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그 어떤 방송국의 카피처럼, 만나면 좋은 친구지만, 한편으로는 그 무게감과 몰입감에 압도당해서 길게 함께하지 못하는 것,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시(詩) 라는 것이  그렇다. 한번에 서너편을 읽기가 버겁다. 어떨땐 한편을 읽어도 그 하루의 상념을 다 소진하는 때가 있다. 그렇게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하루에 한가지에 온전히 빠져있을 수 있음에도, 그 감정들을 쪼개어 억지로 더 밀어넣는다는 것은 결국, 감각의 밀도를 들어낼 수 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 페이지에서 느낌 감정이, 오늘 하루만이라도 온전하게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다음 페이지에서 내가 받아들일 감정들은 그 다음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꾸준하게 조금씩 시를 읽어나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터인데, 그런 일에 여전히 서툰 내겐 읽다만 시집들이 어느정도 되는 것 같다. 시 한편 읽지 못했을 정도로 바빴을 때가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그래서일까, 잠시 만났다 오래 헤어진 그 언어들과 나는 아직도 너무 낯선게 사실이다. 인문분야와는 다른 이유로 시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시피한 내가 요즘 종종 시를 만나면서 당황스럽거나, 부적응했던 때는, 아주 깊게 개별화되고 산문화된 시들이었다. 내 삶이 시의 감성과는 너무 먼, 건조한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짧고 간략한, 그리고 항상 인류보편적인 이야기에서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지극히 사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마치 일상에서 흉내내보기도 할 만큼의 친근함을 갖고 있는 모습들 이었는데, 어쩐지 요즈음 내가 만난 시들은 개별적으로 구체화되고, 산문화 된 느낌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미리 얘기하자면, 나는 이런 시들이 더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고전적 프레임 안에서의 시들만을 기억하는 내게 현대의 변화무쌍한 형식의 시는 아직은 좀 적응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그것들에게서도 어떤 감정의 전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번 류시화의 세번째 시집에 실린 것들은 전부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내게, 류시화의 시는 뭐랄까. 내가 기억하는 이전의 시의 형태를 살짝 비껴감에도, 내가 적응하지 못한 현대 시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았다.(이것은 높고 낮음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다) 결코 보편적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깐, 모든 시들이 당연히 우리 사람의 마음과 삶의 희노애락의 순간과 빛나는 생명을 이야기 하겠지만, 그것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나와 더 유연하게 이뤄졌다고나 할까. 다시한번 말하지만 당연히 시의 수준을 왈가왈부 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내가 그 시에 뛰어들어, 틀리던 맞던 그 시가 가진 향을 음미하고, 거기서 내가 가진 향을 들여다보는 것이 수월했음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무척이나 개별적인 느낌인 것이다.

 

 

 

 

 

여기에 실린 시 한편 한편을 해체하다보면 좀 더 세밀하고 자세한 '분석' 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물론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류시화가 사랑하는 꽃이나 어떤 순간들, 관심의 방향은 나름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 맨 뒤의 이홍섭 시인의 글에서 충분하리만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니 어차피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그냥 뭉뚱그레한 느낌이라도 지금 여기다 적은 내 감정이 차라리 스스로에게 더 솔직할 것이다. 시에 대한 서평은 마치 시처럼 써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다 겨우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게는 지금 이 순간 조차도 쉽지 않은게 사실이니깐.

 

내가 생각하는 시는 우리를, 그 언어가 그려내는 시공으로 인도한다. 마치 액션영화를 보고 몰입하던 아이처럼. 시에 몰입하는 순간 모든 것을 시적으로 바라보며 말이다. 알아보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이 생명력있게 다가온다. 저 멀리서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불현듯 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못보던 것들을, 보고있음에도 초점 맞추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해준다. 잃어버린 시간을, 잊으려고 애썼던 사람의 등을 돌리게 한다. 고맙지만 얄미우니 아프면서도 잠시나마 따뜻해진다. 눈물겹도록 아름답다는 순간은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 우리가 고이 접어놓고 등돌렸던 감정, 순간, 사람들을 우리가 다시 언어가 할 수 있는 가장 간략한 표현을 통해, 혹은 가장 다층적이고 흐리멍텅한 묘사를 통해서. 정말로 이 류시화의 시집에 실린 시들이 거의 대부분 그랬다. 나는 이 짧은 글자들에게서 너무나 많은 감정과 사람과 순간을 떠올렸다.

 

한때는 술김에, 한 친구에게 '사람은(남자는) 두번 시를 쓰는데, 정확히는 사랑을 할때와, 사랑이 끝났을 때' 라는 헛소리를 한 적이 있다. 지그 생각해보면, 어차피 똥폼 잡는거 '여전히 누군가를,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모든 순간' 을 추가할껄 그랬다. 그것은 마치 더이상 숨길래야 숨길 수 없어서 결국 튀어나오고야마는 말 같은 것. 그 어떤 시 선집의 제목과 같이 누구나 시를 품고 살아가고, 시를 부화시킬수 있음에도, 우리는 마치, 이제는 잃어버려서 유전적으로 도퇴되어서 사라져버린 수많은 성질처럼 잊고 살아간다. 그것들은 우리가, 내가 되지 않고 여전히 계속 우리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했던 일들임에도 어느샌가 많은 욕망들에 휩쓸려서 창(窓)을 잃어 버린다. 시인들은, 그렇게 자기 스스로 잠궈놓고선 이제는 온갖 인위에 쌓여 나갈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가련한 영혼들을 밖으로 인도하는 자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우리가 높게 쌓아놓은 온갖 물질적, 근시안적 탐욕의 탑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일을 하며 말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순간 속 모든 꽃과 나무와 물과 흙과 태양과 하늘과, 누군가와, 그리고 그 순간이 남긴 상처, 그 상처가 뿌리가 되어 피어난 꽃, 그것을 아우루는 빛의 마법들일지도 모르겠다.

 

시는 대체 언제 어디에서 꽃피는 걸까. 시는 언제라도 마음 속에서 꽃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것 아닐까. 다만 살아가는 순간순간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공기의 온도, 작은 배려, 비범한 슬픔과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는 그것들이 마음이라는 대지 속에서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가 때가 되는 순간에 검은 잉크를 따라, 혹은 씁쓸함을 튕기는 혀 끝을 따라 이 고독한 세상으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이야긴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는 시는 역시 이런 것 같다. 사람에게서 태어나서, 사람을 이야기 하고, 헹여 사람이 부재하더라도 결국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것...

