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아파트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저 부의 축적수단으로만 인식되어왔고, 언제부턴가 내가 사는 공간이자 많은 이들이 지금껏 살아왔던 공간이었고,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살아가게 될 아파트란 공간에 대해, 그간 품고있던 자그마한 호기심을 풀어줄 책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발견들이 쏟아졌다. 사려는 물건보다 더 값진 덤을 왕창 얻어온 기분이다. 물론 그간 인문학을 자주 접하지 않아서 한쪽으로 쏠림현상된 뇌에 쉽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다행이 맨 콘크리트에 헤딩하기는 아니더라. 콘크리트에게 영혼을 불어넣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동안, 그간 작은 틈 하나 없이 견고한 것 같았던 아파트가(실은 내가 아는 아파트들은 별로 그렇지는 않지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오래된 나무는 가끔은 말을 건네줄 것 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허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아무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때 문득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조용히 바람의 소리를 피부 끝으로 느낀다면, 어쩌면 해와 달과 별과 바람에 대해 조금 더 깊은 혜안을 가질 수 있지않을까? 난 그래본 적이 없다. 나무의 나이를 보는 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이 맥락에서도 엉뚱하게, 콘크리트에게도 귀를 기울이고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당연히 이 책을 읽고서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콘크리트로 구성된 아파트란 존재에 생명을 심어넣어 그(아파트)가 하는 이야기를 전해주는 역할은 작가가 대신 해주었으니, 독자는 그저 읽어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시선'으로 시작해서, '아파트'에게, '강남 1세대'에게, '꽃무늬'에게 숨을 불어 넣는다. 작가가 숨을 불어넣은 그순간, 그것들은 각각 고유한 정체성을 갖고, 활동하고,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결국 따지고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쓴 글임에도, 나는 그것들을 개별적 존재로서 인식하며, 귀 기울였다. 쉽지 않았지만 좋은 만남이었다.

이 책은 픽션과 팩트 두가지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여느때의 독서처럼, 처음부터 읽는다면 앞서 언급한, 무생물에 숨을 불어넣은 픽션 부분을 먼저 읽게 된다. 그리고 책의 서문에서 앞서 말한 픽션에 관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여태껏 묵언의 자리에 놓여 있던 행위자들에게 비판의 법정에 선 용의자가 아니라 자기 옹호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아파트가 지닌 매혹적인 힘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1인칭 혹은 2인칭의 주어로 아파트와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빚어진 자신의 삶과 욕망에 대해 직접 말해준다면 그 발언의 내용들이 근접조우를 위한 우회로로 기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각종 참고 문헌과 문학 작품을 동원해 '가짜 자서전' 혹은 '허구의 회고담'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8)
 

아파트는, 작가를 편집자, 혹은 대변인으로 내세운다. 까놓고보니 아파트는 실로 할 말이 참 많은 개체였다. 우리는 지금껏 그것을 부의 증축과 투기의 대상으로만 바라왔으니깐 아파트도 할말은 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는 그것들을 포함해서 그 이상으로 털어놓을 담론거리들이 많았다. 팩션이자, 둘째 파트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2부의 글은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아파트, 즉 마포아파트, 한강맨션, 강남의 아파트 단지 등을 서술의 대상으로 삼아, 신문, 잡지, 문헌 등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7)


자랑으로 늘어놓을 얘기는 아니지만, 내게 있어 부족한 독서량중에서도 인문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나 빈곤했다. 그래서 이 책이 손에 쥐어졌을 때 그 어느때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그럼에도, 그 익숙치 않은 두려움은, 필연적인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초반엔 더디었지만 조금 익숙해지자, '못읽을 것도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얘기는, 내가 완벽한 이해를 했다는 것이 아닌, 내 나름대로의 이해를 하며 읽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그러니깐 아예 '내가 지금 한국어를 읽는 것일까' 란 의구심이 들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초입부는 '시선'으로 시작한다. 아파트라면 차라리 나을텐데, '시선'이라니.. 그래서 조금 더 힘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항공촬영으로 바라본 (지금은 볼 수 없는) 방파제를 연상케하는 기묘한 모습의 마포아파트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시선으로 시작해서 꽃무늬로 마무리 지어지는 모습은 흡사, 사람을 살펴보듯 찬찬히 먼 외부에서부터 깊은 내부로 들어가는 모양새처럼 느껴진다. '시선'부분을 읽으며, 어렴풋이 알게됐다. '한국의 아파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근현대사를 어렴풋하게나마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근현대사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한국전쟁의 아픔과 고난이 아직은 모든이의 가슴에 크게 남아있었을 시절, 살아남은 이들은 좀더 잘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고 그 중심에 당연히 군인이 존재하던 시절, 아파트는, 군부세력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공병대대장이 마포아파트의 진두지휘를 했을 정도니 말이다.) 
 

 

1 마포아파트 철거 모습  2 Y자 형태의 마포아파트 모습  3 마포아파트의 야경(1970)
(출처 : 네이버캐스트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12)

 
위에 말했듯, 아파트란 존재가 시대적으로 군부독제시대에서부터 담겨있으니, 대체 왜, 어떻게 아파트가 여기까지 와야만 했는지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근현대사를 이야기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실로 상상 이상 이었다. 게다가 아파트에 고백과, 강남 1세대의 고백을 듣고 있노라면, 아파트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기때문에, 우리가 으레 아는 역사와 떼놓을 수 없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아파트란 개체, 아파트란 공간은 역사속으로 들어온다. 아파트는 공간이 아니라 곧 그 격변의 시대에 말없이 우뚝 서있던 하나의 실체였고,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아파트를 어떻게, 누가 만들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변화시켰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또 그래서 그 아파트에 어떻게 영향받고 혹은 지배되어 왔는지 차례차례 풀어지기 시작했다. 말미엔 꽃무늬까지 대동하며 아파트와 동시다발적인 생활상의 변화와 사고의 변화, 시대의 변화까지 관통하게 된다.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서 아파트를 바라보는 과정은 곧, 아파트를 통해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보게 됨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덧붙이자면 픽션부분은, 시선의 모험 -> 아파트의 자서전 -> 어느 강남 1세대의 회고담 -> 꽃무늬 이야기 로 구성된다. 얼핏 짐작할 수 있듯이, 숲에서부터 나무로, 잎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단, 그 과정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연대기의 순서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시선의 모험]에서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마포아파트의 버드뷰 사진으로 시작한다. 한국의 아파트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 그런 건축물의 근원에 대해, '시선'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주체를 통해 접근한다.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부터 시작된, '공간을 사이에 둔게 아닌 벽을 사이에 둔' 건물에 관한 이야기와 시선들은, 한국 최초의 아파트가 갖는 온갖 이야기와 시선으로 넘어온다.    

[아파트의 자서전]에서는 이제 바깥에서 머물던 시선이 아파트 내부로 들어오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주체는 전보다 조금 더 구체적이다. 아파트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내부와 거기에 들어앉아 사는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 무생물과 생물의 밀고당기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아파트가 자신을 변론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 책을 읽게된, 혹은 읽어야만 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근거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들은 내가 지닌 공간의 논리가 거주자들의 신체와 정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중략) 그러니까 그들은 나를 둘러싼 상품화의 논리를 제도적으로 교정한다면, '나쁜' 아파트의 자리를 '착한' 아파트가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에 그들이 패배를 반복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근본적인 잘못이 나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들의 탐욕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 오히려 나는 그들의 그런 오인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참신한 권력의 원천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67) 

물론 이런 아파트의 주장은, 아파트를 바라보는 모든 독자를 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를 향한 보편적인 시선에 관한 항변이기도 하니,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함과 동시에 앞으로 풀어나갈 이야기들을 암시하는데는 아주 적절한 언급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느 강남 1세대의 회고담]은 그 제목 그대로, 명민한 강남의 아파트 부자가 해줄듯한 이야기다. 사실 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접하기 쉽지만, 이런, 당당하고 논리적인 부에 대한 변론은 찾기 힘든것이 사실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것이 우리가 너무 당연히 간과해버리는 '부를 가진 자들'의 입장인지, 혹은 저자의 시각인지 완벽히 파악할 수 없을지라도, 질투와 시기, 열등감이 앞선 논리로는 파악하기 힘든 부분들을 잘 풀어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발견으로 여길 수 있었다. 

