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에 안녕을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7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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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만을 가끔 보던 人, 장르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통의 일반 순수문학(사실 이것을 규정하는 일도 나에겐 쉽지 않은데, 대략적으로.. 장르적 특성에 치중하지 않고,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상대적으로 문체성을 살리고 사람에 대한 심도있는 관심을 갖는 소설이라고 정의하자) 을 읽노라면, 거의 빠지지 않는것이 바로 '문체' 이야기 이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어떻게든 재미가 있어야 읽혀지게 마련인데, 문체를 따지다보면 설령 이야기 자체가 대중적인 흡입력을 갖지 않는다고 해도, 그 언어적 우월성으로 인해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사실 '문체'를 걸고 넘어지기엔 좀 무리가 있다. 중요한건 문체가 우월해야 재밌거나, 재미없거나 하는 것이 아닌 글을 읽을 때 그 언어의 구조를 하나하나 헤쳐나가면서 볼것인지, 이야기 그 자체의 감흥과 메시지에 집중하며 볼것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체'란것을 따지려면 실은, 그 '문체'를 분석하고, 판단/비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할테고, 그 작가의 책을 거의 대부분 섭렵 한다던가, 상충되는 '문체'를 지닌 작가들을 비교할 줄 알아야 할텐데.. 그게 분명 아는척 끄적이는 것만큼 쉬운일은 아닐것이다. 나만해도 이렇게 '문체'를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잘은 모른다.

문체에 대한 사전 검색결과이다.

"필자의 사상이나 개성이 글의 어구 등에 표현된 전체적인 특색 또는 글의 체제. "

왜 나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문체'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 했냐면, 지금까지는 접했던 소설들이 대부분 이런 '문체'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이런것들이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다지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독서를 해온것만은 아니지만, 본의아니게 나의 독서는 그런 사고방식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참, 오래간만에 박하샴푸로 머리를 감은 듯 싸한 느낌을 주는 책 한권을 만났다. 그게 바로 '해피엔드에 안녕을' 이다.
 
요전에 장르소설을 몇개 읽은적이 있다. 배틀로얄, 나는 전설이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호러단편을 엮은 책..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이것들도 아마 다 소싯적에 봤던 책들이 대부분이다. 지금도 뭐 딱히 다르다고 하긴 그렇지만,
아무생각없이 책을 읽던 시절이었다.(물론 그만큼 많이 읽었단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것들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놨다
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몇권 안되는 장르소설이라서 그런지 그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는 그나마 그때보다는 조금 더 나은 독서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어차피 오십보 백보겠지만)
그래서 나는 이번기회에 '장르문학'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가며 읽게 됐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주제적 접근방식
지금까지 읽은 일반적인 책들을 보면, 보통은 사람의 생에 대해서, 내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해준 책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때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다. '진실' 이란 것과 '소통' 그리고 '사람의 본성' 크게는 이 세가지 일 것이다.
 
진실? 소통?
아무리 왈가왈부 한다고 해도 역시 이 책의 묘미는 허를 찌르는 반전이 제일이긴 하다. 뒤통수 맞는 기분의 반전부터,
등골 서늘하게 하는 반전, 미스테리한 반전까지 각양 각색의 색을 지닌 반전의 향연이다. 하지만 모든 단편들에 이것을 주제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부분은 '진실'이라는 모토를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어보였다.
 
우리는 보통 남들에게 주워듣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면 뉴스등을 통해서 사회의 사건사고 들을 접한다. 하지만 거기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괜히 뒷얘기 상상하면 '음모론자' 취급받기 딱좋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우리가 보는 것들중에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들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3인칭 시점의 이야기들이 다소 많은것을 본다면, 실제로 우리가 보는 그런 '제약적인 시각'이 진실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아닌가 싶다. 또한 진실은 힘을 가진자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할 뿐 아닌가?
 
