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
에두아르 쉬레 지음, 진형준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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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889년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작가인 에두아르 쉬레에 의해 출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28년이나 전이다. 출간 직후 대중들에게 은밀히 전파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장에 임한 병사들에게 경전처럼 읽혔다고 한다.

 

 한데 한국에선 왜 이제서야 출판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의아하게 생각하게 되어 한 번역자에 의해 한국에 알려진 이 책은 시대적 상황이 현대의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작가의 서문을 빼고 대신 번역자의 서문을 시작으로 대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기록된다.

 

 

 종교의 시작이 어디서 기원되었고, 어느 나라에서 먼저 시작되었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점, 마술, 예언들이 가장 힘이 강하게 발휘되었던 때..  지금은 흥미와 미신꺼리로 여겨지는 이런 것들이 역사속에서의 인류들에겐 어떤 역할과 어떤 의미를 두고 있을까. 또 인류의 시작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항상 예언자하면 '노스트라다무스'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 책속에서 수많은 신비주의의 선각자들은 예언은 곧 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였고 신적인 세계를 체험한 통과의례를 거친 사람들이었으며, 모든 정신적 최고의 선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면서 곧 그들이 예언자이자 선지자이며, 신의 사자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신화와 역사와 종교가 모두 어우려져서 서술되어 있는 이 책에서 사실을 어디까지 확신할 수 있으며, 과연 사실의 증거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 마지막장쯤에 나와있는

'만일 우리가 그러한 생생한 증언을 믿지 않는다면 역사에 대한 온갖 증언들도 모두 거부해야 하며 역사에 대한 기술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이란 말을 보며 문제는 어디까지 믿고와 어디까지 믿지 않음을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셈 문화는 지상의 원칙. 즉, 최고 권위의 원칙으로서 단일성과 보편성을 신뢰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족을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안 문화는 지상, 초지상의 온갖 영역 속에서 단계적 진화와 상승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연의 풍요로움 혹은 인간 영혼의 열망의 무한한 복수성과 다양함을 인정하고 있었다.

 

 달리표현하자면,  셈 문화의 정령이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내려온다면 아리안의 정령은 인간으로부터 신으로 다시 올라간다. 이 두 정령을 우리는 우리들 안에 지니고 있으며 신비주의자, 비교주의자는 각자의 존재 안에 그 두 정령이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 자이며,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의 발현과 조화가 우리 각각의 존재에게 모두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자이다.(본문)

 

 따라서, 이 책에서 펼쳐보이는 광활한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역사는, 우리 각자가 겪을 수 있는 내면의 역사이기도 하며,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 책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밝힌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는 어디서부터 부패를 가져왔을까? 왜 종교가 믿는 그 신념보다 우위의 자리에 섰을까? 이런 부분은 책의 이 부분을 보면 이해가 된다.

 

 

 '백인종의 여예언자들은 드루이드교의 여승려들처럼 하나의 단체가 되었으며, 그 단체는 교양 있는 원로들이나 승려들의 감시하에 있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아주 유익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직관과 점술과 열정으로, 수백 년간에 걸친 흑인종들과의 싸움 초기에 접어들어 있는 종족에게 커다란 도약이 가능토록 해주었다.

 

 

 하지만 급속히 부패가 뒤따르게 되었고 그 직관이 크게 남용되는 일이 벌어졌다. 스스로 백성의 운명의 조종자가 되었다고 느끼게 되면서, 드루이드교의 여승려들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백성들을 지배하려 들게 되었다. 그런 타락은 영감의 저하를 가져오게 되었고 공포에 의한 지배 방법을 택하게 되었고 종국에 그녀들은 사람을 제사의 제물로 바치도록 강요하게 되었다. 이 제물로 받쳐진 사람들이 사자로서 죽은 자들에게 보내지고 그렇게 해서 조상들의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문)


 
 부패는 바로 인간 본연의 변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순수한 뜻은 변질되고 유물론과 제물론, 물질론이 정신적인 요소를 망각해 버림으로써 그 모든 폐악과 잔인함, 고통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간의 지니고 있는 고결한 본성이 현자의 권위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드높은 의식에 의해 선으로 이끌리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타락의 예를 우리는 거기서 본다. 개인적 야망과 정열에 무턱대고 내맡겨진 채 고귀한 영감은 미신으로, 용기는 사나움으로, 희생의 고결한 생각은 잔인한 압제의 도구로 변질되는 것이다.'(본문)

