. 이러니 '신뢰'는 개인의 역량보다 더 중요하기도 한 것이다. 서로간의 '신뢰'를 통해 '성장'해서 모두 각자가 한명한명의 협객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협객으로 거듭난다면.....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세상은 어지러울 것이고, 아마도 많은 협객들이 나타나고 사라질 것이다. 혹시나 그들이 밝은 세상을 만들진 못하더라도, 오늘 어둠으로 세상이 덮히지 않도록 할 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협객들이 그렇게 소리없이 나타나고 사라졌을 테고. 그들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내일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깐, 협객은 '릴레이'가 필요한 것이다.

 

 

 

 

 

방대하진 않지만 짧은 시간을 밀도있게 담아낸 어렵지 않은 스토리, 영상기법을 적절히 차용한 효과, 색색깔 화려하기 보단 컷마다 색을 정해 인물과 배경을 그 색에 맞춰 스타일리쉬함을 돋보이게 하고, 과감하고 대범한 선/묘사, 컷구성과 진행으로 인해 시원스럽게 페이지를 넘겨가는, 하지만 그 틈에서 의외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은근 머뭇거리게끔 해줬던 이 <무림수사대>는 얼핏 보기엔 사나이의 우정을 끈덕지게 이야기 한다. 맞다. 그게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말미까지 쭉 주의깊게 따라가보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그리고자 했던, 꿈꾸고자 했던 사람과 세상이 무엇인지 더 폭넓게 알수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우리의 선함과 순수함에 맞지 않는 어두운 세상에 태어났을지라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옆에 있는 이들에게 등을 맡기어, 신뢰로 한발 한발, 비록 그 어딘가에 이름 한자 남지 않을지라도, 내 동료가, 그리고 나 스스로가 그 순간을 기억하기에, 모두가 서로, 한명 한명의 협객이 되어, 의롭게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이상은 본문 텍스트 차용) 그 속에서 우리는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서로 '신뢰'로써 '성장'하여, 함께 '협객'이 되어, 비록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인류 역사와 거의 함께 해왔을 이토록 지난한, 불의에 맞서 의롭게 사는 일...그래서 적어도 누군가가,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런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작은 별들이 되기를, 어쩌면 이충호 작가는 그 작은 꿈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의 희망을 품는다는 듯 보여진 종이학 한마리 처럼 말이다.

 

 

 

 

파트너끼리는 '너 때문에도 '나 때문에도' 없다고 말하던 현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때문'으로 짊어지려고 했던 안타까운 협객이었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 했기에 성질급한 지후를 생각해 그를 뒤에 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불화를 낳았고, 그로인해 그들은 파국을 맞았다. 부패한, 비정한 세상은 그들의 의협심을 놔두질 않은 것이다. 그 비극속에서 살아남아, 살아남은 자의 책임과 고통을 홀로 짊어지며 과거의 상처에 박제된 채 살아갔던 지후는 '무림수사대'의 동료들을 만나서 (현이 지후에게 바랐던 것처럼) 다시 서로를 '신뢰'하는 것을 배우며, '성장'해서 진정한 '협객'으로 거듭나 세상에 맞서는 '무협만화', 이것이 바로 <무림수사대>다.

 

이 책 맨뒤, 책날개에서 작가는 협객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과감성이 있으며 이미 허락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의를 다한다. 그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의 곤경에 뛰어들며 벌써 생사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어도 그 능력이 있음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사마천이 [사기] - [유협열전] '에 '협객'을 묘사한 글이다. 세상이 천박하게 변해버려서일까. '협객'을 찾아보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졌다. '협객'근처에도 가기 힘든, 나약한 책상물림으로서 이 시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떨리는 펜으로 질문을 던져볼 밖에.

 

"어지러운 이 세상을 바꿀 진정한 '협객'은 어디에 있는가?!"