 

 

 

 

 

 

류시화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은 아마 중학교 때 일일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알게 되었다기 보다, 내 인지안에 그 이름을 겨우 올려놓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지금은 무엇에 대한 감상문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책도 그리 많이 읽지 않던 중학생이 쓴 감상문이 최우수라고 해봤자 무얼 대단했겠는가) 그저 한창 놀기좋아하던 때의 아이들 속에서 약간 더 성실한 글을 뽑아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이라는 책을 만났을땐, 마치 어제 일 일이기도 한 것마냥 류시화의 이 시집이 떠올랐고,  그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많은것들이 흐리고 낡고 불분명하지만, 왠지 그때의 모습이 그려질 것만 같기도 하다. 한번도 다시 찾아뵙진 못했지만 그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다. 내게는 그 99년도, 아직 이십대 후반도 되지 않았을 꽃다운 선생님의 그 얼굴 그대로.. 문득 사진을 찍고서 날짜를 다시 살펴보니 5월의 어느날이다. 스승의 날을 삼일 앞둔. 나는 그날, 그 선생님께 무엇을 남겼을까.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내게 분명 그 순간을 남겨주셨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서라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내 생에 처음으로 시집을 선물해 주신 선생님께 말이다. 철없고 투박한 남자중학생에게 선생님이 시를 선물한 이유는 어쩌면, 내가 많은 물음들과 관심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살아가길 바라셔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왜 시를 읽는지, 왜 그렇게 아플때 어줍잖은 시라도 홀로 써내려가야 했었는지. 시를 읽고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삶에는 시로써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문득 그때의 선생님은 누구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고 있었을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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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의 아폴론 3
코다마 유키 글.그림,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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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집에 놀러가는 것은 생각보다 꽤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늘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시간을 지낸 친구의 집에 처음 놀러가는 날은 이성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그 친구의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며 나의 공간과는 다른 공간을 상상하고 또 신기해했다. 그것은 분명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이 방문했던 친구와 친하게 지내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으니깐 말이다.(당연한 얘긴가;) 결국 개인의 공간을 내어주는 일은, 사소하지만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의 물리적 심리적 공간에 서로의 방문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3권의 이야기다.

 

얹혀사는 집에서의 친척들의 부담스러운 대화로 인해 카오루는 집을 나선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드럼스틱을 보게되고 크리스마스날이 센타로의 생일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생일선물로 드럼스틱을 고르던 카오루는 거기서 같은 목적으로 드럼스틱을 고르던 리츠코와 만나게 되고, 함께 드럼스틱을 나눠사고 길을 걷던 중 카오루는 충동적으로 리츠코에게 키스해버린다. (카오루는 생긴거와 다르게 무척이나..;;)

 

하지만 리츠코는 얼핏 눈물까지 보여버리며 사라지고, 그와중에 만난 센타로는 카오루가 나왔던 근본적인 이유까지 상기시키게끔 만들어 버린다. (정확히는, 그것을 카오루가 멋대로 상기해버린 것이지만) 어쨌든, 지금껏 센타로가 모든것을, 적어도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는 따뜻한 가정환경에서 남부럽지않게 자라고 있다고 생각한 카오루는 센타로에게 함부로 말해버리고, 이윽고 센타로는 카오루와 함께 자신의 집을 가게 된다. 사실상 2권까지, 카오루의 과거 이야기는 종종 간략히라도 언급되었지만 센타로의 이야기는 생략되었었는데, 드디어 센타로의 과거가 제대로 밝혀지는 것이다.

 

서로가 공유하는, 다르지만 또 비슷한 유년의 결핍을 공유함으로써 그 둘의 신뢰는 더욱 깊어지지만, 카오루는 여전히 리츠코의 냉담한 반응을 확인할 뿐이다. 재즈연습은 역시나 불협화음. 그러던 중, 카오루는 우연히 센타로의 동생과 함께하던 종이컵 전화상담(!)에 자신도 모르게 리츠코가 들어오고, 그로인해 카오루는 크리스마스의 일에 대해서 용서를 얻지만 확실한 대답(거절) 또한 듣게된다.

 

다리가 풀릴만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카오루는 도저히 연습에 나오지 못하고, 센타로는 그런 카오루의 집에 침입하게 된다. 그리고 일정보다 빨리 집에왔다가는 아버지에게 이혼한 엄마의 연락처를 받은 카오루는 엄마를 만나러 (어쩌다보니 센타로도 함께) 떠나게 되는데, 엄마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고, 잠시 신세를 지려했던 준이치 또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데...

 

 

매 권 마다 카오루의 돌발행동!에 깜짝깜짝 놀란다. 뭐랄까. 이거 곱상하게 도련님처럼 생겼어도 실속은 다 챙기는..(?) 현명하고 남자다운 남자랄까; 특히나 이번의 눈내리는 크리스마스날 카오루의 행동은, 그가 실은 정말로 대단한 캐릭터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다.

 

특히 이번화에서는, 아마 60년대의 시대적 배경이기에 좀 더 현실감 와닿는, 종이컵 통신에 관한 부분이 돋보였다. 리츠코의 미안함과, 카오루의 망연자실함이 얇은 실을 통해서 전달되는 풍경은 어찌나 아찔한지. 슬픈 장면이지만, 역설적으로 또 너무나 예뻐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아가 그 전후로 카오루와 센타로가 서로의 집을 예기치않게 방문하며 서로에 대해서 한발 더 이해하는 부분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공간을 열어준다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해준다.

 

엄마를 찾으러 간 카오루와 센타로는 과연 (카오루의)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사라진 준이치는 어디에 있을까. 이번에도 여러가지 의뭉점을 남긴채로 이야기는 끝이난다. 4권에서는 많은 이들이 새로 등장할 것 같은 예감이다.

 

말미에 수록된 약간은 으스스한, 그렇지만 푸근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짧은 사랑 단편도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나저나 애니메이션은 어떨지 궁금증 대 폭발 인데, 혹시라도 마음에 안들까봐 섣불리 보지도못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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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의 아폴론 2
코다마 유키 글.그림,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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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같이 모든 이들이 계급에 구분없이 평등하게 남녀노소 여럿이 지낼 수 있는 곳은 확실히, 여러가지 복잡한 관계들이 얽히기 쉽다. 굳이 사귀거나 하지 않더라도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데, 또 누가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본다던가 하는, 그리고 그게 이중삼중으로 꼬이거나 하는 얘기들 말이다. 그것은 학교 같은 반강제적 단체생활에서 특히 더 가능해서,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고 바보같기도 또 안타깝기도 하다. 그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카오루와 센타로, 그리고 센타로의 소꿉친구인 리츠코가 드디어 그런 얽히고 섥힌 관계의 중심에 들어오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언덕길의 아폴론>2권의 이야기다.