반전자체가 또 하나의 진실이기떄문에 어쩌면 이런 반전을 지닌 소설은 필연적으로 '진실'의 이야기 밖에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꾸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피엔드에 안녕을' 은 적지않은 이야기들이 사회적인 현상과 맞물린다. 얘기를 자꾸 산으로 돌리니 결론만 말하자면, 사회적인 이야기에는 그것들을 '자신의 시각'만으로 바라봄으로 인해 생기는 진실의 왜곡과 오해,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소통의 부재가 낳는 오해와 그로인해 드러나는 인간내면의 어두운 일면을 트릭과 이야기의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책, 그렇게 딱딱하지 않다. 개인사와 사회현상을 교모하게 넘어들기 때문에 어떤 부담도 갖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저그런 반전,트릭,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이 '해피엔드에 안녕을'에 실린 단편들은 한편한편 확고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
 
 
언니 - 첫 작품이니, 이 반전이라는 뿅망치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게해주는 작품이다. 사소한 오해와, 불신이 얼마만큼의 위력을 지니는지, 그것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해서 걷잡을 수 없게 되면....

벚꽃 지다. - 그렇게 살면서 강조하는 열정, 열정.. 현실은 모두가  이상을 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과에 대한 것은 솔직히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던 듯한 이야기 였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풀어나가는 솜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결국 파편의 조잡한 덩어리 라는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천국의 형에게 - 짧지만 강렬하다. 미묘한 말 하나로도 우리는 많은 진실을 숨기기도, 드러낼 수도 있었다.
 
지워진 15번 - 감정의 파급효과는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15번은 대체 어디에...
 
죽은 자의 얼굴 - 고전적인, 하지만 더욱 교묘한 이야기. 가장 등골이 오싹했다.
 
방역 - 이웃나라도 비슷한 사정인걸까.. 자식을 소유물로, 자신의 분신으로 보는 위험한 시각.. 이또한 등골이 오싹했다.
 
강 위를 흐르는 것 - 이또한 사회현상과 닿아있다. 오싹함보다는, 현상에 대한 생각과, 치밀함을 돌이켜보게 했다.
 
살인휴가 - 어쩌면.. 이란 예측이 다소 비슷하게 맞아떨어진 이야기. 물론 거의 모든 트릭이 밝혀진 결말 바로 근처에서.
 
영원한 약속 - 어디까지가 어디까지인걸까 라는 모호한 질문을 던지게 됐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약간 갸우뚱 거리는 부분이 다소 있기도 했다.
 
In the lap of the mother - 교육열이든 그 반대든.. 극을 달리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부모의 자질이란 대체 이렇게나 힘든걸까.
 
존엄과 죽음 - 제목과 아주 적절히 맞아 떨어진다. 반전또한 일품이다.
 
 

'해피엔드에 안녕을' 방법적 접근방식 : 반전을 맞추려고, 복선을 찾아 헤매지 말 것
장르문학을 많이 접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여기서 제안하는 방법적인 접근 방식이 좀 주제넘을 수도 있겠지만, 나름의 내가 분석해본 것으론 이렇게 읽는편이 더 좋을 것 같다. 트릭이나 추리소설, 반전등에 익숙하여 그것들을 (불가피하게라도) 능수능란하게 찾아낼 줄 아는 이들이 아니라면, 굳이 애써 트릭을 찾아서 그것을 풀려하지 않는게 더 좋다고 본다. 나같은 경우에는 전반부의 몇편을 보면서 뒤통수를 몇대 얻어맞다 보니, 후반부에는 반전을 맞춰보고 거기에 만족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복선이 되는 부분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결과는 90%는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맞추기 위한 소설이 아닐것이다. 그 반전에 대한 '뒷통수'를 제대로 맞아주기 위한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얼마만큼 뒷통수를 세게 맞았느냐에 따라서 그 이야기의 주제에 대해서 더 심도있는 관찰과 고민을 하게됐다. 반전을 통해, 사실주의적으로 드러나는 현실보다 몇배 더 강한 충격을 더해주는 것이다. 누군가가 얼마나 착한지, 나쁜지, 혹은 이상한지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대책없이 드러나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방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어설프게 반전을 맞추려고 머리를 싸매지말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리고 놀래라. 이것은 그러기 위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주제에 대한 비판적이고 현실적인 접근방식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치밀한 방법들이 우수하기때문에, '문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제쳐두고서도 '스릴있고 즐거우면서도 좋은 책 읽었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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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그러리라 생각하지만, 강산애의 노래가 떠오른다. 하지만 어디 연어 뿐이겠는가. 마치 숙명처럼 놓여진 가시밭같은 험난한 인생사를 뚫고 살아가는 모든이들 또한 연어같은 모습은 아닐까. 지금보다 더 무지몽매한 시절 읽었던 연어를 떠올려보면, 연어이야기 또한 분명 시적인 감수성과 삶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희망적인 역동성이 담겨있을 책이기에 낙엽서걱이는 소리에도 가슴 저려지는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에 읽어보고 싶다.