[꽃무늬 이야기]는 그 주체의 선정이 가장 흥미로웠다. 밥통의 외관을 장식한 꽃무늬 이야기는 그 시대 디자인의 필연성, 그리고 발전성을 이야기하는것을 시작으로 아파트를 비롯한 사회적 기호와 생활 전반, 문화의 흐름에 관한 것들을 탐구한다. 


아파트란 개체는 놀랍도록,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한국사의 중심에서 시대와 사람, 그것을 둘러싼 모든것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 픽션또한 많은 문학작품과 사료들이 그 근거이고, 또 인용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문학작품으로 이야기한다면, 분명 그것들은 이야기 속의 공간을 언급한 것일진데, 여기서는 그게 역으로 공간속의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그만큼, 정착해서 산다는 것은 곧 공간을 다루는 일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종종 사건의 인과관계로만 설명된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흥미는 결국 그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사람으로 향한다. 결국 한 사건을 파헤치더라 하더라도 그것은 곧 그 일련의 사건들과 관계맺은 사람으로 향하니깐 말이다. 그러니 근현대사를 둘러봤단 이야기또한 당연히 '사람 포함' 이다.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나란히 흥미가 가고 또 언급되는 부분은, 아파트에 살고있거나 혹은 아파트에 살지 못하더라도 그 주거변화를 더불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이야기들이다. 아파트가 생기고, 변화하는 과정만큼 사람또한 아파트를 힐난하다, 곁눈질하다, 들어가 살게되고, 적응하게되는 과정. 지금이야 별일도 아닐지 모르지만, 예전만해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아파트란 공간에 적응하는 인물들의 적응과 변화의 모습은, 특별난 역사적 사건에 뒤지지않게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때 그시절'을 아파트를 통해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이렇게까지 연관성이 있을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군부독재 시절과의 인연, 정치와 체제, (의심할 여지 없이 경제와 관련된) 아파트의 존재였고, 나아가 사는 풍경을 바꾸는 것과 동시에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각광받기 시작하는, 즉 '어떻게 잘 적응해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어떻게 잘 사서 잘 팔아볼까'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처음에 인식했던, 부의 수단으로만 여겨지는 아파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음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왠지, 부의 수단으로 변모해온 아파트의 역할이 안타깝다. 픽션파트에서 '강남 1세대' 부분을 보면, 정말로 그 주체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아파트가 시작한 자기변호에서 이어진 강남 1시대의 고백은, 여태껏 그런 위치에 설 수 없었던 내가 그들을 좀더 들여다 볼 수 있는 동시에 그만큼, 그들과 나 모두가 나름의 이유로 안쓰러워졌다. 그리고 픽션 부분을 통틀어 전반적으로, 1인칭 시점을 따라가다 놓친건지, 혹은 드러내지 않은건지.. 나의 능력으로는 완벽히 읽어낼 수 없었던 작가의 시선은, 제발 '강남 1세대'의 고백은 아니길 바란다..(그냥 개인적인 바람이다) 어쨌든 다행이, 그런 일련의 감정들도 '꽃무늬'로 마무리되는 픽션을 통해 그 시절 부엌에서 나름의 제역할을 했을 전기밥솥과 보온통의 무늬를 통해 '정말' 아파트를 둘러싼 여러 가전제품과 가구, 소품의 변천사와 그와 어울어진 사람의 적응과 변화를 바라보며 우울감을 약간은 떨칠 수 있었다. 

 
픽션부분이 끝나고 등장하는 팩트부분은 앞의 부분에서 다루지 못한 사실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좀 더 객관에 가까운 시선으로 이야기 한다. 잘 정리된 것들을 굳이 여기서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두번째 파트인 팩트부분의 초입부를 읽으면서는, 왜 팩트가 앞부분으로 나오질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나로서는, 당연히 팩트부분이 더 읽기 쉽기 때문이다. 보충하자면, 팩트를 간단히 읽고서 픽션을 읽는다면, 그 픽션을 이해하기가 좀 더 쉽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인 것이다. 흥미로 보자면 픽션보다는 조금 더 지난한 부분이 있지만 그정도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팩트를 먼저 읽었다면 픽션에서 주체가 되는 것들의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혹, 인문학에 익숙치 않은, 아니면 아파트의 역사와 그것과 관련된 한국사에 그간 완전 관심없던, 몰랐던 독자라면 팩트부터 읽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 그러다 지루함이 느껴진다면, 어느선에서 그만두고 픽션을 읽으면 될 일이다. 물론 당연히 작가와 편집자의 오랜시간동안의 많은 수고를 거쳐나온 그 순서는 치밀한 계산이 있었을 것임이 두말할 것 없겠지만.. 둘째파트부터 읽는다고 해서, 결론부터 읽어내려가는 방식은 아니니, 슬쩍 통독을 조금 해보고 자신에게 맞겠다 싶은 부분부터 읽어보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겠다.
 

얼마나 어려운 인문학책이, 얼마나 많은지는 잘 모른다. 다만 이 책으로만 보자면, 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지만, 내 개인적인 '이해의 수준'에서 하는 얘기다.) 실은 지금 생각해보면 아파트란것이 한국을 구성하는 여러 모습과 얽혀있고, 복잡한 그 모습 그 자체라서, 기억나지 않는 부분도 있을뿐더러, 이야기의 중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부분도 분명 많을 것이다. 그래도 아예 콘크리트에 머리찧는 느낌까지는 아니니, 인문학에 두려움이 있다해도 한번은 읽어볼만 하겠다. 하기사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인문학서적이 아닌 역사, 사회학 서적일 가능성이 충분히 농후하니깐 말이다.

 
한권의 책을 통해, 내가 지금 앉아있는 높이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온갖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이루어진 '아파트'란 공간, 그리고 그것과 함께 존재했던 '시대'와 '사람'을 보았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콘크리트 구조물이 얼마나 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지, 책 한권으로 (내 딱딱한 뇌조차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그 가치를 지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주의 아이들 -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 이야기 문학동네 청소년 8
박영희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요근래 북한과 조선족에 관한 영화와 책들을, 다른때보다 비교적 많이 접하게 됐다. 그 시작은 장률 감독의 두만강 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로 짐작된다. 처음 그 두만강을 보았을 때의 주요화두는 탈북자를 비롯한 사람이었지만, 만주의 아이들을 읽으니 그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의 범주가 넓어진다. 극중 주인공의 집은 엄마가 한국으로 돈벌러 나갔던 상황이었던 것.. 그때는 그런 설정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결국은 <만주의 아이들>을 통해 본 책뿐만 아니라 이전에 봤던 영화를 되새기며.. 하나의 작품에서 보지 못한 것들을 다른 작품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흔히, 재일동포, 재중동포 출신의 감독,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때면 모국에 대한 정체성이 입방아에 오르곤 한다. 정작 그것이 주제가 아닐지라도 한번쯤은 언급되며, 대체 무슨 답을 원하는지도 모를 질문들이 앞선다. 한때 축구선수 정대세의 상황을 보며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봤던 사람들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자국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는 정작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그 시선자체의 모호함이 더 문제 된다고 생각한다. 으레 그런 고민은 어른들에게만 주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오히려 그 혼란은 어른이 되기까지의 아이들에게 더 크다. 그럼에도, <만주의 아이들>에서 취재한 아이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뒤로하고 가족이란 의미의 정체성을 찾는데도 너무나 벅찬 아이들이었다.(나는, 국가적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이 그럴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라고 말하고 싶은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 너무나 당연해야 할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내쫓겨져 있는 조선족 아이들.. 늑대로 상징되는 유/무형의 수많은 위기에 노출된 아이들.. 그들을 보호해야할 부모들은, 자신들의 진짜 역할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은 작가가 3년 전 김좌진 장군의 딸 산조의 족적을 따라가던 중 한 하숙집에서 한 달 가까이 지내는 동안 한국에 돈 벌러 나간 아버지를 둔 미혜의 이야기를 듣게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 후로 작가는 만주를 찾을 때마다 그런 남겨진 아이들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결국 2010년 4월 16일 한국을 떠나, 중국 요녕성 심양으로 부터 시작해서 길림성 집안/통화/유하/매하구/용정/왕청 그리고 흑룡강성 하얼빈/해림/목단강을 거치며 아이들을 취재 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의 말대로, 그는 취재를 할 수록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또한 아주 할 이야기 많아질 것이다. 