 

 

 요즘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점술과 예언에 대한 내용들이 언급되며 지배자들의 욕심과 백성들의 잘못된 맹목적인 믿음으로 한 인간의 운명과 더불어 정의가 묻혀지는 일들을 볼 수 있다. 문제가 미신이라고 비난하기 보다 순수한 뜻의 변질에 초점을 맞춘다면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에서 말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역시나 '예수'였는데, 신의 본질을 종교의 교리 자체에서 찾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라는 그의 말씀이 특히나 가슴에 남았다. 완성을 위하여 희생을 한 그의 순교자다운 모습에서 나는 내 안에서 움틀대고 뻗어가는 믿음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보다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고 여러가지 복잡한 관념과 사유에 대한 사상들이 많아 단번에 이해하기 다소 힘들어 몇번 고씹어 보았던 부분도 많았다. 또, 종교에 대한 상식도 풍부하지 않고 역사와 신화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것도 모르는 것이 많았던 터라 나는 이 책을 정말 상상력을 총동원하고 이런 저런 물음과 생각들을 마음에 두면서 읽어내려갔다. 그렇게 나름 열정을 가지고 책장을 덮은 결과 이 책은 진리와 내면의 믿음을 이끌어내주는 의미가 깊은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없는 맹신자를 비난하며 절대선과 절대진실, 절대 미를 추구했던 예수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내 자신도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되 악에 유혹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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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밀레니엄 북스 39
루쉰 지음, 우인호 옮김 / 신원문화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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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젊었을 때는 많은 꿈을 가졌었다. 대개 잊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애석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 그 잊혀지지 않는 한 부분이 이제 와서 '납함'을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 (본문중)

 

 루쉰은 이렇게 그가 아큐정전을 비롯한 짧은 단편소설들의 모음집을 쓰게 된 원인을 밝히고 있다. 아큐정전 본문의 부분적인 내용은 고등학생때 읽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작가 루쉰에 대해서는 요근래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계몽의식과 시대의 주흐름의 반대사상을 문학을 통해 펼쳤음을 알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주요세력의 사상에 도전한다는 것은 국민들뿐 아니라 국가에 도전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사상을 펼쳐야 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외로운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루쉰은 젊은 시절 도쿄로 유학을 했다가 타국에서 바라본 중국인들의 덜 깨우쳐진 의식을 눈으로 확인하고 수치심에 도쿄를 떠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자국민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결심을 하게 된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비록 체력이 튼튼하고 오래 산다 해도 고작 보잘것 없는 본보기나 구경꾼 노릇만 할 뿐 아닌가. 병들거나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런 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저들의 정신을 고치는 데 있다. 그리고 정신을 뜯어 고치는 데는 문학과 예술이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문)

 

 루쉰의 이 말은 왠지 나의 마음도 뜨끔하게 만들었다. 한국이 과연 이 문장이 가르키는 무언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의 작품들 모두가 딴막딴막한 단편인데 반해 아큐정전은 제법 길다. 이 글은 마치 연재된 글처럼 아큐를 이모저모 관찰하고 있다. 그의 연애문제, 생계문제, 혁명에 대한 그의 견해 등등 여러방면에서의 아큐를 지켜본다. 아큐의 인물은 그리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적수가 호랑이나 매와 같아야 비로소 이긴 자로서의 승리감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적수가 양이나 병아리 같다면 도리어 승리에 무료를 느낀다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들의 아큐는 그런 약기는 없었다. 그는 영원히 우쭐해 하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중국의 정신 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하나의 증거일지도 모른다.'(본문)

 

 

 

 우리가 작품을 보면서 아큐를 조롱하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아큐의 모습은 루쉰이 살던 그 시대에서의 중국인의 평균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아큐의 모습과 닮은 이를 만나기 힘들지 않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캐릭터다. 루쉰의 주위의 사람도 루쉰의 작품을 보면서 혹시 자신을 표현한 건가 싶어 뜨끔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들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자신의 모습이 문자로 쓰여지면 충분히 비웃고 조롱하는 면이 있는 듯하다. 물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내가 루쉰의 글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구절은 이 말이다.


