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를 하나하나 지나면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았다. 가장 답답하게 했던것은 고등학생들이나 중학생, 혹은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의 묘지였고, 가장 가슴 저리게 만들었던 것은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글이었다. 부모를 보낸 자식들의 마음또한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겠냐만은,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심정은 정말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오지 않는 자식을 오랜시간 기다리다, 이제 내가 너의 곁으로 가야할 것 같다는 한 부모의 글을 보고 새삼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 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이들도 있었고,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어지는 글도 있었다. 웨딩드레스 입은 아내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놓아야만 했던 남편은 묘비 뒤에 이렇게 글을 써 놓았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누군가의 묘비 뒤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자유공원에서의 문화해설사분의 말에 의하면 이 청년의 아버지가 광주에서 있다가 이런 움직임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은 그곳으로 향하려 했고, 그것을 막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 청년과, 아버지의 심정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순 없을 것이다...
그래고 끝끝내 나는, 내가 '지금 이 병든 역사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만 했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저위에 있는 동그란 돌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마주보고, 단단하게 결합해서 그것을 지키려하지 않는다면, 뒷짐지고 방관한다면, 언젠가 틈이 벌어져 우리 머리위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사실상 작금의 시대는 민주주의라 하기도, 아니라 하기도 미묘한 시대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지금은 무척이나 '세련된' 독재가 이뤄지고 있는 시대라 생각한다. 군사독재의 시절을 넘어, 군복을 벗고, 정장을 입은 독재정치 말이다. 하지만 이또한 이 나라의 국민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란 것도 부정할 수 없음이 답답할 따름이다..
[5.18 자유공원]
김대중 컨벤션센터역에서 내려 역무원들에게 5.18 자유공원 가는 길을 물었다. 안내책자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대략적인 경로는 알고 있었기에 지하철역까지는 무리없이 내렸지만, 아무래도 초행길이라 조금 막막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무원들은 이 자유공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 싶었다. 적지않은 시간동안 이 자유공원 가는길을 서로 찾으며 시간을 보냈다. 결국 그 역에서 근무하는 분들중에서 약간 직급이 높으신 분에게 '기념공원을 말하는게 아니냐, 거기라면 여기가 아닐것이다' 라는 말을 듣고선, 내가 약간 울컥한 기분으로 '여기에 있다구요!' 라고 말해버렸다. 왜 광주사람들, 더욱이 여기 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이 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적지(5.18 자유공원)의 존재와 위치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한지, 순간 격한 감정이 몰려왔던 것이다. 광주 사람들조차 이것들을 잊어간다면 대체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아마 이전날 다른 곳에서도 이런 사적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을 보고서 답답했었던것 같다. 이때 약간 흥분해서 그렇게 얘기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럼 자유공원은 대체 어디있었나? 역에서 도보 직선코스로 약 15분 가량, 버스 1~2 정거장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김대중 컨벤션센터와 한 블럭, 신호등 하나 차이의 거리에 있던 5.18 자유공원. 정면에는 전시관이 있고 좌측에는 상무대 영창/법정을 복원한 곳이 있었다. 사람들의 무관심한 인식만큼이나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상시로 근무하는 인원도 굉장히 적어 보였다. 웬일인지 김대중 컨벤션센터 주변부터 이 자유공원 안까지 경찰병력(전경)들이 많이 있었다. 우선은 정면에 보이는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민주묘지와 민주묘지 내에 있는 전시관에 비한다면 이곳의 규모나 전시물품은 꽤 협소했다. 특히나 그곳들을 이미 둘러본 후여서 그랬는지 관람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사실 내겐 상무대 영창/법정을 복원한 곳이 더 가보고 싶었다. 언젠가 한번, 책과 티비에서 본 후로 이곳또한 광주에 와서 꼭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자유공원 원형보존 하라' 라는 현수막이 있는 것, 관리가 깔끔하게 되지 않는 점등을 미뤄보면, 이곳에도 무언가 개발에 대한 계획이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지만, 깜빡하고 물어보질 못했다..
좌측에 있는 상무대 복원현장에 들어가기 전 안내소를 찾았다. 일단은 안내소 안으로 들어가서 문화해설사 분의 설명을 듣게 되었는데, 거기엔 경찰간부로 보이는 분이 한분 앉아계셨다. 왠지 모르게 영 탐탁치 않았지만 일단은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문화해설사분에게 대략적인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여행에 관한, 경찰 병력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눴다. 알고보니 경찰 배치의 원인(!)은 김대중 컨벤션센터에 현 대통령이 와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전/의경 들이 (지방에서까지 올라와서) 이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부터 자유공원까지 와있던 것이었다. 솔직히 속으로 '아, 참 xx같은 타이밍에 맞춰왔구나' 싶었다.