 

 

글이든, 그림이든, 만화든, 영화든, 음악이든, 춤이든, 연극이든, 그 뭐가 되었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의(義)를 펼치는 협객이 되자. 각자, 그리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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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메라이
시마다 토라노스케 글 그림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배우고 싶은 악기중에서 피아노는 첫번째다. 그리고 그 다음이 기타와 드럼. 고등학교 때 반에서 좀 얌전했던 친구가 음악시간에 막간을 이용해서 잠깐 일본곡의 처음 반주부분을 쳤던 적이 있다. (아마 엑스재팬의 Endless rain 이던가.) 짧게 치고 조금 서툴렀지만, 반주 자체가 워낙 서정적인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그 아이를 보는 다른 친구들의 시선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이 내게도 퍽 멋있게 보인게 사실이다. 그때가 아니라도 종종 피아니스트를 보면 피아노를 꼭 한번 배워보겠노라 다짐했지만 바쁘단 핑계, 피아노는 성인이 되서는 배우기 힘들다는 얘기때문에 여지껏 난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데다가 악보도 볼줄 모르는 신세.

 

아마 그 후에 피아노가 굉장히 아름다워보였던 때는 티비의 한 프로포즈 프로그램에서 한 남자가 피아노곡을 연주하면서 고백하는 장면을 봤을 때. (물론 드라마 등에서도 많이 나오지만) 그리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한 소녀가 연주하는 피아노로 인해 군인들이 총을 내려놓는 Y피아노 광고야 말로 피아노라는 악기의 상징성을 확실히 각인시켜 주었다. 스토리보다 '데츠카 오사무 문화상' 신인상 수상작 이라는 타이틀이 먼저 이 만화책을 들게한게 사실이었는데, 보니깐 이 <트로이메라이> 또한 그런 피아노의 상징성을 중심으로 풀어나간 이야기였다.

 

사실 이 리뷰를 쓰는 것이 좀 부담스럽기도 하다. 아직 메세지나 작가의 견해에 대해서 명확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리뷰를 찾아보아도 출판사에서 소개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좀 더 깊게 파헤치는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은 내가 그 글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내가 읽은 바에 대해서, 비록 주관적인 견해라도 나름의 근거가 뚜렷하다면 자신이 있겠건만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럼에도.. 생각해보면 다른 책들도 그저 내 자신의 근거로 써내려갈 뿐이긴 하니깐.. 그러니깐 어쨌든 써보자.

 

 

이 만화는 침략국가와 식민지 국가에서 파생되는 필연적인 국가적, 개인적인 상처와 그것들이 시간이라는 치유를 거쳐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트로이메라이>는 슈만의 피아노곡 중에 하나이며, '꿈꾸는 일', '공상'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란하지않고 맑은, 암울하지 않고 밝은 분위기의 이 곡이야말로,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뚜렷하게 표현하는게 아닐까. 과거의 상처가 시간을 통과해서 치유되는 모습을 그리고자 했던게 맞다면 말이다.

 

그 발파르트는 특별한 소리를 내지 않던가?

 

두개의 큰 이야기가 피아노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하나는, 피아노 조율사인 토다에게 맡겨지는 '발파르트' 라는 오래된 피아노를 수리하는 이야기다. 그 피아노는 20세기 초 유럽열강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을 식민지로 두고있거나 혹은 건드려보던 시절, 독일인이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 견디는 피아노를 만들기 위해 카메룬의 오벵나무를 멋대로 베어가 만든 것인데, 그 피아노를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를 수하르토가 저지하면서 벌인 공산당 색출과정에서 엄마를 잃은 구 왕족의 후계자가 수리를 의뢰한 것이다. (이 인도네시아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국가이다.) 그리고 그것을 1980년대 초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부 라는, 불상 도제와 2002년 6월 도쿄에서 피아노 조율사 일을 하고있던 토다가 함께 수리하게 되는 이야기가 이 <트로이메라이>의 큰 이야기 중에 하나다. 