 

 

  

 

그저 한세기에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만 생각했을 이순신장군에 대하여, 또 다른 시선과 재미까지 안겨주였던 김훈작가의 [칼의노래]를 읽었을때 느꼈던 강렬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 젊은날의 숲'의 신간까지 발간되는 시기에서, 너무 늦지않게 공무도하를 거쳐가고 싶다.

 

 

   

 365일이란 시간에서, 단 한번씩 찾아오는 계절들도 이제는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러나 아직은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싶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쌀쌀맞을 것 같기에, 늦어도 11월에는 이책을 읽고 지나가야겠다. '늦어도 12월에는' 도 아닌, 한해의 마지막인 12월을 즐길수 있게 '늦어도 11월에는' 이라니 참 맘에드는 책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올해 11월이 가기전에 어떻게 해서든 읽어봐야 할 책이지 않을까.

 

 

 

  

 문학동네가 발굴한 신인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을까. 책 제목의 사라다가 그 '사라다'라니! 게다가 오밀조밀하게 구성된 방의 모습또한 책에 대한 지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해주고있다. 요새에 읽어내렸던 청춘이라는 시기를 통과하는 책들은 모두 나의 현재를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도 분명 그 사이에 이름을 걸쳐놓을수 있겠지!

 

 

 

  

 예-전부터 너무 읽고싶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우주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그 우주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언젠가 '도를 아십니까'를 말해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나, "우주의 가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이야기의 결과는 역시나 였지만, 그가 말했던 "우주의 가을"이라는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우주를 소재로한 흥모로운 이야기들을 꽤 많이 접해왔다. 그중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어느 작가또한 추천했던 책이니만큼, 이 분명 우주를 과학에만 머무르지 않게 할 중대한 책이 아닐까!

 

  

 제목부터 참 읽고싶단 생각이 든다. 영화든 드라마든 우리는 주인공에 익숙해져있고, 거기에 집중한다. 그들을 둘러싸고 그들을 관찰하는 많은 구경꾼들은 대체 어디로 간걸까? 나는 적잖이 그 구경꾼들과 주변인들의 모습이 궁금하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에, 이런 나의 시선과 부합하는 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목과 책표지그림만으로도 이렇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책이 많진 않은데.. 나도 구경하고 싶어라!!

  

 

  

가을즈음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 산란을 하는 연어, 그리고 그보다 진한 삶의 이야기 [연어이야기]를 [늦어도 11월에는], [공무도하]와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면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이 올것이고, 그때쯤이면 우리를 둘러싼 [코스모스] 안에서, 나를 스쳐간, 내가 스쳐간 [구경꾼들]을 다시한번 되새김질 해볼 수 있겠지요.  

연어이야기 : 문학동네. 6750원

공무도하 : 문학동네. 9,900원

늦어도 11월에는 : 문학동네. 6000원

사라다햄버튼의 겨울 : 문학동네. 8,100원

코스모스(보급판) : 사이언스북스. 11,900원 

구경꾼들 : 문학동네. 9,000원 

총 : 51,6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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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를 기다리며 읽기를 미뤄두는 책들을 '이제는' 조금씩 읽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가끔, 세기를 넘어서 너무 유명한 책들, 그러니깐 길가다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왜인지 다 읽어봤을 법한 책에는 정이 잘 가질 않는다. 괜한 소유욕인가보다. 소실적에 읽어봤던 '위대한 개츠비'나 '호밀밭의 파수꾼' 등을 읽으면서도 정말 나는 전혀 아무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제나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문득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나 '데미안'을 읽고서 감탄하지 않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내가 소홀히 읽었던 고전들을 다시 펼쳐보면 아마 또 다른 깨달음이 오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나는 나름대로 삶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배웠기 때문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은 그 연장선이다. 너무나 유명한책, 하지만 그로인해 흥미를 갖지 못했던 책. 하지만.. 아마 이것도 소실적에 읽어봤더라면, 소홀하게 읽고서 언제 다시 읽을지 기약이 없었을 책.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책.(부끄럽게도 말이다.)  