얼마 후 경찰 간부가 호출되어 나가서, 야외로 나가 본격적인 안내를 받으려 했지만 점심시간이 다 되어 애매한 시간이었다. 해설사 분께 괜찮다는 밥집 명함을 하나 받아들고 점심을 먹으러 다녀왔다. 후에, 해설사분과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안내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그저 듣는쪽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질문을들 던지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원래는 현재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에 있던 것들을 이곳으로 옮겨서 복원시킨 이곳, 실제 이곳에 시민들이 잡혀와서 영창에 들어가기까지 약 4시간이 소요됬다고 한다.
두들겨 맞고 차에 실려와, 내린후에 또 이렇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실제 도보로 몇분 거리의 공간을 사진에서 보는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수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그 시간동안 얼마만큼의 폭행이 가해질 수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케 했다. 처음에 들어간 곳은, 끌고온 시민들을 조사한 곳 이었다. 건물과 인형으로 복원해놓은 현장에 가까이 가면 인터랙티브 사운드가 재생되는 방식이어서, 바깥에서 간단한 설명을 듣고 그곳을 둘러보고 나왔다.
다음은 영창과 식당, 목욕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날도 햇볕은 눈이부셨다.
영창의 모습이다. 실제 그때의 나무바닥과 새로 복원하며 설치한 나무바닥이 이어졌다고 한다. 안쪽의 무광택의 부분은 그때 당시의 바닥이라고 한다. 이 수용소에 적정인원의 몇배가 수용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구타 또한 계속되었다고 한다. 아마 영화 <오월애>에서 시민군에 참가했던 한분이 앉아서 담배를 태우며 돌아보던 곳이 이곳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꽃의 나라>에서 주인공의 친구였던 인호가 군인들에게 잡혔다가 도망쳤던 부분도 떠올랐다.
고문하는 장면을 재현해놓은 식당의 모습이다. 지독한 구타가 행해지는 마당에 당연히 밥이나 제대로 먹였겠는가. 문화해설사 분의 설명에 따르면, 붙잡혀온 시민들에게는 아주 극소량의 식사만을 제공해서, 굶주려 있던 시기에 군인들이 잠시 담배피러 간 사이, 붙잡혀온 한 시민이 쓰레기통에서 군인들이 먹고 버린 밥을 주워먹다가 걸려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은후에 물구나무를 서서 소위, 몸의 모든 구멍으로 먹은 것들을 쏟아내야 했다고 한다. 당사자는 그때 차라리 죽여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목욕탕 내부의 모습. 그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초단위' 였다고 한다. 훈련소 시절에 10분? 혹은 5분 가량의 시간에 목욕을 한적은 있지만, 이것은 그것과 당연히 비교할 것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사람이 회상하길, 더운날, 비좁은 곳에서 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이렇게 잠깐이라도 몸을 적시고 밖에 나가 몸에 햇볕을 쬐일 수 있는 순간이야말로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이곳들을 지나며, 문화해설사 분의 말을 들을수록..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 하는 내게, 문화해설사 분은 그들 또한 일종의 피해자임을 이야기 해주셨다. 그리고 대화는 법정에 가서 이어지게 되었다.
무자비하게 폭행한 시민들을 잡아와 재판같지도 않은 재판을 치렀던 법정. 이곳에서 (없는)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법정 밖 (혹은 바로 옆에서) 구타를 당한후에 다시 자신의 죄를 인정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 재판같지 않은 재판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이슬로 사라지거나, 오랜 시간을 투옥되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 죄없는 무고한 이들이 너무도 억울한 재판을 받아가며 일방적인 죄를 강요받았을 장소에서, 나는 문화해설사 분과 앉아서 용서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바깥을 걸으며 했던 이야기를 이곳에서 이어하기도 하고, 민주묘지에 갔던 이야기를 나누며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방문자 안내에 소극적이 되어버린 민주묘지, '님을 위한 행진곡'도 부르지 못하게 하고 '방아타령'을 부르려 했던(이쯤되면 기가막혀 말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5.18 추모행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나는 그때의 그 군인들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얘기했다. 그 군인들 또한, 전경들이 시위대들에게 일정라인이 밀리면 부대복귀해서 구타를 당하듯, 뒤로 밀리고 후퇴하는 순간 엄청난 폭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진압작전이 있기 몇달전부터 실제를 방불케하는 진압훈련으로 항상 피떡이 되었다고도 한다. 폭력과 야만에 찌든 그들도 결국은 피해자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피해자였다고 할 지언정 그들은 동시에 가해자라는 딱지를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지은 참혹한 구타와 만행은 결코 되돌리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했다. 사과하지 않은 이들을 용서할순 없는 것이다. 최소한의 용서 또한 죄지은 자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과했을때 가능한 것이니깐. 그런 내게, 오히려 그 분은 여지껏 그 죄책감으로 고통에 살고있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 하며, 그들을 용서해야 함을 이야기 조용히 이야기 해주셨다.
