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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사람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도망쳐. 어디까지나 이야기는 소설 속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호수-다른 사람>를 읽으며 화자인 진영에게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점점 조여 오는 긴장감과 마치 몸 전체를 휘감듯 엄습해오는 불안감, 소설은 어쩐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화자의 친구 민영은 호숫가에서 쓰러져 발견되었고 현재 의식불명 상태다. 그리고 민영의 남자 친구는 호수에서 뭔가를 발견했다며 진영에게 그곳으로 와달라고 말한다. 그런데 진영은 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하고 어딘가 의심스럽다. 남들의 눈에 그는 민영을 잘 챙기는 멋진 남자친구일지 모르겠으나 진영에게는 그렇게 안 보였던 것, 주위 사람은 민영을 부러워했지만 진영은 정작 민영이 별로 웃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사건 전날, 민영은 무섭다고 했다. 도대체 무엇이(혹은 누가) 무서웠던 것일까. 이것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민영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는 가운데 진영은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런데 이야기는 오로지 화자의 시선과 생각으로 서술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어쩌면 독자는 편견에 빠지거나, 괜한 생각으로 상대를 오해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화자에게 도망치라고,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라고 하고 싶다. 그가 범인이 아닐지라도 그가 보여준 행동이나 질문의 내용만 봐도 그는 여전히 위험하게 느껴지고 전혀 신뢰감이 가지 않는 남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자아내고 불편함 혹은 기이함,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 보니 등장인물들은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그만두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제대로 된 판단보다는 그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목표 삼아 나아갈 뿐이다.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을 들여다보자. 니꼴라 유치원은 졸업하면 출세한다는 소문이 난 곳이다. 지난 이 년 동안 화자의 아들은 선착순 정원 모집에서 모두 떨어졌기에 화자에게는 그곳의 입학이 너무 간절하기만 하다. 그리고 드디어 입학 서류에 서명하게 되면서 화자는 아들은 물론 자신까지 귀한 사람이 되리라 행복해하며 이야기는 마무리 짓는다. 자신의 아이에게만큼은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잘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 때문에 너무 성급한 결정을 내린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원장에 대한 괴소문, 유치원에 대해 떠도는 이야기들, 그리고 원장실 문을 쾅쾅 두드리고 나타난 여자 등등. 분명 미심쩍은 요소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아이가 니꼴라 유치원에 입학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당신을 닮은 노래>에서 화자의 엄마는 백화점의 문화센터에서 가곡 강습을 받는 중이다. 어느새 엄마에게 노래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게 되었고, 강사의 칭찬과 지적도 엄마를 좌우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백화점 문이 닫혔고 수업은 휴강되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무조건 강사를 만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를 원한다. 오늘은 목소리가 잘 나오는 날이라 마치 그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누군가의 칭찬이 뭐가 중요하겠느냐마는, 엄마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가까워지지 않는 한 무엇이든 좀처럼 멈추기 어려운 법이니까.
그래서 <방>도 무척 안타까웠다. 수연과 재인은 전세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폭발한 도시를 정비하는 일에 지원한다. 건강은 나빠지고 몸에 이상이 왔지만 그들은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도시를 빠져나오는 대신 돈을 모으기 위해 폐허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좀 더 일을 하기로 결정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조금만 더 버티고자 했던 일. 그러나 결말은 바람과 달리 흐른다.
나머지 단편들은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기괴한 상황 속에서 ‘관계’라는 점이 더욱 부각된 것 같다.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상대방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으면 하는가. 이것은 우리들도 늘 고민하는 문제다.
형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봐 불안한 기채 <눈사람>.
굴 말리크와 타니 칸, 그리고 그와 그녀. 두 연인의 이야기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예연의 하숙집, 누군가 한 명이 이 집에서 나가줘야 한다고 했을 때 희진이 아닌 자신을 선택해주길 바라는 수지 <벌레들>.
물건들이 버려지는 이유는 더는 쓸모가 없어서다. 아니면 해가 되거나.
나는 형이 나를 버리고 떠날까봐 불안했다. 내가 조금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면 형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한심하고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p.202, <눈사람>중에서)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불안은 순식간에 번지는 곰팡이와 같아서 쉽게 눈에 띄었고, 그러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p.88, <괜찮은 사람>중에서)
그래서 <괜찮은 사람>에서의 나(민주)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서 몸이 안 좋았음에도 그 집에 가보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다면 그는 어떤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봐도 좋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계단에서 그가 그녀를 밀친 것은 분명 정전으로 인해 앞이 안 보인 실수였기에 납득이 된다. 그렇다고 아픈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웃어넘기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이것만으로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를 걱정해주고 배려해주는 태도 등 여러 가지를 보았을 때 그를 괜찮은 사람으로 보아도 될까. 그런데 이건 또 묘하게 어딘가 껄끄럽다는 거다. 조수석 서랍의 알 수없는 상자들, 창문과 시트 사이의 골판지, 고장 난 내비게이션, 폐업한 지 오래된 도축장에서 고기 썩는 냄새를 풍기며 수레를 끌고 다가오는 남자. 이런 것들에 대해 화자는 남자에게 질문하지만 남자는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답을 들었어도 명쾌해지는 것은 없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엉덩이는 아프고, 날씨는 흐리고, 도축장 때문에 좋지 않은 냄새에 화자는 잔뜩 예민해져 있다. 거기에 하나 마나 한 남자의 대답은 여자의 신경을 더욱 긁는다. 그쯤에서 그만 돌아갔으면 좋았겠지만, 여자는 끝까지 그 집에 가보겠다 말한다. 이상한 일의 연속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찾아오지만 화자는 멈추지 않는다. 뭔가 석연치 않은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어쩐지 여기서 그만둘 수 없다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현실에서의 우리도 가끔은 멈추기보다 끝까지 가는 것을 선택한다. 그다음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그게 최선이라고 믿을 뿐이다.
그를 아무리 지켜보아도 답을 구할 수 없었듯,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것이 늘 나의 최선이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만으로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p.106, <괜찮은 사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