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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의 아폴론 1
코다마 유키 글.그림,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순정만화' 라고 보통 통칭되는 장르의 만화를 보는 것이 대체 얼마만인가.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하고 그 후에 만화책을 접했던 '후루츠 바스켓'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래서 괜히 걱정스런 마음이 먼저 들었다. 너무 유치하진 않을까, 재미없는건 아닌가 하는 괜한 우려들. 하지만 그것들도 한장한장 넘겨보면서 쓸데없는 기후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소설-만화-애니메이션-영화의 변주가 매우 빈번한 일본이지만,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어 방영된다는 것은 분명 괜한 이유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꽤 괜찮은 감성을 지닌 청춘, 그리고 재즈의 이야기였다.
60년대의 일본, 항운관련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덕에 전학이 빈번한 미소년 카오루(안경 벗으면 완전 미소년이 되지만, 안경써도 충분히..짐작간다)는 언덕길 위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몇번의 전학을 겪었지만, 그중 5학년 때 교실에서 토를 한 이후로 카오루의 심리적 균형은 깨어진 듯 하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전학후에, 학급위원인 리츠코의 안내를 받던 도중 급우들의 요란한 시선에 메스꺼움을 느낀다. 그의 안식처는 바로 옥상. 하지만 옥상에는 센타로라는 같은반의 문제아가 잠을 청하고 있는 중. 그 순간 깨어버린 센타로와 얼떨결에 첫 대면을 하게된 카오루.
센타로는 카오루를 천사라고 부르고,(그 순간 뿐이지만), '순간 빛 속에 묻혀버린 것만 같았다.'라고 독백하는 카오루를 보고 있노라니, 이 둘의 첫 만남이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이 만화가 '야오이'물이다! 란 것을 확신해 버렸다. 그리고 당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야오이 물은 처음인데 이걸 어쩌나..하면서 말이다. 헌데 어쨌든 계속 읽어보니 그렇지가 않다.
놀란 마음으로 메스꺼움을 진정시켜버린 카오루는 당황하며 내려왔지만, 자신이 자신답게, 그리고 크게 심호흡 할 수 있는 옥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열쇠는 센타로에게 있기에, 카오루는 다시 옥상을 향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열쇠를 훔쳐놓은 상급자들과 그들을 기다리는 센타로가 있었다. 그리고 카오루는 열쇠가 필요함을 센타로에게 어필하고, 센타로는 상급생 세명과 맞붙어 겨우 열쇠를 다시 돌려받는다. 카오루는 자신때문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열쇠를 받아내려 했는줄 알았지만, 센타로는 돈을 요구한다.(물론 장난으로)
어쩌다보니 앞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이 첫부분은 생각해보면 굉장히 의미심장한 시작이다. 마치 야오이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카오루와 센타로의 만남이 얼마나 필연적인지 설명하듯 말이다. 카오루가 그동안 혼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그 옥상이라는 상징적 장소의 열쇠를 센타로가 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까워진 카오루가 다시 옥상을 올랐을 때 그를 우산없이 비 맞게 하는 센타로는, 카오루가 그동안 갖고 있던 심리적 불균형, 그 두려움의 각도를 조금 바꿔놓아주기 시작하는 인물인 셈이다. 타의였지만, 두려움의 우산을 던지고 차가운 빗방울을 맞으며 카오루는 이제 그 두려움의 껍질을 한꺼풀 벗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가 갠 뒤에 비스듬히 비추는 햇빛을 온통 독차지한 채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언덕길을 가볍게 내달려 간다. 녀석에게는 그 언덕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는 걸까? 그건 내가 본 적 없는 풍경일까?
청춘이든 아니든,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종종 닮고싶은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까운 사람일수도 먼 사람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와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 또한 흔하지만은 않은 일. 자신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그리고 더 많은 것이 불안한 청춘,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닮아가고 싶어하고, 자신을 초라하게 비추고마는 순간들이 산재해있다. 어쩌면 아버지 아래서 자라고, 지금은 친척들의 눈치를 받으며 살고있는 카오루에게있어 센타로는 그런 동경의 대상이다. 동갑내기임에도, 빛을 보여주는 존재. 그래서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 다행이도, 카오루는 친절한 리츠코에게 호감을 느끼고, 클래식 레코드를 파는 곳을 물어보다가 리츠코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에 초대받게 된다. 온갖 그 나이의 남자다운 엉뚱한 상상을 하던 카오루지만, 그 레코드가게의 지하에서 센타로와 만나 피아노와 드럼으로 화음을 맞추게 된다. 드디어 파릇한 청춘의 '재즈'와의 만남이다. 거기에 옆집사는 연상의 준이치 까지 등장, 리츠코에게 잘보이고 싶은 카오루를 비롯한 그들은 어느새 같은 노래로 같은 리듬을 타고 있다. 그리고 이윽고 리츠코에게 나름의 데이트를 신청한 카오루는, 과연?
신해철을 좋아해서 예전에 신해철이 발매한 재즈앨범을 구매해서 들어본 적이 있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그동안의 그의 음악스타일에 익숙해진 사람이 '재즈' 스타일 이라니, 거기다가 몇년 전 일이니,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리듬에 따분함 뿐이었다. 그래도 든 안전한 생각이, '나는 아직 재즈를 이해하기엔 어린가보다' 란 것 뿐. 리뷰를 쓰면서 책에 언급된 재즈곡을 몇곡 들었다. 글쎄, 솔직히 그렇게 큰 감흥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전에 들었던 감정보다는 분명 몇 걸음 더 나아가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큰 굴곡은 없지만, 잔잔하게 계속 들을 수 있는 음악. 계속계속 반복해서 듣고있어도 질리지 않다. 청춘과 재즈는 앞으로 또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처음엔 예기치 않은 장르인줄 알고 화들짝 놀라, 긴장하며 봤었지만,
한권을 다 읽은 시점에선 마음이 왠지 따뜻해지며 두근거린다.
그것은 비단, 그들이 이성간의 애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청춘이 만나는 사랑의 설레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결핍을 또래에게서 발견하려고 하는,
그래서 그런 결핍을 서로가 메워줄 수 있는, 우정이라는 큰 버팀목을,
누군가의, 지나간 어느때의 그 순간들을 참 예쁘게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끝에 실린 단편또한 그 하나의 작품의 가치를 톡톡히 하니, 장편의 긴 호흡과 단편의 여운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어 참 좋다.
센타로에게도 변화가 예상되는 2권에서 이들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