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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ㅣ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평점 :
출간된지는 일년이 조금 넘었지만, 언젠가 이 책을 본 처음부터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제목이었지만, 분명 내가 찾던 종류의 책이 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독서침체기를 지나서 다시 책을 좀 읽기 시작하고, 나는 드디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보다 사회는 더 곪아서 이젠 고름이 나오고 보기에도 끔찍한 지경에 이르렀다. (내게 그건 바로 '세월호' 였다. 하지만 이 글에는 글의 내용만을 가지고 짧게 서평을 쓰려고 한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정확히는, 이해는 되지만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반응들에 나는 너무 지쳤고, 질렸다.)
이 책은, 'KTX 여승무원들의 철도공사 정규직 전환 요구' 문제에, 대한 이십대 (대학생)들의 차가운 반응에 당황한 한 대학강사로 부터 시작했다. 이십대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정규직은 비정규직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서 들어오는데, 어떻게 비정규직이 날로 정규직이 되려 하느냐' 다.
그럴 듯 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하니깐. 아니 그런데 좀 이상하다. 그래도 이십대라면, 비정규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 거의 동일한 노동의 양에 대한 차별 보상, 이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뭐라도 할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이십대들은 모든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역량과 능력의 탓으로 치부해 버리게 되었는가. 한 십년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도, 비정규직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을 것 같은 이십대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그 거침없던 이십대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겁이 많아져서? 아니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개인에게 전가시켰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조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까지 개인의 능력 고하의 탓을 해버리는 이십대의 세태를 '자기계발' 즉 '힐링' 문화에서부터 찾는다.
과거에는 경영이라는 분야의 책들이 생산성 증대를 위한 논의나 마케팅 기법 등 전문서로서의 의미가 강했지만, 지금은 기업의 경영기법을 인간의 생애과정에다 적용해서 ˝노동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최면적인 동기 부여를 위한 미사여구의 개발에 역량을 집중˝ 하는 내용이 사실상 전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분류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스스로를 잘 관리하면 어떠어떠하게 살 수 있다' 는 식의 논의가 무수하다. (28p, 위의 밑줄은 필자가 임의로 표기함)
나 또한 한때, 자기계발서를 좀 읽은적이 있다. 손에 꼽아봐도 너다섯권 정도긴 하지만 나는 분명 힘들때 그 책들을 찾았다. 내가 일반적인 구직자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가고있어서 사실상 책에 나온 것들이 직접적으로 연관없음에도, 지금의 상태를 극복하고, 역전의 드라마가 '나'도 가능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누군가 말해주고 증명해주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 응답으로, 그 책들은, 위의 말대로 온갖 미사여구로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최면은 마치, 우리가 앞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란 비참한 '희망' 을 심어주었다.
물론 나는 그들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 사회가 정말로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고, 그에 따른 인간적이고 공정한 대우를 하고 있다면,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따뜻한 말들은 깊이 간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 '나름의 힐링' 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십대들이 처한 현실의 원인을 이십대 안으로 끌어들였다. '현실이 공정하지 않아도 잠깐 힐링하고 가면 되는것 아닌가? 그게 왜 이십대들이 사회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여기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나?' 라고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의 관심사는, 이미 경쟁사회에서 무감각해진 이십대가 어떻게 그렇게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이들을 비난하고, 자신도 통과할 확률이 미약한 그 좁은 문 안에서 권력을 부리는 자들을 옹호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나는 그 이유를, 그들이 언젠간 자신도 그 좁은문 안에 들어가 권력을 부리길 꿈꾸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계발 또는 힐링을 표방하는 책들이 사회적인 문제들을 간과하거나 혹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회적인 문제를 바꿀 수 없다면, 그렇게라도 개인이 자신 스스로를 추스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자기계발_힐링의 무분별한 남용은 생각보다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자기계발서가 어떻게 이십대를 지금처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는지 이어서 얘기하겠다. 책에는 여러 자료와 근거들이 잘 나와있는데, 그것을 짧은 글에 선뜻 요약하기가 쉽진 않다. 나또한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주장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차근차근 논리적인 설명과, 근거와, 반박의 반박을 통해서 해결된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이 허접한 서평보다는 책을 일독하길 권한다. 다만, 내가 찾은, 내가 찾던 해답은 (의외로 책에서도 길지않게 정리해놓은) 아래와 같다. 물론 이것은 일부의 내용이다. 저자는 이것을, 자기계발의 시대가 만들어 내고 있는 이십대의 고유한 특성 이라고 설명했지만, 이 짧은 내용은 자기계발이 이십대에게 미치는 영향을 나름 간결하고 순차적으로 설명한다.
