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김연수란 작가는, 되는대로 읽어대는 줏대없는 독서습관을 가진 내게도 가장 좋아하는 몇몇의 작가중 한명이다. 당연히, 그 작가의 글에 대해 충분한 신뢰를 갖고 있다는 뜻. 그래서 김연수 작가의 신작 에세이가 나온다는 이야기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괜히 내가 아는 사람이 책을 내는 것 마냥 즐겁다.(쌍방 알지 못할뿐 내가 아는건 맞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런 작가의 책들은, '읽을까 말까'의 문제가 아닌, (늘 읽고싶은 책을 바로 읽을 수 있는 여건은 아닌지라), '언제 읽을까'하는 문제가 되곤 하는데, 기회가 좋아 비교적 빠른 시간내에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소설이 아닌지라, 그가 어느 한 시간 한 공간에서 느낀 것들을 뭉텅이로 한꺼번에 받아들일 깜냥이 없어 천천히, 읽어갔고, 여차저차한 핑계로 서평을 쓰는 것은 또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이런 유명작가들의 에세이 같은 장르를 읽을때면, 창작자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물론 창작자들부터 '작품으로 보여줘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창작자의 시각과 자세에서 비롯되지만,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래서 틀린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것은 분명 멋지고, 또 원대한 일이며, 사실 위대한 많은 예술가들이 걷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는 별개로 이런 창작자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는게 즐겁다. 인간은 어찌되었든 사회적으로 한가지 일을 주업으로 삼긴 하지만, 그 한 인간이 가진 능력과 재주,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며, 한 인간이 한가지 창작을 잉태하기까지는 결국 수많은 이야기가 농축되기에, 창작자를 만나는 것은, (특히 미술작품의 경우) 창작품을 이해하는 범위를 넓혀주기도 한다. 작품 하나에 정말로 누구나 인정할만한, 인간 이상의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것들도 있겠지만, 결연한 예술혼을 논외로 한다면, 인간의 가치는 결코 창작의 가치에 뒤쳐지지 않는다. 그 어떤 드라마도 삶보다 아름답거나 슬플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린 결국, 우리가 사는 드라마에 출연할 뿐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생각의 차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가가 아닌, 평범한 김연수란 사람이, 걸어온 길에서 사색한 것들을 만날 수 있음이 즐거웠던 것이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삶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 <지지 않는다는 말>에 녹아있다. 어떤 것은 그가 한참전에 지나온 꿈결같은 시절을 돌아보며 이야기 하고, 어떤 것은 얼마되지 않은, 나와 같은 동시대의 자신과 사람들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신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나간 추억을 음미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한 계절을 살아가고, 잠시 스쳐가는 모든 것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 다양한 시간과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말해지지만,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아마도 마라톤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실제로 마라톤에 관한 이야기와 거기에서 얻는 통찰은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세상에는 비슷하게 보이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한명 한명의 삶은, 비슷한 듯 보임에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그 분명히 다른, 한명한명의 개인이 써내는 삶은 그리고 그 삶에서 만난 사람과 순간을 통한 통찰들은 얼핏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연수가 풀어내는 삶의 이야기가 다른이와 또 다른 점은, (정말 끈질기게도) 달린다는 행위를 통해서 삶을 만나고 있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웬만한 독자라면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함께 떠올리겠지만, 나는 아직 집에 있음에도 못읽었으니, 김연수의 '달리기' 만을 갖고 말하자면, 이것은 완벽한 예찬이다. 달리기에 대한, 달리는 동안에 대한, 달리는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것은 수많은 그의 글 속에 녹아있음에도, 개인적으로 몇가지 추려내보자면,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 내게도 달리기는 내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그걸 육체의 지리학이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길의 생김새와 각도와 냄새를 경험한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들의 지저귐과 사람들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경험할 수는 있게 되는 것이다. (272)

 