 

카오루, 리츠코와 함께 했던 나들이에서 자신이 도와준 여인에게 넋을 빼앗겨 버린 센타로는 그 이후로도 여전히 넋이 나가있는 듯 하다. 더군다나 등교길에 그 여인 '유리카' 를 만나, 같은 학교 학생인 것을 알게되며 센타로는 더욱 이상기후에 돌입하게 된다. 리츠코를 본격적으로 짝사랑하게 된 카오루는 유리카와 센타로를 이어주기 위해 더블데이트를 제안하지만, 유리카와 센타로의 다정한 모습으로 인해서 혼자서 숨죽여 상처받은 리츠코를 바라보게 될 뿐이다. 자신의 섣부른 행동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상처입혀버린 카오루는 유리카의 얘기를 서슴없이 꺼내는 센타로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게되며 둘은 잠시 냉전에 돌입한다.

 

결국, 일전에 준이치에게 들었던 'Someday my prince will come' 을 연습해 리츠코에게 선보인 카오루는, 내친김에 (참 생각보다 대담하게도, 그리고 멋지게도) 고백까지 하게되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아 보인다. 코다마 유키 작가는, 유리카에게 데이트 신청한 장본인으로 몰아세워진 카오루를 보며 리츠코가 언뜻 묘한 시선을 던지듯 보여지지만, 결국 그녀는 센타로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깐.

 

하지만 리츠코의 절대적인 노력으로 센타로와 카오루는 다시 화음을 맞추며 얼어붙은 감정을 녹인다. 그리고 준이치는 주일미군이 드나드는 술집에서의 재즈공연을 제안한다. 드디어 카오루, 센타로, 준이치, 그리고 리츠코의 아빠인 츠토무까지, 그들의 실력을 펼칠 기회가 온 것이다. 카오루는 리츠코에게, 센타로는 유리카에게 보내는 재즈의 선율을! 하지만 어째 둘의 사랑 모두 다 순탄하지가 않을 것 같은 전개가 펼쳐진다.

 

 

유리카 라는 여인에게 반해버린 센타로의 귀엽고도 진지한 모습, 그런 센타로를 지금껏 바라만 봐왔을 리츠코의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그런 리츠코를 좋아하는 카오루의 마음이 섬세하게 그려진 2권은, 리츠코의 마음이나 센타로의 마음 역시 빼놓을 순 없지만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입힘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카오루의 마음이 아주 잘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복잡한 관계를 (완벽하진 않더라도) 털어내고 재즈공연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들 또한 멋지다. 손님의 행패로 자칫 위기가 될 수 있던 그들의 공연을, 서로가 하나의 호흡으로 풀어나가는 모습은 잠깐이지만 하나의 밴드가 탄생하는 우여곡절을 보는 것과 같았다. 특히 각자가 할 수 있는 악기를 통해서 하나의 재즈를 완성해가는 모습도 일품인데, 그런것들을 대범한 컷구성과 연출력으로 잘 표현하고는 있어서, 음악과 그 현장의 분위기를 상상하는게 어렵진 않지만 아무래도 만화책으로는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느낄 수 없음이 아쉽기는 아쉽다. 언급된 음악을 듣고는 있지만 말이다. (물론 이런 아쉬움은 애니메이션에선 분명 채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내심 계속 하고 있다)

 

어쨌든, 재즈를 본격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에(?) 사용하게 되고, 첫 공연까지 무사히 마친 이들의 행보는 앞으로 어떻게 재즈와 연결되고, 그속에서 또 어떤 마음의 우여곡절을 겪을지.

 

아, 말미에 실린 단편 <인터체인지> 정말 정말 좋다. 책의 가치를 두배정도는 올려줄 수 있는 작품이다. 뒤에 단편들도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쏙 맘에드는지 모르겠다. (특히 <인터체인지>는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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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의 아폴론 1
코다마 유키 글.그림,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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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라고 보통 통칭되는 장르의 만화를 보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가.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하고 그 후에 만화책을 접했던 '후루츠 바스켓'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괜히 걱정스런 마음이 먼저 들었다. 너무 유치하진 않을까, 재미없는건 아닌가 하는 괜한 우려들. 하지만 그것들도 한장한장 넘겨보면서 쓸데없는 기후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소설-만화-애니메이션-영화의 변주가 매우 빈번한 일본이지만,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어 방영된다는 것은 분명 괜한 이유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꽤 괜찮은 감성을 지닌 청춘, 그리고 재즈의 이야기였다.

 

 

60년대의 일본, 항운관련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덕에 전학이 빈번한 미소년 카오루(안경 벗으면 완전 미소년이 되지만, 안경써도 충분히..짐작간다)는 언덕길 위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몇번의 전학을 겪었지만, 그중 5학년 때 교실에서 토를 한 이후로 카오루의 심리적 균형은 깨어진 듯 하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전학후에, 학급위원인 리츠코의 안내를 받던 도중 급우들의 요란한 시선에 메스꺼움을 느낀다. 그의 안식처는 바로 옥상. 하지만 옥상에는 센타로라는 같은반의 문제아가 잠을 청하고 있는 중. 그 순간 깨어버린 센타로와 얼떨결에 첫 대면을 하게된 카오루.

 

센타로는 카오루를 천사라고 부르고,(그 순간 뿐이지만), '순간 빛 속에 묻혀버린 것만 같았다.'라고 독백하는 카오루를 보고 있노라니, 이 둘의 첫 만남이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만화가 '야오이'물이다! 란 것을 확신해 버렸다. 그리고 당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야오이 물은 처음인데 이걸 어쩌나..하면서 말이다. 헌데 어쨌든 계속 읽어보니 그렇지가 않다.

 

놀란 마음으로 메스꺼움을 진정시켜버린 카오루는 당황하며 내려왔지만, 자신이 자신답게, 그리고 크게 심호흡 할 수 있는 옥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열쇠는 센타로에게 있기에, 카오루는 다시 옥상을 향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열쇠를 훔쳐놓은 상급자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센타로가 있었다. 그리고 카오루는 열쇠가 필요함을 센타로에게 어필하고, 센타로는 상급생 세명과 맞붙어 겨우 열쇠를 다시 돌려받는다. 카오루는 자신때문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열쇠를 받아내려 했는줄 알았지만, 센타로는 돈을 요구한다.(물론 장난으로)

 

어쩌다보니 앞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이 첫부분은 생각해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한 시작이다. 마치 야오이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카오루와 센타로의 만남이 얼마나 필연적인지 설명하듯 말이다. 카오루가 그동안 혼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그 옥상이라는 상징적 장소의 열쇠를 센타로가 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까워진 카오루가 다시 옥상을 올랐을 때 그를 우산없이 비 맞게 하는 센타로는, 카오루가 그동안 갖고 있던 심리적 불균형, 그 두려움의 각도를 조금 바꿔놓아주기 시작하는 인물인 셈이다. 타의였지만, 두려움의 우산을 던지고 차가운 빗방울을 맞으며 카오루는 이제 그 두려움의 껍질을 한꺼풀 벗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가 갠 뒤에 비스듬히 비추는 햇빛을 온통 독차지한 채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언덕길을 가볍게 내달려 간다. 녀석에게는 그 언덕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는 걸까? 그건 내가 본 적 없는 풍경일까?