다른 하나는, 독일인이 발파르트 피아노를 만들기 위해 오벵나무를 벨때 그것을 막지못한 카메룬의 주술사 만베만베가 그 오벵나무에 저주를 걸었는데, 거의 백년이 지난 후 그 나무로 만든 발파르트가 연주되면 재앙이 있을거라며 이름이 같은 그 손자가 그 저주를 풀기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피아노를 '살리기'위해 애쓰는 이들과, 그 피아노가 연주되는 것을 막으려는 쪽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되는 구조인 셈이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2002년, 그러니깐 작품의 현대에서의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과거에 외세의 침략을 받았던 국가의 사람들이었다는게 이 작품의 중요한 실마리이기도 하겠다. 

 

(스포일러 포함)

 

하지만 2002년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만베만베에게 일본에서 카메룬과 독일의 경기가 끝나기 전에 다른 주술사를 찾아 저주를 풀라고 시킨 장본인은 그 피아노를 누가 연주할지 몰랐던 것일까? 결국 만베만베는 그 피아노가 고쳐지고 연주되는 것을 막지 못하지만 아무 재앙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실질적인 변화보단, 무척 상징적인 장면들이 펼쳐진다. )그 피아노를 친건 다름아닌, 1965년 수하르토의 공산당 색출과정에서 엄마를 잃은 딸이었이었으니깐. (검색결과, 실제로 2002년 월드컵 당시 카메룬과 독일의 경기는 양팀다 한명씩 퇴장을 받고, 그해 월드컵에서 최다 경고기록을 받는 등 경기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만화의 이야기상으로 보면 (어쨌거나) 피해자인 의뢰자가 연주함으로써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 셈. 다시 말하면, 피해당한 이들이 '용서'한다는 개념일까?


만약 이 만화가 전혀 다른 국가를 배경으로 했거나, 혹은 다른 나라의 작가가 그렸다면 앞서말한 것처럼, 침략당한 국가들이 시간을 거쳐 과거를 용서하거나 앙금이 녹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조금은 해석이 가벼워질수도 있었겠지만, 일본인이, 일본이라는 국가를 배경으로 여러 침략 당한 국가들을 묶어 이야기를 펼친다는 점에선 꽤 복잡해진다. 2002년이 훨씬 지난후 그려진 만화기에 당연히 팩트를 갖고서 이야기를 구성했겠고, 그렇다면 의도가 먼저인지 설정 구축이 먼저인진 모르겠지만 근대의 대표적 침략국가인 일본에서 펼쳐지는 월드컵, 그것도 의미심장한 한일월드컵, 거기서 한때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인도네시아인, 그리고 20세기 초 식민의 관계였던 카메룬과 독일, 덧붙여 이라크의 침략을 받은 이란인까지 한데 묶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역사도 흰개미에게 먹혀버렸답니다. (124)


이 해석이 헷갈리고, 난해한 이유는, 이 치유의 과정이 정말로 '과정'만 있지 서로의 어떤 노력이나 사과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담담하게 그려내는 역사 속에서 침략국의 횡포나, 잔혹함은 비춰지긴 하지만, 그런 '폭력'을 행한 이들의 어떤 노력과 반성은 쉬이 찾아낼 수 없다. 기껏 찾아본다면, 마약거래 혐의로 수배를 받고있는 이란인 아부를 일본인인 토다 같은 인물들이 저지하려고 해준 다는 것? 하지만 거기에 비한다면, 차라리 이란인 아부가 전쟁터에서 친구를 잃었던 과거와, 불단을 발견하고 얻는 깨달음, 토다를 중심으로 소개되는 피아노에 대한 역사와 그런 피아노가 갖는 음의 특성이나 음악적 이해가 훨씬 더 비중있게 다뤄진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피해자들이 가진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그저 시간이란 다리를 건넌 것만으로,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는 것만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하는 점이다. 알다시피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은 어떤 국제적 압력이나, 지리적 압박의 차이를 차치하고서라도 결과적으로 종전후 보인 행보가 너무나 뚜렷하게 다르다. 


여기서 일본은 카메룬과 독일이 경기를 할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해주며(월드컵), 피아노를 수리할 수 있는 기술을 제공하는 셈인데, 이것의 의미도 혼란스러울 뿐더러, 심하게 본다면 화해의 제스처를 일본이 제공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물론 독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찌 본다면 결국 용서와 화해에 필요한 모든 이해의 과정은 오로지 피해자가 깨우치는 것으로만 그려지는 듯 보이기도 하다. 