결국 우리가 그렇게도 매번 쏟아져 나오다시피하는 책을 고르고 골라서, 읽고있는 이유는, 바로 나, 너, 우리, 세계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어쩐지 그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몸으로 이해하기를 역설한다. 글자를 읽는다고 해서 모두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뿐더러,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 아니냐 따지고도 싶지만, 나또한 속으론 인정할 수 밖에. 가령, 아무리 가슴아픈 사랑이야기라도, 지구상에서 우주상에서 가장 가슴아픈 사랑이야기라도 내 사랑이야기보다 슬프지 않듯 말이다. 머리가 경험해야만 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고, 몸으로 경험해야 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실제'들이 실제와 같은 '가상현실'로 하나하나 차곡차곡 대체되고 있는 시대에 분명 작가의 말은 더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시대는, 머리와 몸으로 배우던 것들의 조화가 무너져가며, 방 안에 앉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스마트'한 세상이 되어가니깐.

 

그가 달리기에서 말하고자 함은 고통과 아픔의 가치다. 운동중에서 특히 달리기란, 다른 운동처럼 지난한 연습을 거쳐서 한 순간에 그것을 펼쳐내는게 아니라 연습과 같이, 실전에서 또한 고통의 연속을 거쳐서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긴 시간을, 매 순간 순간 고통을 넘어서는 일이다.

 

에밀 자토펙은 "아픔과 고통의 경계선을 넘어서면서 어른들은 아이들과 헤어진다."고 말했다. 흔쾌히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완주할 때마다 나는 고통과 아픔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 고통과 아픔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까지의 삶에서 겪은 고통과 아픔 역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건 바로 그때다. 누구라도 35킬로미터 지점까지만 가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285)

 

지금은 친구들과 달리기를 할 일도 없을 뿐더러, 뛰는 것 자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뛰는 것은 심장과 폐와, 다리, 게다가 요즘같은 날씨에는 온몸이 고통이다. 더욱이 지금 뛴다는 것은, 어딘가에 늦었단 경우가 많으니깐. 중학교 때에는 반 대항 계주도 나가고, 오래달리기에서 1등도 해봤다. 계주야 그저 앞만 보고 미친듯이 바닥을 찼던 순간이라 잘 기억도 나질 않고, 기껏해야 경기가 끝나고, '아이들이 나도 응원해 주더냐?'라고 물을 처지였지만, 오래달리기는 인내 그 자체였다. 막판까지 접전을 벌였던 친구를 두고, 나는 정말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속도를 붙여 결승점을 들어왔다. 그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내게 치사하다고 말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때에 나는, 내가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번 더 힘을 쥐어 짜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공원 잔디에 누워 얼마나 숨을 헐떡였겠는가.

 

그 후로 내가 달린 것을 기억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을 때다. 어디에 있던 고통이었다. 살아있으면서 하는 모든 것, 만나는 모든 것, 보고 듣는 모든것이 고통이었다. 그러니깐 내가 살아있다는 자각이 고통이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을 때, 나는 (비록 졸업한 초등학교 운동장일 지라도) 달렸다. 때론 친구와 달리고 때론 혼자 달렸다. 누군가와 달릴땐 결국 누군가와 이야기기 했지만, 혼자 달릴땐, 또 나 자신과 이야기 했다. 얼마 후엔 곧 러닝머신 위를 달리긴 했지만, 그래서 사람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오롯이 만나진 못했을 지라도 분명 난, 내 막연한 심경을 달리면서 더 정확히 맞닥뜨리고 위로했음은 분명하다. 지나간 시간속에서 후회하며 가슴을 치는 나에게서 멀어져, 늘 제자리 같지만 또 한번 어딘가로, 누군가에게로 달려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이후의 삶의 방향을 완고히 했다고 말은 못할지라도 분명, 그 순간을 살 수 있게한 중요한 순간임은 분명하다.