얼마전에 '레터스 투 줄리엣'이란 영화에서 나오는 편지를 보면서, 사람이 자신의 고통과 열정을 가장 솔직하게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편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지금 베르테르의 슬픔을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이 책을 들고 싶다. 시공을 넘어 베르테르와 슬픔을 나눠보자.

 

 인상깊게 봤던 일본 애니메이션 '울프스 레인' 에서는 엔딩곡으로 cloud9 이라는 곡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KT&G 에서 cloud9 이라는 프리미엄 담배 또한 있다. 이렇게 가끔씩 보게되는 그 문제의 cloud9에 대해서 알아본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언젠가 너무 늦지 않게, 신곡을 읽어보고 말리라 하는 결심을 세워두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이후, 전국 여러곳에 분향소가 세워졌을 무렵, 나는 그분께서 살아생전계실때에 크게 지지한적도, 비판한적도 없었기에 다른이들처럼의 관심은 없었지만 언젠가 봤던 선거연설은 가슴 깊숙히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정치인의 자살에 내 마음이 그렇게 동요했던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언젠가 분향소를 찾았다. 절을 하기 전일까, 후일까. 조화와 담배가 수북히 쌓인곳에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KT&G 사의 cloud9. 기억해보면 다른담배또한 수북했지만, 왜인지 그때의 나에겐 그 cloud9 의 모습과, 상황의 묘한 조화로움은 아직까지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천국을 찾아가신 걸까.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을 그곳에서는 이루고 계신걸까...그러셨으면 좋겠다. 잊혀지지 않는 그날의 기억만큼, 그가 천국으로 향하는 9번째 계단을 온전히 밟았길 희망한다.  그리고 또한, 그 괴테가 '인간의 손으로 된 최고의 것' 이라 칭했으니, 너무 늦지않게 탐독해봐야 하지 않을까. 신곡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아홉번째 계단' 이라는 cloud9. 언제까지 지식인에 의존한 지식을 담아두는것을 이젠 멈추고 싶다.

 

 예전에 '동물농장'을 읽고선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이기에 가득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체제들을 동물에 빗댄 이야기를 보면서 넋을 잃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주제의식에 대해서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의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1Q84를 읽었을때에 보니깐, 1984의 여러 개념과 용어들이 차용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1984는 아직 읽지 않았기에..어깨너머로 주워들은 얘기들) 도대체 어떤 것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하루키가 차용할 정도인지, 동물동장보다 더 높게쳐주는 1984는 얼마나 큰 충격을 줄지, 나는 좀 느껴보고 싶다. 물론 차용된 용어들의 개념정립은, 하루키 또한 어느정도 주관적으로 해석되었겠으나, 그 1Q84를 있게끔 해준 1984의 모습을 꼭 확인해 보고 싶다. (용어는 동일하나 큰 관련은없다는 얘기도 본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이 1984를 읽은후에는 1Q84를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또한 해본다. 

나는 빅브라더의 기원에 대해서 적.확.히 알고싶다! 

 새로운 책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온다. 좋아하지않는 분야의 책들도 쏟아져 나오긴 하지만, 빨리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만큼 좋은 책들또한 무수히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난 너무 늦지않게 고전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보고 싶다. 이렇게 지원해주지 않으면 이 고전읽기 프로젝트는 또 우수한 신간속에 뭍혀서 언제 다시 장바구니에 담길지 모르기에..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발표날인 22일은...  

생일 입니다!!   

이왕이면 기분좋게.. 선물 한번 쏴 주시죠..^^

 

-계산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양장본, 문학동네) 9,000원 
신곡 (완역, 서해문집) :                        32,300원 
1984 (반양장, 문학동네) :                      9,900원      --- 총 51,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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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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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이 시덥잖은 리뷰를 휘갈기고, 누군가가 후에 이 리뷰를 한번 스쳐지나간다는 것은, 그 누군가와 내가 적어도 영양결핍으로 인해 시력을 잃거나, 이미 인류가 정복한지 오래인 흔한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나가거나 하는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느꼈던 배고픔이 아무리 심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진대사가 심각하게 훼손될 정도의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때, 혹은 지금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렇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자신에 만족할까? 가난으로 인해 밥을 굶고 그로인해 영양결핍이 발생할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에 비해선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왜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는지, 이 책은 객관적으로 수치화된 자료와 방대한 자료를 통해서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궁지에 몰린 나라들이 언제부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런 초국가적 힘을가진 횡포에 대응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이 옳은지까지 자세하고 열정적으로 기술 되어 있다.  

