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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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머릿속에는 그 순간의 장면들이 다시 펼쳐진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화라든가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행동, 공기 중에 떠도는 냄새와 일상적인 소음 등등. 그리고 그 순간의 기억들은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서 힘든 마음을 토닥이며 큰 위로로 다가온다.
  어떠한 것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그때 상대가 했던 말의 의미라든가 그 말이 갖는 느낌, 무게감 같은 것들. 또는 평범한 순간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꽤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빛의 호위』. 작가의 여러 작품이 묶인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마치 책 한 권을 읽은 기분이랄까. 차분하고도 따뜻한 온기를 나눠 받는 기분이다.
  사진잡지사 기자인 ‘나’는 분쟁지역에서 보도사진을 찍는 젊은 사진작가 ‘권은’을 인터뷰하게 된다. 그녀는 친구가 준 필름 카메라로 사진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남기는데 화자는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떠올리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둘 스치는 기억의 조각 속에서 마침내 화자는 이십여 년 전, 자신과 권은이 아는 사이였음을 떠올리게 된다. 화자는 반장이기에 그녀의 결석 때문에 찾아오지만, 폐허가 되어가는 동네에서 온기 없는 가난한 방에 혼자 있던 그녀가 왠지 모르게 신경 쓰여 읽다 만 만화책이라든가 스노볼에 들어가는 건전지 같은 것을 챙겨주게 된다. 그리고 안방 장롱에서 우연히 발견한 필름카메라를 훔쳐 권은에게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학교에 다시 나오게 된다. 그렇다고 둘 사이가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카메라가 그녀에게 있어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이자 희망이었고 그 시절을 버티게 해주는 무언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근데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권은은 대답 대신 손짓으로 자기 옆에 앉아보라는 표시를 해 보였다. 내가 주춤하며 옆에 앉자, 테두리가 흐릿해지고 있는 발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권은이 말했다. 발자국 안에 빛이 들어 있어. 빛을 가득 실은 작은 조각배 같지 않아? 어, 그런가...... 여기에도 숨어 있었다니...... 뭐가? 셔터를 누를 때 카메라 안에서 휙 지나가는 빛이 있거든. 그런 게 있어? 어디에서 온 빛인데? 내가 관심을 드러내자 권은은 그때까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껏 신이 난 얼굴로 날 바라봤다. (p.32, 《빛의 호위》) 

 


잘 보이지 않는 곳의 빛들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사진으로 담아낼 줄 아는 그녀.
‘빛의 호위’라는 제목처럼 밝은 빛에 휩싸이는 듯한 부드러운 여운이 한동안 지속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집의 다른 단편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기억은 망각보다 각인의 속성을 더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번역의 시작》에서는 뻔뻔한 태호의 행동 때문에 화도 났지만, 화자의 서툰 영어를 기다려주고 언어를 초월하는 교감 능력을 보여줬던 안젤라라는 존재가 있어 무척 고마웠다. 한편 《사물과의 작별》에서는 서군이 잡혀간 것에 대해 고모가 그 긴 기간 동안 자신을 탓하며 미안해한 것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기억은 그처럼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고마운 사람은 여전히 고맙고, 미안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영속성을 지녔나 보다.
  가끔 기억 속에서 우리를 찾아와 마음을 두드리는 누군가들. 그들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작은 힘이 되는 그런 존재로 기억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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