 

청춘이든 아니든,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종종 닮고싶은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까운 사람일수도 먼 사람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와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 또한 흔하지만은 않은 일. 자신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그리고 더 많은 것이 불안한 청춘,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닮아가고 싶어하고, 자신을 초라하게 비추고마는 순간들이 산재해있다. 어쩌면 아버지 아래서 자라고, 지금은 친척들의 눈치를 받으며 살고있는 카오루에게있어 센타로는 그런 동경의 대상이다. 동갑내기임에도, 빛을 보여주는 존재. 그래서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 다행이도, 카오루는 친절한 리츠코에게 호감을 느끼고, 클래식 레코드를 파는 곳을 물어보다가 리츠코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에 초대받게 된다. 온갖 그 나이의 남자다운 엉뚱한 상상을 하던 카오루지만, 그 레코드가게의 지하에서 센타로와 만나 피아노와 드럼으로 화음을 맞추게 된다. 드디어 파릇한 청춘의 '재즈'와의 만남이다. 거기에 옆집사는 연상의 준이치 까지 등장, 리츠코에게 잘보이고 싶은 카오루를 비롯한 그들은 어느새 같은 노래로 같은 리듬을 타고 있다. 그리고 이윽고 리츠코에게 나름의 데이트를 신청한 카오루는, 과연?

 

 

신해철을 좋아해서 예전에 신해철이 발매한 재즈앨범을 구매해서 들어본 적이 있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그동안의 그의 음악스타일에 익숙해진 사람이 '재즈' 스타일 이라니, 거기다가 몇년 전 일이니,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리듬에 따분함 뿐이었다. 그래도 든 안전한 생각이, '나는 아직 재즈를 이해하기엔 어린가보다' 란 것 뿐. 리뷰를 쓰면서 책에 언급된 재즈곡을 몇곡 들었다. 글쎄, 솔직히 그렇게 큰 감흥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전에 들었던 감정보다는 분명 몇 걸음 더 나아가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큰 굴곡은 없지만, 잔잔하게 계속 들을 수 있는 음악. 계속계속 반복해서 듣고있어도 질리지 않다. 청춘과 재즈는 앞으로 또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처음엔 예기치 않은 장르인줄 알고 화들짝 놀라, 긴장하며 봤었지만,

한권을 다 읽은 시점에선 마음이 왠지 따뜻해지며 두근거린다.

그것은 비단, 그들이 이성간의 애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청춘이 만나는 사랑의 설레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결핍을 또래에게서 발견하려고 하는,

그래서 그런 결핍을 서로가 메워줄 수 있는, 우정이라는 큰 버팀목을,

누군가의, 지나간 어느때의 그 순간들을 참 예쁘게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끝에 실린 단편또한 그 하나의 작품의 가치를 톡톡히 하니, 장편의 긴 호흡과 단편의 여운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어 참 좋다.

 

센타로에게도 변화가 예상되는 2권에서 이들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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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가을 다녀온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올해 다시금 이곳에 풀어놓는다.. 지난해에 적었던 글을 다듬으며, 가급적이면 5.18 민주화운동의 기간 안에 올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6월이 되기전에 이곳에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올해는 또 언제 갈 수 있을까...

 

 광주는 내게,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이다. 하지만 무언가에 이끌린 것인지 그곳은, 언젠가는 꼭 한번 가고 싶었던 곳 이자, 가야만 하는 곳 이었다. 마치 미뤄놓은 숙제같기도 했던 이곳. 결과적으로 광주에서 3일간을 지내면서 나는 5.18 민주묘지와 자유공원 (그리고 반 즉흥적으로 비엔날레)을 다녀왔다. 아마도 여행전에 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영화 <오월애>와 소설 <꽃의나라>를 종종 떠올리곤 했다.

 

 



대학 때 무슨 근거로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터넷상에서만 큰소리를 쳐대는소위 '키보드 워리어'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물론 과제이지만, 분야 특성상 작품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작품에 나는 5.18민주화운동 때의 영상자료(영화 '꽃잎'에서 사용됐던) 들을 사용했다. 아마도 의도는, 실제로 앞에 서지도 못하면서 안에서만 부르짖는 이들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일 것.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 또한 민주주의나 정치에 대해 그만큼의 관심도, 행동도 없었으면서, 그저 자신이 온라인상에서 악성덧글 따위를 쓴 적 없다는 알량한 자부심으로 그런 작품을 만들었던 것 같다. (작품수준이야 뭐 형편없었지만) 어쨌든, 그때 나는 5.18 민주화운동과 본격적인.. 나름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 같다.

 

 

 


 - 그때당시 작품을 준비하며 스캔했던 한 광주민주화혁명 관련 사진첩의 한장면.(어떤 책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저작권 표시를 보류, 확인되는 대로 게제 예정) 화염방사기를 등에 맨 계엄군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띈다. 광주 MBC 사옥 화재사건도 으레 시민군이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있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다.

 

한창훈 작가의 소설 <꽃의 나라>에서도 시민군이 왜곡보도를 하는 방송국을 불태우려다 그만두었는데 반대편 군인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화재가 발생한 장면처럼 말이다. 또한 문화해설사분의 말대로, 그때의 방송국은 셔터들이 굳게 닫힌 상태에서 과연 시민군이 쉽게 화재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사진과같이 당시 화염방사기를 둘러멘 군인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군인들이 화재를 일으켰을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본다. -

 

 

 

어쨌든 그 즈음, 그 작품과 관련해서 과 동기 형은 내게 그런말을 했었다. '너는 광주에 한번 가봐야겠다' 고. 나 또한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과제를 하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과제를 했기 때문인진 정확치 않다. 그럼에도, 그때의 그 말, 그때의 생각을 여태껏 간직하고 잊기를 반복하다 이제서야 드디어 광주를 다녀왔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순간에 타올랐다 꺼진 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광주에 대하여 박학다식하게 아는것도 아니다. 살면서 무언가 툭하고 뇌리에 들어와, 가슴에 남았다가 또 어느샌가 모르게 사라지듯, 광주 또한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나또한 말로만, 그것도 간혹 정의를 외쳤을 뿐이다. 촛불문화제 현장에서는 채증용 카메라를 물대포인줄 알고 벌벌 떨며 뒤로 물러섰던 겁쟁이다. 하지만 그 언젠가의 내가 광주를 떠올렸던 것 또한 분명하다. 다른 이들과 내가 느끼는 광주가 무엇이 다를쏘냐 생각도 들지만, 또한 앞으로도 광주를 떠올리는 시간보다 잊고지내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광주를 시간의 저편에 박제시키지 않으려 애쓰고 싶었다. 실제로 5.18 사적지를 밟아보는 것이 보잘것 없는 행위일지라도,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큰 의미의 움직임이었다.