 "가령 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도 않을 거야. 안에는 깊이 잠든 사람이 많이 있어. 얼마 안 있어 숨이 막혀 죽고 말 거야. 그러나 혼수 상태에서 그대로 죽는 것이니까, 죽음의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아.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다소 의식이 있는 몇 사람을 깨운다면 이 불행한 몇 사람에게 결국 살아날 가망도 없이 임종의 고뢰움만 주게 되는데,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몇 사람이 깬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수지 못하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본문)

 

 

 이 부분은 루쉰의 생각과 목적이 잘 나타나있는 대목이다.

 

 아큐의 최후는 죽음이다. 이유 모르는 죽음.. 의미조차도 없는 그 죽음에서 결국 루쉰이 말하고자 한 것은 잠들어 있는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풍자라는 형식을 빌려 비판한 것이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몇 마디 고함이 입에서 새어 나오는 수가 있는데, 아쉬운 대로 이 글로 적막의 한복판에 돌진하는 용사들에게 마음 편히 앞장설 수 있게끔 약간의 위로라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본문중)

 

 

 그는 문학을 통해 다음 세대로까지 계속 의식이 변하길 바랐고 희망에 부풀어 있을 청년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의식을 변혁시키길 원했다. 그래서 불후의 비극으로 끝나는 예술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작품이라고 그 자신의 소설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광인일기> 또한 예리하게 시대와 민중을 비판하고 있다. 주류의 사상에 반대되는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주인공을 광인으로 묘사해야 하는 참신한 선택을 했다.

 

 여기서 언급되는 식인문화는 실제 중국에 존재했었던 문화다.

<광인일기>뿐만 아니라 <약>에서 또한 죽은 시체의 인혈을 먹는 부분이 나온다.   
 

 

 <고향>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자라고 나서 떠났던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 기억속의 아련하고 기분 좋았던 추억의 고향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내용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선 다소 서정적인 면이 있는 이 작품은 루쉰의 색다른 문학이기도 하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다. 실상 땅 위에 본래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은 곧 길이 되는 것이다.'(본문중)

 

 루쉰의 작품을 이번에 접하게 되면서 중국문인중에 가장 좋아진 작가가 되었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의식의 뇌리에 콕콕히 박히면서 내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가 절망했던 그 안타까움의 일부분이 <납함>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던 것처럼 나도 그 꿈의 일부분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가 다음 세대의 청년들에게 그의 꿈을 전하고 그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이어나가길 바란 것처럼 나도 그의 꿈 일부가 이루어졌을 꺼라 믿고 싶다. 또 앞으로 계속 그 꿈이 진행되길 빈다.

 

 

 



<루쉰공원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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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의 성 - 치정과 암투가 빚어낸 밤의 중국사
시앙쓰 지음, 강성애 옮김, 허동현 감수 / 미다스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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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국은 큰 땅덩어리와 넘치는 인구만큼이나 방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황국의 성'이라는 제목을 가졌지만 그 내용보다는 역사적인 여러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에 더 치중을 한 것 같다. 아무래도 성이야기라는 것이 이렇게 두꺼운 이야기책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모든 역사적사실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의 양육강식이 빚어내는 저 이변의 끝엔 결국 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 욕심 넘치는 쾌락이 불러오는 결과는 언제나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인간의 모습이 있다. 나는 성악설이라는 것도 성선설이라는 것도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각각 이 본질 중 하나의 성향을 타고 태어나는 것 같다. 그 타고나는 것에서 커가면서 주위의 환경에 의해 조금씩 변형이 가능하나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중국인들에 대한 많은 일화를 들었었다. 예전에 알던 언니가 중국에서 몇년을 살았었는데, 그곳은 여자 혼자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면 안된다고 한다. 어쩌다 사건이 터져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단다.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봐..

 

 또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로, 중국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팽소니를 치고 도망가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지 않고 차에서 내려 얼마나 사람이 다쳤는지 확인하면 그 다친 사람이 장애인이 됐을 경우 평생 먹고 살수 있도록 책임을 져야 한단다.
 
 그런 이야기들이 다 사실인지는 입소문으로만 들어 알 수 없지만 그만큼 내가 아는 한국인들의 눈엔 중국인들이 무책임하고 방관적이며 잔인하게 비춰지는 것 같다.