정확한 원인을 알고나면, 연민과 동정이 분노로 바뀔 수 있다.
기아와 가난에 대한 얘기를 들을때는 다소의 연민과 동정심이 생기지만,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은 왜 그럴까. 물론 당연한 얘기겠지만 먹지 못하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그 사실들이, 그것을 머나먼 거리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에겐 정말로 ‘너무나 먼’ 현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쩌지는 못하는 일이다. 그 어떤 최악의 고통이라도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다소의 연민과 동정은 있을지언정 그것은 결국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 되버리는 것을 누굴 탓할 수 없는 일이니깐. 그러나 인간의 습성이 어느정도는 그럼에도,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과 동정이 행동을 이끌어서 세계 곳곳에서 구호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 구호단체나 지원자들처럼 난민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우리가 그럴만한 이타심이나 상황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앞서 말했다시피 그것이 가장 첫 번째가 되겠지만, 내가 생각하건데 두 번째는 바로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이 굶고 가난하게 사는 이유를 그저 ‘가난하니깐, 돈이 없으니깐, 환경이 안좋으니깐’..라는 이유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면 그들의 상황을 정말 단순히 ‘불가항력적인 사항’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아와 가난이 단순히 식량생산과 산업기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강대국들과 다국적기업들이 함께 펼치는 비열하고도 악랄한 “부채”의 고리때문이란 것을 알게되기 때문이다. 악덕 고리대금업자, 빚을 담보로 더 많은 것을 앗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가끔 티비나 영화를 통해서 보게된다. 간단하게 보면 그것이 국가적으로 범위가 커졌을 뿐이다. 우리가 기아와 가난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알고나면, 피해자를 향했던 연민과 동정이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바뀔 수 있다. 사실 급하기는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급하겠지만, 가해자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런 악순환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이다. 인간적 존엄성을 잃어버린 자들이 만든 기업과 정부는 ‘정도’ 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얼마간의 행복이라도 맛볼 수 있을까? 어쨌거나 부채가 있는 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191p)

객관적 숫자는 인식과 기억에 힘을 보태준다.
모 카드회사 광고에서 그렇게나 숫자를 강조하던게 생각난다. 객관적으로 수치화 될 수 있는 것들은 그만큼 사람들이 신뢰를 갖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런 주제에서도 객관적인 숫자들을 토대로 판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숫자로 되어있지 않다고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숫자로 객관화 되었을 때야 비로소 누군가가 세계의 기아에 대해서 말할때, 자신의 연민을 토대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를 갖고 이야기 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그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 더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나 통계적인 숫자는 많이들 갖고 있을텐데, 그럼 이 ‘장 지글러’만이 갖는 특별함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하면서 그가 실제로 경험하고 본 방대한 체험지식들이라는 점이다. 숫자는 여느 학자가 흉내낼 수 있을지라도, 실제로 경험하고, 눈으로 본것들은 흉내낼 수 없다. 또한 그것을 토대로한 열정인데 어찌 감히 아무나 흉내낼 수 있을까.

진흙바닥위로 안개가 내려오면서 한기가 돈다.씻지않은 지저분한 몸에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인다. 그러고는 슬며시 잠이든다. 이들 중 몇몇은 이 밤에 죽어나갈 것이다. (185p)