기본적인 구조는 작가가 조선족 거주지역을 이동하면서 만나는 아이들을 인터뷰 하는 과정이라 주된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이야기들이지만, 그 과정에서 학교의 선생님이나 조부모, 친인척, 혹은 한국에서 돌아온 부모 등의 인터뷰 또한 실려있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빌려 현재 4가구 중 1가구 정도가 이혼하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조선족 사회가 이렇게 된것을 살펴보면, 중국이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기 부터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앞으로 살 길을 인민들스스로 꾀하라는 지침이었던 '각자도생'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소수민족이었던 조선족에게는 무척 힘든 현실이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무렵에 조선족들의 '각자도생'에 물꼬가 터졌다. 그간 미국에 예속되어, 못사는 나라라고 일컬어졌던 남한의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92년 한중수교가 맺어짐에 따라서 '각자도생'의 문은 완전히 활짝 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각자도생'이라는 것이, 총체적인 가족이 아닌, 구성원 각자에게, 심지어 아이들에게 까지도 '각자도생'의 길을 열어놨다는 것이다.

 

온기를 잃은 아이들

어른들에게, 그 각자도생의 길이란 다름아닌 한국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었다. 2년이었던 비자가 한중수교후에 5년까지 연장되면서 표면적으로는 그 길은 마치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로 보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곧 행복을 벗어나는 지름길 이었다. 멀리가지 않아도, 집안의 서기관과 인터뷰 하는 부분에서 그 폐단이 드러난다. 황무지를 개척하며 억척같이 살던 조선인, 굳건한 의지와 휘몰아치는 교육열로 타 소수민족에게 그 귀감이 되기도 했던 조선인들은 그 잘못된 각자도생의 길을 걸으면서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집안의 학교들은 15년동안 24개의 학교가 문을 닫고, 전체 학생 70퍼센트의 학부모들이 한국으로 돈을 벌러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거의 절반은 이혼한 상태라고 한다. 

"생일날만이라도 엄마가 곁에 있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철마다 이 생각을 함다. 엄마가 끓여 준 미역국이 간절하게 그립단 말임다. (45)     

누구나 부모를 필요로 하지만, 어릴 때는 유독 더 그렇지 않은가. 그다지 즐겁지 않은 공부를 시작하며, 실제로 여러가지 의무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시기. 경험이 부족하니 많은 것들이 두렵고, 유혹은 도처에 넘처나는데 그것을 이성적으로 구분할 재간이 없는 나이. 그.래.서 더욱 더 보호가 필요한 나이.. 누구도 부모란 존재를 대신 해줄 수 없는 시기. 유년기에는 그저 본능적으로, 좀 더 자라난 청소년기에는 혼란까지 받아들여줄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한 시기.. 

 

엄마 곱니 아빠 곱니 누가 누가 더 곱니   

엄마 없던 하루 세 끼 비빔밥만 먹었구요  

아빠없던 날 밤새도록 도깨비 꿈만 꾸었대요 

엄마야 아빠야 우리 우리 함께 살자 

해도 있고 달도 있는 푸른 하늘집처럼 

(246) 


한국 바람이 불면서 3개월 동안이나 동북3성 노래방에서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던 노래, <엄마 곱니 아빠 곱니>  
부모 기다리는 아이들이 제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면서도, 몰래 눈물 흠치며 불렀을 노래... 그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엄마와 아빠와 함께 살길 바라는 아이들의 순박한 바람은.. 왜 이리도 힘든 이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무너지는 아이들  

"한 학생이 고백한 건데, 성적이 떨어지니까 부모와의 정마저 떨어지더랍니다. 기실학생들의 심정이 이러할진대 어찌 부모님 요구대로 사회에 나가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거야말로 부모 생각 다르고 자녀 생각 다른 이율배반이 아닐까요. 두 대의 기차가 평행선을 향해 치닫고 있단 말입니다."  (중략) "앞으로 10년 뒤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가족에 대해 뭘 좀 알아야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거 아닌가요?" (82)  

우리가 수학공식과 과학원리를 배우기 전에, 체득하는 것은 사랑이다. 비록 어렸을적에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머리가 인지하기전에 마음이 먼저 인지하는 것.. 관심과 사랑. 그것들이 부재한 채로, 정말 필요할 때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하는 공부의 의미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먼저 배웠어야 할, 인간에게 필요한 가장 큰 것을 배우지 못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배워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위태로웠다. 공부에는 돈이 필요하지만, 돈 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더 좋은 학원, 더 좋은 과외를 해주면 우수한 학생이 될것이라는 부모들의 기대와 실제로 공부하는 학생의 괴리감은 이토록 큰 것이다. 생업에 바빠 자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할 시간이 없는 것과 아예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것은 꽤 다른 일이 아니지 싶다.

"엄마는 있지만 진짜 엄마는 없슴다. (중략) " 나는 엄마처럼 아이 살 겁네다. 엄마가 따박따박 부쳐 오는 송금도 졸업만 하면 그만 받을 생각임다. 통화 한 번 없이 돈만 부치는 엄마, 진짜 엄마는 그렇지 않잖습네까. 진짜 우리 엄마라면 내가 아팠을 때, 내가 죽자고 했을 때 왜서 그런 맘을 품었더냐고 진심되게 물어봐 줘야 하는거 아입네까?" (중략) 영주는 이제 가족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비상구를 찾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119)

아이들은 같이 죽자는 얘기겠느가... 힘들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같이 살아가보잔 것이다.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란 것을 부모들이 더 잘 아는 것 아닐까? 돈으로 공부하는 것은 가족의 사랑이 밑바탕이 되었을때 그나마 가능한 것이다. 혹 가족의 사랑이 있을지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공부가 힘들때도 있는 법인데.. 엄마처럼 살지 않을것이란 아이의 말이 얼마나 서글픈가. 부모들이, 자식들을 키우는 데에 가장 중하다고 생각해서, 혹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해서 버는 돈, 그것을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더이상 받지 않겠다는 말을 보며.. 우리는 그 아이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걸까?.. 이것은 아이들에게 돈이 얼마나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잘 보여주는 예 였다. 물론 돈이 없는 아이들, 돈이 없어서 다른이들만큼 과외받지 못하고 문제집 살 돈 부족한 아이들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불행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 부모와 좋은 과외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무슨 대답을 할지, 물어보지 않아도, 모두가 알지 않는가. 돈이 없이 공부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부모없이 공부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인 것이다. 당사자인 아이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다만, 어른들이 망각 할 뿐이다.  

자신들이, 힘든 삶에서 그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그만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친구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면서 뭐란 줄 아세요? 한국은 지구촌에서 당장 사라져야 할 국가라고 했습니다." (264) 

이 아이가, 이 말을 내뱉기까지 얼마만큼의 고통을 받아왔을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른이길 강요받는 아이들  

"저는 4년짼데예, 전화로만 담화를 해서리 인차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척 알 수 있슴다. 우리 엄마가 지금 아픈지 아이 아픈지. "(106)

작고 여린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은 이미 정신적으로 어른에 가까워 있었다. 자신을 길러준 부모들의, 한 인간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언젠가는 스스로 체득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시기는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고생과 고통의 의미마저 채 배우지 않은, 혹은 그냥 어렴풋하게 알아가야 할 나이인데, 벌써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버리는 것.. 이것은 조기교육이 아니라, 시기상조한 교육이다.  