 

 게다가 중국에 대한 역사책을 들춰보면 공자도 인육을 즐겨 먹었으며 중국인들이 대대로 인육을 즐겨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헉.. 끔찍하고.. 입이 떡하니 벌어질 일이다.

 

 얼마전에 읽었던 '아큐정전'을 보아도 중국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책의 저자인 루쉰은 그런 야만적인 중국인의 모습을 보고 그 시대땐 위험할 수도 있었을 반사상을 문학을 통해서 그들을 풍자하고 비판하며 의식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이 책에서도 보면 왕이 자신의 성기능을 위해 어린 남자 아이들의 골수를 먹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인간의 잔인함의 극치가 어디까지 상상될 수 있는지는  역사를 보면 잘 나와 있는 듯하다.

 

 무측천황후에 대한 것도 많이 언급되어 있었는데 그녀는 권력을 위해 자신의 어린 갓난 아이까지 죽였던 인물이었다. 젊고 미남자들을 좋아하고 일부러 그런 이들만 뽑아 함께 지내면서 향략을 즐겼으며, 원래 잔인한 성미라 왕의 애첩이었던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백 대씩의 곤장을 치게 하고 손발을 잘라 술독에 넣었다.

 

 '불멸의 여인들'이라는 책에도 무측천황후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녀가 중국의 역사에서 잔인하긴 잔인한 황후였으나 그 시절때 백성들은 윤택하게 살았다고 하니 궁에서는 피바람이 불었을진 모르나 국민들에겐 좋은 지도자였다고 평가되어 있다.

 

 그러고보니 요새 하는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과 조금 닮은 듯도 하다. 드라마상의 미실이지만 어느정도 끼어 맞춰지는 구석이 있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무측천뿐만 아니라 많은 잔인한 황후가 있었다. 어떤 황후는 왕이 아끼던 애첩을 왕이 죽자 손발을 자르고 혀까지 잘라 화장실의 똥통에 넣었던 황후도 있었는가 하면, 또 어떤 황후는 왕이 궁녀를 조금 살갑게 다루었다 하여 바로 궁녀의 손을 잘라 상자에 넣어 왕에게 바치는 왕후도 있었으니 읽는 내내 이것이 역사인지 공포물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유교의 예법이라는 것이 절차는 복잡하고 많지만 사실 그 속의 알맹이는 볼품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저렇게 지켜야 할 것이 많았음에도 왕이나 왕후나 자기식대로 해석해버리고 그 법조차도 정의에 맞지 않은 잘못된 것이 많았으니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이만큼의 잔인한 행태들도 없었어야 되지 않았을까.

 

 궁중의 미용에 관한 것중엔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얼굴에 달모양의 그림을 그려넣는 화장도 신기하고 여러가지 화장품들 또한 재미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이 많았음에도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던 책이다.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도대체 무슨 왕과 왕후가 그렇게 많은지 왕과 왕후의 이름만도 헷갈려서 다시 전으로 돌아갔다 뒤로 돌아갔다를 반복했던 책이다.

 

 공포적인 내용도 있으니 여름인 날씨에 딱 읽기 좋은 책인 것 같다. 속독을 하지 않으면 여유롭게 일주일정도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으면 좋을 것이다. ^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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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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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오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장 그르니에-


 글을 쓸것이다. 처음 다짐했던건 초등학생때였다. 그땐 그저 시시껄껄한 로맨스소설이나 끄적이는 정도였지만 그것도 내겐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다짐을 접어야 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나는 그 다짐을 무참히 짓밟은 이모를 원망하면서 다짐도 쓰레기통으로 쳐박히고 말았다. 이모는 내 글이 일기라고 알았던 모양인지 갈가리 찢어버리고 나를 추궁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것이 소설이네, 내 글이네 하고 말할수 없었다. 내 글을 남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터라 그런 식으로 알게 된 이모앞에선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내 글이 쓰여진 종이는 그동안의 노고에 수고함의 기억도 없이 잔인하게 찢겨져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그날 나라고 외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잃어버렸다.  <글쓰기, 내가 이토록 글쓰기에 마음을 매고 있는 것은, 이것으로만이,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지..본문중> 의 내용은 나의 과거의 추억과 겹쳐진다.