 

 

 

 

 

[국립 5.18 민주묘지]



5.18 민주묘지로 가는 버스는 두대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배차간격도 좋지 않다. 여튼 도착한 민주묘지 입구.. 드디어 이곳에 오게되었다는 안도감과, 뜻모를 기대감이 솟았다.

 

 


워낙 큰 곳이라, 차량이 통과하고 안내소가 있는곳을 지나서도 주차장 지나서 십분가량은 걸어간 것 같다. 물론 평일 대낮.. 한산했다. 햇볕이 어깨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민주주의는 저 건너편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주차장을 지나 '민주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묘지는 물론 그와 관련된 여러 추모 건물들도 양쪽으로 서있다. 시간상 햇볕이 강한데다가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시관이 눈에 띄어 일단은 그쪽으로 들어가서 민주화혁명에 대해서 복기한 후 묘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5.18 민주묘지를 다녀 온 후 다음날 자유공원을 갔었는데, 자유공원에서 민주묘지에 다녀온 것을 이야기 하며 거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들을 군데군데 포함시켰다. 또한, 약간의 시일이 지난 것들이라 약간의 기억의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큰 맥락으로만 이해해 주시길)

 

  



"추모와 계승은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전시관 안은 좀 시원했다. 역사의식을 갖고 찾아갔으면서 이렇게 일신의 안위를 찾는것이 조금 안이하게도 느껴졌지만, 덥다고 얼른 보고 오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이곳 광주를 오기전에도 큰 맥락은 알고있던데다 <오월애>라는 영화를 보며 <꽃잎>, <꿈의 나라>, <화려한 휴가>까지 재감상한 것과 더불어 한창훈 작가의 <꽃의 나라> 연재까지 보고 왔지만, 안에 들어가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복기한다면, 묘지를 둘러보는 시간이 더욱 값질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재밌는 점이 한두가진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여기 광주에도 상식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일이 진행중이었다. 이 문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아시아 문화전당을 위한 도청별관 철거문제 말이다. 시민군의 마지막 항전지이자, 도청 가운데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되고, 실제로도 가장 많은 시체가 나왔던 도청 별관을 철거하고 그곳에 아시아 문화전당을 세운다니. 여기 전시장에 두분이 계셨는데, 철거문제에 대해서 어쩌다 두번을 각각 따로 물어봤더니, 조금씩 이야기가 달랐다. 결과적으론 '부분철거'가 맞는 것 이었다. 사적지를 보존하는 일은 외국에서도 상식적인 일이고, 부서지고 허물어진 것을 복구하느라 수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이런 5.18민주화운동에서 그러니깐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건물을 손댈 생각을 하다니.. 이런 발상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지역발전이 그렇게나 중요한 것인지. 설령 그것들이 그 어떤 금전적 이익이나 국제적 명성을 가져온다고 해도, 잃어버릴 민주화 정신과 비견할 수 있을까. 이 과거의 치부를 허물어뜨림으로써 그것들의 기억이 훼손되는 일은 결국, 우리는 그 뼈아픈 역사를 잃어버리는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선총독부 건물과 같은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반복 뿐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인간의 본성과 흐름이 큰 변화가 없을 뿐 아니라, 과거의 치부들을 너무 쉽게 잊는다는 뜻은 아닐까.

 

김태일 감독의 독립 다큐멘터리 <오월애>에서의 인터뷰를 보면, 그때 시민군에 참전했던 사람 조차도 도청 별관의 철거는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광주시 전체가 5.18의 정신이 깃든 곳이지 도청 별관에만 그것이 국한되진 않는다는 것.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관념적으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 무관심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6.25 전쟁 발발 년도도, 통일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 보지 않는 세대가 도래하는 시대에, 사라져가는 사적지는 우리의 기억, 민주주의를 위해 그들이 흘린 피에 대한 망각을 부채질할 뿐이다. 모든 사적지는 가능한 보존되는 동시에, 광주 전체가 민주화의 정신이 깃든 곳이란 생각을 해야하지 않을까.

 

 

 



전쟁 이후, 죄없는 사람들에게 유례없이 쏟아졌을 총알들...

 

전시장에는 그때의 증거들 및 여러 인터랙티브 영상과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때 군인들이, 또 시민군들이 사용했을.. 총알들.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기위해 몸부림쳤던 날카로운 흔적들이다. 이것들에 스러져간 무고한 시민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먹먹해지나. <꽃의 나라>에서 주인공을 스쳐갔던 총알, <오월애>에서 다리를 절으셨던 아저씨를 관통했던 총알의 모습이었다.

 

5.18 때 최초로 희생된 시민은 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공원에서 안내해주시던 문화해설사분의 설명에 의하면, 군인들의 명령과 제지를 알아듣지 못한 농아가(차에 타란 것을 알아듣지 못했고, 어찌하여 자신이 농아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되려 더 큰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후, 시름시름 앓다가 하루 혹은 이틀 후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영화<화려한 휴가>에서도 등장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죽을만큼 맞았다는 것....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다...

 

 

 


아무 죄 없는 주검 위의 태극기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삽시간에 넘쳐났을 시체들. 그들을 모두 수용할 관도 부족해서 그저 태극기나 천따위로 덮어둔 시체도 많았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몽둥이가 날아왔고, 총알이 날아왔다. 태극기 아래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매일 같이 했을 군인들은 자국의 시민들을 몽둥이와 대검, 그리고 총으로 무참히 짓밟을 것을 예측했을까. 국민을 지키지 않는, 오히려 국민을 살해하는 군대가 태극기에 대고 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도청의 태극기는 그런 군대를 내려다보며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태극기에 남아있는 시체들의 혈흔은 곧 그 아무 죄없는 시체들을 감싸며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자유공원에서의 문화해설사 분에 말에 의한다면, 더운 날에 제대로 안치되지 못한 시체들이 부패하여 관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관이 터졌다고 한다. 그때 당시 시체를 차가운 곳에 안치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고, 그럴 공간도 없었을 것이다. 관조차 없어서 천이나 비닐로 덮어두어야만 했던 시체가 많았으니깐. 실제로 이 전시장에는 그때 시체들을 덮었던 비닐도 전시되어 있다.

 



 

당신은 광주를 기억하는가?

 

 이 전시공간에 기록되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말 중에서, 한 외신기자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들이 죽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라고 했던..