"아빠가 등을 돌리고 앉아 술을 마시는데 너무 가여워 보였어요. 중국에서 술 마실 땐 그러지 않았단 말예요. 고기 안주에 ,얼마나 당당하셨는데요." (209) 

생각이 깊은, 혹은 말을 똘똘하게 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들을 보면, 어른들은 으레 '애어른', '애늙은이' 라는 말을 쓴다. 소싯적에 가끔 그런말을 들을 땐, 그게 마냥 칭찬인줄 알았고, 그래서 부끄러웠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은 칭찬뿐만아니라 안타까움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해야 할 고민들은, 어른이 되어도 차고 넘친다. 헌데, 아이들에게까지.. 삶의 고단함을 미리 가르쳐 줄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돈을 벌어 올 능력이 없는 시기에 돈 걱정을 하는 아이들이 이젠 그리 대견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조금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가 비로소 우리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때, 그래야만 할때, 수많은 의무, 책임들과 싸워나가야 할 시간들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그때 좀더 온전히 버티기 위해선, 혹은 그렇게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들을 향해 적어도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으려면.. 권리가 필요할 때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부모들의 고단함을 아는 것.. 그래도 대견하다. 기특하다. 이 아이들.. 그런데 꼭 그렇게 일찍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찍 배우게 되는 것이.. 온전한 가족안에서가 아닌.. 떨어진 가족에게서 느껴야 함은.. 달콤한 솜사탕을 들고있어야 할 아이들에게, 무거운 돌 덩이를 쥐어 주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리고 이건 저의 간절한 소망인데요, 두 분 모두 병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너무 아껴 쓰지만 말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유희도 부려 가며 사셨으면 좋겠어요." (중략) "한국에도 지금 비가 올까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엄마 아빠가 더욱 보고 싶은 게 사실이에요. 수업도 엉망이 돼 버리고요." 과연 국단의 저 눈 속에는 어떤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세상에 저런 울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모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95)  

하지만, 그렇게 부모들을 생각한다고 해도, 그 아이들이 또 완벽한 어른인 것은 아니다. 그 흔한말로,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부모들이 얼마나 고단한지, 머리가 안다해도 가슴으로는 그들의 사랑을 원하는 것이다. 생의 아름다움 보다, 고단함을 먼저 배우는 것은, 앞서나가는 것이 아닌 부작용인 것이다. 힘들면 힘들다고 투정부릴 시기에, 그 대상이 부재한 아이들.. 그리고 그렇게 속으로 삭히는 것을 어른이라고 배워나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 그 삭힌 것들이.. 곧 마음에서 병을 만들것임이.. 그리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음이.. 너무나 잘 증명되고 있었다.  

"어른들은 아무리 힘들고 슬픈 일이 생기더라도 그걸 가슴으로 삭일 이성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철딱서니 없이 마구 떠들고 지지배배거리고..... 그런 아이들의 입이 닫히면서 가슴까지 꽉 막혀 버렸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겠습니까.(59)  
 

 

권리와 책임 사이, 그 경계가 허물어진 

"살다보면 누구라도 한두 번씩 실수를 한단 말임다. 하지만도 용서라는 말이 어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답네까. 나그네한테 지은 죄는 나중에 차차 용서받을 수 있짐나 자식한테 지은 죄는 절대 기렇지 않단 말임다."(167)   

부모들 중에 한명이 한국에 돈벌러 나간 것으로 인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을 벼랑끝으로 내모는 가장 큰 비극은 부모의 이혼이었다. 그리고 그 비율은 이미 지금도 매우 클 뿐더러, 한국으로 나가는 부모들의 비율과 비례해서 꾸준히 높아질 것이다.  

"인간의 성을 도덕적 잣대로 재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다만 그 선택이 자신의 핏줄에게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안겨 준다면 지탄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139)

대분의 사람은 어쨌건 자신의 이익이 가장 우선이다. 결혼도, 이혼도, 결국 자신을 가장 먼저 위한 일이지, 상대방을 위한 일인 경우는 거의 없다. 혼인과 이혼 그 자체에도 책임이 있지만, 진짜 '책임'이 짊어지는 것은 아이가 생기는 일일 것이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만큼의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그 일이 벌어질때의 반응은 또 사람마다 달라서, 누군가는 그 책임을 자신의 생에서 자신보다 높은 가치를 매기고, 누군가는 자신의 생에서 그 가치를 자신보다 낮게 매긴다.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어떤 이들은 거룩하게 보이거나 안타깝게 보이고, 어떤 이들은 지독한 이기주의로 보이거나, 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한국 남자가 미칠 듯이 좋아서 산 건 아닐끼다. 당장 벌어 먹고 살 일이 막막하이까네 등짝 기댈 곳이 급하지 않았겠나." (128)

살면서 배워가는 것중에 하나는, 자식 가진 부모들도 결국은 '사람'이란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나 덜먹고, 하나 덜입고 하는 부모들도, 가끔은 그 부모라는 책임을 벗어나 한 남자, 한 여자란 것을 인정해 줘야 하는 것.. 그들도 한 개인이고, 인격체이기 때문에 감정이 먼저 앞설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모란 이름은 그들을 또 다잡게 만든다. 부모가 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부모란 책임 아래서 벗어나는 것 또한 아니다. 사람은 아이나 어른이나 외로운 존재니, 부모들이라 한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체념하기에 아이들은 너무 어린 것이다. 자식들을 위해서 돈벌러 갔다가, 외롭다는, 힘들다는 이유로...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은, 타자에게는 '살다보니깐, 외롭다보니깐'이란 말로 다소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를지언정, 그 부모 아래의 자식들에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들의 고생과 외로움은 이해받을 수 있을지언정, 그로인한 선택까지 모두 이해받을 순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면에서 본다면, 어떻게 해서든 부모가 함께 한국에 나가 있는것은.. 차라리 더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큰 문제를 안고 있지만, 누군가는 아이를 맡고, 누군가는 돈을 벌다가 아예 서로 영영 안보게 되는 것과 비교하자면 말이다.

 
 

이미, 그 시간을 거쳐간 어른들의 후회  

"아시다시피 저도 아들을 이곳에 둔 채 10년 넘게 한국에 나가 있었잖아요. 그때만 해도 뭐 알았나요. 목표한 걸 달성한 뒤 나중에 더 잘해 주면 되는 줄 알았지." (중략) " 가족이란 것이 10년 치를 하루아침에 보상받는 퇴직금이 아니잖습니까. 그날그날 건네고 받아 가는 용돈 같다고나 할까요.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이런 글귀가 있더군요. 세상을 가장 잘못 산 사람은 소소한 추억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고. 제가 요즘 그걸 뼈저리게 느끼며 산답니다." 정 씨는 성공과 자식은 별개인 것 같다며 그것을 이제야 깨달은 자신을 탓했다. "내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저절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질 순 없다고 봐요,. 설령 모자지간이라도 아래서 위로 돌탑을 쌓아가듯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필요할 테고요. 제가 실패한 것도 바로 그 점인 것 같아요." (240)  

10년넘게 한국에서 돈을 벌어와서 집단하숙집을 차린 한 조선족의 인터뷰 이다. 빚만 지고 돌아오는 경우나, 빚 때문에 못돌아오는 경우도 있는 반면 이렇게 가게를 차리거나 아파트를 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된 것처럼 보여지는 경우에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했다. 부모 자식간의 시간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는 것이다. 기초를 잘못다진 공사에 후에 그것을 보강하고, 다잡으려면 그 배만큼의 노력이 드는데, 하물며 사람이라고 예외겠는가. 부모들이 부재한 아이들은 바람앞에 놓여진 등불같은 존재다. 자신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가장 멀리 있다면.. 그것이 과연 진실로 아이를 위한 일이 될 것인지는 고심하고 또 고심해봐야 할 문제이다. 체온의 따뜻함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잘 자라나주길 바라는 것은, 돈없이도 잘 자라나 주길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기대 아닐까?