1.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 자기계발의 논리로 무장할 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시중에 출간된 자기계발서들은 대다수가 자신의 고통은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남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남의 고통까지 신경쓸 생각하지 못할 뿐더러, 타인의 고통과 극복을 그 자신 스스로의 몫으로만 치부하니 딱히 공감할 필요성을 못느끼며, 자연스럽게 공감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2. 편견의 확대 재생산
-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기실 '공감' 이란 단지 함께 느낀다는 점에서 중요한게 아니라, 한 개인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권장된다. 타인의 상황을 깊고 넓게 이해할 수록 타인의 상황을 이렇다 저렇다 재단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헌데, 공감력이 떨어지니, 타인의 상황을 이해할 생각도 전에 이렇다 저렇다 자신의 (세뇌된) 기준으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한다. 자기계발서라면 대부분이 패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해버리는 것이다.
3.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 패자에 대한 편견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클수록 '안전한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 외에 길에 대해서는 부정적 편견을 생산하며, 다름에 대한 거부가 날카로워 진다.
(위의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 책의 내용을 인용하다시피 해서 적었다.)
'이러한 다름에 대한 거부감은 이십대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옥죈다. 자기 스스로 '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며, 그만큼 정해진 '레일' 위에 안착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한다. 이런 경향 자체가 시대적 특징이 되어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개인에게 강요된다. 그 결과 개인은 앞뒤 가리지 않고 레일 위를 달리기 위해 해야 될 자기계발을 찾고 있으며, 또 그런 자기계발의 일부 성공적인 결과를 보고 부러워하면서 더 적극적인 수행을 다짐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순환적으로 이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그로 인해 고정관념이 강화되는 현상은 더 가속된다. 이런 환경에 노출된 이십대는 당연히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98p)
이 책은 나아가, 대학가에 팽배한 대학 서열화에 대해 파헤친다. 자기계발 시대에 대학생들이 스스로를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만드는 이 폐단에 대해 진단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최근에 새롭게 <진격의 대학교>라는 책으로 탄생했다.) 어쨌든,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겠다.
'희망', 그건 개인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자연스레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사회가 진정 공정해지면 절로 희망이 부풀기 마련이다. 기회의 균등은 그럴 때 '실재' 할 수 있는 것이다. (214p)
리뷰를 쓰면서, 이 책에 언급된 책 중에 하나가, 나와 약간 인연이 좀 있다는 생각이 났다. 행사에 참여했던 책도 있으며, 또 그와 관련한 이들도 떠오른다. 이 책이, 이 글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으면 한다. 나는 그들이 가진 삶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며,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건 간에 이제는, 우리가 무분별하게 남용하던 힐링과 희망이 어떻게 달라져야하는지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덧, 최근의 예비군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네티즌 들의 적지않은 반응이 '작정하고 덤비는 놈을 어떻게 막냐' 였다. 이는 마치 인생의 한 논리처럼 보이지만, 나아가 생각해보면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그것을 둘러싼 사회와 시스템은 할것을 다한것처럼 여기게 한다. 일차적으로 개인의 고의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이 원인이라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비해야하는 시스템은 분명 허술했고, 그것이 사고를 키웠다.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는게, 모든 것을 사회, 정부, 기관의 탓으로 하는 것보다 나을까? 더 책임있어 보일까? 좋은 시스템이 구축되어있었다고 해도 만약 사고가 난다면 문제점을 진단하고 보완해야 한다. 사회가 만들어내는 문제를 계속해서 개인에게 모두 책임전가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비슷한 사고들을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