 

전쟁 전 피아노의 금속프레임은 그리 대단한 울림을 내진 않았지만 그만큼 목재악기로써의 음색이 더욱 선명했다. (...) 목재는 세월과 함께 건조되면서 내부에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이 피아노의 음색에 그대로 영향을 끼친다. (100)

 

음악, 즉 예술의 길로 통하는 용서가 어떤 감정을 초월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심하게 딴길로 새자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바탕으로 하여 독일처럼 사과하고 보상하지 못한 일본에 대해 이야기 하고싶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이건 자의적 해석이 너무 과한것 같으니 그냥 하나의 가설이라고 생각해둔다면)  


용서를 위해서 응당 있어야 할 진정한 사과와 보상은 예술의 영역과는 별게인 걸까? 피아노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음은 일정 이해하지만... 그것이 좀 더 납득이 가는 사건들속에서 섞일 순 없었던 걸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건 사실이다. 결국 내가 제대로 볼 줄 모르거나, 혹은 내 취향과는 좀 다르거나 둘중에 하나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름 많은 시간을 생각했다. 좋다고 말할 때는 차라리 말바꾼 칭찬을 늘어놔도 어느정도는 전달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 혹은 이것처럼 약간은 미적지근한 반응을 적어야 할때는 더 신경쓰인다. 어쨌거나 그래서 생각을 해본 끝에...

 

피아노를 간직하고 있다가 수리를 의뢰한 사람이 자카르타 출신의 사람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본다. 일본인이 아닌, 굳이 식민통치를 받았던 국가의 사람이 사건의 발단이자, 사건의 종결점이다. 아마 만베만베에게 선조가 걸어놓은 저주를 풀라고 보낸 오샤만베는 아마 변화한 시대의 흐름을 몰랐던게 아닐까 싶다. 비록 발파르트를 고치는 일은, 열강들의 힘을 빌린 셈이 되긴 했지만, 이란의 아부가 많은 역할을 했고, 사건의 종결도 자카르타의 의뢰인인 점, 그리고 카메룬과 독일의 축구경기에서 보여지듯 이제는 한때의 식민지국가도 예전과 같지가 않다. 그러니깐 오샤만베는 여전히 수동적이고 외소한, 약소국을 걱정했지만, 이제는 그 국가들이 전과 같지 않은 역할을 하고 위세를 떨치고 있다고나 할까.

 

데츠카 오사무 문학상 신인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을 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체가 아톰 스타일을 약간 닮긴 한 것 같다. 어린이 교양곡 중 한곡인 <트로이메라이>를 선율로, 그 속에 네가지 시간, 네개의 공간을 하나로 묶어, (출판사의 책 소개처럼) 스크린톤 없이 오히려 먹과 선, 여백으로, 그리고 생략으로 풀어낸 이 만화는 분명 가볍게 페이지를 넘길 순 없다. 특히, 작가는 영화에서 오히려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눈썰미가 없어 명확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3인칭 시점이 많기도 하고, 컷과 컷을 사운드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서 진행하는 영화의 장치처럼 독백이나 작가의 해설을 활용하기도 한다.

 

시간이라는 마법이 만들어낸 플레열의 음색을... (102)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데 있어 작가는 분명 과거 침략의 상처를 가진 이들이 하나로 모여 피아노를 고쳐내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도 부족했을 것이다. 역사적 큰 사건들을 간략하게나마 하나로 묶이는데에도 지면을 다 할애했으리라. 그럼에도, 좀 더 많은 분량을 통해서, 그들이 스스로를 치유할 수 밖에 없는, 외적인 이유들을 (특히 지배국가 들의 이야기들) 하나하나 보여줌으로써, 마지막에 보여지는 치유의 클라이막스를 좀 더 극대화 시킬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건 사실이다.