 

 


 

많은 이들이 봤을 유명한 사진이다. 장례를 치를 가족이 없어 이 조그마한 아이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있어야만 했던.. 자유공원의 문화해설사분의 말에 의하면, 실제 이분은 이 사진으로 인해 좋은 것 보다는 안좋은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진정성 없는, 혹은 일회성과 흥미위주의 관심과 취재로 그 상처를 후벼판게 아닐까... 그렇다면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법 또한 무턱대고 경솔한 마음으로 할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광주는 결코 그들이 원하던 대로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오랫동안 총칼을 들이댔지만, 이때처럼 무자비했을까. <오월애>에서 인터뷰한 광주 시민들이나, <꽃의나라>에서 대사들을 보아도 동란때도 이렇게 잔인하진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믿을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우리의 과거다.

 

자유공원의 문화해설사 분의 말에 의하면, 도청에서의 마지막 항전 때 시민군은, 군인들이 정문으로 올 것이라 예측하고 정문에 성인들을 배치하고 후문에 학생들을 배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인들은 후문을 집중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그로인해 학생들이 많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병원에서 헌혈하고 나온 여학생이 십수발의 총알을 맞고 사망하거나, 임산모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즉사하거나, 아기를 살리려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엄마, 관을 구하러 광주를 나가던 버스가 계엄군에 무자비하게 진압된 일, 같은 계엄군 간의 오인사격에 대한 화풀이로 멱을 감던 아이들이 있던 곳에 총격을 한 점 등 사진에 언급된 것 외에도 수많은, 어처구니 없는 비극들이 존재한 곳이 그때의 광주였다.

 

김영삼 정부에 이르러 이 광주민주화운동이 그나마 인정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도 김영삼 정부가 제대로 나서서 그런것도 아니다. 처음엔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늬앙스의 어물쩡한 조치에서, 여러곳에서 비난이 빗발치자, 전/노 전(前) 대통령들의 구속과 더불어 지금의 이런 보존자료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복원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전까지 이 광주의 희생자들의 가족들은 변변찮은 묘지에다 제대로 참배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심지어 이 민주묘지가 지어지기 전, 구묘지가 있을 때는 국가에서 돈을 쥐어주고 시체를 매수하거나 강탈하며 희생자의 수를 줄이려 했었다고 한다. 자신의 자식, 부모, 친구, 형제 들이 아무 죄도 없이 살해되고, 불구가 되고, 혹은 실종되었는데, 십수년이 지나도록 묘지에 제사한번 제대로 못지내고 여러 오명을 뒤집어 썼었던 것이다... 그때의 한이 과연 죽어선들 사라질 수 있을까..



 

나가는 길목엔 포스트잇을 적어서 넣어두는 투명한 긴 통이 있었다. 수많은 포스트잇들에 각자의 의견, 바람들이 적혀진 채로 그 안에 있었다. 어줍잖은 짧은 글을 적고 나왔다. 할말이 막혀서 겨우 토해냈다... 후에 마지막으로 약 20분 가량 되는 영상을 본 후 이곳을 나왔다.

 

자유공원의 문화해설사 분에게 이 얘기를 해드렸더니, 전 정권때까지는 이것들이 투명한 아크릴 통이 아닌, 더 개방적으로 전시되었다고 한다. (아마 벽에 붙였던가 그랬다고 했던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되고, 현정부에 대한 비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이것들이 모두 아크릴통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통과하기 전, 기도를 하고, 예를 올렸다. 향로에는 계속해서 향이 피워져 있었을 것이다. 이 추념문을 지나가는 것은 어떤 결의를 다지게 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내가 너무 극성떠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착잡하면서도 경건한 마음은 분명했다. 다시금 그들을 떠올렸다. <오월애>에서 보았던 그 가슴 아픈 장면들을 직접 확인해야 했으니깐.

 



어딘지 낯이 익은 모습이다. <오월애>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줬던 아주머니들이 생각났고, 그 당시의 그 사진이 떠올랐다. <꽃의나라>에서 주인공이 먹던 주먹밥이 떠올랐다. 정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내 가족, 내 친구들을 지키고, 내 한 목숨지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또 목숨을 바쳐야만 했던 그때. 모든 상가들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집을 비워도 도둑질이나 강도사건도 없었다는 그 때.. 광주에서 그때를 살아왔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때의 연대를 아름답게 기억했다. 아무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해도 (설령 독도는 우리땅이다 란 말을 해도)반대하고 역성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 이 시대에, 정말로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던 그 시절, 그곳... 그런 아름다운 연대가 앞으로는 꽤나 쉽지 않으리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2008년도만큼만 모인다면 대성공이 아닐까..

 



사진에 다 담지도 못했던, 엄청난 숫자의 묘지들

 

나는 이것들을 가능한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담아가고 싶었다. 좀 더 성의있게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중 한명이 되고 싶었다.

 

<오월애>에서 내가 울컥했던 장면중의 하나는, 어느 묘지 앞에 있던 웨딩드레스 입은 여성의 영정 사진이었다. 그 웨딩사진을 걸어놓을 정도의 신혼부부가 겪은 그 슬픔. 그 장면은,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쌓여있던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얄팍한 호기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5.18 묘지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은 그 장면이었다.

 

물론 내가 기억했던 영화 <오월애>속 모습과 실제의 모습은 달랐다. 영화에서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이렇게 새로 이장되고 꾸며진게 아닌, 구묘역 이었으니깐. (이때 당시에는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어쨌든, 마치 관광처럼 뒷짐지고 이곳을 스윽 하고 지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생각으로 왔던 곳도 아니었다. 해 지기전에 이동해야 했기에 욕심만큼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꽤 긴 시간을 이 묘지를 걸어다니며 뒤에 적힌 묘비 글을 하나하나 읽었다.

 

묘지 배치가, 높이로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맨 아래에는 그 열흘의 기간동안 희생된 분들이 안장되어 있었고, 위쪽에는 그당시 투옥되거나 부상을 입고선 후에 돌아가신 분들의 묘지가 있었다. 사진의 반대편, 그러니깐 입구의 정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못한 무명열사의 묘도 따로 묶어서 배치되있었다.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묘비를 하나하나 지나면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았다. 가장 답답하게 했던것은 고등학생들이나 중학생, 혹은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의 묘지였고, 가장 가슴 저리게 만들었던 것은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글이었다. 부모를 보낸 자식들의 마음또한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겠냐만은,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심정은 정말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오지 않는 자식을 오랜시간 기다리다, 이제 내가 너의 곁으로 가야할 것 같다는 한 부모의 글을 보고 새삼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 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이들도 있었고,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어지는 글도 있었다. 웨딩드레스 입은 아내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놓아야만 했던 남편은 묘비 뒤에 이렇게 글을 써 놓았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누군가의 묘비 뒤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자유공원에서의 문화해설사분의 말에 의하면 이 청년의 아버지가 광주에서 있다가 이런 움직임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은 그곳으로 향하려 했고, 그것을 막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 청년과, 아버지의 심정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순 없을 것이다...