비록 돈을 벌어 다시 아이들의 곁으로 돌아온다한들, 너무 늦어버리면 되돌리기 힘들다는 것을.. 가정이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공백을 메우지 못하는 부모의 고백은, 모든것이 잘 된것 같음에도, 결국 아니란 것을 절실히 보여준다. 자식이 잘되라고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인지... 그들은 더 깊은, 더 현명한 고민을 했었어야만 했던 것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바로 딱 떠오른 한 장면, 처음에 언급했던 장률감독의 <두만강>이란 영화를 다시한번 이야기 하고 싶다. 벙어리인, 주인공 창호의 누이인 순희가, 그들이 도와주었던 탈북자에게 강간 당한 후, 한국에 돈벌러 나간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이다. 집에 혼자만 남아있던 순희는 엄마의 전화를 받지만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전화 너머에서 아무말이 없자, 엄마는 순희임을 알아차리고, 잘 지내는지, 밥은 잘 먹는지 물어본다. 그때의 그 순희의 표정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털어놓고, 울고싶은 순희가 아무말도 할 수 없는, 모든 설움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고 있는 그 얼굴을 보며, 가슴속에 얼어붙었던 얼음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어쩌면 생에서 가장.. 엄마가 필요한 시기. 그 시기에 아이와 어른의 구분은 없었다. 그렇게 부모란 존재는 모두에게 필요함에도, 아이들은, 조금은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책을 읽는 내내, 이 아이들의 부모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돈 벌러 나간 부모를 비난함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갈때의 그 심정, 부모가 아닌 내가, 다 헤아릴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감히 그렇게 말해서도 안될지 싶다. 쉽게 내린 결정도 아니었을 뿐더러, 내 자식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기를, 좀더 좋은 옷 입기를, 좀더 따스한 곳에서 좋은 음식 먹기를.. 바라는 마음,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이다. 자신들이 살자고 나간것이 아닐진데, 아이들 더 좋게 키워보자고 나간 것일진데, 결과는 그와 굉장이 상이하단 말이다.  

그리고 나도 그 생각에 어느정도는 동의한다. 자식을 더 잘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하는 것. 어쩌면 그 부모들만큼 그것을 여실이 느낀 이들이 또 어디있을까. 다만, 한가지 이야기 하고픈 것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한국에서 어렵게 돈 벌어 '고생'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로인해 아이들이 받는 '고통'은 더 큰 비극이란 것이다.

"이 모든 게 윗물인 어른들 탓입네다. 한국 바람, 간다 바람이 먼저고 자녀를 돌보는 일은 안중에도 없단 말입네다. 한국에 나가 일하는 어른들이 고생이라면, 이곳에 남은 자녀들은 고통이지요." (27)

한국에 돈을 벌러가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도 한국으로 향할 수 밖에 없던 것은,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 돈벌어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희망이 약해 보였을 것이다. 희망이 작다는 것은, 언뜻 가능성의 이야기로만 보이지만, 다시 곱씹어보면 그만큼 더 큰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뜻도 된다. 부모들이 고생을 무릅쓰고 한국에 가서 일 하는 것을 감내할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낀다면, 더 굳게, 더 강하게 마음먹고 그 자리에서 있어주기를 감히 바란다. 중국에서 돈 벌어 키우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일, 그러니깐, 자식을 위해 한국에 나가 돈 벌 고생을 마다않는 부모라면, 그 마음으로, 그 사랑으로 중국에서 더 억척같이 살아내길... 다시한번 감히 바래본다. 

그래서 그들이, 한국도, 중국도 아닌..... 가족이라는, 세상서 가장 튼튼하고 아늑한 집 안에서 재회하길..

 

 

내가 감히 바라는 것..

교원들이 탄 버스에 막 오를 때였다. 천여 명의 학생을 어둠 속에 남겨 둔 채 도망치듯 어른들만 집으로 향하는 것 같아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150) 

그저 책을 덮을 수 밖에 없는 스스로가 멋적었다. 아이들을 뒤로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야만 했던, 작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을 도와줘야 하는걸까, 그런 기관을 찾아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해보다가 이내 관둔다. 그들이 동정이 필요한걸까?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한걸까? 그건 아닐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정과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살아갈 것들을 마련하지 못하고,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푼의 돈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좀 더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당위성과 근거를 찾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책을 다 읽고 맨처음 한 생각, 작가가 서문에서도 밝힌 것들이 바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이 한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족 부모와 만주에 남은 아이들을 잇는 끈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고통 못지않게 한국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부모의 고통 또한 클 것이다. 나 역시도 처음엔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을 보며 노동의 대상으로만 여겼을 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그들과 벗이 되고부터는 깨달은 바가 많았다. 대구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이옥순 씨의 말처럼 중국에서 먹고살만 했다면 굳이 한국을 찾을 이유가 있었을까? 하여 나는 이 책을 통해 만주에 남은 학생들에게 부모님의 복잡한 사정과 말 못할 상황도 조금은 헤아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이 책을 가장 우선적으로,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이 봐야한다는,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보니 서문에 있는 작가의 말을 못읽고 지나쳤는데, 책을 읽고 다시 앞부터 돌아보다 작가의 말을 읽고나니, 작가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서 일하는 조선족들에게 이 책을 보게됨으로써 혹 모두 마음을 다시 고쳐잡는다 해도 현실이란 그리 녹록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역할을 강요할 것이 아닌, 부모들과 아이들 모두를 동등하게 이어주길 바란다. 물론 어른들의 역할이 새삼 더 클 것임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역할과 현실은 또 차이가 있으니깐.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더 이해하다보면 언젠가 다시 함께하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수반되어야 할 일이 어쩌면, 이곳에 있는 조선족들이 이 책을 읽는것으로 시작되야 할 것이다. 

작가는 만주에 남은 아이들에게, 부모들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주길 간청한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이해하여, 아이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선택을 다시 생각하고, 아이들도 부모들의 말못할 사정을 조금 짐작해주길 바란다.. 는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발현되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더 원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만주에 아이들을 두고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조선족 부모들을 다시 취재하여 책을 발간하고, 그것을 만주의 아이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그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책을 만나면, 다시 함께 할 그날을 조금 더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혹은, 그 날을 앞당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기다림의 과정이 조금은 덜 버겁지 않을까....

 

 

뜨고 지지 않는, 그저 한결같은 '가족' 이라는 품.. 

"가족이 그렇단 말임다. 상호 의지하는 집체란 말임다. 얼마전 사상품성 시간에 귀맛이당겨 새겨 둔 거이 있는데, 가족을 뚫고 들어온 쪼맨 틈이 인차 나중에 더 큰 괴멸을 불러온다고 했단 말임다." (44)  

가족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건 어쩌면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은, 가족을 와해하는 것은 큰 틈으로 시작하는게 아니라, 작은 틈이 점점 더 벌어져서 생기는 일임을, 이미 알고있던 것이었다. 몸소 체득한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어른들이, 완전한 가족의 요건을 다시 생각하며, 때를 놓치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소중한 사랑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단 것을 깨닫는다면.. 아이들은, 더 나은 가정을 하루빨리 완성하기 위해 부모들도 말못할 상황속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 만 더 이해한다면..

'가족'은 우리가 흔히 쓰면서도 그 뜻을 항상 헷갈리는, 혹은 잘 모르는 단어와 닮은 구석이 있다. 누구나 안다고 자부하지만, 의외로 아무나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단어. 혹은 안다고 해도, 제대로 익혀두지 않으면 가끔은 맞춤법을 헷갈리게 하는 단어들 말이다. '가족'이란 단어의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찾아 본다. 사전에서 찾아본 가족이란 단어에는 왠지 찬바람이 불어왔다. 어렵진 않았다. 그리고 최소한의 의미만을 규정했다. 최소한이자, 기본적인 의미의 가족안에 있지 못한 아이들... 조선족 아이들에게는 이상에 지나지 않을 그 뜻. 부모들이 그 '가족'의 진정한 뜻을 모른다고 폄하하고 싶지만은 않다. 다만, 그들은.. 그들이 안도하고 있는, 혹은 건성으로 지나친 가족의 의미를 다시한번 좀 더 헤아려서 그 뜻을 진정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혹 그 의지만 굳건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꽁꽁 얼어붙은 관계가 영영 돌이킬 수 없기까지의 시간을 조금 유예시킬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부모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아이들과 만나야만 할 곳은,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더욱이 만주도 아니다. 그냥 '가족' 이란 품이 아닐까. 

