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상처를 통해 숨쉰다..

 
사람들은 살면서 제나름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 타인이 보기에 얼마나 큰 상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느낀 그 상처의 크기가 중요하다. 그리고 보통의 생명체라면 자가회복의 능력을 지닌다. 그 어떤 생물도, 사람도, 자연도 마찬가지다. 본디 태생이 그렇게 회복능력을 갖춤에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만하는 인간은 끝없는 욕망의 부작용으로 인해 새로운 상처를 만들고, 거기에 급급하게 치료법을 만드느라 항상 분주하다. 하지만 그런 생물학적 상처를 능가하는.. 여전히 인류를 관통하는 상처는, 옛것에 있다. 옛부터 내려온 것들에서부터 있다. 
 

그 중심에 사랑과 상실이 있지 않을까.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다 하여도 사랑할 수 있다친다면 상실은 사랑의 반대는 아닐것이다. 다만 사랑이 상실되던, 사랑의 대상이 상실되던, 보편적인 감성이라면, 그 사랑과 관련된 그 어떤것의 상실도 괴롭기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 괴로움의 상처에 흉이 지던, 새살이 잘 돋던 우리는 그렇게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니, 매끈한 피부라고 해서 상처없음은 아닌 것이다. 
 

물론 <아가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비춰지진 않는다. 그렇다면 부모자식간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아니다. 생각해보니 이것은 그것조차 뛰어넘는다. 구병모 작가는 평범한 사람사이에서 어떤 형태로든 탄생할 수 있는 사랑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한다. 무규칙 형태의 사랑이니깐, 무규칙 형태의 상실과 상처가 발생한다. 
 

기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것 아닐까?
어떤 시공간 속에서도 탄생해버리는 사랑과, 그 어느 틈에서도 발생하는 상실과 상처에 대한 삶을..


독백같은 한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박터지는 직장에서 이리저리 채여가며 악착같이 밥줄을 붙들며, 노모를 모시고 사는 해류는 모자란 택시비로 인해 집에 채 도착하지 못한채로 길에서 내리게 되고, 술기운에 저벅되다 다리난간틈에 떨어져버린 핸드폰을 주우려다 한강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물고기가 아니라서 물속에서 숨쉴수 없고, 그래서 호흡기관에 물이 들어차지 않게 계속해서 물 위에서 허둥대야 한다. 그러니 그렇게 몸서리 칠 줄 모르는 인간은, 누군가 물에 빠져 호흡기관에 물이 들어차며, 인체의 70%를 차지하는 물이 100%가 될때까지, 직접적으로 도와주는게 쉬운일이 아니다. 더욱이 생면부지의 사람을 구하자고 제 목숨을 담보로 하는게 어디 쉬울까. 누구하나 해류를 직접 구하러 뛰어들지 못하고, 신고후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의 손길이 뻗친다. 사람으로 보기엔 너무나 갑작스럽고, 물고기로 보기엔 너무나 큰 존재. 하지만 그가 누군지 해류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누구를 설득시킬 수도 없었다. 그저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가 물에 빠져죽지는 않았는지 수색대원이 한강을 살펴야 하는 현실로 건져진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길은 때로는 해프닝 처럼 벌어진다. 삶은 시작도 끝도 예측할 수 없다. 과학은 그 영역에 계속해서 손을 뻗치려 하지만, 항상 언제나 한계에 부딪힐 뿐이다. 물론 그래야 할 것이다.
 

한 아이가 있다. 사랑도 정도 책임도 실종된 엄마로 인해 아기때부터 처절하게 살아온 아이는, 결국 삶의 모든 의미를 절망으로 빼곡히 채운 아빠로 인해 함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는 순간, 마을의 한 할아버지에 의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손자와 단둘이 사는 할아버지는 이내 그 아이에게 어떤 이상한 상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서 할아버지와 그 손자는 고민하고, 결국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아이를 기르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곤'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전망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47p)
 

대학생들의 MT 장소가 되기도 하는 어느 한적한 휴양지에서는 그때의 상처를 갖고 있는 '곤'이 숨쉬고 있다. 해류는 드디어 그를 발견한다. 그녀가 일전에 한강에 빠졌을때 구해준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린 것을 누군가 보고 연락을 취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녀는 곤과 함께 자랐던 강하라는 인물에게 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서 결국, 곤을 찾아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만들어진다.

 
일단, 블로그를 통해 서로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던 해류와 강하의 만남은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미 블로그라는 온라인 상의 공간이 여러 정보와 소통의 공간이 된지는 오래지만, 이렇게 소설에서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나니 확실히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이란 공간이 만드는 시공을 초월한 운명의 변화를 새삼 깨닫게 될 수 있었다. 해류와 강하의 만남, 그로인해 곤을 찾을 수 있게 되기까지, 그 단순한 블로그란 공간이 했던 역할은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연같은 사건들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돈이없어 중간에 내릴 수 밖에 없었던 택시, 집으로 걸어가다 떨어뜨린 핸드폰을 줍다 한강에 떨어져버린 사건. 어떤 만남. 그 사건을 블로그에 올린 것을 본 강하와의 만남, 그 만남으로 인해 생긴 곤과의 필연적인 재회.. 