 

그래고 끝끝내 나는, 내가 '지금 이 병든 역사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만 했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저위에 있는 동그란 돌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마주보고, 단단하게 결합해서 그것을 지키려하지 않는다면, 뒷짐지고 방관한다면, 언젠가 틈이 벌어져 우리 머리위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사실상 작금의 시대는 민주주의라 하기도, 아니라 하기도 미묘한 시대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지금은 무척이나 '세련된' 독재가 이뤄지고 있는 시대라 생각한다. 군사독재의 시절을 넘어, 군복을 벗고, 정장을 입은 독재정치 말이다. 하지만 이또한 이 나라의 국민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란 것도 부정할 수 없음이 답답할 따름이다..


 

 

 

 

 

[5.18 자유공원]


김대중 컨벤션센터역에서 내려 역무원들에게 5.18 자유공원 가는 길을 물었다. 안내책자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대략적인 경로는 알고 있었기에 지하철역까지는 무리없이 내렸지만, 아무래도 초행길이라 조금 막막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무원들은 이 자유공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 싶었다. 적지않은 시간동안 이 자유공원 가는길을 서로 찾으며 시간을 보냈다. 결국 그 역에서 근무하는 분들중에서 약간 직급이 높으신 분에게 '기념공원을 말하는게 아니냐, 거기라면 여기가 아닐것이다' 라는 말을 듣고선, 내가 약간 울컥한 기분으로 '여기에 있다구요!' 라고 말해버렸다. 왜 광주사람들, 더욱이 여기 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이 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적지(5.18 자유공원)의 존재와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한지, 순간 격한 감정이 몰려왔던 것이다. 광주 사람들조차 이것들을 잊어간다면 대체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아마 이전날 다른 곳에서도 이런 사적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을 보고서 답답했었던것 같다. 이때 약간 흥분해서 그렇게 얘기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 자유공원은 대체 어디있었나? 역에서 도보 직선코스로 약 15분 가량, 버스 1~2 정거장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김대중 컨벤션센터와 한 블럭, 신호등 하나 차이의 거리에 있던 5.18 자유공원. 정면에는 전시관이 있고 좌측에는 상무대 영창/법정을 복원한 곳이 있었다. 사람들의 무관심한 인식만큼이나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상시로 근무하는 인원도 굉장히 적어 보였다. 웬일인지 김대중 컨벤션센터 주변부터 이 자유공원 안까지 경찰병력(전경)들이 많이 있었다. 우선은 정면에 보이는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민주묘지와 민주묘지 내에 있는 전시관에 비한다면 이곳의 규모나 전시물품은 꽤 협소했다. 특히나 그곳들을 이미 둘러본 후여서 그랬는지 관람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사실 내겐 상무대 영창/법정을 복원한 곳이 더 가보고 싶었다. 언젠가 한번, 책과 티비에서 본 후로 이곳또한 광주에 와서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자유공원 원형보존 하라' 라는 현수막이 있는 것, 관리가 깔끔하게 되지 않는 점등을 미뤄보면, 이곳에도 무언가 개발에 대한 계획이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지만, 깜빡하고 물어보질 못했다..

 

좌측에 있는 상무대 복원현장에 들어가기 전 안내소를 찾았다. 일단은 안내소 안으로 들어가서 문화해설사 분의 설명을 듣게 되었는데, 거기엔 경찰간부로 보이는 분이 한분 앉아계셨다. 왠지 모르게 영 탐탁치 않았지만 일단은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문화해설사분에게 대략적인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여행에 관한, 경찰 병력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눴다. 알고보니 경찰 배치의 원인(!)은 김대중 컨벤션센터에 현 대통령이 와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전/의경 들이 (지방에서까지 올라와서) 이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부터 자유공원까지 와있던 것이었다. 솔직히 속으로 '아, 참 xx같은 타이밍에 맞춰왔구나' 싶었다.

 

얼마 후 경찰 간부가 호출되어 나가서, 야외로 나가 본격적인 안내를 받으려 했지만 점심시간이 다 되어 애매한 시간이었다. 해설사 분께 괜찮다는 밥집 명함을 하나 받아들고 점심을 먹으러 다녀왔다. 후에, 해설사분과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안내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그저 듣는쪽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질문을들 던지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원래는 현재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에 있던 것들을 이곳으로 옮겨서 복원시킨 이곳, 실제 이곳에 시민들이 잡혀와서 영창에 들어가기까지 약 4시간이 소요됬다고 한다.


두들겨 맞고 차에 실려와, 내린후에 또 이렇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실제 도보로 몇분 거리의 공간을 사진에서 보는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수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그 시간동안 얼마만큼의 폭행이 가해질 수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케 했다. 처음에 들어간 곳은, 끌고온 시민들을 조사한 곳 이었다. 건물과 인형으로 복원해놓은 현장에 가까이 가면 인터랙티브 사운드가 재생되는 방식이어서, 바깥에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그곳을 둘러보고 나왔다.

 


다음은 영창과 식당, 목욕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날도 햇볕은 눈이부셨다. 

 


영창의 모습이다. 실제 그때의 나무바닥과 새로 복원하며 설치한 나무바닥이 이어졌다고 한다. 안쪽의 무광택의 부분은 그때 당시의 바닥이라고 한다. 이 수용소에 적정인원의 몇배가 수용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구타 또한 계속되었다고 한다. 아마 영화 <오월애>에서 시민군에 참가했던 한분이 앉아서 담배를 태우며 돌아보던 곳이 이곳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꽃의 나라>에서 주인공의 친구였던 인호가 군인들에게 잡혔다가 도망쳤던 부분도 떠올랐다.


고문하는 장면을 재현해놓은 식당의 모습이다. 지독한 구타가 행해지는 마당에 당연히 밥이나 제대로 먹였겠는가. 문화해설사 분의 설명에 따르면, 붙잡혀온 시민들에게는 아주 극소량의 식사만을 제공해서, 굶주려 있던 시기에 군인들이 잠시 담배피러 간 사이, 붙잡혀온 한 시민이 쓰레기통에서 군인들이 먹고 버린 밥을 주워먹다가 걸려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은후에 물구나무를 서서 소위, 몸의 모든 구멍으로 먹은 것들을 쏟아내야 했다고 한다. 당사자는 그때 차라리 죽여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목욕탕 내부의 모습. 그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초단위' 였다고 한다. 훈련소 시절에 10분? 혹은 5분 가량의 시간에 목욕을 한적은 있지만, 이것은 그것과 당연히 비교할 것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이 회상하길, 더운날, 비좁은 곳에서 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이렇게 잠깐이라도 몸을 적시고 밖에 나가 몸에 햇볕을 쬐일 수 있는 순간이야말로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이곳들을 지나며, 문화해설사 분의 말을 들을수록..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 하는 내게, 문화해설사 분은 그들 또한 일종의 피해자임을 이야기 해주셨다. 그리고 대화는 법정에 가서 이어지게 되었다.