 

인생이 마라톤으로 비유되는 이유는 결코 그것이 페이스를 조절하며 끝까지 완주해야만 하는 특징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마라톤과 인생은 누군가를 앞질러가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자신이 목표로한, 혹은 필연적으로 가야만 하는 그 지점 어딘가까지 가 닿아서, 우리가 사랑하는 혹은 누군가를 만나는 일로써 같다. 그리고 김연수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어디를 보고, 어떤 마음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는지 그의 삶을 증거로 들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김연수의 삶에서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억에 남을 일은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칭커' 였다.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어딘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무슨 책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리더스다이제스트'나 '좋은생각' 같은 책에서 만난 '칭커'에 관한 이야기는 문득 기억속에서 남아있는 물음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 뜻을 다시한번 찾으려 했었지만 원론적인 뜻풀이를 만났을 뿐 내가 그때 만난 깨달음은 없었다. 언젠가는 한 모임자리에서 중국어에 능통하고 종종 번역을 하고 있는 분에게 '칭커'의 뜻을 물어보기도 했었다. (공교롭게도 그분은 나보다 김연수 작가에 대해 몇십배의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이다) 그때에는 내가 그 '칭커'란 말을 만난 배경을 설명하지 못했기에, 그저 '한턱 쏜다'는 농담아닌 농담에 낚였지만, (혹시 이 글을 보고 얘기해주신다면 가볍게라도 한턱 쏘겠다. '칭커'로써) 드디어 많은 시간이 흘러 나는 잊다, 잠깐 기억하다 살아온 그 뜻을 마치 그때처럼 완벽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마치 어떤 것들의 의미는, 오랜시간이 지나서 우연찮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말이 모든 것을 바꾼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삶에 '칭커'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요령은 간단하다. 지금은 호시절이고 모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며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만나게 됐다. 의심하지 말자. (93) 

 

그렇다. 칭커란 누군가에게 정말 푸짐하게 (배가 터지도록)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선 '그 자리의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마치 삶처럼,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말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며, 상대가 여기에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고, 우리가 이 귀한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곧 각자 모두가 이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과 닿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어느 한 순간도 허투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경험할 수 있는 그 끝까지 가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막한 벽이 나온다.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은 바로 거기다.(...) 다들 먼저 온몸으로 경험하기를. 온몸으로 수없이 부딪히고 실패하고 좌절하기를.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가 보기를.(...) 아마 거기까지 갈 수 있다면 왜 상상력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의 전기가 실패담으로 가득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81)

 

그렇게 자신이 왜 이 삶에 '칭커' 당해 여기에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존재 그 자체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더 이상 갈 수 없는 데까지 가 봄으로써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어떤 일들을 겪든, 자신에 대해 실망하든 절망하든, 피로하든 죽고 싶든, 한 번이라도 결승점에 들어가 본 러너라면 그 사실을 이해하기를. 결승점은 어떤 경우에도 충만한 상태로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이 아니면서 동시에 그 순간의 충만함은 어떤 경우에도 파기되지 않는다. 삶의 희망 역시 마찬가지다. (289)

 

그리고 아마도 더이상 갈 수 없는 막막한 벽에 서기까지 우리는 충만한 상태일 수 없을 것이지만, 그 '갈 수 없는 바로 앞' 이라는 결승점의 경계를 만나는 찰나의 순간의 그 충만함은 오직, 심장이 뛰고 있을때만 가능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그 순간 속에 우리 삶의 모든 의미가 담긴다는 것을. 천국이란 다른 게 아니다.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뛰었던 어느 한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는 일을 뜻한다. (...) 천국은 대단히 빨리 뛰는 심장으로만 맛볼 수 있다. (291)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을, 몸으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일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최고의 순간은 현재고, 먼 훗날엔 또 그 당시의 현재가 곧 최고의 순간일 것이다. 그렇게 늘 우리가 사는 지금을 사랑하고, 가슴뛰게 산다면, 우리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김연수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깐, 오늘 하루도 가슴 뛰게 하는 일을, 가슴 뛰게 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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