 

박힌 총알에서 기생한 흰개미가 갉아먹은 '평화의 상징'인 피아노에 얽힌 식민시대의 과거, 그리고 그 피아노가 보여주는, 시대를 막론하고 벌어진 참혹한 전쟁과 내전들. 시간이 지난 후 그 시대의 고장난 유품을, 썩은 부분을 도려내 최소한만 남겨두고, 저주받지 않은 새 목재를 같다 붙이는 과정은, 과거의 잘못과 상처를 도려내어 시간이라는 치유를 통해 새것을 이어 붙이자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는 걸까? 오샤만베가 최후의 수단으로 열어보라고 준 손주머니에는 핸드폰이 들어있는(어쩌면 위트있기도 한)장면을 상기한다면,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의 '소통'을 통한 '화해'를 강조하고 싶은 것일까?

 

아직 채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기에, 글을 마친다. 이 만화를 읽은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고 싶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불단 도제였던 아부가 토다를 향해 읇조린 시 한편으로 마무리 해야겠다. 비밀은 무엇이고, 여관은 어디이고,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녕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야기 그 자체와는 상관없는 것들을 너무 끈질기게 잡고 늘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혼란스럽게 글을 마친다.

 

이 영원의 여로에서 사람은 단지 떠나갈 뿐 -

비밀을 말하러 돌아온 자 어디에 있는가?

길을 나서면 그대는 다시금 돌아오지 못하느니.

이 여관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주의하라.

이 여관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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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여행 끝에서 자유를 얻다 - 마음으로 몸을 살린 어느 탐식가의 여정
데이나 메이시 지음, 이유미 옮김 / 북돋움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한 개그맨이 그런 얘기를 한적이 있다. 나름 유명한 일화인지라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지 모르겠다. 어릴적, 어른들이 개고기를 해먹기 위해 뜨거운 물에 개를 넣었었는데, 그 개가 아직 죽지 않고 솥에서 뛰어나와 어린 그의 앞으로 와서 꼬리를 흔들더란 일화. 그 후로 그는 '개는 먹는 음식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중요한 얘긴 아니지만, 내가 음식에 대해서 생각했던 몇 안되는 이야기중에 하나다. 사실은 이 책의 모습이 그런 음식에 관한 일화들의 합이 아닐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생각했던 책의 모습은, 다이어트라는 화두로 시작해서, 과도한 음식섭취, 특히 육류쪽에 치우친 식습관을 그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실제로 되짚어봄으로써, 그 비율을 줄이거나 하는 쪽인줄 알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좀 더 포괄적이지만, 또 개인적이었고, 그래서 근원적인 이야기 였다. 사실 그녀는 특별나게 육류를 좋아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육류만으로 비만이거나 뚱뚱한 편도 아닌 듯 싶다. 다만 많이 먹었다. 육류나 인스턴트 뿐만 아니라 올리브를 비롯한 채소등도 좋아했지만 문제는 식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생기는 여러가지 불편함이나 괴로움을 올바르게 잡고자 하는 것이 었다. 그녀의 다이어트는 비단 식습관의 조절이나 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쪽에선 음식 자체의 여정을 따라가 음식에 대해서 고찰하고, 한쪽에선 자신의 과거를 쭉 다시 돌아봄으로써 그녀 자신과 음식의 관계가 언제부터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구축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농경사회가 공업사회로 바뀌고, 다시 첨단기술 및 서비스 산업으로 바뀌어 가면서, 농업의 풍경은 도시인들과는 너무 먼 거리가 느껴지게 된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음식은 현대에 이르러 먹어야 하는 강박과 먹지 말아야 할 강박이 동시에 우리를 급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선 먹어야 하는 강박은 많은 요소들의 발전과 맞물린다. 재료의 대량생산의 가능과, 그것을 신속하게 운반할 수 있는 운송수단의 발달, 그리고 (물론 여전히 빈국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주요 국가의 국민들의 수입증대, 그에 따른 보편적인 소비 가능성의 상승, 그리고 점점 자연에서 멀어지고 기계와 속도를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와 공허함을 채우려는 자극적인 음식의 향연 등 말이다. 하지만 또 역으로 먹지 말아야 할 강박 또한 그에 못지 않은데, 의학의 발달로 인해 식습관에 따라 건강과 생명에 미치는 영향을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일부) 풍유로워진 식량배급으로 인해 정점을 찍은 속도위주 사회에 반기를 든, 슬로우한 생활을 추구하는 이들의 꾸준한 증대, 그리고 무엇보다 늘씬함 혹은 많이 양보한 표현을 빌리자면 균형잡힌 몸매를 위해서 먹는 것을 조절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니깐 결국, 자본을 획득하려는 쪽의 유혹과 그것을 적절히 수용해야하는 양쪽의 강박이 맞부딪치는 세상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비단 음식만의 이야긴 아님이 분명하고.