무자비하게 폭행한 시민들을 잡아와 재판같지도 않은 재판을 치렀던 법정. 이곳에서 (없는)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법정 밖 (혹은 바로 옆에서) 구타를 당한후에 다시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 재판같지 않은 재판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이슬로 사라지거나, 오랜 시간을 투옥되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 죄없는 무고한 이들이 너무도 억울한 재판을 받아가며 일방적인 죄를 강요받았을 장소에서, 나는 문화해설사 분과 앉아서 용서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바깥을 걸으며 했던 이야기를 이곳에서 이어하기도 하고, 민주묘지에 갔던 이야기를 나누며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방문자 안내에 소극적이 되어버린 민주묘지, '님을 위한 행진곡'도 부르지 못하게 하고 '방아타령'을 부르려 했던(이쯤되면 기가막혀 말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5.18 추모행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나는 그때의 그 군인들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얘기했다. 그 군인들 또한, 전경들이 시위대들에게 일정라인이 밀리면 부대복귀해서 구타를 당하듯, 뒤로 밀리고 후퇴하는 순간 엄청난 폭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진압작전이 있기 몇달전부터 실제를 방불케하는 진압훈련으로 항상 피떡이 되었다고도 한다. 폭력과 야만에 찌든 그들도 결국은 피해자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피해자였다고 할 지언정 그들은 동시에 가해자라는 딱지를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지은 참혹한 구타와 만행은 결코 되돌리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했다. 사과하지 않은 이들을 용서할순 없는 것이다. 최소한의 용서 또한 죄지은 자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과했을때 가능한 것이니깐. 그런 내게, 오히려 그 분은 여지껏 그 죄책감으로 고통에 살고있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 하며, 그들을 용서해야 함을 이야기 조용히 이야기 해주셨다.

 

타지인인 내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데, 정작 그 시간을 살아온 광주시민이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려 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로서는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마 삼십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그들은, '왜' 라는 이유가 빠진 그때에 대해서, 나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이쪽 자유공원으로 오기전에는 민주묘지에서 관람객들에게 해설을 했었다고 하는 그 문화해설사분은, 그 당시의 실제 피해자에서부터, 아무 연고도 없는데 와락 눈물을 터뜨린 교사,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낌으로써 추념문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주변을 돌고 돌았던 계엄군 출신의 누군가를 만났었으니깐.

 

사실 내가 무어라고 그들을 용서하고 말고를 할 것인가. 용서의 여부는 어차피 내 권한이 아닐터. 다만 내가,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분명한 것은, 이 피맺힌 과거,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이 과거,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기억하는 일이다.

 

텅빈 법정을 지키는 모형들 뒤,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광주에 대해 그 어느때보다 깊은 생각,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문화해설사 분과 내가 앉아있는 그 공간 속 무거운 공기가 돌고 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부담스럽지 않은, 진정 뜻깊은 시간이었다.

 


 

용서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시기상조일 것이다.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수두룩 하고, 여전히 피해자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계엄군이 사망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야산등지에 암매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실종자들의 행적도 여전히 많은 수가 오리무중의 상태다. 더불어 광주민주화운동은 아직도 집단발포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은 신기한 코미디다. 위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그 모든 비극의 '주최자'는 여전히 잘살고 있고, 심심하면 나와서 한마디 하는 뻔뻔함을 가지게끔 놔두는 이 나라는 참으로 신기한 나라가 분명하다. 어쩌면 <꽃의나라>의 표현대로 '이상한 나라' 다.

 

영화<오월애>에서 인터뷰 했던, 총을 맞은 후 많은 수술 끝에 현재 다리를 절며 꽃집을 운영하는 아저씨는 예전에 수술을 한후, 비가오면 바깥에 평상을 놔달라고 했다고 한다. 거기에 누워 비를 맞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몸에서 끓어오르는 수많은 울분과 슬픔을 그는 그렇게 씻어내야만 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시대에 살아가면서도 잊고 지내는 우리들의 무관심이 그들을 더욱 서럽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닐까.'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는 인정하기 싫지만, 역사적으로 인정될 수 밖에 없는 말처럼, 우리는 그들이 흘린 피를 먹고 자란 이 대한민국에 살고있다.

 

 

다녀온지 적잖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글을 적는동안 몇번을 울컥거렸다. 어쩌면 물리적 총알은 이미 우리에 앞서 80년 5월의 광주시민들이 모두 맞아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것이다. 지금도 그 후유증과 고통에 시달리며 그 오랜 시간을 견뎌왔음에도 자살을 선택하고, 먼저 떠나보낸 가족과 친구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그 광주시민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만큼의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 버스 위에서 물대포를 맞아가며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에게, 진압부대의 폭력에 머리가 다쳐 피가 흥건한 붕대를 매고 있으면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던 소녀에게 빚진 것이다. 앞으로는 더이상 빚지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 미천한, '기억'밖에 없으니깐..

 

언제쯤, 그들에 의해 쥐어진 자유로 그들을 매도하는 이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언제쯤, 그들이 끝내 놓지 않았던 자유의 숭고함을 가슴에 깊게 새기며 온전히 계승할 수 있을까. 

 

자유와 민주주의를 빚진 이땅의 모든 이들이, 그들을 잊지 않기를..

 


언젠가는,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민주 세상이 마침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적어도, 80년 5월 그날을, 광주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들을,

그리고 미워해야 할 그 많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내가 믿는 것은 미움이다. 미움의 힘이다. 우리가 이렇게 앓고 있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보다, 미워할 것을 분명하게 미워하지 않아서 생긴 게 더 많기 때문이다." - 한창훈 <꽃의나라>中

 

기억하자.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만큼의 자유, 민주주의는 그때 그들이 스러지며 흘렸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졌음을.. 사는게 팍팍해서 잠시 잊는다해도,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더듬어가고, 읽고, 찾고, 보며, 다시 기억하자. 내가 잊으면 네가 이야기 해주기를, 네가 잊으면 내가 이야기 해줄 수 있게...

 

 

 

 

최정운 (교수)저, <오월의 사회과학>

덧, 이제 6월에는, 얼마전에 지인에게 선물받은 이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

그들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서 한껏 더 성숙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도 읽을 책들이 너무나 많고, 알아야 할 것들도 많다. 그리고 들려줘야할 누군가도 많다.... 그리고 아래는 내가 알고있는, 5.18 혹은 80년대의 사회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 소설/만화들이다.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원더보이>

 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강풀 <26년> 세트 

 최규석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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