 나는 마음의 문에 열쇠를 채우고 나만의 비밀속으로 점점 묻혀 들어갔다. 누구도 믿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중학교때 내 국어선생님중 한분은 내가 가장 반항적이었을 때 정말 소중한 말을 내게 해주신 분이다. 아마 영원히 그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넌 언어적 감각이 있다고. 문학쪽으로 길을 열어보면 어떨까..'라고.  덧붙여 아이들이 다 있는 앞에서 내가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해주셔서 의기양양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분의 의도가 어쨌던 간에 나는 그 칭찬이 그 시기엔 기분이 좋았지만 그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 머리속엔 철없게도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그 말만이 아로 새겨졌었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황송하고 철이 없는 내게 과분한 칭찬이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칭찬이 인색한 환경에서 살아왔던 나는 그 칭찬이 힘들때마다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결정적 버팀목였다는 것을 근래들어 알게 된다. 고등학생때 국어선생님으로부터 또 한번 '문학으로의 길'로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들었을 때도 내 마음은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상처받은 마음을 가둬놓고 열쇠를 채운 고독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남았다. 그녀의 소설이 남다르지 않음은 나의 과거와 이어지는 기억 때문이었다. 항상 내 머리속에 맴돌고 있었던 그 말..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소질도 솜씨도 없다. 그냥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앞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 무얼 하고 싶은지간에 어떤 길로 가든 글은 쓰고 싶다. 그래서 작품속 그녀가 말했던 글을 쓰고 싶었고,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더욱 내 가슴에 와닿았다. 나는 대학교를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마치곤 초등학생때부터 아버지가 가라던 공장을 떠돌았다. 의무교육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보다 더 어릴때 공장을 다니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집에서 교육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의식주부터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먹고 사는 것에 지친 엄마가 그때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확실했던건 우리집은 결코 화목하지도 않았고 평범한 집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곳에서 나는 우울과 고독과 외로움과 상처를 처음 접하고 제일 먼저 배웠다. 집을 벗어나면서 처음으로 행복이 내 손안에 잡힐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희망이라는 단어를 내 가슴에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이 무겁다는 것을 일찍 깨우쳤던 나는 '나이라는 건 숫자의 차례대로 먹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날 열여섯에서 서른둘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본문의 말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몇달전에 나는 엄마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하고. '네가 글을 잘 쓰냐?' 이미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도 엄마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는 의심스러움을 한가득 담은 그 말은 내 가슴을 후벼팠다. 한번도 내 글을 보지 않은 엄마의 말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글을 잘쓰는가에 대한 의문이 마음속을 파고 들어갔다.

 그러곤 내 자신에 대한 회의와 앞날의 일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래도 저래도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는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외골수라서 한쪽으로만 이해한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해본다. 엄마는 너무 고달픈 인생을 살아온 연약한 여인이었고 글이라는 것은 엄마에게 너무 멀면서도 낯설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이 도대체 무얼할 수 있단 말이냐..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본문의 <'나는 편지 말고 다른 글을 쓸거야.' '무슨 글 말이니?' 열여섯의 나. 아직 누구에게도 한번도 말해본적이 없는 비밀을 외사촌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시나 소설 같은 것 말야.' 내 말을 묵살해버릴까봐서 열심히 더 말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내가 원해온 일은 그런 글을 쓰는 일이었고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런 사람들은 다르게 태어나는 것 같던데?' 나는 외사촌이 그러니 너는 작가가 될 수 없을거야 라고 할까봐 조바심치며 좀더 말한다. '다르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생각하는 거야.'> 이 부분을 보며 내 생각과 닮은 작가의 그말이 마음속에 스며든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또한 내게, 작가가 말했던 <마음속에 순결한 무엇을 두지 않으면 다시 내 발 바닥에 쇠스랑을 내리꽂고 말거라고 어떻게 말해줘야 하는지. 아무튼이라고 나는 말한다. 본문중,,> 에서의 그 순결한 무엇이었다.