현재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특정지역’의 기아와 가난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인류가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이다.
어렸을적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라는 말을 본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실 어느정도는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라를 구성하는 정부과 관료들이 지은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현재에는 식량생산과 경제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했음에도 기아와 가난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왜 현재에도 나라가 국민을 구제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그 나라의 부패한 관료들과 그들이 ‘이뤄낸’ 복구하기 힘든 썩어빠진 토대, 나아가 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강대국들과 거대 다국적 기업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부채’ 즉 나라 빚이다. 강대국과 다국적기업들은 해당 나라의 부패한 정치인들이나 내전상황을 이용하여 가난한 나라가 그들 국가의 노력으로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채를 계속해서 증가시키고, 내정을 간섭한다. 부채를 갚지 못하는 나라는 곧 식량, 의료, 복지 산업의 후퇴를 야기한다. 각 나라의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IMF나 세계은행에서 부채를 빌려쓴 나라는 곧 그들에게 내정간섭의 권한을 쥐어주게되고, 그로인해 다국적 기업들이 매우 유리하고 불합리한 조건으로 해당 나라에 진출하고, 폭리를 취하며 도저히 그 나라가 회생불가능한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한것은 그런 케이스중에 하나에 불과하고, 지금 여기서 나의 재량으로는 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지독하게 철저히 교묘한 부채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강대국들이나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선심쓰듯 하는 구호활동이나 물자지원은 그들이 앗아가는 것에 비한다면 동냥과도 같으니, 가끔 이들의 그런 사회환원을 보더라도 우리는 크게 감동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것은 결국 이미지 홍보에 그칠뿐이고, 결과적으로 나아지는건 먼지만큼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영양결핍과 기아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21세기최대의 비극이다. 이는 그 어떤 이유나 정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조리와 파렴치의 극치다. 나아가 끝없이 되풀이되어온 반인류 범죄에 해당한다. (115p)

이것은 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인류전체의 비극이다.
아프리카와 남미국가, 동남아시아의 기아와 그로인해 희생되는 사람들의 비극은 비단 그들만의 비극은 아니다. 그들중에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혹은 인류를 좀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사람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비극이 곧 인류의 궁극적인 발전 가능성 저해에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소한의 삶아갈 권리를 갖고 있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들이 굶고, 질병으로 쇠약해가고, 죽어가는 것은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인가? ‘운’이 지지리도 없다고 치부해버리면 될 일일까? 그래서 우리는 운이 좋아서 다행이 (그나마)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되는 것일까? 배고파하는 아이들에게 밥이 곧 될거라며 거짓말을 하고,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리는 이 비극적인 일들이 지금 이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현재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들을 기아와 가난에서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이 지리한 비극을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하루에 한끼조차 먹기 힘든 나라에서도 교육에 대한 토대를 끊임없이 닦아놓으려는 이유가 그것 아니겠는가. 아는것이야 말로 상황을 타계할 가장 큰 초석이 될 테니깐 말이다. 알고, 진실로 깨달아야 그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던, 횡포를 일삼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보이콧에 동참을 하던 할 것 아니겠는가? 또한 장 지글러는 (조금은 원대하다고 보여지지만,) 우리에게 혁명을 일으킬 것을 역설한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당장 총칼을 들거나, 시위를 할 엄두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시위를 지지하고 강대국들과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정당하고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라는 뜻 아닐까? 물론 그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어지간한 거대 다국적 기업이란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층에게는 매력적인 기업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고, 그것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면 곧 대안이 보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정도면, 누가 더 세상을 가난하게 만드는지는 확실히 좀 더 명확해진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과 막강한 힘을 쥔 나라들, 부패한 정치인들, 그리고... 가난이 단지, 해당 나라의 탓, 구호활동의 부족함으로 알고선 방관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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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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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이란 것은 크게 공간의 제약을 받는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방 한귀퉁이에서도, 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복잡한 기차 플랫폼에서도 그리고 그 어디서라도. 실제로도 현실로서의 여행에 회의를 느끼고 책을 통해서 그곳에 대한 상상으로서의 여행을 즐기는 이도 있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나름의 ‘정신적 여행’ 을 하면서도 대부분은 저마다 인생에서 한번이상을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긴 인생속에서 어느 공간, 어느 사람에 머무는 것이 또 긴 부분이라고 친다면, 몸과 마음을 일상에서부터 떠나보내는 여행은 어쩌면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 물론 역사상 지금까지도 여행하지 않고 많은 업적과 행복을 누린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고, 그런 논리에 입각한 ‘생각’은 앞서 말했다시피 시공을 넘어서 확장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여행은 확실히 그 생각들의 촉매제 혹은 변수의 역할을 한다. 그것이 왜, 어떻게 촉매제와 변수가 되고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이 [끌림]은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행했던 공간에서 그 이상의 공간을 본다. 낯선 어느 공간에서 마주하는 것은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뿐만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봐왔던 자신의 공간을 넘어가보는 일이 된다.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될만한 공간에서 잊었다고 믿었던 그리운 이를 다시금 떠올리며 텅빈 가슴을 달래보기도 하고,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낯선 누군가를 동경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성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여행이란것은 개개인에게 바꿀 수 없는 추억이 되고, 삶을 살아가는 제 나름의 밑거름이 된다. 물론 그것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힘은 당장 없을지라도, 한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세월을 타고 돌을 깎아 내리듯, 천천히 삶의 방향을 되잡아주기도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실제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은) 또한 처음 마주하는 공간에 대한 경이감을 탄생시키면서도, 자신이 잊고있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불현듯 꺼내보게 만든다.

