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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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우리는 그것을 뼈아픈 치욕의 역사로 배웠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삼배고구두례(三拜九敲頭禮 :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를 하며 굴욕적인 항복을 했는데, 땅바닥에 머리를 9번 찧은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고 말이다. 하지만 조정이 청의 대군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었던 1636년 병자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47일간에 해당하는 시간을 어찌 이와 같은 몇 마디로 짧게 마무리 지을 수 있겠는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항전의 시간이었다. 김훈 작가는 『남한산성』을 통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치열하게 오갔던 말들과 고통스럽고 참담했던 견딤의 시간들을 세밀하게 풀어낸다.

 


  여진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해 약화된 명을 압박했다. 조선은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며 후금을 자극했는데 그 결과 인조 5년,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이는 두 나라가 형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후금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국호를 청으로 변경 후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조선에서는 주화론과 주전론(척화론)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면서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게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병자호란이다.

 


  청병은 산성 밖에 있었다. 그러나 백성과 군병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했다. 소설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고단한지를 잘 보여준다.
  남한산성은 제법 단단했다. 주변 지형 또한 강의 물살이 사납고 산줄기가 가팔라 적이 쉽게 다가올 수 없는 요건들을 갖춘 곳이었다. 그러나 길이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 어렵다는 점, 따라서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무엇보다 계절은 겨울이다. 눈이 오든 비가 내리든 겨울 추위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서웠는데, 성첩을 지키는 군병들은 밤새 젖고 얼어야만 했다.
  더 큰 문제는 갑작스러운 상황이기에 남한산성에서는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이 부족했다. 몸을 녹이고 밥을 짓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한데 그마저도 부족해 급한 대로 말먹이 풀로 불을 때우지만, 말먹이 풀이 부족하니 이번에는 말들이 굶어 죽어 나갔다. 어쩌겠는가. 백성들의 초가지붕을 헐어 말먹이로 쓰이고 기둥과 서까래를 뽑아 쓰는 수밖에.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한다.

 


  묵직하고 불안한 나날들이 이어진다. 싸움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 청의 군사력에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모두가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남한산성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임금은 군사들을 호궤했다(음식과 술을 나누어 주며 위로함). 그리고 격서를 내보내 구원병을 부르고자 했는데 길은 적에게 막혀있어 격서를 전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면 바로 말[言]과 말의 부딪침이 아닐까 싶다. 임금은 신료들에게 성안의 실태에 대해서, 혹은 대립과 화친에 대해서 의견을 묻고는 했다. 대표적으로 예조판서 김상헌은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청과 싸우자는 척화파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일단 싸움을 멈추고 청과 협상하여 나라를 지키고 보자는 주화파의 입장이었다.
  신료들의 말은 임금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저마다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따라서 말과 말은 추운 겨울 공중 속에서도 뜨겁고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신료들의 모습이 그들이 닥친 남한산성의 상황보다 더 답답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하나마나한 말로 무의미한 언쟁을 할 때가 많았고 조선을 생각한다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 백성을 위하는 것인지는 아니면 본인들을 위하는 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아서였다. 그들은 직접 나서야 할 순간에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몸을 사렸다. 결국 입으로만 떠드는 말에 불과했나 싶어 입맛이 썼다. 차라리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장장이 서날쇠가 그들보다 나았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는 자였다.

 


  한편, 말[言]은 삶을 이어가기 위한 길이 되어주기도 한다. 점점 청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던 가운데 칸의 문서가 도착했다. 주화파와 척화파가 삶과 죽음을 두고 대립하였으나 임금은 살고자 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후세에 이어질 치욕과 오명 때문인지 누구도 문장 쓰기를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최명길이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한다며 스스로 앞장서기를 청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청의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춰 삼배고구두를 한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삼전도의 굴욕이다. 그 뒤는 널리 알려졌듯, 두 왕자와 척화론자들(홍익한, 윤집, 오달제), 많은 포로가 청의 인질로 잡혀간다.
  다시금 돌아봐도 모욕적이고 곤욕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조는 국제 정세를 잘 읽지 못했고 외교와 군사에 대한 감각도 부족했다. 침입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다 하더라도 일이 발생한 후 대처라도 잘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 미흡해 고통은 오롯이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왕은 그만큼 책임과 의무가 막중한 존재이건만 인조도, 신하들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치욕스러운 역사일수록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더 잘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본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병자호란을 반면교사로 삼아 안과 밖을 두루 살피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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