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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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내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면 계절의 흐름에 한발 늦게 반응할 때가 있다. 봄이구나 싶었는데 바깥은 어느새 여름이고, 마찬가지로 뜨거운 열기로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그 여름도 언젠가는 지나간 시간에 해당되고 만다. 가끔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인식과 현재 진행 중인 계절 사이에서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그에 따른 온도차를 함께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 또한 그와 같은 느낌을 잘 담아낸 책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책의 단편들은 대체적으로 어떤 존재와의 이별, 영원한 헤어짐, 상실을 다루고 있는데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겪은 일 앞에서 어떤 온도 차이를 느끼게 됨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제야 실질적으로 체감되는 계절의 변화일 수도 있고 또는 다양한 감정에서 기인한 마음의 온도, 아니면 그 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발견한 어떠한 사실일 수도 있다.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 <입동>,
소년은 휴게소에서 버려진 개를 데려와 서로 의지하며 지내지만, 개가 늙고 병들어 죽음을 앞두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노찬성과 에반>,
이수와 도화, 연인의 이별을 담아낸 <건너편>
남편이 죽은 뒤, 사촌 언니의 집이 있는 스코틀랜드에서 잠시 지내게 되는 ‘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그 외에 <풍경의 쓸모>라든가 <가리는 손>은 등장인물이 직접적으로 죽음이나 헤어짐을 겪는 건 아니지만 이 단편들 역시 어느 시점을 전후로 화자의 심리상태가 전과 같지 않음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거기에도 온도 차이는 존재한다.
  <풍경의 쓸모>에서 ‘정우’는 교외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강사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여자가 있어 오래전에 어머니와 헤어지셨고 가끔 선물을 보내오실 뿐 별다른 왕래 없이 지내고 있다. 1월, 정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태국에서 패키지여행을 하는 중이다. 한국은 겨울인데 태국은 여름이다. 하지만 그는 교수 임용에 관한 면접 결과 소식을 기다리느라 여행에 집중할 수가 없다. 휴대폰을 수시로 확인해보지만 원하는 소식은 없고 대신 바쁘냐고, 연락을 달라는 아버지의 문자만이 있을 뿐이다. 잠시 뒤, 그는 모교 최 선생님의 전화를 통해 자신이 왜 면접에서 떨어졌는지 일의 정황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문자를 받게 되는데 모두에게 보내는 단체 문자라 정우에게도 덩달아 온듯하다. 그것은 아버지와 함께 살던 여자의 부고였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p.182, <풍경의 쓸모>중에서)

 


  주인공이 유리 볼을 빗대어 다른 사람에게나 해당되듯 시차를 말하기는 했지만, 이 문장은 그 자체로 정우의 마음 상태를 표현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나 기대했던 면접의 탈락, 그리고 알고 보니 내막에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바깥은 여름이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겨울일 것이다. 다른 여행자들은 즐겁고 떠들썩하다. 그러나 주인공은 복잡한 감정으로 도저히 거기에 섞일 수가 없으리라.
  한편 <가리는 손>은 다문화 가족의 아이가 받는 편견을 얘기하는 동시에 엄마와 아이 사이를 그려낸 단편이다. 중학생들과 노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그 노인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인터넷상에서는 동영상이 돌아다니는 중이다. 그 동영상에서 ‘재이’는 저 멀리 목격자로 등장한다. 물론 엄마인 ‘나’는 재이가 그 일에 관련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런데 재이가 조사관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 어딘가 찜찜하고, 아이와 대화하다 보게 된 미소 어린 표정에서 어떤 묘한 기시감을 받게 된다. 재이의 생일을 맞아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좋았던 분위기지만, 어쩐지 ‘나’의 마음은 아이의 미소를 본 뒤로는 무언가 계속 석연치 않을 따름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은 <침묵의 미래>이다. 여기에는 단 하나뿐인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 모여 사는 ‘소수언어박물관’이 등장한다. 천여 개의 전시실에서 각각의 언어를 구사하는 마지막 화자들이 하루 내내 관광객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을 보러 오는 방문객은 얼마 되지 않아 박물관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마지막 화자들 역시 누군가와 말할 사람이 없어 점점 침묵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나’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일까 묻고 답하기를 반복한다. 이 단편에서 ‘나’는 언어다. 사실 언어는 가슴이나 눈빛을 통해서도 그 의미가 전달될 수 있지만 어쨌든 말은 기본적으로 누군가와 직접 소리로 주고받는 작업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말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고, 결국 언어 역시 사멸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는 ‘나’가 자신의 마지막 화자를 관찰하듯 살펴보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언어가 하나의 존재가 되어 사람을 살펴보는 모습이 각별하게 다가와 오랜 여운을 남겨 주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주고받는 일상의 말들이 사실은 무척 대단하고 소중한 것임을 새삼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내 마지막 화자, 검은 피부에 우아한 속눈썹을 가진 노인은 누군가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눈 맞춰준 뒤,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하는 건 몹시 오랜만'인데다 '너무 평범하고 친근해 눈물이 날 것 같은' 모국어로 뭐라 대꾸해주길 바랐다. '응'이나 '그래' 같은 아주 간단한 말이라도, 그뿐이라도. (p.127, <침묵의 미래>중에서)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중략...)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다. 내 몸은 점점 붇고 이름 또한 길어져, 긴 시간이 흐른 뒤 누구도 한 번에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됐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이 세계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 쓸모 있는 죽음, 단지 그뿐인 채로 사라진다. (p.145, <침묵의 미래>중에서)

 


『바깥은 여름』. 소설을 읽고 보니 어쩌면 사람들은 각자의 계절을 겪고 있거나 그 안에 머무르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아픔의 계절일 수도 있고 좋았던 순간의 계절일 수도 있다. 저마다의 다른 계절 흐름이 있음을 깨달으며, 오늘은 누군가와 함께 말을 주고받고 싶다고 여겨본다. 노인이 그토록 원했던 ‘응’이나 ‘그래’ 같은 아주 간단한 말이라도, 그뿐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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