"그날은 왠지 모르게 엄마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제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다." (221)  

 

아이들은 엄마라는 별이, 아빠라는 별이 더 높은 곳에서 빛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자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더 높은 곳에서 빛나기 위해 그들을 등지지 않고, 그저 눈이 닿는 곳에서, 한결같이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에게 큰 고생을 수반하는 일일지언정, 고통만큼은 아닐테니깐.

그러니까, 그들이, 뜨고 지지 않고, 아이들의 곁을 변함없이 지켜주는 별이 되기를.. 

혹, 어제도 없고, 오늘에도 없을지언정, 내일은 있어주길, 빛나주길. 너무 늦기전에..  

"어머니는 해도 달도 아닌, 변함없는 별이란 말임다." (15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지현 2013-11-22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캔펀딩에서 만주아이들과 토론하는 '만주 정세청세(정의로운 청소년 세상과 소통하다)'기획금을 위한 프로젝프를 열고 있습니다. 모금 기간이 얼만 남지 않았습니다. 제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방법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검색창-'유캔펀딩'검색
유캔펀딩 홈페이지 검색창- '정세청세'검색

http://www.ucanfunding.com/project/view.php?num=517
 
테르마이 로마이 1 테르마이 로마이 1
야마자키 마리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발상의 전환을 통한 목욕의 참 의미 곱씹어보기!!

고대 로마, 테르마이(목욕탕) 설계자인 루시우시는 자신의 설계안이 더이상 인정받지 못해, 좌절한다. 그 와중에 시장서 우연히 만난 그의 친구 마르쿠스와 함께 기분전환겸 갔던 목욕탕에서 정체모를 통로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다시 수면위로 나왔을때 마주한 것은 현대 일본의 목욕탕. 광활한 시공간을 넘어 마주한 낯선 풍경에 루시우시는 적잖이 당황하지만, 이내 진보한 목욕문화와 시설을 배워나가기에 바쁜데..

살아가는데에는 일상적인데, 쉽게 다뤄진 적 없는 이야기. 일단은 목욕에 대한 소재부터 기발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이것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작가는 루시우스 처럼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준비한, 철저한 사료분석을 통한 고증은 고대 로마의 현실감있는 묘사와 목욕탕 타임슬립이라는 황당한 설정과 함께 버무려져 유쾌한 충돌을 자아낸다.

 재밌는 점은, 목욕에 관해 풀어가는 이야기인 탓에 상반신 누드는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단골메뉴인데, 그것이 이 만화의 그림체와 아주 잘 매치된다는 점이다. 간결한 뎃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한컷 한컷은, 깔끔한 디지털의 느낌과는 또 다른, 디테일에 대한 묘한 감흥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장면장면에서의 풍부한 표정묘사, 나아가서는 현대 일본의 목욕문화를 체험하면서 느끼는 황홀감의 젖은 표정은 그 주인공의 감정이 온전히 전달되는 느낌이랄까.
 

한번도 목욕이란 것을 깊게 생각한적도, 고대의 목욕문화에 대해 쥐뿔만한 관심도 없었던 이들에게 황당하고 유쾌한 경험을 선사해주는 이 <테르마이 로마이>에 대해 간단하게 나눠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디테일!

 

 "바~~로 이 맛, 아입니까!?" 

 섬세한 표정연기가 일품인 루시우스 표정 3종셋트. 물론 '부분발췌'일 뿐이다. 나머지는 책을 보며 즐겨야 할테니.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작가는 14살때 홀로떠난 여행에서 만난 이탈리아 도예가의 초청으로 17살때 이탈리아에 건너가 피렌체 예술학교에서 11년간 유화를 배웠다고 한다. 이런 이력에서 미루어보면 신기하지 않은것이, 이탈리아 생활을 그린 에세이로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오랜 타국생활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목욕은 매우 안락한 휴식처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태리 장인정신이 뭍어나는 디테일함은 비단 표정에만, 사람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는 점. 잘보면....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고대 로마와 현대 일본의 목욕문화와 환경에 대해서 자세히 그려내고,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로 인해 소홀할 수 있는 상황설정이 단단한데다, 극화체의 그림들이니, 타임슬립을 제외한 모든것은 극도의 리얼리티를 표방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목욕탕을 배우자!

 

한 에피소드가 끝날 때에 나오는 한장의 목욕이야기와 사진들은, 만화에서는 이야기 전개상 다 담을 수 없는 고대 로마와 일본의 목욕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거기에는 정말로 고대 로마의 목욕 문화에 대한 자료도 있고, 작가가 여행을 하며 봐온 목욕문화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바라보는 목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테르마이(목욕탕)을 사랑하는지 짐작케 해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이것들을 읽어보고 있노라면 새삼 목욕이라는 것을 가지고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작가가 이 목욕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목욕의 의미를 다시 찾자!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목욕은 기본적으로 청결을 유지하며, 심신을 안정시키며 켜켜이 쌓여있던 피로를 풀어주는 행위이다. 시대가 변하고 청결과 위생이 점차 보급되면서, 이 목욕이란 개념은 어느정도 보편적인 행위가 되었는데, 그중에 일본의 온천문화는 다른나라의 목욕문화보다 조금 더 특별하긴 특별한 것 같다. 작가가 밝혔듯이 고대로마와의 공통점인 화산지대의 영향을 받기도 했을진데, 어쨌든 발달한 온천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청결 그 자체를 위한것보단 심신에 쌓인 피로들을 풀어주는 역할이 더욱 큰 듯 하다. 새삼 흐르는 물에 때를 씻어내는 것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는 차별성이 보였다. 일본만큼의 온천이 발달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찜질방이란 것이 급속히 퍼진것을 보면, 문명화된 사회가 될수록 그 피로를 풀어주는 일은 은연중에 중요한 화두가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물론 여가의 한 방면이 크기도 하지만 말이다.)


특히나, 마지막 에피소드인, 황제의 명을 받아 전장에서 지친 병사들의 피로를 풀어줄 목욕탕을 만드는 부분은, 사람이 극도의 긴장으로 인해 피로할수록 그것을 풀어줄 목욕탕이 절실히 필요함을 보여준다. 이러니 그간 별 시덥잖게 생각했던 목욕에 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밖에.
 

 

서사의 간결함!?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 및 출판사에 있습니다.) 

<테르마이 로마이>의 이야기구조 간단명료하다. 문제에 봉착한 고대 로마의 루시우스가 우연찮게 현대 일본의 목욕탕으로 타임슬립하게되고, 거기서 자신의 시대에서는 보지못했던 여러 발명과 문화를 맞닥뜨리게되고, 그것을 배워서 다시 로마로 돌아가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 복잡하게 헤맬필요없는 간단한 이야기 구조는 극적인 구성으로 재미를 주기 보다는, 좀더 손쉽게, 그동안 크게 관심갖지 않았던 목욕문화에 대해 집중하게끔 해준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단순한 이 이야기구조로 인해서 사람들은 어떤 긴장감 보다는 천천히 고대로마의 목욕문화를 살피고, 현대 일본의 온천문화를 돌아보며, 그것들이 시대를 역행하며 전이됐을 때, 어떤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해보게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일단 이 1권으로만 봤을때는 이전에 다른 만화에서 볼수 있는, 빠른전개로 인한 긴장감과 극적인 맛이 조금 부족하단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2권을 기대하며! 

