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대개의 사람들은 죽음을 끝, 마무리라 여긴다. 그러나 『내 이름은 빨강』은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는 ‘나’. 그는 이 책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화자로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독자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화가들 사이에서 ‘엘레강스’라고 불리는 이 남자, 과연 그를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보일 듯 말 듯하면서도 쉽게 드러나지 않는 살인자의 정체, 그리고 치밀하면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의 구성! 소설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진다.

 


  오르한 파묵. 그는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터키라는 나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있으며 흑해, 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여 있는 독특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따라서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어우러져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데,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이러한 부분과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잘 담아내었다.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역사추리소설 『내 이름은 빨강』.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인상 깊게 다가왔다.
  우선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터키가 가진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소설 속에서 볼 수 있었던 동서양의 영향, 대비되는 모습들이다.
술탄은 에니시테에게 헤지라 천 년이 되는 해에 베네치아 총독에게 선물할 책을 완성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그 책은 서양의 화풍을 사용해 만들도록 했기에 제작 자체가 비밀이었고, 따라서 에니시테는 실력이 뛰어난 세밀화가들, 나비, 올리브, 황새 그리고 엘레강스를 동원해 자신의 집에서 작업을 착수토록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금박 세공사 엘레강스가 살해당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전통적인 화풍과 새로운 화풍 사이에서 갈등하는 화가들의 모습, 나아가 종교적인 것과 순수성, 예술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고민과 문제를 다룬다.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책은 누구 한 사람의 시점이 아니라 다양한 화자들이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는 것이다. 나비, 올리브, 황새는 물론 12년 만에 이스탄불로 돌아온 카라, 카라가 여전히 사랑하는 여인 셰큐레와 그녀의 아들들인 오르한과 셰브켓, 셰큐레의 아버지인 에니시테, 카라와 셰큐레 사이에서 편지를 전해주던 방물장수 에스테르 등등. 심지어 한 그루의 나무라든가 금화도 화자로 등장해 자신이 겪은 일들을 풀어놓는데 이러한 서술은 신선하면서도 각자의 감정과 시선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내 이름은 빨강』 또한 1권의 소제목으로 등장해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도 한다.

 

  당신들이 던지는 질문을 들었다. 색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색은 눈길의 스침, 귀머거리의 음악, 어둠 속의 한 개 단어다. 수천 년 동안 책에서 책으로, 물건에서 물건으로 바람처럼 옮겨 다니며 영혼의 말소리를 들은 나는, 내가 스쳐 지나간 모양이 천사들의 스침과 닮았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들의 눈에 말을 걸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동시에 나는 공중에서 당신의 시선을 통해 날아오른다. 이것이 나의 가벼움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내 이름은 빨강』1권, 31.<내 이름은 빨강> 中에서)

 


  범인은 살인자의 기척을 숨기며 다른 사람들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의 정체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단서가 나오고, 카라는 조금씩 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간다. 금박 세공사 엘레강스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카라와 셰큐레의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게다가 술탄이 비밀리에 명한 밀서는 어떻게 마무리가 될 것인가.
  역시 오르한 파묵, 이 책은 마지막까지도 무엇 하나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작가의 개성, 그리고 문장의 매력이 충분히 돋보이는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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