 문학이란 무엇일까? 삶에 가치를 담아놓는 그릇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그릇은 실제 삶보다는 치열하지 못하나 아름다움과 초월을 닮아있다. 삶이 고달픈 사람에게는 인생이 너무 지루하고 무의미함으로 가득차 생에 대해 거부가 생길지도 모른다. 문학은 외롭고 고독하고 상처가 있었던 사람의 마음에 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 문학이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위로와 평안함을 가져다주고 작가 신경숙씨가 말했던 것처럼 꿈을 꿀 수 있게 한다. 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의식을 깨우치는 것 또한 문학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아.. 이 책은 '엄마를 부탁해'와 이어져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 책속에는 시대적 환경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소설.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책 속엔 너무 깊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너무 얇게도 다루지 않은 자본주의의 변화속에서의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이 들어있다. 천민자본주의의 추악한 뒷모습, 그 속에서의 인권유린, 이쪽도 저쪽도 될수 없는 어중간한 자리에서의 죄책감과 수치심.. , 그속에서 상처받은 이의 죽음까지 엮어내어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냉정한 문체로 옮겨놓았다.

  세상은 변화되기 바로 직전에 엄청난 희생과 비이성적인 일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세대지만 현재를 겪고 있는 지금 정의에 맞써 싸운 희생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일구어낸 결과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떠나온 길이 폭포라도 다시 지느러미를 찢기며 그 폭포를 거슬러 돌아오는 연어. 본문중> 처럼 그녀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여전히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를 들추어낼 때 나 또한 그녀의 글과 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상처와 기억들이 떠오른다.

 마치 내 가슴에서 나오는 말같은 낯설지 않은 글들을 접할 때 나는 용기를 얻는다. 내가 꿈꾸던 삶을 살아가는 이를 볼때 내 가슴은 두근두근 뛴다. 왠지 내 꿈도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같다. 아직 힘겨운 길을 가는 과정이지만 곧 나도 그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런 느낌이 든다.

 소설속의 주인공이 모든 마음의 짐과 육체적 고통을 내려놓았던 외딴방. 그 방 또한 낯설지가 않다. 내 속에 있는 외딴방. 나는 그곳에서 소설의 그녀처럼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날의 추억을 간직해놓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그 방에서 꿈을 가졌던 것처럼 나 또한 그 속에서 꿈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으면 결단코 이르는 그 길을 계속 나아갈 것이다. 오늘 하루는 밤하늘의 별을 찾아보며 내 꿈을 아로 새겨본다.
 
 나는 당신이 주신 목소리로 말했고, 당신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르쳐주시고 또 그들이 내게 전해주신 말로 글을 썼습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 프린시스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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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무종교론자지만 무신론자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경험이나 사건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 무언가 나도 모르는 존재의 힘이 존재할 꺼라 느끼면서도 그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그 신을 말하는 것인지는 믿기가 힘들다.
 

 평소때는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위기의 순간이 올때 제발 도와달라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나를 보면 이기적으로 원할때만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때는 교회도 다녔고 성당도 다녔었다.

 

 그러나 그 곳 어디에서도 신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내가 무척이나 신을 찾았을 때도 또한 어떤 것도 응답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점점 신에게 멀어지면서 컸다. 자라고보니 종교에 대한 피맺힌 역사를 알게 되었고 길거리에서 마치 홍보하듯이 "하느님을 믿으라. 아니면 지옥간다"고 광신교처럼 빨간 십자가 간판을 건 몇몇 과한 행동의 사람들과 또는 "도를 아십니까? 덕이 많은 얼굴인데.."라고 물어보며 어디 미지의 세계라도 끌고 갈 것처럼 손을 끄는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더욱더 종교에 대한 좋지 않는 관념이 생겼다.

 

 게다가 주위의 아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전부 이상한 길로 빠지기 일쑤였다. 친가쪽 사람중에는 교회에 미쳤다는 사람도 있었고 내 친구 고모도 전도사라는 사람인데도 낭비벽에 가사를 탕진하고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 있었다. 웃기는 일화가 있다.

 

 친구의 이야기인데, 별로 친하진 않았었던데다가 그동안 연락도 없었던 고등학교 1학년때 동창이 7년만에 보자고 했단다. 그래서 오랜만이고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여 만났는데 그렇게 오랜만에 보았음에도 전혀 거리낌없이 내 친구를 데리고 산을 탔다고 한다.

