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밀레니엄 북스 39
루쉰 지음, 우인호 옮김 / 신원문화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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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젊었을 때는 많은 꿈을 가졌었다. 대개 잊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애석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 그 잊혀지지 않는 한 부분이 이제 와서 '납함'을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 (본문중)

 

 루쉰은 이렇게 그가 아큐정전을 비롯한 짧은 단편소설들의 모음집을 쓰게 된 원인을 밝히고 있다. 아큐정전 본문의 부분적인 내용은 고등학생때 읽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작가 루쉰에 대해서는 요근래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읽어보면 계몽의식과 시대의 주흐름의 반대사상을 문학을 통해 펼쳤음을 알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주요세력의 사상에 도전한다는 것은 국민들뿐 아니라 국가에 도전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사상을 펼쳐야 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외로운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루쉰은 젊은 시절 도쿄로 유학을 했다가 타국에서 바라본 중국인들의 덜 깨우쳐진 의식을 눈으로 확인하고 수치심에 도쿄를 떠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자국민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결심을 하게 된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비록 체력이 튼튼하고 오래 산다 해도 고작 보잘것 없는 본보기나 구경꾼 노릇만 할 뿐 아닌가. 병들거나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런 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저들의 정신을 고치는 데 있다. 그리고 정신을 뜯어 고치는 데는 문학과 예술이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문)

 

 루쉰의 이 말은 왠지 나의 마음도 뜨끔하게 만들었다. 한국이 과연 이 문장이 가르키는 무언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의 작품들 모두가 딴막딴막한 단편인데 반해 아큐정전은 제법 길다. 이 글은 마치 연재된 글처럼 아큐를 이모저모 관찰하고 있다. 그의 연애문제, 생계문제, 혁명에 대한 그의 견해 등등 여러방면에서의 아큐를 지켜본다. 아큐의 인물은 그리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적수가 호랑이나 매와 같아야 비로소 이긴 자로서의 승리감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적수가 양이나 병아리 같다면 도리어 승리에 무료를 느낀다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들의 아큐는 그런 약기는 없었다. 그는 영원히 우쭐해 하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중국의 정신 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하나의 증거일지도 모른다.'(본문)

 

 

 

 우리가 작품을 보면서 아큐를 조롱하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아큐의 모습은 루쉰이 살던 그 시대에서의 중국인의 평균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아큐의 모습과 닮은 이를 만나기 힘들지 않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캐릭터다. 루쉰의 주위의 사람도 루쉰의 작품을 보면서 혹시 자신을 표현한 건가 싶어 뜨끔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행동들은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자신의 모습이 문자로 쓰여지면 충분히 비웃고 조롱하는 면이 있는 듯하다. 물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내가 루쉰의 글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구절은 이 말이다.


 "가령 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도 않을 거야. 안에는 깊이 잠든 사람이 많이 있어. 얼마 안 있어 숨이 막혀 죽고 말 거야. 그러나 혼수 상태에서 그대로 죽는 것이니까, 죽음의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아.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다소 의식이 있는 몇 사람을 깨운다면 이 불행한 몇 사람에게 결국 살아날 가망도 없이 임종의 고뢰움만 주게 되는데,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몇 사람이 깬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수지 못하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본문)

 

 

 이 부분은 루쉰의 생각과 목적이 잘 나타나있는 대목이다.

 

 아큐의 최후는 죽음이다. 이유 모르는 죽음.. 의미조차도 없는 그 죽음에서 결국 루쉰이 말하고자 한 것은 잠들어 있는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풍자라는 형식을 빌려 비판한 것이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몇 마디 고함이 입에서 새어 나오는 수가 있는데, 아쉬운 대로 이 글로 적막의 한복판에 돌진하는 용사들에게 마음 편히 앞장설 수 있게끔 약간의 위로라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본문중)

 

 

 그는 문학을 통해 다음 세대로까지 계속 의식이 변하길 바랐고 희망에 부풀어 있을 청년들이 적극적인 자세로 의식을 변혁시키길 원했다. 그래서 불후의 비극으로 끝나는 예술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작품이라고 그 자신의 소설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광인일기> 또한 예리하게 시대와 민중을 비판하고 있다. 주류의 사상에 반대되는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는 주인공을 광인으로 묘사해야 하는 참신한 선택을 했다.

 

 여기서 언급되는 식인문화는 실제 중국에 존재했었던 문화다.

<광인일기>뿐만 아니라 <약>에서 또한 죽은 시체의 인혈을 먹는 부분이 나온다.   
 

 

 <고향>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자라고 나서 떠났던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 기억속의 아련하고 기분 좋았던 추억의 고향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내용이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선 다소 서정적인 면이 있는 이 작품은 루쉰의 색다른 문학이기도 하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다. 실상 땅 위에 본래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은 곧 길이 되는 것이다.'(본문중)

 

 루쉰의 작품을 이번에 접하게 되면서 중국문인중에 가장 좋아진 작가가 되었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의식의 뇌리에 콕콕히 박히면서 내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가 절망했던 그 안타까움의 일부분이 <납함>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던 것처럼 나도 그 꿈의 일부분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가 다음 세대의 청년들에게 그의 꿈을 전하고 그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이어나가길 바란 것처럼 나도 그의 꿈 일부가 이루어졌을 꺼라 믿고 싶다. 또 앞으로 계속 그 꿈이 진행되길 빈다.

 

 

 



<루쉰공원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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