그녀의 과거는 조금 어두했다. 가끔 폭력으로 위협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그녀는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견뎌왔다. 이 특별한 저자의 과거에서 시작된 음식에 대한 여정은, 가공식품의 폐해로 인해 열량만 높아진 현대의 음식에서 한발 더 들어가 자신이 먹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기 자신의 과거에서 찾아가는 과정과 어우러진다.


이야기는 유혹/공유/변화 이렇게 총 세가지의 주제로 묶여있다. 맨 처음 /유혹/은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고 하는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소시지나 올리브, 초콜릿 등 삶에서 그녀를 가장 유혹하는 것들이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고, 어떤 기술들을 거쳐서 만들어지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크게 그녀에게 어떤 유혹을 제거시켜준 것 같아 보이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음식이 그저 살기위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작은 부산물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자신과 진정으로 연결되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 혹은 그저 즉흥적인 욕구로 인해 '가짜'로 연결되어 있었음과 함께. 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의 행보의 시작이, 그저 음식의 단편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그것을 대해왔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치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책에서 그녀가 보여주고자 함은 표면적으로 그녀는 음식의 재료가 자라는 곳이나, 가공되어 지는 과정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음식에 대한 개념을 다시 재정립하고, 그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음식과의 연결성을 올곧게 바로잡는 일을 통해 새롭게 음식과의 관계를 재정립 하는 일이 분명하다. 


두번째는 /공유/이다. 앞에서의 과정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완제품'의 가공과정을 돌아보는데 주력했다면 이제는 그것들의 이전단계, (가령 소시지라는 가공된 고기가 나오기 이전단계의 고기들을 추적하는 식으로) 농장이나 과수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거기에서 만나는 것들은 이전의 가공단계에서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연결성을 그녀에게 확인시킨다. 여기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음식, 곧 식량과의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만남을 위해서는 (그 음식의 탄생과 성장에 몇십, 때로는 몇백 키로나 떨어져있어서 그 처음의 생산자를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또한 연결되어있고 책임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이미 이전부터, 마트같은 기업형 대형유통체인이 아닌 생산자와 직접 연결되는 공급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실제로 농장이나 과수원에 가서 생산자가 그 수확물을 대하는 태도, 혹은 그것을 운영하고 공급하는 것과 소비자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소비자의 신분을 떠나 기본적인 인간으로서 자연이 주는 자원들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변화/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고 듣고 했던 것들을 체득한 몸에 변화를 주는 마지막 순서다.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요가의 의미를 돌아보고, 4일간 단식을 하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했던 것들을 몸으로 응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미 앞의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음에도 실제로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 물론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의지를 갖고 하나씩 하나씩 음식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세웠다. 그녀가 정말로 음식을 심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되짚어 보자면, 이 책은 식재료가 우리 식탁으로, 혹은 입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봄을 통해 그간의 식습관을 '충격요법'으로 깨우치는 책이 아니다.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모르지만, 정리를 해보자면,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소모적임 음식으로써의 의미를 깨고, 자연이 주는 '먹을 수 있는'것들의 의미를 재조명해서, 그것들과 우리의 그동안의 편협하고 의존적이었던 관계를 서로가 더 긍정적이고 독립된 위치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이 더욱 특별한 것은, 그녀 자신이 과거에서부터 마음의 상처나 아픔들을 음식에 위로받던 것들에서 벗어나고, 과거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과거의 자신을 보듬는 과정과 어우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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