 그간 알지 못했던 로마의 목욕문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타임슬립을 하면서도 논리적인 설명이 누락되지 않게 각각의 상황에서의 치밀한 상황설정, 표정에서 극을 달리는 디테일한 묘사, 철저한 자료분석으로 인해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보는 여러 신선한 장점들에 비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소 반복적인 방법을 사용한 에피소드의 진행은 왠지 아쉽긴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문득, 이 만화에서도 그것을 찾아야만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책장을 넘기다가 지치는 책이 있다면, 한장한장 음미하다 지치는 책도 있는 법이다.(여기서 이 지친다는 의미는 긍정, 부정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싶다) 멜로영화에서 액션영화같은 극적인 컷편집을 요구할 수는 없는 바이니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그간 관심갖지 않았던 목욕에 관한 이야기들은 꽤 흥미로웠다. 또한 한 시대에서도 다양하게 존재하는 목욕문화들을 고루 다룬다는 점과 발달된 목욕문화를 접할때마다 나오는 루시아스의 다양한 반응들은 소소한 재미를 끊임없이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단조로움을 희석시켜 준다. 무엇보다, 간간이 등장했던 루시아스의 가정의 위기(!)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들어나고, 또한 타임슬립으로 역행한 문화의 발달이 어떤 일들을 벌일지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될 듯 하니, 다음 권이 더욱 기대되는 바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글 때, 우리의 모든 감각이 느긋해지 듯.. 그렇게 이 만화를 음미해보자.

그러면, 둘러볼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상처를 통해 숨쉰다..

 
사람들은 살면서 제나름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 타인이 보기에 얼마나 큰 상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느낀 그 상처의 크기가 중요하다. 그리고 보통의 생명체라면 자가회복의 능력을 지닌다. 그 어떤 생물도, 사람도, 자연도 마찬가지다. 본디 태생이 그렇게 회복능력을 갖춤에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만하는 인간은 끝없는 욕망의 부작용으로 인해 새로운 상처를 만들고, 거기에 급급하게 치료법을 만드느라 항상 분주하다. 하지만 그런 생물학적 상처를 능가하는.. 여전히 인류를 관통하는 상처는, 옛것에 있다. 옛부터 내려온 것들에서부터 있다. 
 

그 중심에 사랑과 상실이 있지 않을까.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다 하여도 사랑할 수 있다친다면 상실은 사랑의 반대는 아닐것이다. 다만 사랑이 상실되던, 사랑의 대상이 상실되던, 보편적인 감성이라면, 그 사랑과 관련된 그 어떤것의 상실도 괴롭기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 괴로움의 상처에 흉이 지던, 새살이 잘 돋던 우리는 그렇게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니, 매끈한 피부라고 해서 상처없음은 아닌 것이다. 
 

물론 <아가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비춰지진 않는다. 그렇다면 부모자식간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이것은 그것조차 뛰어넘는다. 구병모 작가는 평범한 사람사이에서 어떤 형태로든 탄생할 수 있는 사랑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한다. 무규칙 형태의 사랑이니깐, 무규칙 형태의 상실과 상처가 발생한다. 
 

기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것 아닐까?
어떤 시공간 속에서도 탄생해버리는 사랑과, 그 어느 틈에서도 발생하는 상실과 상처에 대한 삶을..


독백같은 한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박터지는 직장에서 이리저리 채여가며 악착같이 밥줄을 붙들며, 노모를 모시고 사는 해류는 모자란 택시비로 인해 집에 채 도착하지 못한채로 길에서 내리게 되고, 술기운에 저벅되다 다리난간틈에 떨어져버린 핸드폰을 주우려다 한강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물고기가 아니라서 물속에서 숨쉴수 없고, 그래서 호흡기관에 물이 들어차지 않게 계속해서 물 위에서 허둥대야 한다. 그러니 그렇게 몸서리 칠 줄 모르는 인간은, 누군가 물에 빠져 호흡기관에 물이 들어차며, 인체의 70%를 차지하는 물이 100%가 될때까지, 직접적으로 도와주는게 쉬운일이 아니다. 더욱이 생면부지의 사람을 구하자고 제 목숨을 담보로 하는게 어디 쉬울까. 누구하나 해류를 직접 구하러 뛰어들지 못하고, 신고후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의 손길이 뻗친다. 사람으로 보기엔 너무나 갑작스럽고, 물고기로 보기엔 너무나 큰 존재. 하지만 그가 누군지 해류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누구를 설득시킬 수도 없었다. 그저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가 물에 빠져죽지는 않았는지 수색대원이 한강을 살펴야 하는 현실로 건져진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때로는 해프닝 처럼 벌어진다. 삶은 시작도 끝도 예측할 수 없다. 과학은 그 영역에 계속해서 손을 뻗치려 하지만, 항상 언제나 한계에 부딪힐 뿐이다. 물론 그래야 할 것이다.
 

한 아이가 있다. 사랑도 정도 책임도 실종된 엄마로 인해 아기때부터 처절하게 살아온 아이는, 결국 삶의 모든 의미를 절망으로 빼곡히 채운 아빠로 인해 함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는 순간, 마을의 한 할아버지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손자와 단둘이 사는 할아버지는 이내 그 아이에게 어떤 이상한 상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서 할아버지와 그 손자는 고민하고, 결국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아이를 기르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곤'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전망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47p)
 

대학생들의 MT 장소가 되기도 하는 어느 한적한 휴양지에서는 그때의 상처를 갖고 있는 '곤'이 숨쉬고 있다. 해류는 드디어 그를 발견한다. 그녀가 일전에 한강에 빠졌을때 구해준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린 것을 누군가 보고 연락을 취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녀는 곤과 함께 자랐던 강하라는 인물에게 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결국, 곤을 찾아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만들어진다.

 
일단, 블로그를 통해 서로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던 해류와 강하의 만남은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미 블로그라는 온라인 상의 공간이 여러 정보와 소통의 공간이 된지는 오래지만, 이렇게 소설에서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나니 확실히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이란 공간이 만드는 시공을 초월한 운명의 변화를 새삼 깨닫게 될 수 있었다. 해류와 강하의 만남, 그로인해 곤을 찾을 수 있게 되기까지, 그 단순한 블로그란 공간이 했던 역할은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연같은 사건들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돈이없어 중간에 내릴 수 밖에 없었던 택시, 집으로 걸어가다 떨어뜨린 핸드폰을 줍다 한강에 떨어져버린 사건. 어떤 만남. 그 사건을 블로그에 올린 것을 본 강하와의 만남, 그 만남으로 인해 생긴 곤과의 필연적인 재회.. 

 
필연 이라는 말을 여기에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고 하니, 어떤 우연들을 통해 (실로 웹상에서는 정보들이 아주 촘촘하게 얽혀있어서 그것들과 인연을 맺는 것 자체도 굉장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하면될까. 아마도 블로그를 통한 해류와 강하의 만남의 실제로 그들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사건으로 인해, 곤을 키우던 강하와 할아버지의 소식, 강하가 바라보고 느끼고 그렇게 했어야만 했던, 혹은 그렇게 했기때문에 후회할 수 밖에 없는 감정을 유일하게 전달받은 것은 세상에 해류 혼자 뿐 이었다. 그래서 해류는 곤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 자신의 시선으로만 가득차있는 곤의 과거에 한 시대를 함께했던 강하의 이야기를 전해주어야만 했다. 해명 아닌 해명, 어떻게 보면 변명.. 하지만 강하의 진심은 해류의 입을 통해 곤에게 온전히 전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더 극적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해류또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표현할 길이 없어 블로그라는 공간에 올렸던 것이고, 강하또한 곤을 찾지 못해 어디에도 그 시절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없었기에, 해류를 만난것은 일종의 블로그같은 소통의 공간을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결국 그들은 제 자신에게 적합한 공간, 사람을 찾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 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51p)
 

곤에게서 원망같은 침울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유념시절부터 알아온 체념의 터득, 그리고 일말의 죄책감, 혹은 원망감 같은 감정들조차 세월에 씻겨 그 빛을 바란건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그럼에도 곤에게선 어쩔수 없는 과거의 상실감이 풍겨온다. 기억나지 않는, 혹은 어떤 본능적인 제어로 인해 기억될 수 없는 유년의 기억, 강하의 집에서 함께살던, 어느정도의 체념으로 인해 나름 평온했던 날들.. 그리고 어떤 한 순간에 그 모든시간들을 영영 떠나보내야만 했던 순간.. 아마 그것들은 곤에게 거의 전부인 과거였을 테니깐 말이다.


