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가들
정영수 지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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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물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일컬어 ‘애호가’라고 부른다. 애호가라는 말은 어쩐지 단어 자체만으로도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당사자가 얼마나 관심을 가지며 마음을 쏟는지를 잘 전해주는 듯한 단어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차분하고도 섬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책 제목과 달리 책 속 이야기들은 어느 것 하나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각 단편의 화자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나름의 이유로 현재가 충분히 힘든 사람들이다. 그런데 소설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주인공들에게 또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게 한다.

 


-<레바논의 밤> : 오랜만에 나타난 ‘장’, 그리고 남겨진 시체. 하지만 화자는 서가에서 책 정리를 하느라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고 어느덧 그는 눈앞에 놓인 시체보다도 장이 왜 연희와 자신을 같이 자게 했는지가 더 혼란스럽다.
-<애호가들> : 스페인어 강사를 하고 있는 나, 연이어 발생하는 불편한 일들. 주인공은 조만간 한국을 정리하고 떠나면 그만이라고 느끼지만 기대하던 번역 일이 틀어지면서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느껴지던 학교로 돌아가 어떻게든 다시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하나의 미래> :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적 병증 때문에 매일 많은 양의 신경안정제를 먹고 있고 그래서 늘 잠이 오는 화자. 그런데 희곡 낭독 모임에서 자신과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소녀 ‘오하나’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나름의 관계를 이어가는데...
-<여름의 궤적> : 더운 여름, 서점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십 년 만에 만나게 된 그녀. 반가움보다는 불편함과 어색함이 뒤섞인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는다.
-<음악의 즐거움> : 로큰롤 스타가 되는 방법으로 시작해서 전립선암의 위험성으로 끝나는 이야기.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 : 성당에서 치러진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화자는 삶의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스비극을 외운다고 고해성사를 한다.
-<북방계 호랑이의 행동반경> : 아내의 이혼 요구, 회사에서는 완전히 잘려 복직이 어려운 상태. 화자는 필수가 제안해온 호랑이 사냥에 함께 나서게 된다.
-<지평선에 닿기> : 서지연과 메일을 주고받는 화자. 지연은 본인의 쌍둥이 동생과 관련된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고, 화자는 자신의 가족 때문에 힘든 마음을 털어놓는데...

 


  『애호가들』은 심각하고 난감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도 묘한 유머러스함을 잊지 않는다. 예를 들면 <레바논의 밤>에서 ‘나’와 연희가 시체를 묻을 땅을 파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꼽고 싶다. 문득 화자는 연희에게 우리가 잔 사실을 장이 알고 있냐고 묻는다. 시체를 파묻는 와중에 그게 궁금했을까 싶지만, 연희는 화자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말을 들려준다. 장도 알고 있다며, 오빠랑 한 번 자달라고 한 게 장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마치 남녀 사이의 말싸움 같은 형태로 흘러가는데 시체가 바로 옆에 있음에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픽, 하고 새어 나오게 된다. 뭐든 남녀 사이가 조금이라도 연관 되면 나머지는 이렇게 상관없어지게 되는 걸까. 순식간에 분위기가 전환되며 스릴러 미스터리에서 로맨스코미디로 장르를 오가는 기분이다.
  눈앞에 발생한 일 중 어떤 것이 더 심각한 것인지 저울질하기 힘든 이 상황이여! 왠지 웃프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만 같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별다른 반전 없이 저마다의 흐름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뚜렷한 결론보다는 그냥 지금의 현상에서 그나마 일어날 만한 다음 현상으로 옮겨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것은 ‘이상하다’와 ‘이해하다’를 양옆으로 두고 그 가운데 길을 걷는 기분이기도 했다. 이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옮겨가면 좋으련만, 이 소설에서는 그런 게 없어 조금 아쉽기도 했다. 어쩜 다들 이렇게들 일이 안 풀리는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겠지만, 그래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당황스러운 부분도 많았노라 살짝 고백해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화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살아가고 있었다. 더불어 타인이 보기에는 이상하고 황당한 이유일지라도, 개인에게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에서 화자가 그러했다. 그는 공장의 꽉 막힌 공간에서 매일 지루한 노동을 반복하며 보내고 있었는데 일하는 동안 그리스 비극을 외워 그 지루함을 이겨내고는 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잔인한 이야기가 오히려 지루함으로부터 그를 살리는 하나의 방법이라니 어떤 면에서는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그에게는 맞는 것, 필요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여자 친구 재연은 그런 화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비극 외우는 자체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며 차라리 공부를 해 함께 대학을 가자고 권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재연처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학은 재연의 이유이고 방법일 뿐이지 화자에게는 아니었다. 그리스비극이 재연에게 맞지 않았던 것처럼.
  한편 화자는 그리스비극 번역자를 찾아가고, 노인이 된 그는 화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빨리 가지만 삶이 권태로워진다고, 자신은 이거라도 붙들고 있지만 남들은 어떻게 이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취기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죽는 게 두렵지만 그렇다고 다른 뭔가를 기대할 수도 없어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p.151)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른 수많은 삶을 살아간다. 그중에는 즐겁고 신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 그런 사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삶이 되었든 이것 하나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것을 계속 즐기기 위해서든, 아니면 반대로 지루함을 이겨내거나 현재의 삶을 버티기 위해서든, 어쨌든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왕이면 여러 개가 좋다. 혹시 하나의 방법이 소용없어지면 또 하나의 대비책을 위해서라도. 그러니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주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두루 살펴볼 일이다. 그러다 스스로 점점 다양한 분야에 애호가가 되어 그것을 꾸준히 즐길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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