 
필연 이라는 말을 여기에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고 하니, 어떤 우연들을 통해 (실로 웹상에서는 정보들이 아주 촘촘하게 얽혀있어서 그것들과 인연을 맺는 것 자체도 굉장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하면될까. 아마도 블로그를 통한 해류와 강하의 만남의 실제로 그들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사건으로 인해, 곤을 키우던 강하와 할아버지의 소식, 강하가 바라보고 느끼고 그렇게 했어야만 했던, 혹은 그렇게 했기때문에 후회할 수 밖에 없는 감정을 유일하게 전달받은 것은 세상에 해류 혼자 뿐 이었다. 그래서 해류는 곤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 자신의 시선으로만 가득차있는 곤의 과거에 한 시대를 함께했던 강하의 이야기를 전해주어야만 했다. 해명 아닌 해명, 어떻게 보면 변명.. 하지만 강하의 진심은 해류의 입을 통해 곤에게 온전히 전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더 극적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해류또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표현할 길이 없어 블로그라는 공간에 올렸던 것이고, 강하또한 곤을 찾지 못해 어디에도 그 시절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없었기에, 해류를 만난것은 일종의 블로그같은 소통의 공간을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결국 그들은 제 자신에게 적합한 공간, 사람을 찾아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제가 슬프다고 한 건, 저렇게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 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마다 삶의 무게가 비슷하구나 싶어서입니다."(51p)
 

곤에게서 원망같은 침울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유념시절부터 알아온 체념의 터득, 그리고 일말의 죄책감, 혹은 원망감 같은 감정들조차 세월에 씻겨 그 빛을 바란건지도 모르니깐 말이다. 그럼에도 곤에게선 어쩔수 없는 과거의 상실감이 풍겨온다. 기억나지 않는, 혹은 어떤 본능적인 제어로 인해 기억될 수 없는 유년의 기억, 강하의 집에서 함께살던, 어느정도의 체념으로 인해 나름 평온했던 날들.. 그리고 어떤 한 순간에 그 모든시간들을 영영 떠나보내야만 했던 순간.. 아마 그것들은 곤에게 거의 전부인 과거였을 테니깐 말이다.


해류를 통해 전해들은 강하의 이야기로 인해, 곤은 이제 자신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과거,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시간을 찾아간다.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인정하게 된다. 강하가 자신에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 순간의 이유들과 참회로 인해 그 시간들의 상처와 마주하고, 그 틈으로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 본디 강하와 할아버지가 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곤에게 있는 알수없는 상처를 갖고 곤란해 했었다. 그로인해 비밀스럽게 의원까지 부르게 되지만, 결국은 곤의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세상에 내놓는 것은 곤에게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조용히 그를 기를 길렀다. 그 상처를 혐호하거나, 억지로 덮어두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그것을 호기심으로만 바라볼 세상에서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곤은 뇌가 기억할 수 없지만 본능으로 기억할 아기때부터 지독한 삶을 살왔고, 그 결과마저 비참할 뻔 했다. 어쩌면 아가미는 그런 주류세상에 편입할 수 없는 곤이 다른세상에서 숨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셈이 아닐까. 그것이 생에 대한 본능으로 인해 제로에 가까운 확률로 우연찮게 발현된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다버려지다시피한 엄마로부터 상처받았던 강하는 그래서 그 곤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에게 숨겨야했던 그 상처, 아가미를 누군가에게 그대로 이해받고, 그리고 이해받았었다는 사실은 그의 상처를 더이상 덮어두지 않아도 되게끔 한다. 이제 곤은 그 상처로 숨쉰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여준, 하지만 그때는 알지못했던, 그리고 이미 늦어버린 그 시간을 향해 힘껏 거슬러 찾아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서지는 햇살을 오롯이 받아들여 다시 그것을 휘황찬란한 온갖색으로 부서뜨리는 그의 비늘은 아름답고도 슬픈 모습이었다.

 
<아가미>는 낯선 누군가를 통해 스러져가는 삶을 다잡고, 누군가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인정받고, 위로받고, 그로인해 다시 낯선 누군가를 구원해내는 이야기다. 그것은 인물간의 교차되지만, 모두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해류는 블로그를 그 통로로, 강하와 곤은 해류를 그 통로로 사용했듯, 구병모 작가는 글이라는 매체를 그 통로로 우리에게 슬프도록 눈부신 상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싫어' 라는 건 반드시 증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달리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아 싫다는 것뿐이지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에요. 그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방식 가운데 가장 범위가 넓은 거라고 봐요. (p166)


인간의 몸에 70%가 수분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통설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물고기처럼 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실로 모든 생물은 물에서 뻗어나왔다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은 그 사실을 너무 오래전에 잊어버린 종(種)중에 하나인 셈이다. 마치 곤처럼, 우리 과거의 시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을 잊어버린 우리들은 물에서 살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과거를 잊어버렸으니, 그 망망대해를 자유롭게 유영하지 못하고 두려워 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 그 불완전한 기억들과 과거를 온전히 이야기 해 줄 수 있게된다면.. 어쩔 수 없었던, 그래야만 했던, 그때는 볼 수 없었던 시간의 이면이 가진 상처들이 비로소 우리가 제대로 숨쉴 수 있는 틈이 되어줄 수 있는것 아닐까. 그렇게 제 안으로 들어온 생의 에너지가 다시금 우리들을, 스러지지 않고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덮고, 흩어진 상처들을 하나씩 이어나가면 마침내, 빛이 고인, 기적처럼 아름다운 완전체의 비늘을 마주할 수 있다. 구병모 작가는, 우리가 이시대에서 온전히 호흡하기 위해, 과거 한켠에 묻어둔 상처와 어떻게 해후해야 하는지 글을 다리삼아 이야기 한다.

헤엄쳐야지 별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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