 

 그냥 특이한 만남이다 생각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려 했지만 몇가지 물을 세도 없이 어떤 건물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길게 늘어뜨린 원피스 형식의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더란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한 내 친구는 결국 그 건물에 들어가 흰옷을 입은 신도들과 함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계속 절을 했단다..
 
 지금도 그 종교가 무슨 종교인지 잘 모르는 내 친구는 황당하고 어이 없었지만 약간 겁이 나 시키는대로 했다는 데 듣는 내 입장에서도 그 황당함이 느껴지면서 웃기기도 했다. 일단 무사히 나왔으니 웃을 여유는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신을 믿는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 근처에는 존재느낌을 전혀 느낄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는 종교와 신은 먼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영 신은 없다고 확신할만큼 아는 것이 많이 없는 관계라 뭐라 주장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내 옆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었다.

 

 신념을 항상 가지고 있다가 절망을 느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받지 못하면 그 신념을 버티고 갈 힘이 줄어들고 결국 다른 신념으로 대체되고 만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질테니까..

 

 또, 이기적이지 않았던 사람이 그렇게 되는데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한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저자가 말한 '거대한 슬픔'을 겪어보았던 나였기에 이 책의 주인공 맥처럼 신이 존재한다고 전제한다면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다.

 

 몇가지 질문은 벌써 맥이 물어주었고 그에 대한 답도 들었다. 그러나 그 답이 내겐 썩 시원하진 않다. 맥에게도 그랬었던지 그는 만족하지 않았었지만 신은 완벽한 대답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저히 맥을 설득하기 힘들었던 신은 그에게 직접 심판의 자리에 앉아보길 권한다. 그 자리에서 맥은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난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정의가 먼저냐, 선이 먼저냐.. 정의를 행하기 위해 수단이 악이 된다면 선이 있을 자리는 없어지고, 선을 행하기 위해 수단이 악이 되는 것은 말이 되는 것일까?...


 악행을 저지른 죄인에 대해선 도대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똑같이 복수를 자행하면... 결국,

 

 '아들을 잘못 키워서 무시무시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린 그 아버지는 어떻게 하죠? ,.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 할까요? 이 망가짐의 유산은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담은 어떻게 하죠? 하나님은 어떤가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시작했어요. 하나님도 비난받아야 하나요?'(본문중)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전 생애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기꺼이 그 일을 하는 이는 신이 아닐까.

 

 질문과 혼돈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사건은 또 다른 사건에 사건을 만들어낸다. 영화 '보이A'를 보면 가해자의 입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이 영화의 가해자는 무척이나 안타깝고 불쌍한 인물이다. 과정을 지켜보다보면 충분히 동정심과 이해를 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 모든 가해자가 영화속 인물들 같지 않다. 너무나도 분노를 일으킬만한 악행을 자행하고도 뻔뻔한 이를 보면서 그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누가 진리와 지식의 심판관이 되건 간에 그는 신들의 웃음소리에 파괴된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 말이 답을 대신해줄 듯하다. 이 책속에서의 하나님은 특정한 모습에 대한 편견을 깨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모습과 명사가 아닌 동사로써 존재하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설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몇몇 소재는 저자가 만들어낸 것이지만 그 속의 알맹이는 진실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루소의 말은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거짓에는 무한한 조합이 있지만 진실의 존재 방식은 하나뿐이다' - 장 자크 루소


 책을 덮고 나서도 내가 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게 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다. 세상에는 신처럼 자비로운 사람들도 많이 있다. 신의 존재를 결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죽기전까지 빈민을 도와온 테레사여사도 그랬고 가장 불쌍한 자들 옆에 존재한다는 신처럼 그런 사람들을 돌봤던 모든 사람들을 보면 신을 느낄수가 있다.

 

 

 다만 말마따나 철저히 믿는다면서도 마음은 신과 함께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이기심과 편견, 거짓, 악 때문에 순수한 뜻에 때가 타는 것이 아닐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나오는 거지처럼 그 거지를 자비의 시선으로 느끼지 않고 겉으로만 보는 그들에게 과연 신이 함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말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이 있을 때 더욱더 철저하게 기쁨에 넘쳐 악을 행한다' - 블레즈 파스칼

 

 

 이 책의 지면에 찍힌 활자로서는 아무 힘도 없지만, 이 책을 읽을 때 내면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것들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주는 마음의 소리이고 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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