해류를 통해 전해들은 강하의 이야기로 인해, 곤은 이제 자신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과거,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시간을 찾아간다.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인정하게 된다. 강하가 자신에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 순간의 이유들과 참회로 인해 그 시간들의 상처와 마주하고, 그 틈으로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 본디 강하와 할아버지가 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곤에게 있는 알수없는 상처를 갖고 곤란해 했었다. 그로인해 비밀스럽게 의원까지 부르게 되지만, 결국은 곤의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세상에 내놓는 것은 곤에게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조용히 그를 기를 길렀다. 그 상처를 혐호하거나, 억지로 덮어두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그것을 호기심으로만 바라볼 세상에서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곤은 뇌가 기억할 수 없지만 본능으로 기억할 아기때부터 지독한 삶을 살왔고, 그 결과마저 비참할 뻔 했다. 어쩌면 아가미는 그런 주류세상에 편입할 수 없는 곤이 다른세상에서 숨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셈이 아닐까. 그것이 생에 대한 본능으로 인해 제로에 가까운 확률로 우연찮게 발현된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다버려지다시피한 엄마로부터 상처받았던 강하는 그래서 그 곤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에게 숨겨야했던 그 상처, 아가미를 누군가에게 그대로 이해받고, 그리고 이해받았었다는 사실은 그의 상처를 더이상 덮어두지 않아도 되게끔 한다. 이제 곤은 그 상처로 숨쉰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여준, 하지만 그때는 알지못했던, 그리고 이미 늦어버린 그 시간을 향해 힘껏 거슬러 찾아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서지는 햇살을 오롯이 받아들여 다시 그것을 휘황찬란한 온갖색으로 부서뜨리는 그의 비늘은 아름답고도 슬픈 모습이었다.

 
<아가미>는 낯선 누군가를 통해 스러져가는 삶을 다잡고, 누군가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인정받고, 위로받고, 그로인해 다시 낯선 누군가를 구원해내는 이야기다. 그것은 인물간의 교차되지만, 모두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해류는 블로그를 그 통로로, 강하와 곤은 해류를 그 통로로 사용했듯, 구병모 작가는 글이라는 매체를 그 통로로 우리에게 슬프도록 눈부신 상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싫어' 라는 건 반드시 증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달리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아 싫다는 것뿐이지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에요. 그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 가운데 가장 범위가 넓은 거라고 봐요. (p166)


인간의 몸에 70%가 수분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통설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물고기처럼 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실로 모든 생물은 물에서 뻗어나왔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그 사실을 너무 오래전에 잊어버린 종(種)중에 하나인 셈이다. 마치 곤처럼, 우리 과거의 시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을 잊어버린 우리들은 물에서 살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과거를 잊어버렸으니, 그 망망대해를 자유롭게 유영하지 못하고 두려워 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 그 불완전한 기억들과 과거를 온전히 이야기 해 줄 수 있게된다면.. 어쩔 수 없었던, 그래야만 했던, 그때는 볼 수 없었던 시간의 이면이 가진 상처들이 비로소 우리가 제대로 숨쉴 수 있는 틈이 되어줄 수 있는것 아닐까. 그렇게 제 안으로 들어온 생의 에너지가 다시금 우리들을, 스러지지 않고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덮고, 흩어진 상처들을 하나씩 이어나가면 마침내, 빛이 고인, 기적처럼 아름다운 완전체의 비늘을 마주할 수 있다. 구병모 작가는, 우리가 이시대에서 온전히 호흡하기 위해, 과거 한켠에 묻어둔 상처와 어떻게 해후해야 하는지 글을 다리삼아 이야기 한다.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2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처음 해보는 신간 추천..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책소개와 배경지식으로 책을 소개해야하는 위험함과 어려움이.. 정말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스스로도 가끔, 정말 이렇게 추천을 해도 되는 책일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과연 어떨지.. 일단은 한번 두고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4월의 추천 예술/대중문화/만화 분야의 책은 어래와 같다. 

 

  

가려운 곳은 긁어야 한다. 헌데 왜 가려울까. 사실 어디서 간지럽히는줄은 아는데, 잘 긁지를 못하게 한다. 그래서 미칠지경이다. <시사인만화>는 아마 그렇게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 만화이다.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로 유명한 굽시니스트 가 그린, 시사 만화가 굽시니스트의 '정수'라고 소개된 부분이 참 기대할 만 하다. 특히나, 시의성 문제로 실리지 못했던 두편이 어떤것일지 궁금해진다. 현실을 비틀어 현대인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은 가공할만한 상상뿐만이 아니다. 티비속에서 화자되는, 화자될 수 밖에 없는 인물들에게, 우리가 던져주고 싶은 말들을 유쾌하고 통쾌하게 대신해줄 만화가 기대된다.

 

 

 

 

 창작자에게 무엇을 배경으로,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기초로 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여기 이태원에 사는 아티스트 들은 이태원을 배경으로 창작을 해나간다. 이태원에 사는 기본적인 공통점을 시작으로, 미술, 음악, 웹디자인, 디자인, 가구, 공예, 음식, 패션.. 그리고 사랑까지 다양하고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한 지역에서 펼쳐보이는 창작의 과정은 분명 다채롭고 아름다울 것이다. 게다가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영감을 받을 것이고, 또 그 창작들이 또하나의 이태원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심히 궁금해지면서도, 상상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 같아서 호기심이 인다. 그들은 자신이 숨쉬는 공간과 더불어 살아가며 만들어갔을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까?

  

 

   

  영화인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과 비영화인이 영화를 이야기 하는것, 때론 서로 으르렁 대지만 분명 두 분야 다 가치있을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알고있는 영화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느끼는 영화는 분명 다를 테니깐. 저자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일 지 모르지만, 약력으로만 살피자면, 김종철 작가는 영화인과 비영화인의 중간적인 역할을 할 것 같다. 게다가 시리즈로 나온 그의 저서들을 보면, 그 박학다식함이 굉장할 듯 보인다. 어쨌든 이 책은, 기본적인 영화사를 쉽게 풀이하고, 저자가 생각하는 '좋은영화'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줄 듯 보인다. 영화에 관한 책들은 간혹, 너무 깊거나, 혹은 너무 감성적으로 흐르거나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적당히 그 중간을 절충한 책이기를 기대한다. 영화사를 깊고 넓게 섭렵하는 사이에, 저절로 좋은영화와 비교적 그렇지 않은 잣대에 대한 윤곽을 잡을 수 있다면, 아니 그 잣대에 대해서 생각이라도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영화사를 통해 영화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기를 기대한다.

 

 

  

 바그너라.. 바그너라니. 언제 처음 접했다가 잊어버렸더라.. 그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확실한건, 그때 바그너를 접했던 책은 매우 어려웠고, 내 머리는 지금보다더 더 덜 여물었단 사실이다. 물론 이책이 바그너에 관한 책은 아니다. 현대의 예술을 아우르는 '총체예술'을 살펴보는 책이다. 그 시작인, 바그너부터 살펴보기에 꺼낸 얘기다. 다만, 부제는 '바그너에서 백남준까지'인데..목차를 보았을 때 바그너와 백남준이 다는 아닌듯 보인다. 초입부에서는 총체예술의 개념과 기원을 잡는데 주목하고, 중반부 부터는 한국의 연극과 판소리에 대해서 보여줄 듯 하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연기에 관해 설명한다.. 이정도면 눈치챌만한 것이, 예술/대중문화에서 연극으로 분류되있는 책이다. 총체예술의 개념 그 자체보다는 연극에서 필요한 총체예술의 개념이 조금 더 어울릴 듯 보인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다소 독자층이 넓진 않을 텐데, 묘하게 또 궁금해지는 것들이 있다. 바로 한국을 조망하기 시작하는 제2부 부터이다. 책의 분량상 깊게 들어가진 못할테지만, 서양에서 시작된 총체예술의 기원을 살핀 후 한국의 판소리와 마당극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흥미로운 부분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제3부 연기부분도 연기지도를 위한 부분이 아닌, 연기관에서 언급될 것 같으니..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연극/연기분야의 책을 처음 접한다면 낯선느낌은 없잖아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