타지인인 내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데, 정작 그 시간을 살아온 광주시민이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려 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나로서는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마 삼십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그들은, '왜' 라는 이유가 빠진 그때에 대해서, 나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이쪽 자유공원으로 오기전에는 민주묘지에서 관람객들에게 해설을 했었다고 하는 그 문화해설사분은, 그 당시의 실제 피해자에서부터, 아무 연고도 없는데 와락 눈물을 터뜨린 교사,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낌으로써 추념문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주변을 돌고 돌았던 계엄군 출신의 누군가를 만났었으니깐.
사실 내가 무어라고 그들을 용서하고 말고를 할 것인가. 용서의 여부는 어차피 내 권한이 아닐터. 다만 내가,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분명한 것은, 이 피맺힌 과거,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이 과거,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기억하는 일이다.
텅빈 법정을 지키는 모형들 뒤,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광주에 대해 그 어느때보다 깊은 생각,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문화해설사 분과 내가 앉아있는 그 공간 속 무거운 공기가 돌고 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부담스럽지 않은, 진정 뜻깊은 시간이었다.
용서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시기상조일 것이다.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수두룩 하고, 여전히 피해자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계엄군이 사망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야산등지에 암매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실종자들의 행적도 여전히 많은 수가 오리무중의 상태다. 더불어 광주민주화운동은 아직도 집단발포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은 신기한 코미디다. 위에서 가장 큰 죄를 지은, 그 모든 비극의 '주최자'는 여전히 잘살고 있고, 심심하면 나와서 한마디 하는 뻔뻔함을 가지게끔 놔두는 이 나라는 참으로 신기한 나라가 분명하다. 어쩌면 <꽃의나라>의 표현대로 '이상한 나라' 다.
영화<오월애>에서 인터뷰 했던, 총을 맞은 후 많은 수술 끝에 현재 다리를 절며 꽃집을 운영하는 아저씨는 예전에 수술을 한후, 비가오면 바깥에 평상을 놔달라고 했다고 한다. 거기에 누워 비를 맞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몸에서 끓어오르는 수많은 울분과 슬픔을 그는 그렇게 씻어내야만 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시대에 살아가면서도 잊고 지내는 우리들의 무관심이 그들을 더욱 서럽게 만들고 있는 것 아닐까.'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는 인정하기 싫지만, 역사적으로 인정될 수 밖에 없는 말처럼, 우리는 그들이 흘린 피를 먹고 자란 이 대한민국에 살고있다.
다녀온지 적잖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글을 적는동안 몇번을 울컥거렸다. 어쩌면 물리적 총알은 이미 우리에 앞서 80년 5월의 광주시민들이 모두 맞아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것이다. 지금도 그 후유증과 고통에 시달리며 그 오랜 시간을 견뎌왔음에도 자살을 선택하고, 먼저 떠나보낸 가족과 친구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그 광주시민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만큼의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 그뿐인가, 서울 한복판, 버스 위에서 물대포를 맞아가며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에게, 진압부대의 폭력에 머리가 다쳐 피가 흥건한 붕대를 매고 있으면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던 소녀에게 빚진 것이다. 앞으로는 더이상 빚지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 미천한, '기억'밖에 없으니깐..
언제쯤, 그들에 의해 쥐어진 자유로 그들을 매도하는 이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언제쯤, 그들이 끝내 놓지 않았던 자유의 숭고함을 가슴에 깊게 새기며 온전히 계승할 수 있을까.
자유와 민주주의를 빚진 이땅의 모든 이들이, 그들을 잊지 않기를..
언젠가는,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민주 세상이 마침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적어도, 80년 5월 그날을, 광주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들을,
그리고 미워해야 할 그 많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내가 믿는 것은 미움이다. 미움의 힘이다. 우리가 이렇게 앓고 있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보다, 미워할 것을 분명하게 미워하지 않아서 생긴 게 더 많기 때문이다." - 한창훈 <꽃의나라>中
기억하자.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만큼의 자유, 민주주의는 그때 그들이 스러지며 흘렸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졌음을.. 사는게 팍팍해서 잠시 잊는다해도,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더듬어가고, 읽고, 찾고, 보며, 다시 기억하자. 내가 잊으면 네가 이야기 해주기를, 네가 잊으면 내가 이야기 해줄 수 있게...
최정운 (교수)저, <오월의 사회과학>
덧, 이제 6월에는, 얼마전에 지인에게 선물받은 이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
그들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서 한껏 더 성숙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도 읽을 책들이 너무나 많고, 알아야 할 것들도 많다. 그리고 들려줘야할 누군가도 많다.... 그리고 아래는 내가 알고있는, 5.18 혹은 80년대의 사회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 소설/만화들이다.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원더보이>
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강풀 <26년> 세트
최규석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