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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평점 :
지금 내가 이 시덥잖은 리뷰를 휘갈기고, 누군가가 후에 이 리뷰를 한번 스쳐지나간다는 것은, 그 누군가와 내가 적어도 영양결핍으로 인해 시력을 잃거나, 이미 인류가 정복한지 오래인 흔한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나가거나 하는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느꼈던 배고픔이 아무리 심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신진대사가 심각하게 훼손될 정도의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때, 혹은 지금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렇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자신에 만족할까? 가난으로 인해 밥을 굶고 그로인해 영양결핍이 발생할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에 비해선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왜 그것을 인정해야만 하는지, 이 책은 객관적으로 수치화된 자료와 방대한 자료를 통해서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또한 궁지에 몰린 나라들이 언제부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런 초국가적 힘을가진 횡포에 대응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이 옳은지까지 자세하고 열정적으로 기술 되어 있다.
정확한 원인을 알고나면, 연민과 동정이 분노로 바뀔 수 있다.
기아와 가난에 대한 얘기를 들을때는 다소의 연민과 동정심이 생기지만,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은 왜 그럴까. 물론 당연한 얘기겠지만 먹지 못하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그 사실들이, 그것을 머나먼 거리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에겐 정말로 ‘너무나 먼’ 현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쩌지는 못하는 일이다. 그 어떤 최악의 고통이라도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다소의 연민과 동정은 있을지언정 그것은 결국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 되버리는 것을 누굴 탓할 수 없는 일이니깐. 그러나 인간의 습성이 어느정도는 그럼에도,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과 동정이 행동을 이끌어서 세계 곳곳에서 구호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 구호단체나 지원자들처럼 난민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은, 그저 우리가 그럴만한 이타심이나 상황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앞서 말했다시피 그것이 가장 첫 번째가 되겠지만, 내가 생각하건데 두 번째는 바로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이 굶고 가난하게 사는 이유를 그저 ‘가난하니깐, 돈이 없으니깐, 환경이 안좋으니깐’..라는 이유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면 그들의 상황을 정말 단순히 ‘불가항력적인 사항’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아와 가난이 단순히 식량생산과 산업기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강대국들과 다국적기업들이 함께 펼치는 비열하고도 악랄한 “부채”의 고리때문이란 것을 알게되기 때문이다. 악덕 고리대금업자, 빚을 담보로 더 많은 것을 앗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가끔 티비나 영화를 통해서 보게된다. 간단하게 보면 그것이 국가적으로 범위가 커졌을 뿐이다. 우리가 기아와 가난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알고나면, 피해자를 향했던 연민과 동정이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 바뀔 수 있다. 사실 급하기는 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급하겠지만, 가해자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이런 악순환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이다. 인간적 존엄성을 잃어버린 자들이 만든 기업과 정부는 ‘정도’ 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얼마간의 행복이라도 맛볼 수 있을까? 어쨌거나 부채가 있는 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191p)
객관적 숫자는 인식과 기억에 힘을 보태준다.
모 카드회사 광고에서 그렇게나 숫자를 강조하던게 생각난다. 객관적으로 수치화 될 수 있는 것들은 그만큼 사람들이 신뢰를 갖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런 주제에서도 객관적인 숫자들을 토대로 판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숫자로 되어있지 않다고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숫자로 객관화 되었을 때야 비로소 누군가가 세계의 기아에 대해서 말할때, 자신의 연민을 토대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를 갖고 이야기 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고, 그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 더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나 통계적인 숫자는 많이들 갖고 있을텐데, 그럼 이 ‘장 지글러’만이 갖는 특별함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하면서 그가 실제로 경험하고 본 방대한 체험지식들이라는 점이다. 숫자는 여느 학자가 흉내낼 수 있을지라도, 실제로 경험하고, 눈으로 본것들은 흉내낼 수 없다. 또한 그것을 토대로한 열정인데 어찌 감히 아무나 흉내낼 수 있을까.