...
가야지요.
차곡차곡 쌓은 환상도 펴보면서,
때론 그것들이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도 봐야죠.
...

 개인의 그런 경험들을 타인과 나누기 위해 누군가는 그 여행지를 추천해주고 설명해주지만, 누군가는 그 경험들을 시적 언어로 풀어놓음으로써 당시의 사색들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향유한다. 이병률 시인의 [끌림]도 두말할 것 없이 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시인의 감수성과 성찰이 듬뿍 담긴 언어들의 향연에 취해있다가도, ‘아 언젠가는 저곳에 꼭 가보고 싶다, 나도 저런 낯선 장소에서 많은것을 생각해보고 싶다’고 느껴지니,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여행추천도서 또한 없을까 한다. 다만 실용적인 것에 중점을 둔 여행책들은 그 여행지들과 여행에 대하여 찬양하기위해 길게 길게 늘어놓는다면, 이 [끌림]은 짧고 간결하고 조용하지만, 그럼에도 낯선곳을 향한 여행의 즐거움에 대해서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삶을 사색하는 시인의 태도에서도 낯선 여행지의 매력적인 모습이 보여지고, 그런 낯선 여행지의 모습에서도 사색하는 시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여행이 우리에게 이렇다 할 생각들을 던져주지 못할때를 본다면(혹은 실제와는 다르게 그렇게 생각함에도), 시인의 감성과 성찰로 가득한 ‘낯선곳에 대한 안내’를 책 한권으로 어느정도 대신할 수 있는것은 참으로 저렴한게 아닌가싶은 생각도 든다. [끌림]은 작가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그곳에서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말그대로 더욱 ‘끌리게끔’ 아름다운 언어들로 표현해내는데, 책의 어느곳을 펴봐도 놓치고 싶지 않은 글이 가득하고, 꼭 가보고 싶은 풍경이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리워지고, 때론 삶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찬 글과 사진을 보며 맘껏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둘러싼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어느샌가 책장을 덮으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그의 언어와 사진들이 한편의 외화를 보듯 눈앞에 떠오르기도 하며 낯선곳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을 불태우게 된다. 비록 나는 낯선곳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짓지 못한다해도 말이다.

...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

 그렇게 [끌림]에서는, 시인의 감수성과 낯선 체험이 가지는 힘이 조화가 되서 곳곳에서 시가 탄생한다. 공간속에서 시가 탄생하기도 하고, 시 속에서 공간이 탄생하기도 하고, 타인의 삶이 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곧, 그 시 안에 남겨두고온 자신이, 떠나보낸 자신이, 마주하게 될 자신이 서로 사이좋게 펼쳐진다.
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읽는 자신에 대한 성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여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책 한권으로 세계 곳곳을 누려본 듯한 정신적 충만함과, 그리고 그것이 봄날의 파릇한 새싹처럼, 때로는 가을날의 낙엽처럼 가슴을 저리게 만들어 간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끌리게끔’ 되어있다. 그의 가슴을 적시는 글들에 끌리고, 그가 가보았을 많은 공간들에 대해서 끌린다. 아마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향한 여행에 끌리는 것이지 않겠는가. 결국 시인 또한 외부로 향하여 나갈수록 자신에 대해서 안으로 향하게 되고, 그로 인해 무엇하나 버리기 싫은 사색들이 탄생을 하고, 그것이 우리를 또 세계의 낯선곳으로, 내면의 중심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깐 이 산문집은 결국 자신안으로의 여행안내서일지도 모른다.

...
그렇게 사랑은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쏟아놓을 것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세상을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는 기적을
당신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일이 쉬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분명 다른 한가지는 가능 할 것이다. 우리 내면을 향해 좀더 여행하고, 다듬고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그 길을 누군가와 동행한다면 나와 그 사람을 둘러싼 그 세상은 분명 좀더 아름다운 향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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