진흙바닥위로 안개가 내려오면서 한기가 돈다.씻지않은 지저분한 몸에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인다. 그러고는 슬며시 잠이든다. 이들 중 몇몇은 이 밤에 죽어나갈 것이다. (185p)
현재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특정지역’의 기아와 가난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인류가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이다.
어렸을적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라는 말을 본적이 있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사실 어느정도는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나라를 구성하는 정부과 관료들이 지은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현재에는 식량생산과 경제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했음에도 기아와 가난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왜 현재에도 나라가 국민을 구제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그 나라의 부패한 관료들과 그들이 ‘이뤄낸’ 복구하기 힘든 썩어빠진 토대, 나아가 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강대국들과 거대 다국적 기업들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부채’ 즉 나라 빚이다. 강대국과 다국적기업들은 해당 나라의 부패한 정치인들이나 내전상황을 이용하여 가난한 나라가 그들 국가의 노력으로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채를 계속해서 증가시키고, 내정을 간섭한다. 부채를 갚지 못하는 나라는 곧 식량, 의료, 복지 산업의 후퇴를 야기한다. 각 나라의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IMF나 세계은행에서 부채를 빌려쓴 나라는 곧 그들에게 내정간섭의 권한을 쥐어주게되고, 그로인해 다국적 기업들이 매우 유리하고 불합리한 조건으로 해당 나라에 진출하고, 폭리를 취하며 도저히 그 나라가 회생불가능한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한것은 그런 케이스중에 하나에 불과하고, 지금 여기서 나의 재량으로는 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지독하게 철저히 교묘한 부채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강대국들이나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선심쓰듯 하는 구호활동이나 물자지원은 그들이 앗아가는 것에 비한다면 동냥과도 같으니, 가끔 이들의 그런 사회환원을 보더라도 우리는 크게 감동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것은 결국 이미지 홍보에 그칠뿐이고, 결과적으로 나아지는건 먼지만큼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영양결핍과 기아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21세기최대의 비극이다. 이는 그 어떤 이유나 정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부조리와 파렴치의 극치다. 나아가 끝없이 되풀이되어온 반인류 범죄에 해당한다. (115p)
이것은 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인류전체의 비극이다.
아프리카와 남미국가, 동남아시아의 기아와 그로인해 희생되는 사람들의 비극은 비단 그들만의 비극은 아니다. 그들중에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혹은 인류를 좀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사람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비극이 곧 인류의 궁극적인 발전 가능성 저해에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소한의 삶아갈 권리를 갖고 있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그들이 굶고, 질병으로 쇠약해가고, 죽어가는 것은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인가? ‘운’이 지지리도 없다고 치부해버리면 될 일일까? 그래서 우리는 운이 좋아서 다행이 (그나마)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되는 것일까? 배고파하는 아이들에게 밥이 곧 될거라며 거짓말을 하고,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리는 이 비극적인 일들이 지금 이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현재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그들을 기아와 가난에서 구제할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이 지리한 비극을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하루에 한끼조차 먹기 힘든 나라에서도 교육에 대한 토대를 끊임없이 닦아놓으려는 이유가 그것 아니겠는가. 아는것이야 말로 상황을 타계할 가장 큰 초석이 될 테니깐 말이다. 알고, 진실로 깨달아야 그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갖던, 횡포를 일삼는 거대 다국적 기업의 보이콧에 동참을 하던 할 것 아니겠는가? 또한 장 지글러는 (조금은 원대하다고 보여지지만,) 우리에게 혁명을 일으킬 것을 역설한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당장 총칼을 들거나, 시위를 할 엄두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시위를 지지하고 강대국들과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정당하고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라는 뜻 아닐까? 물론 그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어지간한 거대 다국적 기업이란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층에게는 매력적인 기업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고, 그것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면 곧 대안이 보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정도면, 누가 더 세상을 가난하게 만드는지는 확실히 좀 더 명확해진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과 막강한 힘을 쥔 나라들, 부패한 정치인들, 그리고... 가난이 단지, 해당 나라의 탓, 구호활동의 부족함으로 알고선 방관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